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6· 25 개전 초기의 승전 기록
우리는 6· 25 전쟁에 대해서 초기엔 기습적인 남침에 허를 제대로 찔린 나머지 서울을 사흘 만에 뺏기고 한동안 졸전과 패전, 후퇴만을 거듭하다가 낙동강 일대까지 밀렸다고 알고 있다.
그건 물론 거시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개전 초기에도 다음과 같은 일부 국지전에서는 국군이 승리하기도 했다는 것을 기억해 두면 좋겠다.
(1) 춘천-홍천 전투
6월 25일부터 30일까지 한반도의 중· 동부 지역인 춘천 일대에서 북한군이 진격해 오는 것을 국군 제6보병사단이 성공적으로 차단한 전투이다.
물론 서울을 빼앗긴 상황인 데다 북한군의 엄청난 물량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아군도 7월 1일에 춘천을 내어주고 후퇴하게 되었지만, 이때 제6보병사단이 벌어 준 며칠간의 시간은 정말 결정적인 금쪽같은 시간이었다. 이로 인해 북한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서 남진이 사흘 정도 지연되었으며, 그 동안 우리 쪽에서는 전열을 가다듬고 UN군의 파병을 논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정말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 나라를 구했다. 당시 이 사단의 최고 지휘관은 김 종오 장군이었다.
(2) 대한해협 해전
본토의 휴전선 인근에서 저런 난리가 벌어지는 동안 바다, 그것도 후방도 그저 조용하지만은 않았다. 북한군은 육로뿐만 아니라 배를 타고 동해를 따라 부산으로도 곧장 후방 침투용 공작원을 보냈기 때문이다. 누가 주장하는 것처럼 1980년 5월에 광주에 공작원 600명이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1950년 6월에 부산에 공작원 600여 명이 괴선박 한 척을 타고 침투되고 있던 건 사실이었다.
손 원일 제독이 도입한 백두산함은 6월 25일 당일 밤에 북한군이 탄 괴선박을 발견하고 "귀함은 언제 어디서 출항하여 어디로 가고 있는가? 소속 국가가 어디인가? 정지하라.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한다"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응답이 없고 나포도 되지 않자 결국 함포를 발사했다.
괴선함도 무장이 달린 군함이었기 때문에 몇 차례 교전이 오갔으나.. 결과는 남한의 승리였다. 아군은 몇 명이 전사· 부상하고 군함이 경미한 손상을 입은 반면, 괴선박은 완전히 침몰했으며 그 안에 있던 수백 명의 북한군 병사들은 부산에 상륙하지 못하고 수장됐다. 대한민국 최초의 6· 25 전투 승전은 바로 이 해전이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도 다뤄졌던 흥남 철수는 이로부터 거의 정확히 반 년 뒤 크리스마스 직전에 있었던 일이다. 중공군의 개입 때문에 서울까지 도로 빼앗긴 1· 4 후퇴가 있기 열흘 남짓 전이기도 하다. 이때 수많은 피난민들이 탔던 미군 군함은 다행히 적군의 공격을 받지 않고 부산에 무사히, 기적적으로 잘 도착했다.
6· 25 하니까 나는 생각이다. 리암 니슨이 맥아더 역을 맡아서 인천 상륙 작전을 배경으로 하는 6· 25 영화가 내년에 나온다고 하는데.. 기대된다. <오! 인천>이나 <클레멘타인>(스티븐 시걸..) 꼴 나지 말고 잘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난 니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전쟁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UN군이 널 찾아 내서 널 죽여 버릴 거야." / "잘해 보라우" 이런 대사가 나오려나 모르겠다.
딸을 구출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에펠 탑이라도 폭파할 기세였으니, 북괴군을 섬멸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평양에 핵이라도 떨어뜨릴 생각 정도는 충분히 하고도 남겠다. ㄲㄲㄲ
2. 일제 강점기 때의 독특한 인권 변호사
일제 강점기에 대한민국의 독립에 기여하여 건국 훈장을 받은 인물 중에는 프랭크 스코필드 같은 외국인이 있다는 건 다들 아실 것이다. 그런데 유럽/미국인, 혹은 중국인이 아니라 적국인 일본인 중에도 이런 훈장이 추서된 사람이 딱 한 명 있다.
