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려 말의 왜구

우리나라의 경우, 과거에 조선이 하도 흉하고 추한 과정을 거쳐 멸망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격한 반감과 심지어 트라우마까지 지닌 사람이 있다.
19세기 말에야 왕비가 외국 자객에게 암살 당하고, 왕이 쫄아서 외국 대사관으로 피신을 가고, 자국 군대가 봉기를 일으켜서 대궐을 점령하고, 왕이 외국 군대를 동원해서 자국 민란을 진압하는 등... 뭐 상상할 수 있는 개막장 인외마경이 다 벌어졌다.

하지만 사실은 조선 이전의 고려도 말기엔 만만찮게 시궁창 막장을 넘어 '헬게이트'였으며, 언제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던 상태였다.
일자무식 무신들 쿠데타에 휘둘리면서 나라 내부가 결딴이 났고(물론 그 전에 문신들이 나라 지키는 군인들을 개차반 대접했던 것도 잘못),
대륙으로부터는 몽골인지 원나라인지 걔들한테 작살 나면서 오랫동안 휘둘렸으며,

바다로부터는 이놈의 왜구가.. 소말리아 해적 수준이 아니라 어지간한 적국 해군 수준으로 한반도의 해안을 몽땅 접수하면서 끊임없이 민가를 털어 갔던 것이다. 망망대해 위에서 배만 턴 게 아니라 아예 상륙까지 해서 남의 영토에서 노략질을 했으니 원..
이 왜구는 일본 자국의 입장에서도 통제가 안 되는 골칫거리이긴 했다.

하지만 고려는 멸망 직전의 말기에 중앙 정부의 통치력이라고는 도읍 주변으로 확 쪼그라든 상태였다. 오죽했으면 이 성계가 처음에는 온갖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장수로 시작했다가 나라를 갈아엎어 버렸다.
마침 이 시기에 최 무선이 고성능 화포를 개발한 덕분에 특별히 왜구들을 화력으로 제압할 수 있었다. 알고 보면 이때 저 사람은 이 순신 만만찮게 나라를 구하고 조선의 국방의 기틀을 닦은 것이었다.

그렇게 왜구들이 무력으로 제압되고, 일본도 1600년대쯤 중앙집권 막부가 등장하고부터는 왜구라는 것이 자취를 감췄다. 조선이 임진왜란 전과 후가 상황이 많이 달라졌듯, 일본도 그 전과 후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왜구가 자꾸 찝적대고 대미지를 누적시키고 국력을 소모시킨 것은 고려의 멸망에 간접적으로 기여를 했다. 그러나 이때는 그래도 이 성계라는 자국민의 쿠데타를 통해 왕조가 바뀐 것이었다.
그러나 훗날 조선은 왜구가 아니라 근대화된 일본 제국의 군대가 총칼을 들이대며 위협하니 알아서 슬슬 기면서 외교권 사법권 내어주고 군대 해산하다가 끝내 멸망하게 됐다. 둘은 멸망 방식에 이런 차이가 있다.

차라리 왜구들이나 찝적대는 게 강화도 조약, 을미사변, 청일 전쟁 이런 것보다는 더 나았던 건지는 모르겠다.
나도 오랫동안 근현대사만 생각하다 보니, 일본군만 떠올리지 옛날 왜구...의 존재감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놈의 토착왜구 타령은 참.. -_-;;
그 미개한 왜구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근대화해서 아시아 최강대국이 된 건 생각을 안 하고 언젯적 얘기만 계속 읊어 대는지 모르겠다.

2. 삼별초

옛날에 박 정희 군사 정권은 '군사 정권'에 대한 대외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고려의 무신 정변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후하게 평가하도록 역사학계에다가 로비를 넣었던 것 같다.
특히 삼별초라는 친위대 말이다. 투철한 애국애족 정신으로 뭉쳐서 마지막까지 몽골에게 항거하던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많이 미화를 했는데.. 현재는 그렇지는 않은 걸로 평가가 바뀌고 있다.

단, 지방에서 '노비'들이 삼별초에 많이 가담했다고 한다. 더 잃을 게 없는 처지에서 잘 되면 신분 해방이고 못 돼도 본전이니까 가담했던 게 아닐까? 몽골의 침략 때문에 시국이 뒤숭숭한 데다, 불과 60여 년 전에 '만적의 난'이 미수에 그쳤던 것도 영향을 끼쳤지 싶다.

