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시민 아파트

고급형으로 시작했던 한국의 원조 아파트와 달리, '시민 아파트'라는 것이 등장하면서 아파트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이건 서민· 빈민들을 좁은 서울 땅에 최대한 많이 수용하기 위해 나라에서 작정하고 건축한 저가의(언제까지나 상대적으로) 양산형 보급형 아파트이기 때문이다. 자동차로 치면 경차인 셈이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시골 빈민들이 아무 일자리나 구하러 무작정 닥치고 서울로 몰려드니.. 서울의 인구는 조선, 일제 시대 등을 통틀어 어느 때보다도 크게 증가하고 있었다. 이들도 발 뻗고 잘 곳이 있어야 한지라, 서울 시내엔 무슨 6· 25 피난민들이 몰렸던 부산처럼 무허가 판잣집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서 도시 미관을 해치기 시작했다. 당장 청계천 주변만 해도 195, 60년대 사진을 보면 판잣집들이 장난이 아니게 많이 늘어서 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이런 판자촌을 대체할 아파트들을 '시민 아파트'라는 이름으로 서울 곳곳에 시급히 짓게 되었다. 2천 가구에 달하는 주택을 공급할 작정이었기 때문에 과거의 고급형 아파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큰 규모였다. 이 과업을 추진한 주역이 바로 당시 서울 시장이자 불도저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김 현옥이다.

시민 아파트라는 명목으로 지어진 가장 오래된 최초의 아파트는 1969년 4월에 최초 입주가 시작된 '금화 시민 아파트'였다. 경기 대학교 서울 캠퍼스의 바로 뒤쪽 언덕에 있다. 여기서 금화란 아파트가 자리잡은 기슭인 안산의 다른 이름이다. 무악산, 금화산 모두 같은 산을 가리킨다.
2010년대 초중반까지 서울에 이런 붕괴 직전의 폐가 흉가가 있다면서 매스컴을 탔던 그 문제의 아파트가 바로 이것이었는데.. 2015년에 다 철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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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는 2000년대 초부터 이미 안전 진단 검사에서 허구헌날 D급 E급 폐급을 받아서 오늘 내일 하고 있었지만, 입주민들은 여기가 아니면 딱히 갈 데가 없던지라 불안해하면서도 철거 직전까지 이 아파트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래도 다행히 불미스러운 붕괴 사고는 안 나고 곱게 철거되긴 했다.

다른 유명한 시민 아파트로는 삼일 시민 아파트라는 게 있었다. 얘는 산기슭 위주로 만들어진 다른 시민 아파트들과 달리 평지인 청계천 근처에 지어졌으며, 유일하게 주상복합 형태이기도 했다. 1960년대 말 당시에 남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고(63 빌딩 이전) 지리적으로도 가깝던 삼일 빌딩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져서 이름도 똑같이 '삼일'이라고 붙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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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 고가 도로 위에서 아파트 한 동을 본 모습. 얘는 큰 그림을 찾기가 어려웠다)

삼일 시민 아파트는 2004년경에 철거되었다. 청계 고가의 철거와 비슷한 타이밍이다. 일부 상가 건물은 아직까지 현존하긴 하지만 아파트의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또 이 글에서 언급할 가치가 있는 시민 아파트는 남산 기슭에 있는 회현 시민 아파트이다. 2개 동 중 2차분은 1970년 5월, 전국에서 마지막으로 건설된 시민 아파트이며 2019년 현재까지 철거되지 않고 입주민도 존재하는 유일한 시민 아파트이다. 역사적 가치를 감안하여 보존하느냐, 아니면 안전을 위해 철거하느냐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는데, 얘는 리모델링만 하고 철거까지는 하지 않는 것으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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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이 ㄷ자 모양으로 한 동 형태이다. 두 동으로 따로 떨어진 게 아님.)

시민 아파트의 건설과 관련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흑역사가 있으니 바로 1970년 4월의 '와우 시민 아파트 붕괴 사고'이다.
서민용 양산형 보급형 아파트를 짓는다는 계획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다혈질 불도저 시장이 너무 짧은 기간과 너무 부족한 예산만 주고서 까라면 까 군대식으로 시공업체들을 쥐어짜며 밀어붙인 게 문제였다. 업자들도 물자 떼어먹기 비리와 졸속 부실 시공이 관행이었고.. 이 때문에 홍대 근처 와우산 기슭의 지반을 제대로 안 닦고 지었던 아파트 한 동이 해빙기에 지반이 내려앉으면서 같이 자빠져 버렸다.

