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대 자동차

현대 자동차는 뭐 내수용와 수출용 제품 차별 폭리, 부품 불량(에어백 미전개나 급발진?) 같은 일부 불미스러운 일로 인한 비판을 받을지언정 그래도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재벌 자동차 회사이며, 나라에 막대한 부를, 개인에게는 꿈의 직장을 제공하고 있는 대단한 기업이다.

대졸 신입사원으로만 들어가도 연봉이 이미 삼성 전자를 능가하는 까마득한 액수인 건 잘 알려진 사실이거니와, 고졸 생산직으로 취업해도 효자에 그 지역 일등 신랑감 소리를 들을 정도이다. 낮은 직급도 워낙 복리후생이 좋으니 연줄과 빽 없이는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하더라.
삼성은 무노조라지만 현대는 그렇지도 않아서 파업이 종종 발생하며, 오히려 귀족 노조의 추태가 협력업체들의 열악한 복리후생과 비교되어 비판받을 정도이다.

자동차 정비소로 시작해서 오늘날의 현대 자동차의 기반을 일군 일등공신은 잘 알다시피 왕회장이다(1915-2001).
오늘날 뱃대지가 불러서 추태를 보이고 있는 건 별개로 욕 먹을 사항이겠지만, 현대차가 옛날엔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고 악전고투한 끝에 '안 되면 되게 하라' 식으로 어떻게 성공했는지를 살펴보는 건 나름 의미 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현대 자동차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던 순간에 외국 기업으로부터 회유를 두 번 받은 적이 있었다.
먼저 고유모델 승용차인 포니를 개발하고 제3세계 위주로 수출까지 한 지 얼마 안 되었던 1977년 5월의 일이다. 주한 미국 대사(그 당시, 리처드 스나이더)가 왕회장을 조선호텔 스위트룸으로 정중히 초청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님 이제 와서 밑바닥에서 자동차 자체개발 해 봤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이지 경제성 면에서 승산 있겠습니까? 님이 지금이라도 (1) 고유모델의 개발을 포기한다면(포니 2 같은 거 만들 생각 하지 말고) 저희 나라에서 현대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GM 포드 크라이슬러 등 우리 차 원하는 대로 커스텀 조립 생산할 수 있게 도와 드리죠."

그러나 왕회장은 당장 안정되고 편안한 조립 생산 셔틀 제의를 거부하고 고난의 길을 자처했다. (출처: 정 주영 일화집 "이봐, 해봤어?", 프리이코노미북스)
포니는 이탈리아 사람이 디자인하고 일본에서 개발한 엔진과 파워트레인을 얹은 물건이지만, 어쨌든 한국 땅에서 지금까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던 승용차를 밑바닥부터 최초로 창조해 낸 사례였다. 코티나나 그라나다처럼 미국차 로컬라이즈 + 면허 조립 생산이 아니라 말이다. 나라에서 요구한 비율만큼 부품 국산화도 달성한 건 덤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0여 년 뒤, 현대차는 알파 엔진이라는 승용차용 엔진을 맨땅에서부터 자체 개발 시작했다. 그 당시 현대로부터 막대한 로얄티를 받으면서 기술 지원을 찔끔 해 주던 일본 미쓰비시는 택도 없는 무모한 시도라고 현대를 마음껏 비웃었다.
그러나 용인 마북리 연구소를 쉬엄쉬엄 방문했던 구보 회장은 개발 중이던 엔진에 고슴도치 가시처럼 꽂혀 있던 240여 개에 달하는 온도계를 보고는 느긋하던 태도가 싹 바뀌었다. "현대차에 독종이 한 명 들어와 있구나(이 현순 박사). 이 자식 안 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그래서 1989년, 1990년 몇 차례 한국으로 날아와 왕회장에게 (2) 엔진의 독자 개발을 포기하라고.. 만들어 봤자 또 최신 기술 격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개발비 회수도 못 할 거라고 집요하게 로비와 회유를 거듭했다. "개발팀 해체하면 우리가 지금 받는 로얄티를 절반으로 깎아 드리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당시 로얄티 무지막지하게 비쌌었다. 차 한 대 팔면 매출의 거의 4~50%가 로얄티로 날아갈 정도였다.

