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글에서 살펴봤듯, 북한에서는 자유를 찾아 귀순한 공군 파일럿이 역사적으로 쭉 있어 왔다. 하지만 월북을 한 남한 파일럿은... 있을 리가. -_-;;
물론, 육군에서는 최 덕신 같은 최고위층의 월북 흑역사가 있었고, 1984년에는 사회에서도 이미 문제가 좀 있던(..) 22사단 소속의 조 준희 일병이 동료와 상관을 사살한 후 월북해 버리는 일도 있었으나.. 그래도 남한에서 공군 전투기 파일럿이 미제 F-xx 전투기를 갖다 바치면서 월북한 정신나간 경우는.. 없다.
단, 북한의 공작원에 의해 남한의 항공기가 북으로 납치 당한 일은 먼 과거에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폭탄을 터뜨려서 너 죽고 나 죽는 테러 말고, 납북 말이다.
1. 창랑호 납북 (1958. 2. 16.)
지난번 글에서는 김포 공항의 역사를 얘기하느라 글이 길어졌는데, 이번에는 대한 항공의 전신인 "대한 국민 항공"이라는 회사의 얘기를 좀 많이 하겠다.
저 시절은 김포 공항이 개항한 지 한 달이 채 안 됐다. 또한 나라가 몹시 가난하고 항공사도 가난해서 더글러스 사(훗날 타사와 합병되어 맥도넬 더글러스가 된)의 중소형 프로펠러 여객기인 DC-3 세 대를 굴리며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는 각각의 비행기 기체에도 마치 배처럼 우남호, 만송호, 창랑호라고 이름이 붙어 있었다. 비행기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 항공 시스템의 많은 용어와 관행이 배에서 유래되었다는 걸 감안하면 이건 그리 이상한 모습이 아니다. 그리고 사실은 열차도 다 저렇게 차량별 이름을 따로 썼으니까 말이다.
그때는 경부 고속도로 따윈 없고 도로가 죄다 비포장이니, 자동차로는 차가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서울에서 부산까지 세월아 네월아 10몇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그나마 가장 빠른 경부선 열차를 타도 해방자호가 9시간이었고, 1955년 광복절에 등장한 통일호 특급열차가 7시간 이랬으니(훗날 1960년, 무궁화호가 6시간 40분으로 단축), 이 당시 교통 사정이 어떠했는지가 이해가 되시겠는가?
비행기는 육상 교통수단보다야 넘사벽급으로 빠르겠지만 당연히 외국인, 정부 고위 관료, 극소수 유학생 같은 사람들밖에 못 탔지, 서민들은 국제선이 아닌 그냥 서울-부산 국내선이라 해도 비싼 가격 때문에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어쨌든.. 저 날 창랑호는 승무원 포함 34명의 승객을 태우고 부산을 출발하여 서울 김포 공항으로 가고 있었다. 하지만 승객 중에 북한 공작원이 타고 있었고, 비행기는 평택 부근의 상공에서 하이재킹을 당했다. 비행기는 기수를 북으로 돌려서 그 당시 북한에서도 지은 지 얼마 안 되었던 평양 순안 공항에 착륙했다.
탑승 전에 짐 검사 같은 건 안 하다시피했는지, 공작원은 반항하는 승객을 둔기로 제압하고 기장을 위협하여 얼마든지 자기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북한은 뻔뻔하게도 창랑호의 승무원과 승객들이 위대한 수령님을 앙망하여 자진 월북했다고 의기양양하게 거짓 발표를 했다. 남한은 이에 맞서 당연히 규탄 성명을 발표했으며 승객들의 송환을 요구했다. 비행기와 함께 이미 북으로 가 버린 공작원들은 어쩔 수 없으니, 승객들의 신원과 주변 인물들을 조회하여 공작원들을 지원한 것으로 의심되는 간첩 몇 명만을 뒤늦게 잡아들여 벌을 줬다.
승객 중에는 미국인이나 독일인 같은 외국인도 적지 않게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다국적 외교 문제로 불거졌다. 압박을 견디다 못해 북한은 자기네 공작원을 제외한 나머지 피랍 승객· 승무원 26명은 3월 6일에 판문점을 통해 전원 돌려보냈다. 북에 있는 동안 공산당 세뇌 교육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던 사람은 좀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증언이 전해진다.
그러나.. 북한은 비행기는 돌려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비행기 3대 중 한 대를 그냥 잃은 대한 국민 항공사는 심각한 경영난에 직면해야 했다. 게다가 사실은 만송호도 1957년 7월 7일에 부산 수영 비행장에 착륙하던 중에 추락해서(2013년 아시아나 214 사고처럼?) 비록 인명 피해는 없지만 기체를 다 날린 상황이었는데 창랑호까지 잃었으니..=_=;;
회사의 창업주인 신 용욱은 자신부터가 일제 강점기 때부터 항공 덕후에 유능한 비행기 조종사였고 이 불모지에서 항공 사업까지 한 비범한 인물이었다. 이 승만이 대통령이 된 뒤에도 대통령 각하보다는 박사라는 호칭을 더 좋아했듯이, 저 사람도 사업가가 된 뒤에도 사장님보다 기장님이라는 호칭을 더 좋아했을 정도.
