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가지 글꼴 생각

1.
요즘 대세가 복고풍 타이포그래피인지? 옛날목욕탕체, 배달한나체가 정말 인기 많다. 영화 국제시장도 그 성격상 복고풍 서체로 포스터가 만들어졌다.
옛날에는 복고풍 서체라 하면 정말로 궁서체와 휴먼옛체 정도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데 이런 분야에도 다양한 서체가 존재한다는 건 그만큼 우리나라가 문화적으로 풍족해졌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라틴 알파벳과는 달리, 한글 서체는 주 사용 인구가 1억도 채 안 되는 내수 시장에서밖에 수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한글에 대해서 옛날 스타일 서체를 꾸준히 고집하고 있는 곳이 최소한 두 곳 떠오르는데
하나는 철없는 전직 부사장이 저지른 땅콩 회항 사건 때문에 이미지를 제대로 구겼던 대한항공이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육사 부대 마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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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동체의 윗부분에 큼직하게 KOREAN AIR라고 써 놓은 거 말고, 앞부분 아래에 자그맣게 '대한항공'이라고 쓴 부분이 내게는 오래 전부터 인상깊게 와 닿았다. 저 한글 로고그래피는 대한항공이 지금과 같은 치약 하늘색 도색과 영문 CI를 도입하기 전부터 계속 써 오던 물건이다.

육사 부대 마크는 무려 1947년부터 써 오던 것이니 보수적인 군대에서 앞으로도 당연히 계속 쓸 테고.
대한항공이든 육사든, 한번 정한 서체는 자기 정체성을 걸고 안 바꾸고 계속 썼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서울 지하철 초롱테크 지하철체.. 시각적으로 아무 문제 없는데 무단으로 뜯어고치고 바꾸는 거 마음에 안 든다.
그나저나 옛날 철도 간이역 역명판 서체들도 디지털로 복원하고 싶다. 자료를 많이 모아야 할 텐데.

2.
요건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본 광고판이다.
이 정도면 복고풍 서체가 아니라 혹시 북한 서체이지 않나 싶어서 원전을 찾아보니..
ㅇ의 모양, 그리고 '교'의 모양이 북한 서체를 아슬아슬하게 비껴 가긴 한다.
하지만 첫인상이 여전히 서로 굉장히 닮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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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베트남은 언어는 중국어와 비슷하게 성조도 있고 1음절 1형태소 1글자 고립어 형태인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자는 프랑스 선교사의 주도로 개혁을 해서 한자를 완전히 없애 버리고 라틴 알파벳을 쓴다. 그래서 분위기가 이색적이었다.
단, 성조를 표기하려고 알파벳의 위· 아래에 이상한 부호들이 많이 달려 있다.

그리고 베트남이 자체적으로 서체를 만들 만한 나라는 아니니, 간판들을 보면 다들 MS Word 95나 아래아한글 96처럼 10년, 20여 년 전부터 기본으로 내장돼 있던 듯한 1990년대 기성 서체들 위주이다.
Cooper Black을 정말 많이 봤고, 그 외에 Copperplate Gothic, Impact, Matura MT Script도 있었다.
그 글꼴이 처음 만들어지던 시절에는 굉장히 참신한 디자인이긴 했지만, 이것도 익숙해지니까 식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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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고, 이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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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자 A의 외곽 획이 활처럼 둥글게 휜 윗줄의 서체도 많이 쓰이는 편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좀 낯설다. 그 반면 아랫줄 서체는 우리에게도 비교적 친숙할 것이다.
바로 한미디어에서 개발하고 MBC가 2000년대 초까지 자사 CI에다 썼던 문화방송체이기 때문이다.
저 사람들이 설마 한국산 서체를 썼을 리는 없으니 저것도 영문 원도가 따로 있는가 보다. 알고 보니 원조는 Banco라는 별도의 서체라고 한다.

4.
본인은 직접 써 본 경험은 전무하지만, 클래식 맥 OS에 대해 어느 정도 동경을 하고 있다. 특히 쟤네들의 기본 서체가 참 개성 있다고 생각해 왔다. 아래 그림에서 File, Edit 같은 메뉴, 그리고 System Tools/Folder를 표현하는 서체 말이다. 맥 OS의 Windows System 같은 서체나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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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맥 OS의 서체 이름은 Chicago이다. Windows 95의 코드명인 그 시카고. 나중에는 비트맵뿐만이 아니라 윤곽선 글꼴로도 만들어졌다. 특히 V와 w 같은 글자의 모양을 보노라면 비트맵과 윤곽선 글꼴이 싱크가 잘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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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타이포그래피와 디자인을 좋아하고 컴퓨터를 하드/소프트 독점 일체형으로 만들었던 애플에서는 OS가 이름이 없이 그냥 System이고 애플 전속 서체는 이름이 있었던 반면, 처음부터 소프트웨어에 초점을 뒀던 마소의 Windows는 프로그램이 이름이 있고 서체는 딱히 이름이 없이 그냥 System이다. 아주 재미있는 차이가 아닐 수 없다.

