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말라기서는 구약 성경의 맨 마지막 책이다. '말라기'는 이 책을 기록한 대언자의 이름이다.
구약의 예언/선지서들은 분위가 다 비슷하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신랄하게 깐다. 좀 우파스러운 원론적이고 영적인 죄뿐만이 아니라, 당대 상류층들의 부정부패를 까발리면서 민생 안정과 사회 개혁을 촉구하는 좌파스러운 책망도 골고루 균형있게 나온다.
그런데 결론은 기승전철..은 아니고 기승전'회'로 동일하다. 저런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타임라인에서 궁극적으로 최후의 승자는 이스라엘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회복되며 옳다구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힌 놈들은 다 작살이 나고 씨도 안 남는다. 이러니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를 안 믿음에도 불구하고 반유대주의와 반기독교 성향은 바늘과 실처럼 따라다니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천주교 교황이 전세계를 돌면서 예수님 재림과 이스라엘 회복을 말한 적이 있던가? (말한다면 그건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며, 그 종교는 이미 천주교가 아닐 게다)
그래도 성경 말씀은 기록된 대로 이루어질 것이고 구약 예언서들이 일관되게 말하는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은 임할 것이다. 단지 구약 대언자들은 산봉우리 너머의 재림만을 보았을 뿐, 예언의 골짜기에 속하는 신약 교회에 대한 계시가 없었으며 초림과 재림의 구분에 대한 개념도 아직 몰랐다는 차이가 존재한다. 물론 실질적으로 초림과 재림 구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수님 거부 이후부터 생겼겠지만 말이다.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말라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땅으로 귀환까지 하고 나서 거의 100여 년 뒤에 구약 중에서 혼자만 굉장히 늦게 기록됐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 포로 귀환 후, 우상 숭배라는 죄 하나는 완전히 떨쳐 냈다. 그러나 노골적으로 바알 숭배만 안 할 뿐이지 영적 상태는 여전히 정상이 아니었다.
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막장급의 매너리즘에 빠졌다. 사람들은 자기가 못 먹는 거니까 흠 왕창 많고 병들고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없는 가축을 헌물로 바쳤다. 출애굽기 이후로 모세오경에 without blemish이라는 단서가 얼마나 지겹도록 많이 나오는데.. 저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십일조 헌금을 안 바치니까 레위 지파 성직자들은 먹고 살 수가 없어서 생업을 따로 구해서 투잡을 뛰어야 할 정도였다. 요즘으로 치면 밤에 대리운전?? =_=;;;
말라기서는 전반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두려움이 완전히 상실되고 “뭐 대충 이렇게 해도 괜찮겠지”, “어차피 다 소용없어”, “우린 아마 안 될 거야” 등, 하나님에 대한 온갖 잘못된 생각들에 대해 하나님이 친히 반박을 하고 책망하는 논리로 진행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성경에서 사람들의 잘못된 신앙관을 먼저 제시하고서는 그걸 반박하는 형태로 진행되는 텍스트가 신구약을 통틀어 여럿 있다. 로마서의 “그럼 ...하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God forbid)”는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예이고. 개인적으로는 성경을 통틀어 이런 예들만 한데 모아도 주일 예배 설교 한 편 분량은 충분히 나올 것 같다.
말라기도 기본적으로 그런 논조이니 유쾌한 분위기는 절대 아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께서 자꾸 동물 헌물을 그딴 식으로 바칠 거면, 그 동물들의 똥을 꼴도 보기 싫은 성직자 네놈들 얼굴에다 덕지덕지 쳐발라 버리겠다는 노골적인 책망까지 하셨을 정도이다. (말 2:3)
헌물 말고도 이 책은 '의의 태양', 침례인 요한 예언도 나오고 십일조에 결혼 문제 등 생각보다 다양한 주제를 이것저것 부랴부랴 다룬다.
그런데 지금 내게 굉장히 절실히 와 닿는 구절은 말 3:14-17이다.
“교회 다니고 하나님 섬기는 거 다 무가치한 헛일일 뿐이다. 어차피 세상에는 자기를 내세우고 적당히 줄 잘 서고 죄도 잘 짓는 사람들이 사회성이 뛰어나고 잘 되고 성공한다..”는 식의 생각.. 역시 일반적인 사람들의 심리는 24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허나 16절을 보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자주 성경을 강론하고 서로 믿음을 북돋우는 교제를 나누면..
그 사건은 하나님이 친히 귀를 기울여 듣고, 정말 기쁘고 기특하다면서 그걸 책으로 기록으로 남기신댄다.
그리고 다음 17절에 따르면.. 그런 사람들은 보석만큼이나, 친아들만큼이나 하나님께서 무진장 귀중히 여겨고 보상할 것이라는 약속이 나온다.
