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 알파벳에는 다른 문자와는 달리 이탤릭이라고 약간 기울이고 흘려서 쓴 변형 서체 유형이 있다. 획을 진하게 하는 '볼드'와 더불어, 산술적인 변형뿐만 아니라 아예 별도의 폰트를 만들어서 제공 가능한 글자 속성 중 하나이다.
옛날에 비트맵 글꼴 시절에는 윗첨자· 아래첨자와 더불어 이탤릭은 아예 별도의 글꼴(폰트 패밀리)로 제공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출력 장치의 해상도가 올라가고 결정적으로 윤곽선 글꼴 기술 덕분에 글자의 크기 제약이 없어지면서 이탤릭과 윗첨자· 아래첨자는 모두 아무 글꼴에나 추가로 적용 가능한 '변형 속성'으로 바뀐 지 오래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탤릭을 아마 수학식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보고 써 왔을 것이다. 수학에서 일종의 '예약어'라 할 수 있는 sin, lim, log 같은 단어은 반드시 regular 정자체로 쓰고, 나머지 임의의 변수명은 이탤릭으로 썼으니 말이다. 단, 소문자 이탤릭을 너무 흘려서 쓰면 그리스 문자와 구분이 어려워지기도 하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a와 알파, n과 η, x와 χ 같은 것.
개인적으로 20여 년 전, 아래아한글 2.1이던가 2.5에서 처음 도입된 수식체를 아주 좋아했다. regular 모양은 신명조와 별 다를 바 없지만 이탤릭이 굉장히 미려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각종 수학 교재나 상업용 출판물에서 쓰인 서체이기도 했다.
지금 아래아한글은 수식의 서체가 뭔가 LaTex스러운 서체로 바뀌었고 마소 제품의 경우 한때는 그냥 타임즈이다가 지금은 다른 걸로 바뀌었는데... 난 아래아한글의 원조 수식체가 지금도 그립다.
한편, 킹 제임스 성경 신자라면 원문에 없는 단어를 뜻하는 이탤릭체 표기가 아주 친숙할 것이다. (사실은 옛날 한글 개역 성경에도 본문보다 "약간 작게 쓴 글자"가 있어서 개념적으로 동일한 역할을 하긴 했다.)
이탤릭 서체는 세로 중심선이 사선 모양으로 기울어질 뿐만 아니라, 세리프 계열의 경우 세로획의 위· 아래 끝 부분이 살짝 둥글게 삐친 형태로 바뀐다.
이탤릭 전용 서체가 없는 글꼴은 응용 프로그램이 글자 모양을 그냥 수학적인 일차 변환으로 기울여서 찍어 준다.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1) Oblique라고 불리는 다른 모양일 뿐 이탤릭이 아니다.
산세리프 계열에 속하는 서체들은 딱히 이탤릭이나 오블리크나 모양 차이가 별로 없어서 굳이 이탤릭 전용 서체가 필요한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뭐, 두 글자의 모양을 한데 포개서 차이를 비교해 봐도 되겠지만. 또한 알파벳 말고 숫자 역시 Times 같은 세리프 계열 서체를 봐도 그냥 그대로 기울인 오블리크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숫자는 딱히 italic-ready 문자는 아닌 듯하다.
이탤릭은 정자체보다야 날려 쓴 듯한 느낌을 주지만, 모든 글자들이 한 획으로 완전히 이어진 (2) 필기체를 표방하는 것도 아니다. 가령, 소문자 i나 l의 이탤릭은 세로선이 기울어지고 위와 아래에 동그란 삐침까지만 있지, 필기체처럼 두 선이 한 점에서 만나는 획이 생긴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Brush Script 같은 필기체 계열의 서체들은 정자체 모양이 태생적으로 이미 좀 기울어진 형태이기 때문에 또 이탤릭을 적용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끝으로, 세로 중심선은 90도 수직선인데 이탤릭체에 적용되는 삐침만 적용한 (3) upright italic이라는 것도 타이포그래피 용어로는 있는 모양이다. 실용적인 의미나 가치가 무엇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고 그냥 이런 게 있다는 것 정도이다.
이탤릭체는 글자의 수직 높이는 변함없는데 중심선이 약간 기울어짐으로써 실질적으로 글자의 크기가 약간 더 커지는 효과를 낸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게 있다. 이탤릭체는 중심선을 정확하게 몇 도 기울이는 것이 정석일까? 여기에 통일된 규격이 있긴 할까?
MS Word의 경우, 이탤릭체가 적용된 글자로 마우스 포인터를 가져가면 신기하게도 포인터의 I자 모양도 이탤릭체 모양으로 기울어진 모양으로 바뀐다. 그리고 cursor(캐럿) 역시 단순 수직선이 아니라 기울어진 사각형 모양으로 바뀐다. 사선 모양이 굉장히 엉성하고 못생기긴 했지만 말이다.
화면 캡처를 해서 들여다보면, Arial, Verdana처럼 이탤릭 전용 서체가 있는 글꼴들은 세로선의 기울기가 5인 듯하다. 즉, 오른쪽으로 1픽셀 움직이는 동안 세로로는 대략 5픽셀이 움직인다. 이것은 각도로 환산하면 약 78.7도(수직선이 90도)이며, 따라서 11~12도 정도 기울이는 셈이 된다. 기울어진 cursor의 기울기도 이것과 얼추 일치한다.
한편, 이탤릭체 모양의 마우스 포인터는 화면을 확대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울기가 4이다(약 76도).
흥미로운 것은 전용 서체가 없이 프로그램이 기본으로 구현하는 이탤릭이다. 얘는 기울기가 거의 3(약 71.5도)에 가까워서 누운 정도가 위의 글자들보다 더 과격하다. 따로 새로 만들어진 획이 없이 전적으로 산술적인 변형만으로 기울어짐을 구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기울여 준 건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내부적으로 이런 차이가 있다는 것도 알면 흥미로울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모든 개념들의 예를 그림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Arial은 bold에 대해서도 전용 이탤릭 서체가 있는 반면, Arial Black은 전용 서체 없이 산술 연산으로 오블리크가 이탤릭의 역할까지 하고 있으며 기울기가 더 과격하다는 걸 알 수 있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