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조(바탕체) 이야기

바탕체, 명조라고 불리는 한글 서체는 우리가 책의 본문에서 수십 년 동안 무수히 접해 온 친숙한 글꼴이다. 요즘이야 맑은 고딕, 함초롬바탕, 나눔명조 같은 여러 본문용 글꼴 때문에 존재감이 작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화면보다 더 보수적인 출판물에서는 어떤 형태로든(신명, 윤디자인, 산돌 등) 오리지널 명조가 여전히 본좌이다.

명조도 다 같은 명조가 아니다. 모니터나 프린터의 해상도가 낮고 컴퓨터의 메모리가 부족하던 시절에는 획 모서리의 세리프만 어설프게 흉내 내고 전반적인 자형은 굉장히 투박하고 엉성한 야메 명조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런 한계가 없어지면서 디자이너의 아날로그 원도와 별 차이 없는 미려한 명조체를 볼 수 있게 됐다.

1. 한글

PC에서는 아래아한글 2.x(전문용)와 Windows 95를 통해 한양 시스템 신명조가 가장 널리 퍼졌었다.
1993년에는 아래아한글 2.1이 출시되었는데, 이때는 한양 시스템뿐만 아니라 휴먼 컴퓨터에서 개발한 서체들이 대거 도입되었다. 그 중 '휴먼옛체'는 워낙 개성 넘치고 큰 인기를 끌었던 서체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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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샘체, 팸체, 안상수체처럼 한글에 가변폭 글꼴이 등장한 것도 굉장히 파격적이었다. 1990년대에는 안상수체 같은 글꼴이 꽤 참신한 미래지향(?) 서체라고 각광받아서 간판이나 책 제목에 종종 쓰이곤 했다.
이런 것들을 PC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최초로 선보였던 아래아한글은 실로 대단한 일을 해냈었다. 비록 그 시절 물가로 거의 30만 원에 육박했던 전문용 에디션 한정이었지만 말이다.

이런 서체들에 비해, '휴먼명조, 휴먼고딕'은 아무래도 기존의 신명조, 중고딕(한양 서체)과 외관상 거의 분간이 안 되니 존재감이 미미했다. 그래도 한양 서체와 휴먼 서체는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으며, 미세하게 차이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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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따지자면 휴먼명조가 한양 신명조보다 '약간 덜' 미려하고 완성도가 낮았다. 하지만 어차피 깨알같은 본문용 글자의 크기와 해상도에서 그 차이는 일반인에게 거의 분간되지 않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러면서 휴먼명조는 그 대신 크기가 더 작고 래스터라이즈 부담이 더 적으며 저해상도 출력에도 더 최적화돼 있었다. 그래서 위의 그림에서도 작은 크기에서 휴먼명조의 '명, 조, 맥' 같은 글자가 한양보다 미세하게나마 더 깔끔하고 획이 균일하다.

애초에 한양 신명조는 한 글자씩 일일이 그린 완성형으로 2350자밖에 표현할 수 없는 반면, 휴먼명조는 조합형 구조여서 한글 11172자 전체를 표현할 수 있었다. 똠 햏 뷁 같은 글자를 표현하려면 싫어도 휴먼명조를 써야 했다.
이 정도면 그 당시에 휴먼명조의 존재가 충분히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휴먼명조만 해도 Windows 3.1 시절의 투박한 바탕체(큐닉스..)에 비하면 훨씬 더 미려하고 외형과 성능을 모두 잡았었다.

그런데 1994년의 딱 아래아한글 2.5 (+ 어쩌면 그 다음 3.0까지도)에서는 어찌된 영문인지 한양 신명조가 아예 빠져 버리고, '신명조'를 고르건 '휴먼명조'를 고르건 무조건 '휴먼명조'가 선택되곤 했다. 즉, 목록상으로는 두 글꼴이 모두 있지만 둘의 차이는 나지 않는 것이다.

둘은 외형도 비슷하고 모든 글자들의 폭도 어차피 동일하니 일반인들이야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모를 것이다. 그 시절에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한양 신명조와 휴먼명조는 다시 구분이 생겨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단지, 한양 신명조가 잠시 누락된 적이 있었던 것은 본인의 기억에 확실하게 남아 있는 역사 팩트이다....라고 썼는데,

오, 인터넷을 뒤져 보니 물증이 있다.
아래아한글 2.5의 예제 문서를 열어 놓은 스크린샷이 굴러다니는데, 저 때는 아예 대놓고 '휴먼명조 = 신명조'라고 쓰여 있다! 내 기억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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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문

신명조에는 한글뿐만 아니라 그와 어울리는 영문 서체도 있다. 아래아한글에서 신명조, 그리고 Windows가 깔린 컴퓨터에서 '바탕'만 고르면 볼 수 있는 그 익숙한 서체 말이다.