이 사고로 30여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그나마 입주가 덜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이 정도 피해밖에 안 난 것이었다.
이 사고의 책임을 지고 김 현옥은 서울 시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후임인 양 택식 시장은 훗날 서울 지하철 1호선을 잘 완성했는데, 하필 개통식 때 영부인 저격 사건이 터져서 물러나게 되니 이래 저래 참 허무하다.

김 현옥 시장은 아파트로도 감당이 안 되는 판자촌 주민들을 지금의 성남 구시가지인 서울 외곽 변두리로 반강제로 이주시키기까지 했다. 거기 가면 서울시에서 주거와 교통과 각종 생활 인프라를 저렴하게 책임져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현장은 텐트 하나 달랑 쳐져 있는 허허벌판이었으며 약속이 지켜진 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광주대단지 사건 같은 병크가 터지기도 했다. 이것은 아파트 붕괴 사고와 더불어 흑역사의 양대 산맥이다.

시민 아파트들은 저렇게 시범타로 붕괴된 것을 차치하더라도 애초에 고급 프리미엄이 아니라 열악하게 지어졌기 때문에 세월이 흐르면서 상태가 급속히 악화됐다. 그래서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던 고가차도들이 2000년대 이후부터 하나 둘 철거됐듯, 시민 아파트들도 지금은 거의 다 남지 않고 주차장, 공원 등 다양한 형태로 바뀌었다. 회현 시민 아파트 제2동은 와우 아파트 사고를 반면교사 삼아 그나마 더 튼튼하게 지어졌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인왕산 수성동 계곡도 원래 거기에 옥인 시민 아파트가 있었는데 철거되고 원래 형태가 복원됐다고 들었다.

5. 그 이후

지금까지 얘기가 나왔던 게 일제 시대의 충정 아파트, 그리고 할배 때의 종암 아파트, 나중에 박통 때의 마포와 시민 아파트 시리즈들인데.. 이 정도면 우리나라의 초창기 원조 아파트들과 건설 트렌드는 그럭저럭 다 다룬 것 같다.

1970년을 전후해서 너무 무리해서 지었던 시민 아파트는 아파트에 대한 대외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깎아내렸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그 인식을 개선하고자 아파트의 컨셉을 다시 고급화했으며, 그 첫 작품으로 1971년 말에 (1) '여의도 시범 아파트'를 내놓았다. 이름조차도 '시민' 대신 '시범(example!!)'이라고 바꾼 것이다. 여의도 시범 아파트는 국내에서 엘리베이터가 최초로 설치된 고층 아파트라고 한다..;;

아울러, 시민 아파트 자체는 망했지만 시민 아파트의 본래 취지이던 '서민들에게 합리적인 가격으로 주택 공급'이라는 이념도 여전히 등한시할 수는 없다. 그 역할은 대한 주택 공사에서 분양하는 (2) '주공 아파트'가 담당하게 됐다. 주공 아파트 1호는 1972년에 지어진 반포 주공 아파트라고 한다. 그리고 74년에는 잠실 주공 아파트도 만들어졌다. 여의도와 강남의 이 아파트들은 아직까지 재건축되지 않고 건재하는 중이다.

1970년대에는 강남 허허벌판도 활발하게 개발되기 시작했다. 그 이름도 유명한 (3) 대치동 은마 아파트는 1979년부터 입주가 시작됐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시간· 공간 배경이 그 바닥이다.
세월이 흘러 서울의 서쪽 양천구의 (4) 목동에도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1985년부터 1988년에  걸쳐 입주가 진행됐다. 간선 도로가 독특한 일방통행 형태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끝으로, (5) 1988 서울 올림픽과 관련된 대규모 아파트 건설과 분양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을 방문하는 수많은 선수와 언론 기자들이 거주할 '올림픽 선수 기자촌 아파트'가 올림픽 공원 바로 옆에 동그란 방사형으로 지어졌으며, 올림픽이 끝나고 그들이 떠난 뒤엔 민간에 분양되었다. 그리고 가락시장 남쪽의 문정동에는 '올림픽 훼밀리타운 아파트'라고 해서 선수의 가족들.. 그러니 기자촌보다는 올림픽과의 관련이 약간 덜한 주변 사람들이 머물라고 역시 수천 세대 규모로 지어졌다. 세월이 흘러 이 건물들 역시 노후하여 재건축 대상에 올라 있다.