3. 지조를 지킨 의인

조선 시대엔 사육신과 생육신이란 게 충절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숙부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내쫓고 왕이 되자, 저 충신들이 다시 단종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실패로 돌아가고, 반대로 그들이 정치범 역적으로 몰려 집안이 통째로 숙청 당하고 삭제 당했다.

저 사람들은 어떤 고문에도 끝까지 굽히지 않고 "당신은 대감님 나으리이지, 왕이 아니올시다!"를 고집했다고 한다.
옛날에 석총이 궁예에게 "당신은 국왕 폐하이지, 미륵이 아니올시다!"를 고집했던 것과 좋은 대조=_=를 이루는 것 같다.

조선보다 더 과거에는 우리나라 관료가 아예 외국으로 전향을 권유 받았지만 이를 거부하고 목숨을 잃은 사례가 좀 있었다. 물론 아무 뜬금없이 그렇게 된 건 아니고, 외국을 상대로 기만 내지 적대 행위를 하다가 걸렸기 때문이다.

(1) 신라 박 제상은 정말 독보적으로 유명한 사례이다. 왕의 동생을 적국에서 구출해 준 뒤, 자신은 일본으로 전향을 거부하고 화형을 당해 죽었다. 요즘으로 치면 국정원 블랙요원이 임무 수행 과정에서 발각되고 순직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2) 고려 때는 강 조라는 굉장히 특이한 관료도 있었다. 왕을 시해하고 뭔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 같았지만 거란의 침입에는 맞서 싸웠다. 포로로 잡힌 뒤엔 거란의 신하로 전향을 단호히 거부하고 처형 당했다.

외국으로의 전향을 거부한 사람으로 한국사에 등장하는 사람은 내가 알기로 이 둘이 전부인 것 같다.

4. 조선 시대의 형벌

(1) 로마 제국의 십자가형은 본게임 전에 죄수를 반 죽여 놓는 채찍질이 있었고, 조선의 유형(귀양)형은 본게임 전에 죄수를 반 죽여 놓는 장형이 있었다.
그리고 본게임에서는 둘 다 죄수를 뭔가 방치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뭐, 유형의 경우 장형은.. 돈으로 때우는 걸로 대체할 수는 있었다고 함)

(2) 간과하기 쉬운 의외의 사실인데, 조선 시대의 감옥은 전적으로 미결수가 갇히는 곳이었다. 그 시절에는 감옥에 갇히는 것 자체가 형벌인 '금고 1년, 징역 3년, 무기징역' 같은 자유형이 없었다~! 그 대신 장형, 태형, 사형 같은 신체형이 있었을 뿐.
거기에다 도형(노역)이나 유형이 있는데.. 얘들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장형을 받고 나서 집행되는 형태였다.

"여봐라, 저놈을 당장 하옥시켜라" 이게 그 자체가 형벌을 주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죄를 묻고 나서 진짜 형벌을 주기 위해 신체를 구속하는 조치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의 경우, 갑오개혁 때에야 장형과 도형이 폐지되고, 징역형이란 게 처음으로 도입됐다. 그리고 사형 집행 방식도 좀 근대화(?)됐다. 덕분에 갑오개혁 거의 직후에 처형된 전 봉준은 참수 대신 교수형을 당했다.

(3) 조선에서는 사형을 집행할 때 사형수는 꿇어앉아 있고, 칼 든 망나니가 '칼춤'을  무슨 탈춤처럼 덩실덩실 추면서 입으로 술인지 물인지를 후~ 뿜다가 내리친다거나 하는 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건 이제 다들 많이 알려져 있다.
곤장 칠 때처럼 사형수를 엎어 놓고 목을 쳤다.

5. 사도세자

사도세자는 왕자 주제에 근처의 사람을 지 기분 꼴리는 대로 고문하고 막 죽이기까지 했다니(!!).. 예상 이상의 개막장 정신병자 싸이코패스 망나니였다.
근데 그렇게 된 게 애비 영조가 애를 어린 시절부터 훈육을 빙자해서 아동학대 수준으로 너무 심하게 잡았기 때문이었다. 애가 미쳐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는 그 스트레스를 사치 향락으로 풀고, 주변의 궁인· 궁녀들이나 학대하며 푼 것이다.