이거 무슨 북괴에다 핵 개발 포기를 종용하는 것도 아니고..
이때에도 왕회장은 미래를 내다보는 생각을 했다. 쟤들이 저렇게 큰 당근을 제시하며 회유할 정도인 걸 보니 반대로 엔진 독자 개발은 반드시 꼭 성공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출처: "내 안에 잠든 엔진을 깨워라", 김영사)

이 (1)과 (2)의 결정 덕분에 현대차는 포드 수입 자동차를 겨우 조립 생산만 하던 처지를 벗어나 고유모델을 만들어 냈으며,
2밸브 카뷰레터 엔진이나 겨우 조립하다가 자체기술 터보 엔진까지 만들게 됐다.
자체 개발 엔진은 안 그래도 그 당시에 제일 과감한 실험적인 모델이던 스쿠프에 맨 처음으로 탑재됐으며, 1500cc 3밸브 SOHC 터보 엔진이 장착된 스쿠프 터보는 국산 승용차 최초로 최대 시속 200을 돌파하고 제로백 10초 이내도 달성했다.

이걸로도 모자라 현대와 미쓰비시 사이의 기술 주종 관계는 몇 년 못 가 반대로 역전되어 버렸다. 그리고 현대는 스쿠프 - 티뷰론 - 투스카니에 이어 지금은 제로백이 5~6초대인 제네시스 쿠페까지 만들게 되었다.
그 시절에 왕회장 같은 경영자와 이 박사 같은 엔지니어가 같이 있던 것은 국가적인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정도 행적은 있어야 '반일, 극일, 일자리 창출' 같은 걸 논할 자격이 갖춰지지 않나 싶다.

2. 삼성 전자

지금까지 현대차 위주로 얘기를 했는데, 삼성 전자도 그 시절에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도박· 모험을 했다. 백색가전이나 근근이 수입 부품 조립으로 만들다가 1983년 2월에 반도체를 맨땅에서 만들겠다고 경영진이 전격 선언하고 공장을 짓고 개발에 들어간 것이다. 오일 쇼크에, 선진국들의 장벽 등 1980년대의 여러 정황을 보아하니, 반도체 자체 개발이 아니면 기업과 나라를 먹여 살릴 길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1983년 가을에 64K디램의 개발에 성공하기까지 연구원들은 그야말로 월화수목금금금 갈려 들어갔다고 한다. 외국으로 연수 가서 하나라도 더 보고 배우고 오려다가 거기 직원들한테 저지 당하고 문전박대 당한 건 우주 발사체나 고속철 개발 같은 다른 분야와 다를 바 없었다. 하다못해 팀원이 "저 다음주에 결혼합니다. 휴가 좀.." 이러자 팀장이 "야 임마 왜 하필 이런 바쁜 때에 결혼을 쳐 해!" 이렇게 버럭 했을 정도였댄다. 그 당시 팀장이 훗날 신화 창조의 비밀 비스무리한 TV 프로에 출연해서 지금 생각하면 그 부하 직원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회고한 걸 본인은 유튜브 동영상으로 봤다..;;

그것 말고 삼성 전자의 반도체 개발과 관련된 다른 에피소드는 잘 모르겠다.
메모리 반도체보다 가치가 더 높은 비메모리 반도체까지 잡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그 당시로서는 메모리 하나 잡은 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하고 감지덕지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오늘날이야 삼성은 전자 기기, 현대는 자동차 이렇게 업종이 다르니 서로 맞닥뜨리거나 대립할 일이 없다고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과거에는 지금 하이닉스 반도체의 전신이 현대 전자였으며, 현대 전자에서도 전화기, 컴퓨터 같은 걸 만들었다.
이 건희 회장의 심기가 편할 리 없었다. "현대는 우리 삼성이 다루는 업종의 제품을 다 만들 수 있는데 우리는 왜 현대처럼 자동차를 못 만들지?" 이렇게 위기 의식을 가졌다. 그래서 기어이 1990년대 중반에 자동차 회사를 세웠지만 잘 알다시피 별 재미를 못 봤다.

우리나라에서 2, 30년 전과는 달리 "과소비를 추방합시다, 국산품을 이용합시다" 이런 가난한 구호가 쏙 들어간 이유가 뭘까?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커피나 석유 같은 원자재를 그냥 물 쓰듯이 펑펑 쓰고, 각종 외제품 외제차, 외국산 영화를 마음껏 보는데도 나라가 어떻게 돌아갈 수 있을까?

일차적으로는 세계 각국이 자본주의 경제 논리 실용주의에 입각해서 시장을 적극 개방했기 때문이지만, 그 다음으로는 우리 쪽에서도 그렇게 수입을 마구 해도 될 정도로 국내 기업들이 고부가가치 상품들을 잔뜩 수출해서 외화 벌고 세금도 많이 내 주기 때문이다. 기업을 욕하기에 앞서 반기업 정서는 우리가 당연하게 누려 오던 부의 상향평준화까지 저해하며, 부자가 망할 정도이면 서민들은 완전 거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3. 안랩

지난 19대 대선 때 출마했던 대선 후보들의 프로필을 보면, 신고한 재산 액수가 혼자서 타 후보들의 평균 액수보다 0이 두 개쯤 더 붙은 독보적인 사람이 있었다. 의사, 프로그래머, 기업가, 교수를 거쳐서 대통령 자리까지 넘보게 된 그 사람 말이다.