이런 식이면 요즘은 올림픽 한번 치르려면 경기장뿐만 아니라 주변에 아파트를 짓는 것도 필수인 듯하다. 그 많은 사람들을 짧지만은 않은 기간 동안(수 주 이상) 내내 호텔에 투숙시킬 수는 없으니 말이다. 서울 올림픽보다 최근인 평창 동계 올림픽도 동일하게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라는 유물을 평창군에 남겼다.
그 반면, 옛날에 2차 대전이 끝난 직후에 치러졌던 1948 런던 올림픽 때는 세계가 가난하다 보니 군대 천막과 대학교 기숙사를 동원해서 선수촌을 꾸렸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서울과 수도권은 땅값이 치솟고 온통 아파트 천지가 돼 왔다. 그린벨트는 차근차근 풀리고, 논밭으로 놀고 있던 땅엔 건물이 들어서고, 군부대나 그에 준하는 엄한 시설들은 더 먼 데로 이전하고, 꾸질꾸질한 상가와 단독 주택, 낡고 낮은 아파트들은 재개발된다. 그리고 그걸로도 감당을 못 하니 서울 밖에 신도시가 개발되고 이것도 1기, 2기를 거쳐서 3기까지 만드네 마네 하는 지경이다. 일산과 분당이라는 1기 신도시 건설이 시작된 게 무려 노 태우 때였다.

원래 허허벌판이던 곳을 개발하는 거라면 차라리 나은데 재건축이라면 이미 살고 있던 사람들을 보상하고 이주시키는 게 보통 문제가 아닐 것 같다. 원래 그 땅이나 집을 갖고 있는 사람은 보상에 동의하고 빠져나갔는데 거기에 세들어 살던 사람들, 애초에 그 부동산에 대해 온전한 권리를 갖고 있지 않던 사람들이 더 난리를 치는 편이라고 들었다. 뭐, 악의적인 알박기를 시전하는 사람도 있긴 하겠지만 말이다.

6. 여러가지 관련 생각들

(1) 서울대나 카이스트 같은 일부 국립 대학교에서 운영하는 교수 아파트, 그리고 예전에 천장산 근처에서 봤던 과학자 아파트는 어디서 어떻게 운영되는 걸까..?

(2) 옛날에는 아파트 이름이 그냥 지역명이나 시공사의 이름이 붙은 무미건조한 2~3음절 한자어 위주였지만, 2000년대부터는 그 이름도 브랜드화해서 온갖 외래어가 섞인 복잡한 명칭으로 바뀌고 있다. 자이, 래미안, 푸르지오, 블루밍 등등..

그래서 주택 공사조차도 주공이라는 싼티 나는 이름 대신 휴먼시아라는 그럴싸한 브랜드명을 개발했는데, 이게 웬걸 '휴거'(휴먼시아에 사는 거지 깽깽이..)라는 엽기적인 개드립 앞에서 버로우 타고 그걸 흑역사 처리한 바 있다.
쟤들은 LH라는 이니셜을 쓰는데 SH(서울 주택 도시 공사)는 또 뭔지?
옛날에는 주택 마련 복권이라고 해서 매주 TV에서 예쁘장한 아가씨들이 "쏘세요!" 소리와 함께 다트를 던지거나 공을 아무거나 꺼내는 추첨도 했는데.. 요즘도 그런 걸 하는지, 목돈 마련 절차가 어찌 되나 궁금하다. 나도 이런 건 조만간 알아야 할 텐데.. >_<

