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의 주요 사건들과 철도

1.
경부선이 개통하던 당시에는 지금의 서울 역이 있는 곳보다 더 북쪽에, 서울 중심과 더 가까우며 지금으로 치면 지하철 5호선 서대문 역과 가까운 곳에 경부선 서대문 역이 있었으며 이것이 그때의 진짜 서울 역이었다. 지금의 서울 역은 남대문 역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유 관순 열사는 잘 알다시피 이화 학당을 다녔는데, 이화 학당은 지금의 이화여고가 있는 곳에 있었다.
이화여고는 서대문 역과 가깝다. 따라서 이화 학당 역시 그 시절엔 경부선 서울 역의 역세권에 있었으며, 유 관순은 경부선 열차를 타고 서울과 고향 천안을 수월하게 오갈 수 있었다.

서대문 역은 1919년 3월, 3·1 운동이 벌어지던 와중에 폐역되었으며, 남대문 역 이북으로는 서대문이 아닌 신촌으로 꺾는 드리프트 선로가 1920년 말에 뒤늦게 건설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다 아는 구 서울 역 건물은 1925년 9월에 완공되었다.

2.
농촌 운동가 최 용신 선생은 샘골 학원 주변으로 수인선 철도가 생기는 걸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니 참 애석한 경우가 아닐 수 없다. (1935년 사망, 수인선은 1937년 개통. 약 2년 반 차이) 그래도 자기 지역으로 철도가 건설될 예정이라는 소식 정도는 듣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3.
1929년의 광주 항일 학생 운동의 배경에도 철도가 있다. 나주에서 광주 사이를 열차로 통학하던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에 싸움이 붙은 것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이유는 물론 일본인 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했기 때문임. 이게 결국은 수십 명의 학생들이 엉겨붙은 패싸움으로 커져 버렸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호남선 나주 역(광주보다 더 남쪽)과 광주 역을 오가는 열차란 상상하기 어렵다. 서울 방면에서 광주로 가는 열차는 있어도, 목포 방면에서 광주로 가는 열차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호남선은 몰라도 경전선 쪽은 지금까지 변화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그때의 광주 역은 지금의 광주 역과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리고 광주 동쪽으로는 담양과 남원으로 가는 '전남선'이라는 철도가 부설되어 있었다. 이것도 참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전남선은 1944년에 일제의 전쟁 물자 공출로 인해 선로가 철거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하에서 광주 역은 다른 곳으로 이설되고 새로 건설된 경전선이 광주를 지나게 되었으나, 이마저도 선로가 남쪽 외곽으로 이설되면서 광주 역은 지금과 같은 낙동강 오리알이 된 것이다.

뭐 지금의 광주송정 역인 구 송정리 역이 호남선과 전남/경전선과의 환승역이었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며, 1929년에 다녔던 열차는 어떤 형태로든 호남선 남부와 전남/경전선을 직결하는 통근열차요, 지금으로 치면 광역전철뻘 되는 열차였던 것 같다.

그리고 여담으로, 대도시 중심부에 있지만 철도 선형상으로는 왠지 고립된 고자처럼 되었다는 점에서는 신촌과 광주 역이 서로 좀 비슷한 구석이 있다.

4.
끝으로, 조선어 학회 사건이 있다.
1942년 여름, 영생 여자 고등보통학교의 학생들이 방학을 맞이하여 집에 가러 열차를 탔다. 한 열차를 같이 탄 여학생들이 낄낄대며 한국어로 수다를 떨었는데, 하필 옆에 조선인 사복 형사가 타고 있었다.
때는 이미 창씨 개명에 조선어 사용 금지 등의 민족 말살 정책이 시행 중이던지라.. 일제의 앞잡이이던 그 형사는 “이것들이 황국 신민이면 신민답게 일본어를 쓸 것이지 왜 조선어를 쓰고 난리냐?”라고 꾸짖었다. 그 학생들은 우리끼리 얘기를 나누는 것일 뿐인데 웬 참견이냐는 식으로 대들었다. (상대방이 일제 끄나풀인지 처음엔 몰랐음)

이에 형사는 빡쳐서 다음 역에서 여학생들을 강제로 끌어내려 심문을 했고, 나중에는 일행 중에 제일 강하게 반항하던 박 영희라는 학생의 집에까지 쳐들어가서 옛 일기장을 압수했다. 그런데 거기에 “학교에서 국어(=일본어)를 썼다가 선생님에게서 꾸지람을 들었다”란 문장이 있는 걸 보고는...

국어를 썼으면 칭찬을 받아야지 왜 꾸지람이냐? 그 선생 누구야? 이거 악질 반동 새끼구만?” 취조를 한 끝에.. 옛 교사였던 한글학자 석인 정 태진 선생의 정체가 드러났다.
일제 고등 경찰은 이 사람이 소속되었던 조선어 학회까지 과격 무장 독립 운동 조직으로 날조하고 일망타진해서 성과 한 건 올리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것이 바로 조선어 학회 사건이 벌어진 계기이다. 더 자세한 내력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을 참고하시라.

난 옛날에는 한글, 국어 쪽으로만 관심이 있었는데 지금 이 사건을 다시 읽어 보니, 그 당시 영생여고보 학생들이 이용한 철도 노선은 함경선이었고 지금의 북한 치하에서는 평라선 구간이 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깊이 와 닿는다. 아아~ 지금도 국토가 분단되지만 않았다면..!
철도교에 입문하고 나면, 일제 강점기 때 한반도에서 있었던 굵직한 사건들을 철도를 중심으로 다시 볼 줄 아는 안목이 생긴다.

안 중근 의사가 중국이 아닌 국내의 철도역 승강장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라도 했다면 거기는 그야말로 철덕들의 성지가 되지 않았겠는가?
6·25 때도 군인· 경찰 말고 민간인 중에 가장 많이 순직한 사람들이 바로 철도인이다. 철도 사랑과 나라 사랑이 별개가 아닌 것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Posted by 사무엘

2014/10/12 08:32 2014/10/12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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