남들은 사짜 직업을 하나만 얻고도 그걸로 평생 안주하고 떵떵거리며 사는데, 그걸로 모자라서 1980년대 말에 이미.. 자료도 구하기 어렵던 시절에 어셈블리어를 공부해서 컴퓨터 바이러스를 연구하고 그걸로 모자라서 기업까지 차렸으니, 능력과 정신이 모두 존경스러운 인물인 건 사실이다. 빌 게이츠도 평범하게 공부만 해도 변호사나 교수 정도는 그냥 됐을 지능의 소유자인데, 굳이 불안정하고 위험한 창업을 감행해서 세상을 바꿔 놓고 변호사· 교수보다 훨씬 더 부자가 되지 않았던가.

게다가 이 사람도 나름 왕 회장의 일화 같은 일화가 전해지는 게 있다. 1997년, 미국 유학 중에 맥아피 사로부터 자기 기업 인수 제의를 받았지만 애국심 애사심(!!) 차원에서 거절했다고 한다. 이건 그 당시 TV 인생 다큐에서 각색되어 방영되었고, 학교 교과서에까지 실렸다고 한다.

비록 저게 완전히 황당무계한 주작은 아니었겠지만 액수가 정말 그 정도로 엄청났었나, 그리고 개인 능력에 대해서, 또 부인까지 동반된 교수 채용 등 일부 절차나 특혜가 과장이나 거품이 있지는 않았나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게 조금은 있다. 마치 신뢰도가 백범일지의 치하포 사건(고증 오류 + 국모 원수 갚는 것과는 별 상관 없는 단순 일본 민간인 살해)과 비슷하게 보이는 것 말이다.

V3은 국산 소프트웨어로서 1990년대에 수많은 컴퓨터들을 도스용 악성 코드로부터 구한 고마운 프로그램이긴 하지만, 그게 현대차만치 세계적으로 많이 수출되어서 쓰여서 외화를 막 벌어 왔고, 미국의 안티바이러스 솔루션을 진지하게 위협할 정도로 그만치 뛰어난 세계구급 제품이었는지도 좀 의문이다.
(물론, 밖에서 막 적극적으로 벌어 오지는 못해도 안에서 외화 유출을 막는 데는 충분히 기여했을 것이다. 국내에서는 아래아한글 때문에 MS 워드가 가격을 왕창 낮추고 저자세로 마케팅을 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 효과도 무시 못 함.)

뭐 기록에 좀 과장· 오류가 있더라도 김 구 역시 큰 그림을 봤을 때 애국자인 건 변함없고 안 철수도 충분히 훌륭하지만.. 우리는 10여 년 전에 황 우석 사태도 겪었고 맹목적인 애국심 마케팅의 폐해와 황당무계한 주작도 경험한 적이 있다. 그러니 어떤 인물의 과거 행적에 대해서는 좀 더 비판적인 안목에서 검증할 필요가 있다.

각 분야의 전문직들을 깊이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다 경험해 봤고, 돈은 이제 평생 써도 다 못 쓸 정도로 벌었고 자식도 하나밖에 없으니.. 이제 안 철수 같은 사람이 다음으로 노릴 만한 건 정말 권력밖에 없긴 했겠다.
과거에 현대 왕회장 역시 1992년도 대선에 출마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바다 건너 트럼프도 그냥 편안한 노후만 보내면 됐을 것을, 자기 사택보다도 더 누추한 장소일 백악관에 그것도 그 나이에 괜히 들어간 게 아닐 것이다. 사실, 경제인 기업가가 돈만 댓다리 많고 권력이 없으면 솔직히 정치 자금 삥이나 뜯기는 셔틀로 전락하기도 쉬울 테니.. (정경유착을 욕만 할 처지가 아님)

대선 후보로서 안 철수는 이념은 대놓고 불순하지는 않은 듯했지만 정치라는 게 본인 당사자의 역량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오죽했으면 현 대통령 당선자와 안 씨의 이념 차이는 현대차와 기아차의 차이나 마찬가지라는 말도 있을 정도였다.
뭐 19대 대선은 이미 지난 일이 됐다만, 저분 설마 다음에 또 출마하려나 모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7/08/17 08:34 2017/08/17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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