(3) 우리나라의 경우 과거에 남산 외인 아파트의 발파 해체 장면이 굉장히 강렬하게 남아 있다. 그렇게 건물을 철거할 때나, 또 예전에 삼풍 백화점이 스스로 붕괴했을 때에나, 심지어 9· 11 테러 때 세계 무역 센터가 무너졌을 때에도.. 건물이 무너질 때는 정말 엄청난 양의 먼지 폭풍이 발생하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급격하게 주변에 영향을 끼치지 않고, 아주 가늘고 길게 야금야금 조용히 건물을 철거하는 것도 고급 기술이다.
일본에서 지난 2012~13년에.. 우리나라 영친왕이 머물렀던 것으로 유명한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의 신관을 천천히 철거했다. 수십~수백 배속 화면을 보면 건물이 차츰차츰 높이가 낮아지면서 땅으로 꺼져 사라지는 걸 볼 수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9/09/01 19:35 2019/09/01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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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오늘날 한국인들 대부분의 주거 형태, 또는 최소한 선호하고 지향하는 주거 형태는 아파트임이 틀림없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서울· 수도권 중심부의 직장· 상권과 최대한 가까운 곳에 집을 잡고 살려고 바둥대고 애쓴다. 하지만 결혼해서 처자식이 생기고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해지면 어쩔 수 없이 더 멀고 저렴한 외곽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집이 서울 도심에서 몇 km 멀어질 때마다 주거비는 크게 감소하지만 교통비와 통근 시간이 얼마씩 증가하고 삶의 질은 그에 비례해서 떨어진다는 무슨 연구 결과가 나온 게 있다.
다만, 이공계 출신의 경우, 공장이나 연구소, 사업장이 아예 대놓고 지방에 있기 때문에 인서울에 집착하는 게 무의미해지기도 한다. 문돌이도 지방직 공무원에 합격해서 외진 데로 발령 나면 마찬가지이겠지만, 그래도 안정된 직업을 얻은 지방행이니 사정이 낫다.

이 와중에 아파트는.. 비록 층· 벽간 소음 같은 문제가 케바케로 있긴 하지만 좁은 땅에 많은 사람이 몰려 살기 용이하게 해 주며, 행정 능률과 토지의 이용 효율을 끌어올리는 여러 장점들이 있다. 그에 비해 단독 주택은 특별히 넓은 정원 있고 차고에다 수영장 있고 개집 있고 다락방까지 있는 미국식 전원 생활이 아닌 이상, 왠지 꾸질꾸질하고 별로 좋지 않아 보인다.

좁은 골목길에 치안 안 좋고, 주차 문제도 심각하고.. 더구나 집의 모든 관리를 주인이 일일이 알아서 해야 한다는 점은 느긋한 전원 생활형이라 해도 변함없다. 어지간해서는 그냥 월 몇만 원 관리비로 모든 걸 퉁치는 게 나아 보인다. 이런 점에서 단독 주택과 아파트의 차이는 자동차로 치면 자가용이냐 대중교통+렌트냐의 차이와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뭐, 반대로 아파트도 좁고 열악하고 닭장 같은 곳은 단독 주택만도 못한 곳, 돈이 부족한 사회 초년생 신혼 부부나 잠시 세들어 사는 곳처럼 묘사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다. 공동 주택도 급이 다 같은 게 아니기 때문이며, 사실 저게 미국에서 아파트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기도 하다. 뭐, 뉴욕 같이 뽁짝뽁짝 대도시는 논외로 하고 말이다.

아파트는 여느 기숙사나 관사, 고시원 같은 곳과 달리, 화장실이 공동이 아니라 각 집마다 따로 있다. 더 좋은 곳은 안방에도 부부 욕실 같은 게 딸려 있기도 하다.
그리고 보통은 입구가 여럿 있어서 각 입구마다 층당 집이 둘만 있는 게 보통이다. 층수는 10층 이상으로 쭉쭉 잘도 올라간다.

하지만 맨션인지 빌라인지 하는 곳은 통상적인 아파트만치 높지 않다. 층수는 그냥 한 자리수이며, 입구는 하나만 있다. 그리고 한 층에서 모든 집들이 한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뭐, 아파트 중에도 이런 형태인 게 없지는 않긴 하지만, 입구별로 층당 집이 둘씩만 있는 아파트보다는 폐쇄성· 보안성이 약한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초가집도 기와집도 아닌 이런 아파트라는 주거 형태는 한국 땅에 언제 처음으로 등장한 걸까? 그리고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주거용 아파트는 무엇일까?

2. 일제 시대

아파트라는 게 조선 내지 대한제국 시절에 존재했을 리는 만무하고.. 짐작하다시피 이건 일제 시대 때 일본인이 지은 건물이 최초이다. 1930년에 경성 미쿠니(三國)상사라는 곳에서 일본인 직원을 위한 관사를 지금의 회현동에 지었다고 한다. 그게 '미쿠니 아파트'라고 불렸다.