사도세자는 원래 머리가 비상하고 아주 똑똑했다고 한다. 잘 컸으면 나라를 잘 다스리는 유능한 군주가 됐을 것 같은데 이런 과정을 거쳐 인성이 완전히 망가지고 폐인이 됐다.
영조는 너무 큰 사고를 치고 자신과도 갈등이 극에 달한 세자에게 벌을 주긴 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서류 기록이 남는 법적인 형벌을 줄 수는 없었다. 당연히 사약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니 처음엔 칼 던져주고 자결하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뒤주에 쳐넣어서 서서히 아사· 갈사시키는 희대의 엽기적인 방법으로 친아들을 죽여 버렸다. 이름하여 임오화변.
우리나라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에는 부모로부터 평생 애정을 못 받고 학대만 당했던 어느 청년이 참다못해 부모를 살해하고 시신을 토막내기까지 했는데.. 이건 사도세자의 정반대 케이스인 것 같다.;;

6. 울나라의 명칭

서양에서 이 대한민국과 그 전신 나라들의 명칭은 Korea라고 오래 전부터 알려지고 정착했다.
조선 정부에서는 자기 나라가 '고려'에서 유래된 코리아라고 국제적으로 일컬어지는 걸 영 싫어했다. 하지만 이 명칭이 진작부터 다 퍼져 버렸기 때문에 그걸 뒤늦게 Chosun이니 Joseon이니 하는 다른 단어로 바꿀 수는 없었다.

결국, 조선의 페이스리프트 후기형인 대한제국은 Empire of Korea라고 대외적으로 선포되었다. 이건 자국 여권에도 적힌 공식 표기이다. 19세기 중후반이 각종 국제 기구라는 게 처음으로 생겼던 시기이니까..

대한제국은 얼마 못 가고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기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일제는 이번엔 대한제국 대신 '조선'이라는 명칭을 다시 가져와서 한반도 지역을 조센이라고 읽었다. 알파벳 표기는 Chosen.. choose의 과거분사 '선택된'과는 아무 관계 없다.. -_-;;

이 명칭을 국제적으로 홍보했지만.. 역시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조선 정부가 홍보한 '조선'이건, 나중에 일제가 홍보한 '조선'이건.. 별 호응이 없었다.
결국 오늘날 '조선'은 북한에서나 쓰고 있는 명칭이 됐고, 걔들도 DPRK라는 영어 이니셜에는 어쩔 수 없이 Korea가 들어간다.

자국 명칭이 '한'짜가 들어가건 '조선'이 들어가건, 영어는 고려 시대 이래로 요지부동 Korea라는 게 신기한 현상이다. 모탈 컴뱃과 더불어 K로 시작하는 얼마 안 되는 고유명사이다.
일본에 대한 열등감과 피해의식이 쩔었던 쌍팔년도 시절엔.. 일본이 국제적으로 로비를 벌여서 Corea의 알파벳 순서를 자기네 Japan 뒤로 밀었다는 정말 황당한 낭설도 나돌았었다. 허나 이건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Posted by 사무엘

2023/11/28 08:36 2023/11/28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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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고대사 토막 상식

* 난 우리나라 역사라 하면 알다시피 철도 또는 안보· 이념과 관계가 있는 근현대사 얘기만 많이 하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오랜만에 고대사 얘기를 좀 꺼내고자 한다. 아, 그렇다고 근현대사도 전혀 안 나오는 건 아니다.

1. 멸망 방식

한반도와 그 주변 나라들을 보면, 단순히 전쟁에서 지거나 내부 혁명과 쿠데타가 발생하는 평범한 시나리오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망한 나라들이 역사적으로 좀 있다.

  • 신라: 왕이 백성들 이끌고 스스로 제 발로 고려로 항복· 귀순함
  • 후백제: 태조가 아들에게 밀려서 피난 간 뒤, 고려로 귀순하여 자기가 세운 나라를 스스로 침공... 꽤 독특하다.
  • 조선 또는 대한제국: 전쟁 하나 없이 야금야금 일제에게 조금씩 단계별로 각종 권리를 뺏기며 열불나는 방식으로 굴욕적으로 멸망
  • 그리고 저 훗날 일제의 괴뢰국이던 만주국: 마치 선장이 비상사태에서 배를 포기한다고 공식 선언하듯이, 황제가 피난길에 국가 셧다운 선언하고 자진 해산함

신라의 경우, 저런 이유로 인해 마지막 경순왕의 무덤은 다른 신라 왕릉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경주가 아니라 연천군 저 북쪽 끝의 민통선 안에 있다. 38도 위도에 정말 근접했지만 그래도 다행히 남한이 수복한 지역이며, DMZ 신세도 면했다. 신라의 수도 근처가 아니라 고려의 수도 근처에 묻힌 것이다.