Windows쪽 얘기를 좀 하자면, 1과 2 시절에는 시스템 기본 글꼴이 고정폭이었다. 그러다가 3.0때부터 오늘날과 같은 가변폭 System이 도입되고 예전의 글꼴은 그 유명한 Fixedsys라는 이름으로 개명당했다. 모노크롬 시절에는 byte align이 힘들어서 성능 오버헤드가 더 크기도 했을 텐데 맥은 처음부터 과감하게 1.0때부터 가변폭 글꼴을 채용했다.

Fixedsys는 Windows 1.0 시절에 비트스트림이라는 유명한 서체 회사에 외주를 줘서 개발한 것인 반면, 오늘날의 가변폭 시스템은 마소에서 자기네 정체성을 담아 자체 개발한 글꼴이다. 그러니 System을 그 모양 그대로 윤곽선화해서 이름을 붙일 법도 했을 텐데 마치 현대 자동차에서 포니, 엑셀, 스텔라 같은 이름에 애착이 없는 것만큼이나 마소에서는 그 옛날 글꼴에는 더 애착을 갖고 있지 않은 듯하다.

이미 구닥다리의 상징에, 시스템 리소스가 다 떨어졌을 때에나 나오는 fallback 이미지가 너무 굳어져서인 듯. 게다가 NT 계열 부터는 리소스 제약도 없어져서 더 볼 일이 없어졌다. -_-;; 동아시아 Windows에서 이상하게 MS Sans Serif 대신 System을 쓰던 구닥다리 Visual C++ 6.0 IDE가 마지막이다.

System, Fixedsys 같은 건 트루타입 글꼴이 개발되기 전부터 도입됐기 때문에 당연히 TTF 형태가 아니다. 그래도 운영체제에 완전히 하드코딩으로 박힌 물건은 아니고, 오늘날도 Windows\Fonts 디렉터리에서 vgasys.fon, vgafix.fon이라고 실물 파일을 확인할 수 있다. 1980년대까지는 '장치 독립적인 글꼴'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신기하게도 글꼴 이름이 저런 형태이다. 맥은 그 시절에 어떠했나 모르겠다.

뭐 그런 것과는 별개로, 본인은 한글 전산화의 역사와 추억이 깃든 과거의 16*16 비트맵 조합형 글꼴들도 윤곽선 글꼴로 리메이크가 많이 됐으면 좋겠다. 이야기체나 둥근모 같은 것들. 가장자리를 동그랗게 혹은 적절한 곡선으로 복원해 주면 이런 것이야말로 진정한 복고풍 서체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지 않겠나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5/05/10 08:27 2015/05/10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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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 용태 2015/05/20 21:46 # M/D Reply Permalink

    16*16 글꼴의 리메이크 버전 저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ㅋㅋ 그러고보니 예전에 자주 볼 수 있었던 "Seoul"체 (한글매킨토시 OS 번들글꼴) 이 많이 보이지 않네요.

    1. 사무엘 2015/05/21 01:50 # M/D Permalink

      지금은 '서울'이라는 이름이 붙은 다른 서체들에 가려서 제대로 검색이 안 되지만, 클래식 맥 OS의 그 투박한 한글 글꼴을 말하는 거라면 저도 뭘 말씀하는지 알겠습니다.
      요즘은 전광판도 다 고해상도 LCD가 등장하면서 16*16 글꼴은 정말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지요. 얼마 못 가 <날개셋> 편집기 같은 왜곬스러운 프로그램에서나 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얘도 언젠가는 복고풍 서체로 복원되는 날이 분명 올 거라 생각됩니다. ^^

  2. pastopia 2016/03/02 20:24 # M/D Reply Permalink

    안녕하세요. Copperplate Gothic 서체의 상업적 이용이 가능한지 찾고 있습니다.
    혹시 알고계시면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1. 사무엘 2016/03/02 23:00 # M/D Permalink

      그 글꼴은 원도가 만들어진 지 100년도 더 됐고, Office 같은 프로그램에서 이미 번들로 제공하거나 인터넷에 굴러다니고 있지 않나요? 저도 정확한 정보는 알지 못하지만 상업적 이용에 다른 문제는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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