화장실은 공동이고 단순 기숙사· 숙소 같은 느낌을 탈피하기 어려운 구석도 있으나, 그래도 이게 한반도에서 상업· 업무가 아닌 주거만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3층 이상짜리 건물이었다.
지금처럼 여러 동으로 이루어진 아파트 단지가 아니라 그냥 한 채가 전부였지만, 그 시절에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었다고 한다. 이 아파트 한 채 안에 수십 세대가 한꺼번에 입주해서 살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미쿠니 아파트는 1990년에 철거돼서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그 뒤 1935년에, 같은 회사에서 또 지은 아파트가 바로 지하 1층, 지상 4층짜리로 지어진 '유림 아파트'이다. 얘는 직원 관사가 아니라 일반인에게 임대· 분양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진정한 아파트였다. 뭐, 그래 봤자 그 시절에 이런 곳에서 살 만한 사람은 일본인밖에 없었다. 조선인은 부자라 해도 이런 데가 아닌 전용 한옥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얘는 '충정 아파트'라고 이름이 바뀐 뒤, 놀랍게도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고 심지어 거주민도 아직 있다! 2019년 현재 한국 땅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아파트가 이 아파트이다.
위치도 어디 엄한 산기슭 비탈길이 아니다. 충정로 역 9번 출구로 나가면 100미터도 채 안 되는 전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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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녹색 도색이 참 추레해 보인다..)
이 아파트는 중간에 호텔로 용도가 바뀌었다가 다시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리고 1979년쯤에 충정로 도로의 확장 공사 때문에 일부가 헐리기도 했다. 그 대신 한 층 더 증축되어 5층이 됐다. 이건 엄밀히 말하면 무허가 불법 증축이었으며, 헐린 것과 인과관계가 있는 증축도 아니었다.

충정 아파트 다음으로 1942년엔 대한 주택 공사의 전신인 '조선 주택영단'이라는 조직 명의로 한국인이 건설한 아파트도 등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더 자세한 기록이 전해지는 게 없으며, 건물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니 한국인이 지은 아파트의 역사는 역시나 해방 후, 더 구체적으로는 6· 25 전쟁까지 끝난 뒤에나 제대로 시작될 수 있었다.

옛날 일본인들이 건물 하나는 튼튼하게 잘 만들어 놨나 보다. =_=;;; 구 서울 역이나 중앙청 건물처럼 말이다. 사실, 태평양 전쟁이 없었고 일제 식민지가 평화롭게 계속됐으면 아파트도 더 지어졌고 1940년대엔 경성에 아예 지하철이 들어설 수도 있었을 거라고 그런다.
일본은 아예 경기도 용인 정도에다가 일본의 수도를 옮겨서 본진으로 삼고, 조선인들은 지진 많은 자기네 섬이나 아니면 만주 벌판으로 쫓아낼 작정이었다는데.. 믿거나 말거나이다. 그런 망상은 실현되지 않았다.

3. 해방 이후

해방 이후에 우리나라에서 지어진 최초의 아파트는 1958년 11월, 고려대 근처의 야산 기슭에 지어진 종암 아파트였다(3개동). 철도나 원자로 같은 기간 시설, 공공시설이 아니라 민간 아파트 건물이 지어졌을 뿐인데 준공식 때 무려 할배 대통령이 참석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아파트의 완공이란 게 그 시절엔 보통일이 아니었다. 집집마다 편리하고 위생적인 수세식 화장실이 갖춰진 것조차도 그때는 최첨단 테크놀러지라고 언론 대서특필감이었으니 말 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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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암 아파트는 37년을 존속하다가 1995년에 헐렸으며, 그 부지에는 다른 아파트가 재건축되어 들어섰다.

할배 시절은 워낙 가난하고 열악했으니 국내의 아파트 건축 기록이 이런 것밖에 없다. 본격적으로 아파트가 지어진 것은 역시나 그 다음 박통 때부터이다.
박통 때 최초로 지어진 아파트는 1962년과 1964년 두 차례에 걸쳐 완공된 '마포 아파트'이다. 얘는 우리나라 최초로 대규모 단지 형태를 표방하고(10개동 642세대)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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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동까지만 지어졌던 1962년 당시의 항공 사진. 광활한 공간이 참 인상적이다.)
이 아파트는 30년 남짓 존속하다가 종암 아파트보다도 더 이른 1991년에 철거되었다. 그 자리에는 마포 삼성 아파트(1994년, 14개동 941가구!!)가 들어섰는데, 얘는 우리나라 최초의 "재건축 아파트"(2세대!)라고 한다.