난 경주 출신이기도 한지라 신라 왕릉이 웬 생뚱맞은 저런 곳에 있다는 게 개인적으로 굉장히 독특하고 흥미롭게 느껴진다.
훗날 고려는 이 성계의 위화도 회군 쿠데타에 의해 비교적 평범한(?) 방법으로 멸망했다. 그리고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무덤이 아예 고양시와 삼척시에 2개로 나뉘어 있으니 신라의 마지막 왕의 경우보다 더 특이하다. (둘 중 하나는 허묘)

우리나라의 경우 6·25 전쟁 당시에 판문점과 송악산, 배수진 지형 등 여러 이유로 인해 개성시 일대를 더 점령하지 못하고 빼앗겼다. 이것 때문에 고려의 존재감이 남조선 땅에서 더욱 없어지고, 반대급부로 '조선'스러운(?) 정서가 더 강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당장 오늘날의 서울도 지리적으로 조선의 한양을 계승했으니 말이다.

그 대신 그 '고려'라는 이미지는 북한이 더 적극적으로 쓰고 있다. 고려항공, 고려연방제처럼.
물론, 그래도 남조선의 경우 수도를 조선의 도읍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고, 북조선의 경우 나라 공식 명칭에 여전히 '조선'이 들어가 있긴 하다.

2. 도읍의 위치

말이 나왔으니 수도 얘기도 해 보자.
일단 신라는 경주(금성), 조선은 서울(한성)로 확고한 붙박이이다. 이들은 안 그래도 당대에 역사가 매우 길었던 왕조로 여겨지는데 천도의 내력 역시 전무하다. 신라의 경우 멸망 직전에는 세력이 경주 시내로 극도로 쪼그라들긴 했지만 그래도 왕궁이 딴 데로 옮겨진 적은 없었다.

덕분에 여기는 각종 문화재 유물도 꽤 많이 남아 있다. 서울이야 시기적으로 제일 가까운 왕조의 수도여서 그렇다 치지만 신라는 서기 1000년도 채 되지 않아 멸망한 엄청 옛날 왕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주는 과장 좀 보태면 온통 땅만 좀 파면 유물이 나올 지경이어서 도시형 국립공원까지 조성될 정도인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한편, 고려는 전반적으로 개성(개경)이긴 했지만 중간에 몽골로부터 침략을 받았을 때 강화도로 딱 한 번 천도를 한 적이 있다. 강화도는 내륙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닌데 몽골은 골수 내륙국이다 보니 해군이나 해병대가 없어서 저기로는 못 쳐들어갔던 모양이다.

후대의 조선은 임진왜란 때 왕이 피난을 갔고, 또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 행궁으로 도읍을 옮겼다. 스타로 치면 본진이 옮겨진 격이다.
대한민국 역시 잘 알다시피 6· 25 전쟁 중에는 부산으로 수도를 잠시 옮긴 적이 있었다.

고구려의 수도는 지금의 평양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건국 직후 한동안은 더 북쪽으로 지금의 중국 땅(졸본, 국내성)에 도읍이 있었다. 하긴, 광개토왕릉비도 괜히 중국에 있는 게 아니다.
리즈 시절 이후와 멸망 때까지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가 평양이었다. 남북이 통일이 되고 나면, 정확히 말해서 북괴 정권이 사라지고 나면 도읍이 이북 땅에 있었던 옛날 한반도 왕조들의 흔적을 찾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백제는 한국사에 등장하는 메이저 왕조들 중에 수도에 대한 존재감이 제일 없는 것 같다. 일단 지금으로 치면 서울· 하남 일대였던 시즌 1과,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더 친근한 충남 공주· 부여 일대의 시즌 2로 나뉜다. 이렇게 초점이 분산된 데다 시즌 1 도읍은 흔적이 전해지는 게 별로 없으니 존재감이 더욱 감소한다.

그래도 삼국 시대에 오늘날의 서울과 가장 가까운 곳에 도읍을 뒀던 적이 있는 왕조는 백제이다. 그렇다고 조선 같은 북악산 기슭의 사대문 안이 아니라 한강 이남의 몽촌토성· 풍납토성 뭐 이런 지대이다. 일단 하남, 위례신도시 이런 명칭들이 다 백제의 도읍에서 유래된 것들이라니 신기한 일이다.

가야나 발해 같은 마이너한(?) 나라들의 역사도 갑자기 궁금해지긴 하는데, 고대로 갈수록 사료 자체가 너무 빈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태양계 행성도 천왕성과 해왕성은 표면 사진 자체가 보이저 2호가 찍은 것밖에 없어서 빈약한 것처럼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7/07/22 08:39 2017/07/22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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