무다구치 렌야처럼 캐 무능 병신 졸장 일본군 고위 인사를 빈정대면서 대한민국 독립 유공자감이라고 얘기하는 경우가 있긴 하다만, 여기서 말하는 건 그게 아니라 진짜로 진지하게 훈장을 받은 사람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후세 다쓰지'(1880-1953)라는 변호사이다. 임진왜란 때에도 김 충선 같은 항왜 귀순 장수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저 사람은 애초에 군인이 아니고 메이지 대학 출신의 법조인이다. 훈장이 추서된 건 다소 늦은 2004년으로, 당연히 당사자의 후손이 훈장을 대신 받았다. 외국인인 관계로, 훈장만 줄 뿐 연금 같은 다른 혜택은 없다.
사실은 더 일찍부터 이 사람에게 훈장을 추서하려는 논의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태생이 일본 국적이라는 점 때문에 논의가 미뤄지곤 했다고 한다.
그가 일본의 법조인으로서 조선인에게 잘해 줄 수 있었던 것은.. 뭐 안 봐도 비디오다.
이 사람은 정말 인권 변호사였다. 일본 자국 내에서 차별과 설움을 받는 부라쿠민 소수 민족들, 그리고 자기 나라의 식민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적극 변호를 해 줬다. 그리고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심지어 자국의 조선 침탈을 비판하기까지 했다.
덕분에 일본 정부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혔으며, 굳이 조선 편들기뿐만이 아니라 굉장히 진보 좌파스러운(일본 제국주의의 입장에서 봤을 때) 다른 판결들 때문에 급기야는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물론 종전 후에는 복권됐다.
그는 1919년에 3· 1 운동 이전에 일본의 조선 유학생들이 벌였던 2· 8 독립 선언의 주동자들을 변호하고 이들은 일본 내란죄 혐의에 대해 무죄라고 주장했다. 관동 대지진 때 벌어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사죄문을 신문에 기고하고, 정부의 폭동 묵인과 날조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 정도면 굳이 한국 편 일본 편을 떠나서 정말 일본 안의 살아 있는 양심 급이 아닌가 싶다.
3. 태평양 전쟁의 마지막 일본군 패잔병
잘 알다시피 일본은 1930년대 말에 중일 전쟁부터 일으켰다가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까지 일으키고, 동남아 일대 나라들을 무단 침략하고 점령하면서 세계를 상대로 그야말로 온갖 깽판을 부렸다. 그러다가 핵을 두 방이나 맞는 험한 꼴까지 당하고 전쟁에서 완벽하게 참패했다.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했으며, 그 대가로 단순히 2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가 아니라 20세기 이래로 자기가 차지했던 식민지들을 몽땅 뱉어 내게 됐다. 우리나라 역시 이때 덤으로 일제로부터 해방됐다.
이에, 지금까지 점령지에 있던 일본군들은 무장을 해제당하고 그대로 본국으로 귀환하게 됐다. 그런데 연합군과 직접 교전하다가 항복하고 포로가 된 게 아닌 일부 군인들은 그 당시의 교통· 통신 사정을 감안했을 때 패전과 항복 소식을 제때 접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것이 도가 지나쳐서 종전 후 수~수십 년이 지나도록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으면서 동남아 밀림 속에서 문명을 거부하고 혼자 일본군 행세를 하며 산 독특한 패잔병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는 '오노다 히로'라는 일본군 소위인데.. 무려 1974년까지 필리핀의 루반 섬에서, 본국으로부터 아무런 보급도 명령도 안 받으면서 자칭 일본군 행세를 하며 지냈다고 한다. 필리핀 민간인을 약탈· 살상하면서 말이다.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 그만 투항하라고 필리핀 정부, 동료 병사, 심지어 일본에 있는 가족까지도 애걸복걸을 했지만 그는 싹 다 귀축영미의 거짓 선전쯤으로 치부하고 믿지 않았다.
머리가 없는 좀비도 아니고..
우리 부모님이 죽지 않았다고 믿으면서 시신 옆에서 먹고 자며 지내던 누구처럼..
도대체 일본군 내부에서 정신 교육 세뇌 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저런 인지부조화 망상에 젖어 지낼 수 있었을까?
6· 25 때는 우리나라에도 "후퇴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끝까지 고지를 지킬 것이고 죽음을 각오하고 싸움에 임하겠습니다"란 FM 답변으로 맥아더 장군을 감동시킨 병사가 있긴 했지만, 저 아저씨는 좀 심하게 오버했다. =_=;;
게다가 6· 25 때 남한은 침략자로부터 자국 영토를 지키는 입장이었던 반면, 저기서 일본은 대놓고 남의 나라에 쳐들어간 침략자였으니 동일선상에 있는 비교 상대도 안 된다.