그런데 얘는 미국 같은 영어권 국가에서 즐겨 쓰이는 서체는 아닌 것 같다. 걔네들은 책 본문은 Times Roman이 압도적인 본좌이며, 거기에다 Bookman, Century, Palantino (Book antiqua와 아주 비슷)가 가끔 꼽사리로 끼는 정도다. 그럼 '영문 신명조'는 원조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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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실물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과거에 미국에서 여권을 발급받으면 이렇게.. “미합중국 여권만 있으면 (지구상에 못 가는 곳이 없고) 세계가 몽땅 님하의 것입니다!”라는 캐간지 안내문이 딸려 나왔다.
그런데 저렇게 천조국의 위상을 자랑하는 문구의 서체가 통상적인 유럽풍이 전혀 아니고 완전 빼박 한국 신명조 바탕인 적이 있다는 게 난 너무 신기했다. 바로 저거 말이다. 기울여 쓴 게 이탤릭도 아니고 오블리크다.. 설마 진짜 '바탕'을 써서 인쇄한 걸까? (지금은 딴 서체로 바뀐 듯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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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 1990년대 초반까지 옛날 미국 컴퓨터 잡지 같은 출판물을 보면 이런 신명조 풍의 서체를 생각보다 자주 볼 수 있었다.
본문 기사보다는 저렇게 광고 문구에 더 많았던 것 같다. 위의 그림은 잡지 제목은 기억 안 나고 워드퍼펙트가 Windows용으로 처음 출시됐다는 광고이니 시기가 대충 짐작이 될 것이다.

영미권에도 저런 서체가 분명 있긴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저게 한글 신명조와 pair가 되기도 했고 말이다.
저건 누가 만든 무슨 이름의 서체일까? 본인은 아직 정보가 없고 궁금하다.
그 흔해빠진 명조 하나 갖고도 얘기할 게 생각보다 많이 있었던 셈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0/05/23 08:33 2020/05/23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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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조(바탕)체의 역사

오늘날 인쇄물에서 본문용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인 지위와 인지도를 자랑하고 있는 한글 서체는 명조, 혹은 바탕체이다.

너무 흔하게 보는 서체여서 잘 모를 뿐이지, 명조는 상당히 미려하고 잘 만든 서체이다.
붓글씨 계열과는 미묘하게 다르고 그렇다고 펜글씨 계열과도 완전히 같지는 않은 그 획과 삐침들은, 명조와 같은 계열로 곁들여져 쓰이는 알파벳이나 한자 서체와는 성격이 다르다. 예를 들어, 한자의 삐침을 그대로 적용한 한글 서체는 '순명조'라고 따로 있지, 일반적인 명조가 아니다. 한글의 명조와 조형이 가장 비슷한 계열을 찾자면 차라리 일본 문자의 명조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명조체는 생각보다 역사가 굉장히 짧다. 역사가 100년도 채 안 됐다.
영문의 Times체가 1931년에 나와서 Garamond나 Bodoni에 비해서 굉장히 젊은 서체 소리를 듣는다만, 명조는 더 어리다.

한글 서체는 20세기 이전에는 전부 흔히 말하는 옛체든 궁서체든 목판체든 어쨌든 붓글씨 형태가 전부였다.
그러다가 일제 강점기 때 흔히 말하는 성경체(산돌성경체..!) 같은 궁서와 명조 사이의 짬뽕 과도기를 거친 후,
1939년에 소년조선일보를 통해 발표된 '박경서체'에서 그나마 명조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프로토타입이 나왔다.
이제야 붓글씨 서체가 아닌 활판 인쇄용 한글 서체가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1958년에 국정 교과서 활자체로 지정된 '최정순체'가 오늘날의 모든 명조 파생형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명조다운 명조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한글 서체 디자인의 아버지인 최 정호가 원도를 그린 '동아출판사체'도 비슷한 시기에 나와서 해당 출판사에서 나온 책과 사전의 본문에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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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명조체의 역사를 한눈에 잘 정리해 놓은 곳

아하! 나 이 서체 기억한다. 'SM세명조'는 이 '동아출판사체'를 얇게만 고친 버전과 거의 일치한다. 어쩐지 비슷하더라. 옛날에 동아 출판사의 책들만 본문 서체의 모양이 약간 다른 게 이유가 있었다.
훗날 1991년에는 명조 계열 한글 표준 서체라는 타이틀로 '문화바탕체'가 나온다. 문화바탕은 동아출판사체 이래로 ㅈㅊ의 세로 꼭지가 오른쪽 끝이 아니라 중앙에서 시작하는 명조 계열을 계승했다.

1990년대엔 PC에서는 아래아한글이 보급한 한양 시스템 명조가 히트를 쳤으나, 출판계의 대세는 최 정호의 원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SM계열 명조였다.
그러다 21세기에 들어서야 더 동글동글한 명조인 윤명조 시리즈가 유행을 주도하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중. 그 전에는 산돌이나 윤 디자인 서체들은 사실상 매킨토시에서나 볼 수 있었다. PC에서도 그런 서체들을 쓸 수 있게 된 건 빨리 잡아도 90년대 후반부터이다.

2000년대 이후부터야 최 정순의 명조 원도에서 더욱 변화를 준 나눔명조, 함초롬바탕 등 여러 본문용 서체들이 계속해서 발표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우리나라에 비해, 북한은 서체 하나만 봐도 정말 시간이 수십 년 전에서 정지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북한 서체는 여전히 남한으로 치면 1970년대 같고, 틀에 박힌 동일한 조합 로직에다 글자 꼴만 양산형으로 바꿔서 찍어 내는 것 같다. =_=;;
글쎄, 이런 것도 우열이 아니라 문화적 상대성이라고 존중해 줘야 하는 건가..?

북한에서 쓰이는 본문용 서체는 청봉이나, 역시 우리나라 서체와는 형태가 살짝 다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순명조에 해당하는 서체로 북한에는 '광명'이 있다.
남과 북은 글꼴도 서로 이질적으로 바뀌고 있는 셈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1/17 08:33 2013/01/1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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