종암과 마포라는 두 원조 아파트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아파트는 처음엔 상류층을 위한 고급형으로 출발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나중에 60년대 중· 후반에는 세운 상가, 낙원 상가 같은 주상 복합 아파트가 만들어졌으며, 미군 간부를 포함해 외국에서 모셔 온 VIP가 처자식 데리고 편히 지내라고 '외인 아파트'도 지어졌다. 이것들 역시 모두 서민과는 큰 관계가 없는 고급형이었다. 대학 교수, 정· 재계 인사, 인기 연예인 같은 계층이나 들어가 살 수 있었다.
(下에서 계속됨)

Posted by 사무엘

2019/08/30 08:33 2019/08/30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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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5년 1월 초엔 경기도 안성에서 엽기에 가까운 황당한 뉴스가 하나 전해졌다. 아파트 16층에 사는 어떤 70대 노파가, 밖에 일일이 나갔다 오는 게 귀찮다는 이유로 밤에 여러 차례 상습적으로.. 자기 집의 음식물 쓰레기를 베란다 밖으로 투척해 오다가 결국은 덜미가 잡혔다.

그 사람이 떨어뜨린 쓰레기 봉투는 음식물 쓰레기 수거함에 곱게 갔을 리가 없으니 지상에 주차돼 있던 차량들 위로 다 떨어졌다. 차들은 유리, 지붕, 엔진룸 등이 부서졌으며, 그냥 쓰레기도 아니고 썩은 물이 줄줄 흐르는 음식물 쓰레기가 묻는 바람에 청소까지 해야 하는 지경이 됐다.
피해 주민들이 민원을 넣고 CCTV를 설치하고 경찰에 신고까지 했지만, 깜깜한 밤에 갑자기 쓱 떨어지는 작은 물체를 포착하기는 쉽지 않았다. 급기야는 쓰레기 봉투 안에 들어 있던 마트 바코드를 조회해서 가해자를 잡아 냈다니 이번에도 우리나라 공권력 만세다.

저 할머니는.. 중증 치매나 정신병, 몽유병, 만취 상태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지금까지 나이를 도대체 어디로 잡수셨는지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다. 자동차니까 망정이지 사람이 그 봉지에 맞았으면 어찌 하려 했는가?
형사상의 벌금은 법에 정해진 한도로만 떨어지지만, 민사상의 손해 배상금은 피해를 입한 만큼 내야 한다. 지금까지 1000만원이 넘는 물적 피해를 낸 저 가해자는 집안 재정이 좀 파탄 날 각오를 해야 할 듯이다. 과거엔 삼풍 백화점이나 세월호를 소유했던 기업도 이런 손해 배상금 명목으로 재산이 다 털렸었다.

2.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으면 최소한 저렇게 위에서 떨어지는 오물을 맞을 일은 없을 것이고, 더 나아가 뺑소니 차량이 긁고 튄다거나 지나가는 취객이 차를 망가뜨리는 일도 상당수 예방이 가능할 것이다. 거기는 24시간 내내 불이 켜져 있고 CCTV도 잘 갖춰져 있어서 치안이 좋다.

그러나 거기도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다. 지하는 지상보다 근본적으로 화재에 취약하다는 약점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2년쯤 전엔 용인의 모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어느 젊은 정신이상자가 불장난을 하다가 대형 화재를 내는 바람에 그 층에 있던 30여 대의 차량들을 깡그리 불태워 버린 적이 있다.
이 정도 피해 규모이면 정말 노예 제도라도 있지 않으면 한 집안을 다 거덜내서라도 피해 보상을 할 수 없을 것이다.

3.
아파트에서 누가 투신 자살을 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안타깝고 불미스럽고 끔찍한 소식인데, 우리나라엔 2010년대에 투신 자살하는 사람에게 깔려서 깔린 사람과 자살자가 같이 죽은 일도 두 건이나 있었다. 이거 뭐, 아파트 주변에서는 앞만 보고 나갈 게 아니라 위로 하늘도 반드시 경계하고 주시해야 하는가 싶을 정도이다.