그는 그렇게 근성으로 살다가 결국, 한참 전에 예편한 옛 직속상관으로부터 명목상 투항 명령서를 정식으로 전달받은 뒤에야 투항했다. ㅋㅋㅋ
무슨 도마냐..;; 내 눈과 손으로 못자국과 창자국을 직접 보고 만지지 않는 한 절대로 믿지 않겠다고.. (요 20:25)
이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는지 사도 요한은 훗날 요일 1:1에서 말씀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가 보았을 뿐만 아니라(look, see) 만지기까지 했다(handle)는 표현을 특별히 넣었다.
4. 6·25 때 일본군이 몰래 참전했는가?
우리나라는 건국 당시에 주변에 적이 참 많았다.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과 소련이 전부 공산화가 된 와중에, 남조선만 친미 자유 진영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비록 붉게 물든 나라는 아니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 식민 통치를 했던 철천지 웬쑤이니 역시 수교를 할 리가 없었고, 서로 소 닭 보듯 애써 외면하면서 없는 사람 취급하는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우리나라는 6·25 전쟁의 포화에 휘말렸다. 이에 UN군이 북한을 저지하러 참전했다. 일본은 아직 UN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전범국이었으며, 헌법 차원에서 무장을 영구적으로 해제 당한 상태였다. 이념에 따라 남북 어디를 군사적으로 편들 필요가 없고 애초에 편을 들 수조차 없으며, 그저 이웃집 불 구경만 하면 되는 중립 옵저버였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몰래 무슨 군대를 파견해서 원산 앞바다에서 기뢰 제거 같은 전투 행위를 슬그머니 했다고도 한다. 이건 마치 196~70년대에 휴전선을 몰래 넘어 북한 영토로 가서 북한군 몇십 명을 때려잡았다는 북파공작원의 얘기를 듣는 듯한 느낌이다. 비록 일본이 북한을 편든 건 아니었지만, 저것도 결국은 다~ 군사 무장 명분이라는 자기 이익을 노리는 수작이기 때문에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6·25 당시에 참전한 남한 아군 중에는 재일 학도 의용군도 있었다. 이들은 UN군의 신분으로 참전했는데, 일본어는 잘하지만 한국어는 못하곤 했다. 이 승만 대통령은 전선 시찰 중에 이걸 우연히 발견하고는 일본이 전쟁에 슬그머니 개입한 줄로 생각했다. 그 연륜과 성깔이라면, 그 순간 그는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구한말 동학 농민 운동의 트라우마가 떠올랐지 싶다.
당장 급하다고 외세를 끌어들여서 내란을 진압했다간 내란이 끝난 뒤에 나라가 무슨 꼴이 나는지? 게다가 일본은 지금 이 상태로도 미국의 병참 기지가 된 덕분에 얼마나 대박 재미를 보고 있는데, 하물며 진짜 병력까지 한반도에 개입한다면?
이 사람이 젊은 시절에 받은 트라우마의 양대 산맥이 바로 저 일본이랑, 미국(가쯔라 태프트 밀약 때문에 버림받은 것)이었으며, 이로 인한 강박관념 성향은 그가 훗날 대통령이 된 뒤 초강경 외교 노선으로 고스란히 표현됐다.
이에 이 승만은 거침이 없었다. "미국이 일본까지 슬그머니 끼워서 전쟁에 참가시키려는가 본데, 만약 왜놈들이 한반도에 온다면 우린 왜놈부터 죽이고 나서 북한군을 쏘겠다" 이런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요즘으로 치면 "전쟁 나면 간부들부터 죽이고 나서 북한군 쏘겠다" 거의 이런 급의 극단적인 발언이었다. 물론 "아, 쟤들은 일본인이 아니라 교포입니다"라는 해명으로 오해는 곧 풀렸다.
'정읍 발언'이 아니라 '왜관 발언'이라고 검색해 보면 이때 대통령의 행적을 알 수 있다.
전자는 이 승만이 남북 분단의 원흉이라고 말도 안 되는 거짓 선동질을 할 목적으로 종종 언급되는 반면, 후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승만의 독도 수호 궁극의 반일 노선의 결과물인 평화선이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렇게 팩트를 모르니까 6· 25 때 이 승만이 일본으로 도망칠 계획을 잡고 있었네 하는 이상한 위사가 나오면 그런 떡밥은 좌우 문맥 따지지도 않고 좌좀들이 옳다구나 잘도 물고 낚이는 것이다. 이 승만은 오히려 이때에도 권총샷 드립을 구사하면서 자신은 한국 땅에서 뼈를 묻겠다는 굳은 의지를 밝혔다.
