1988년에 한글 맞춤법이 바뀌면서(본격적으로 시행된 건 1989년 3월 1일부터) 생긴 대표적인 변화 중 하나는 종결 어미 '-읍니다'가 '-습니다'로 바뀐 것이다.
이 변화 때문에 사람들이 '-음'까지 '-슴'으로 잘못 표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8시에 갔슴). 그리고 재야에서 현행 한글 맞춤법에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은 이것이 형태주의에서 표음주의로 후퇴한 개정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습니다'는 한국어의 형태소를 더 잘 반영한 바람직한 변화이다.
이때의 '-습-'은 상대 높임을 나타내는 교착 선어말 어미로, '용언의 어간+시제 선어말 어미'까지 나왔고 앞 글자에 받침이 있을 때 등장하는 선어말 어미이다.
시제 선어말 어미가 마침 -ㅆ이기 때문에 '습'과 음운이 겹치는 것 같지만, 이들은 원래 서로 다른 형태소이다.

ㅆ이 아닌 다른 받침을 생각해 보면 명확해진다.
가령, '괜찮습니다'는 맞지만 '괜찮슴'이라고는 안 하고 '괜찮음'이 맞다.
그리고 '괜찮사옵니다'/'괜찮소'라고 하지, '괜찮아옵니다'/'괜찮오'라고는 안 한다.

앞 글자에 받침이 없으면 이 선어말 어미는 '습' 대신 그냥 '-ㅂ'으로만 훨씬 더 단순하게 실현된다. 갑니다, 감, 가옵니다, 가오 등.
이 정도면 '습' 또는 'ㅅ'의 존재감에 대해 충분히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맞춤법 개정 전에는 ㅆ 다음에만 '읍니다'이고, '괜찮습니다' 같은 다른 자음 받침 다음에는 '습니다'를 썼었다. 어차피 둘은 동일한 형태소이니, 괜히 그럴 필요가 없이 ㅆ 다음에도 똑같이 '습니다'로 적어 주는 게 더 합리적임을 알 수 있다.
1988년의 맞춤법 개정안에 비판적인 논조여서 내부적으로 성과 이름을 여전히 띄어 쓰고 있는 한글 학회에서도, '-습니다'에 대해서는 아무 문제 제기를 한 적이 없다.

한국어의 변화무쌍함과, 그에 비례하여 한글 맞춤법의 복잡함과 어려움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습니다'냐 '읍니다'냐를 따지는 건 국어학 내지 언어학에서 형태론이라는 분야에 속한다.
국어학 전공자 내지 국어 교사 지망생들은 용언의 어미를 공부할 때 '가/시/었/겠/습/니다'라는 단어를 일일이 떼어내서 각 형태소들의 의미를 공부한다. 어간과 어말 어미 사이에 저 화려한 선어말 어미들의 나열을 보시라.

어떤 언어를 공부할 때 모르는 단어는 사전을 찾으면서 익혀야 할 텐데,
복잡한 용언 활용이 일어난 한국어 문장은 단어를 떼어내서 사전에 존재하는 표제어 형태를 유추해 내는 것부터가 굉장히 높은 수준의 언어 직관을 필요로 할 것 같다. 특히 한국어를 외국어로서 공부하는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오랜만에 모처럼 우리말 분야에 글 하나 투척했다.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13/06/16 08:32 2013/06/16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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