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인쇄물에서 본문용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인 지위와 인지도를 자랑하고 있는 한글 서체는 명조, 혹은 바탕체이다.
너무 흔하게 보는 서체여서 잘 모를 뿐이지, 명조는 상당히 미려하고 잘 만든 서체이다.
붓글씨 계열과는 미묘하게 다르고 그렇다고 펜글씨 계열과도 완전히 같지는 않은 그 획과 삐침들은, 명조와 같은 계열로 곁들여져 쓰이는 알파벳이나 한자 서체와는 성격이 다르다. 예를 들어, 한자의 삐침을 그대로 적용한 한글 서체는 '순명조'라고 따로 있지, 일반적인 명조가 아니다. 한글의 명조와 조형이 가장 비슷한 계열을 찾자면 차라리 일본 문자의 명조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명조체는 생각보다 역사가 굉장히 짧다. 역사가 100년도 채 안 됐다.
영문의 Times체가 1931년에 나와서 Garamond나 Bodoni에 비해서 굉장히 젊은 서체 소리를 듣는다만, 명조는 더 어리다.
한글 서체는 20세기 이전에는 전부 흔히 말하는 옛체든 궁서체든 목판체든 어쨌든 붓글씨 형태가 전부였다.
그러다가 일제 강점기 때 흔히 말하는 성경체(산돌성경체..!) 같은 궁서와 명조 사이의 짬뽕 과도기를 거친 후,
1939년에 소년조선일보를 통해 발표된 '박경서체'에서 그나마 명조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프로토타입이 나왔다.
이제야 붓글씨 서체가 아닌 활판 인쇄용 한글 서체가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1958년에 국정 교과서 활자체로 지정된 '최정순체'가 오늘날의 모든 명조 파생형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명조다운 명조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한글 서체 디자인의 아버지인 최 정호가 원도를 그린 '동아출판사체'도 비슷한 시기에 나와서 해당 출판사에서 나온 책과 사전의 본문에 쓰였다.
아하! 나 이 서체 기억한다. 'SM세명조'는 이 '동아출판사체'를 얇게만 고친 버전과 거의 일치한다. 어쩐지 비슷하더라. 옛날에 동아 출판사의 책들만 본문 서체의 모양이 약간 다른 게 이유가 있었다.
훗날 1991년에는 명조 계열 한글 표준 서체라는 타이틀로 '문화바탕체'가 나온다. 문화바탕은 동아출판사체 이래로 ㅈㅊ의 세로 꼭지가 오른쪽 끝이 아니라 중앙에서 시작하는 명조 계열을 계승했다.
1990년대엔 PC에서는 아래아한글이 보급한 한양 시스템 명조가 히트를 쳤으나, 출판계의 대세는 최 정호의 원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SM계열 명조였다.
그러다 21세기에 들어서야 더 동글동글한 명조인 윤명조 시리즈가 유행을 주도하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중. 그 전에는 산돌이나 윤 디자인 서체들은 사실상 매킨토시에서나 볼 수 있었다. PC에서도 그런 서체들을 쓸 수 있게 된 건 빨리 잡아도 90년대 후반부터이다.
2000년대 이후부터야 최 정순의 명조 원도에서 더욱 변화를 준 나눔명조, 함초롬바탕 등 여러 본문용 서체들이 계속해서 발표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우리나라에 비해, 북한은 서체 하나만 봐도 정말 시간이 수십 년 전에서 정지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북한 서체는 여전히 남한으로 치면 1970년대 같고, 틀에 박힌 동일한 조합 로직에다 글자 꼴만 양산형으로 바꿔서 찍어 내는 것 같다. =_=;;
글쎄, 이런 것도 우열이 아니라 문화적 상대성이라고 존중해 줘야 하는 건가..?
북한에서 쓰이는 본문용 서체는 청봉이나, 역시 우리나라 서체와는 형태가 살짝 다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순명조에 해당하는 서체로 북한에는 '광명'이 있다.
남과 북은 글꼴도 서로 이질적으로 바뀌고 있는 셈이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