2012년 10월엔 경북 고령에서 한 중국 동포 30대 여성이 신변을 비관하여 14층에서 뛰어내렸는데.. 그 순간에 다른 남자가 "쓰레기를 버리러"(아까 1번 이야기와는 좋은 대조를..) 아파트 현관 밖으로 나가려 했고.. 결국 떨어진 사람을 맞았는지 부딪혔는지 깔렸는지.. 표현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지만 끔찍한 참변을 당했다. 정말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다.

이듬해 2013년 5월엔 우울증을 앓고 있던 30대 남성이 부산의 한 아파트 고층에서 뛰어내렸다. 그런데 마침 1층에서는 한 집에서 6살짜리 여자아이와 부모가 외출하러 나가던 중이었다.
아이는 신이 났는지 부모보다 먼저 밖으로 쪼르르 달려 나갔는데.. 저 자살자는 하필 그 타이밍 때 아이 위로 떨어져 버렸다.

자기 눈앞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생판 모르는 사람이 투신 자살을 하고 자기 애가 그 사람 몸과 부딪혀서 치명상을 입고 죽었다니.. 부모가 얼마나 쇼크 받고 멘붕에 빠졌을지 차마 상상이 가능하겠는가? 쓰레기 봉투가 아니라 사람이 떨어졌고 그 가해자는 죽고 없으며 가해자의 유족은 최소한 가해자의 자살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니, 이건 뭐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그러니 답답할 뿐이다.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없기를 바랄 뿐이다.

4.
끝으로.. 우리나라에서야 멀쩡한 엘리베이터를 놔 두고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밖으로 떨어뜨린 노파의 파렴치· 몰상식한 행동이 지탄의 대상이지만, 북한에서는 이게 그저 웃거나 비아냥거릴 일이 절대로 아니다.
남조선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몰래 투척한 노파의 소식을 들으니, 오래 전에 봤던 본 주 성하 기자의 증언도 덩달아 연관 검색 결과로 떠올랐다.

인평양의 고층 아파트에서 살 정도이면 그야말로 1% 안에 드는 최상류층일 텐데.. 그런 동네에서도 전력이 부족해서 엘리베이터는 그야말로 오전과 저녁 러시아워 때만 운영된다. 그렇기 때문에 고층에서 사는 몸이 불편한 노인들은 진짜 자기 집 밖으로 나오지를 못하고 사실상 높은 탑 안에 감금된다.

물도 당연히 특정 시간대에만 제한급수다. 더운물이 안 나오고 난방이 안 되는 건 차라리 양반이다. 추위 정도는 집안에 또 비닐하우스를 만들고 이불과 옷을 겹겹이 감싸면 극복 가능하며 실제로 평양 시민들은 그렇게 지낸다고 한다. 허나 밥 지을 물, 마실 물, 씻을 물, 심지어 변기 내릴 물이 제때에 충분히 안 나오니...;;

종이에 ‘변’을 받았다가 밤에 슬그머니 버리는 집들이 많았다. 몇십 층 높이에서 버리는 바람에 가로등도 없는 밤거리를 걸어가다 오물 벼락을 맞는 사람들도 있어 이런 경우 “번개 맞았다”고 했다. 밖에다 버리지 말라고 아무리 감시를 해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선 소용없었다. (☞ 원문 링크)

탈북자 김철주(가명)씨는 평양에 살 때 아파트가 밀집한 광복거리를 지나다니기 꺼려했다. 이곳에선 무심코 지나가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똥 벼락을 맞을 수 있다. 겉은 번드르르한 광복거리 아파트촌 여기저기 함부로 버려진 똥도 흔히 볼 수 있다. 아침마다 ‘도로보수대원’들이 욕을 퍼부으며 똥을 치우는 장면도 연출된다. 김씨는 “아파트에 물이 부족하다 보니 변기에 물이 많이 필요한 대변은 베란다에서 대충 처리하고 밖에 그냥 버리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 원문 링크)


이건 음식물 쓰레기 투척하고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지 않은가? =_=;;;
시가지에 인분이 굴러다니는 건 중세 유럽이나 구한말 조선 시대가 미개하다고 깔 때에나 등장하는 레퍼토리인데 저 동네는 시골 촌구석도 아니고 평양이 저 지경이고 이에 대한 탈북자들의 증언이 서로 일치하니 참 뭐라 할 말이 없다.
참 여러가지 일들을 생각할 수 있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5/01/30 08:28 2015/01/30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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