성경에서 역사· 교리적으로 유대인 얘기를 하고 있는 곳에다가 교회가 유대인 사칭을 하는 건 병크이지만.. 저것만큼은 정말로 오늘날 교회에까지 그대로 적용되는 약속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로 서로 위로하라.” (살전 4:18) 휴거와 재림만큼이나 위로의 명분이 성립하는 게 틀림없다.
스바냐서에서 “하나님께서 너로 인해 기뻐하고 노래까지 부르실 것이다”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만큼이나 엄청난 구절이 의외로 소선지서 한구석에서 발견되곤 한다.
이렇게 본인은 길고 길던 구약 통독을 드디어 끝냈다.
2.
난 예나 지금이나 아예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것도 안 믿고 무신론자 회의론자로만 산다면 모를까,
내세와 영원을 논하는 '종교'관을 판단하는데 겨우 그 종교에 속한 사람의 외적 행실, 또는 대외 이미지, 유명인사의 의견을 높은 가중치에 두는 건 아주 굉장히 대단히 매우 어리석은 발상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 걸 전혀 볼 필요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며 물론 신자들은 좋은 행실로 좋은 간증을 남기고 가능한 한 세상과 화평하게 지내야 한다. 병싯같은 짓으로 불신자에게 쓸데없이 실족거리를 줘서는 안 된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어차피 구도자의 입장에서도 그런 외형적인 것들은 주된 판단 근거가 돼서는 안 된다.
본인은 몇 차례 글을 썼듯이, 무슨 하나님 믿고 예수는 믿지만 교회는 안 믿는다는 식의 생각을 굉장히 싫어한다.
예수님이 무슨 좋은 덕담이나 남긴 4대 성인 도인 슈퍼스타이고 자신의 상식과 교양 한 줄 정도나 기여하는 아이템인 줄로 아는가 본데, 그 예수가 당신이 싫어하는 교회의 창립자이고 교회의 머리이다. 뭘 좀 알고서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불신자들하고 어울려서 대형 교회 욕이나 하고 다니는 헛똑똑이 겉멋 든 좌독 성향도 완전 혐오.
경제 쪽으로 대기업에 대한 생각하고 완전히 똑같은 논리이다.
대기업을 엿먹이고 싶고 중소기업을 살리고 싶으면, 나 자신부터 중소기업 제품을 애용하면 되듯이
한국 교회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대형 교회가 한국 교계의 레알 비성경적인 악의 축이라고 생각한다면.. 나 자신부터 아주 보수· 근본주의적이고 신앙의 양심을 충족하는 작은 교회를 찾아서 다니면 된다.
대형 교회가 당신의 개인의 양심의 자유와 신체의 자유를 빼앗지 않았고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피해의식 갖고 미워하지는 않아도 된다. 그리고 작은 교회에는 사람간의 트러블, 부조리가 어디 없을 줄 아는가? 대안 없는 비판, 일관성 없는 판단은 이제 좀 그칠지어다.
세상의 모든 대중교통들은 운송 약관을 보면 "만취자, 중환자 또는 신변이 불결한 자에 대해서는 당사가 승차를 거부할 수 있음"이 명시돼 있다. 무조건이든 단독 승차에 한해서든.
그러나 다른 곳은 몰라도 목욕탕이.. 만취자는 몰라도 신변이 불결한 자를 입장 거부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이겠는가?
병원이.. 중환자를 거절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교회가 바로 그런 곳이다.
교회 성도들보다 자신이 너무 똑똑하고 의롭고 질이 높아서 차마 예수는 믿어도 교회는 못 믿겠다(다니겠다) 이러는 분들.. 정말 구원이라도 받은 사람이라면 그 불평을 나중에 예수님 앞에서 자신 있게 털어놓고 예수님을 논쟁에서 이길 수 있기를 난 바라마지 않겠다.
나는 행실이 너무 막장 저질이었는데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하고 일꾼으로 써 주신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 고맙고, 가끔 교회에서 이상한 사람과 싸우더라도 교회의 정체성과 본분을 잊지는 않을 것이다. 100% 완벽한 성도로만 구성된 교회에 내가 등록하는 순간부터 그 교회는 완전성이 깨진다는 생각을 하며 다닐 것이다.
* 나는 늘 공언한다. 누군가가.. 있지도 않은 신을 숭배하고 교회 다니느라 인생을 낭비하는 나같은 중생을 너무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서.. 무신론을 전하기 위해 나를 위해서 목숨까지 버렸다가 나중에 부활했다면 나는 그 정도 표적에는 기꺼이 반응하여 지금의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무신론자가 되겠다. 이 정도면 내가 왜 교회를 다니는지 논리가 설명이 되었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