"우리나라가 전쟁에서 져서 북한군이 내 앞에까지 쳐들어오게 된다면 난 이 권총으로 적을 쏘고 다음에 아내를 쏜 뒤, 마지막 총알로는 자결할 것이다."
5. 구국의 영웅에서 쳐죽일 나치 부역 반역자로 -- 프랑스의 앙리 필리프 페탱 장군(1856-1951)
마지막으로, 우리나라가 아닌 프랑스 얘기를 좀 하고 글을 맺겠다.
저 사람은 보병 장교 출신의 군인이다. 1차 세계 대전 때 베르됭 전투에서 독일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면서 가히 구국의 영웅으로 등극했으며, 종전 후에는 프랑스의 역사상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드문 원수 계급에 추대되었다.
저기 연도가 보이시는지? 저 사람은 1856년생이다. 1차 세계 대전 타이밍 때만 해도 이미 50대 나이가 꺾인 노장이었으니, 저 전쟁을 끝으로 완전히 은퇴만 해 버렸으면 그는 평생 부와 명예를 거머쥐면서 행복한 노후를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처음엔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급박한 시대 정세가 "구관이 명관" 운운하면서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2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또 프랑스가 전쟁에 휘말리자 그는 총리 자리에 올랐는데, 여기서 그는 자기의 영광스러운 과거 커리어를 모조리 말아먹는 실책을 저질렀다. 나치 독일에게 그냥 항복해 버렸고, 그 대가로 '비시 프랑스'라는 괴뢰 정부의 수립을 보장받은 것이다. 그는 강대국인 나치 독일에 저항해 봐야 국민적으로 얻을 게 없으며, 이렇게 정권을 유지하는 게 국민에게 더 이익이고 그리 치욕스러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또한 히틀러가 그렇게까지 인간 악마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오판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모조리 빗나갔다. 나치가 패망하고 전쟁이 끝나자 그는 졸지에 매국노 반역자가 되었다. 고국으로 돌아오자 부하 군인들은 아무도 페탱 장군에게 경례를 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그를 사형시키라는 여론까지 들끓었다. 90세에 육박하는 고령이 된 그는 최종적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며, 마치 나폴레옹처럼 대서양 연안의 섬으로 유배를 당하고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
이 사람은 뭔가 중국에 조공을 바치던 조선의 사대주의를 추구한 것 같기도 하고, 김 옥균처럼 악의적이지는 않았지만 오판을 저지른 구한말의 친일파 같기도 하다. 리즈 시절 이후에 다른 분야에서 삽질을 하다가 예전 커리어를 다 말아먹었다는 점에서는 심 형래나 홍 명보, 그리고 프리츠 하버(시대를 잘못 타고나고 잘못된 줄을 선 과학자)와도 비슷해 보인다. 일생일대의 패착을 저질러서 쳐죽일 반역자가 된 건 박 헌영과도 비슷하지만, 박 헌영은 리즈 시절의 업적도 별로 없으니 페탱과 같은 급이 아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친일 청산 문제를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청산 문제와 같은 잣대로 비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마치 성경에서 벧후 3:6-7을 노아의 홍수하고 비교하는 것만큼이나 바른 비교가 아니어 보인다. 겨우 몇 년 적군에게 점령당했던 것하고, 아예 한 세대가 바뀔 정도로 긴 시간을 지배당한 것을 어떻게 똑같이 비교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6· 25 때 북한군 부역자 청산 문제와 비교하는 것이 체급이 더 맞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만 봐도 이전의 독립 운동 경력을 나중의 변절 내지 좌익 공산주의 활동으로 다 말아먹었다던가, 반대로 이전의 친일 경력을 나중의 반공 활동 경력으로 상쇄한 입체적인 인물이 적지 않다. 자기 개인 블로그나 SNS에다가 개인적인 인물 취향과 호불호만을 밝히는 것이야 상관 없겠지만, 남과 논쟁을 하고 남을 설득까지 하려면 공과 과를 따로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겠다.
다만, 기회주의자는 분명 아닌데 당시 판단력의 한계로 줄을 잘못 서서 평판을 망친 사람이라면 참 안타까운 예가 아닐 수 없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