단, 이 사람은 업종과 행적이 그렇다 보니 과거에 대동아 전쟁을 위한 일본군 항공 수송과 비행기 헌납 같은 빼도 박도 못 할 친일 논란이 있기도 하다. 동갑내기 파일럿인 안 창남과 같은 인생을 살지는 않은 게 아쉽지만, 그래도 한편으론 그 시절에 일제한테 그 정도 협조를 안 하고서야 고자본 전문직인 항공 사업을 조선인이 어떻게 그것도 한반도 본토에서 경영할 수 있었겠나 싶기도 하다.
게다가 해방 후에 그가 비행기에다 붙인 우남· 만송· 창랑이라는 이름들 역시 이 승만, 이 기붕, 장 택상... 당대 정치인들의 호였다. 다소 정치적이고 권력 지향적인 작명이었다. 막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돈이 많이 깨지는 항덕의 꿈을 사업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배후 권력이 무엇이 되건 적절히 잘 이용하고 기름칠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허나 그 당시에 대한민국은 항공업으로 막 재미를 보기에는 근본적으로 너무 국력이 부족하고 서민들이 가난한 나라였다.
각 비행기들은 사장이 사업 밑천 마련을 위해 미국에 로비를 하고 집 팔고 빚 내면서 정말 힘들게 어렵게 구입한 것이었다. 그 가난하던 시절에 비행기를 구입할 정도의 엄청난 외화 유출을 감수하려면 구두쇠 대통령으로부터 승인도 필요했다.
그랬는데 광복 후에는 북한으로 인한 악재, 늘어 가는 적자, 경영난, 회사 빚을 감당치 못하고 사장은 환갑을 갓 넘긴 1961년에 결국 한강 투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대표까지 세상을 뜨자 대한 국민 항공사는 상황이 막장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 나라에 항공사가 없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이걸 국가가 인수하여 국영 기업을 만들었다(1962. 9.). 허나, 이것이 영 실적이 좋지 않아서 한진 그룹 산하로 민영화해 버린 것이 오늘날의 대한 항공이다(since 1968. 11.). 박통이 조 회장에게 "시궁창이 된 이 회사를 임자가 책임지고 좀 살려 보게나" 이렇게 구슬리면서 떠넘겼다고 한다.
그 시절의 옛날 비행기 중 유일하게 우남호만이 내구연한이 경과할 때까지 잘 날다가 만기 퇴역했으며, 요건 인하 대학교 본관 1호관 옆의 잔디밭에 정태보존돼 있다. 항공 사진 지도로도 확인 가능하다. 옆의 인하공전 안에 교육용으로 비치되어 있는 보잉 727하고는 다르므로 혼동하지 말 것!
우남호의 모델인 DC-3은 나름 1940년대를 풍미하며 전세계적으로 많이 생산되었던 명품 비행기이다. 그런데 평평한 지면에 정지해 있을 때는 기체의 전방이 위를 향하게 경사가 져 있다. 비행기가 엔진 성능이 지금만치 좋지 못하던 시절에 최대한 양력을 많이 받아서 잘 뜨게 하려고 일부러 저렇게 설계한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비행 중에는 물론 평평한 상태로 움직인다.
그리고 보잉 727은 DC-10 같은 삼발기이고 엔진이 날개 아래가 아니라 동체 뒤에 있다. 보잉 사가 개발한 여객기 중 유일하게 삼발기라고 한다. 당연히 엔진이 있으리라 여겨지는 날개 밑에 엔진이 없다니, 전동차로 치면 팬터그래프가 없는 제3궤조 집전 차량이요, 헬리콥터로 치면 꼬리날개가 없는 동축 반전 로터 같은 변종을 보는 것 같다.
두 비행기 모두 오늘날의 전형적인 비행기들과 비교했을 때 독특한 점이 하나씩은 다 있었다. 우남호는 몰라도 보잉 727 정도 되는 비행기를 분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옮겨 오는 건 보통일이 아니었을 것 같다.
얘는 1991년에 조종사의 부주의로 동체 착륙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수리 불가 비행 불능 판정을 받고 퇴역하여 학교에 전시되는 운명이 되었다. 그래도 삼발기여서 엔진의 위치가 높은 덕분에, 바닥이 쫘악 긁히는 와중에도 엔진이 터지거나 연료가 새어서 화재가 나는 일은 다행히 벌어지지 않았다.
한때는 인하공전 말고도 전라남도 강진의 '성화 대학'도 항공 특성화 전문대를 표방하면서 캠퍼스 안에 보잉 727을 비치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 학교는 몇 년 전에 망하고 폐교했다.
끝으로, 비행기와는 관계 없는 여담이지만,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후엔 북한은 좌초한 자기네 잠수함을 돌려 달라는 개소리를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부는 무장공비들의 시신만 돌려 주고 저 무례한 요구는 당연히 씹었다.
2. 대한 항공 (1969. 12. 11.)
창랑호 납북 사건으로부터 10여 년 뒤, 그리고 한진 그룹 산하의 대한 항공이 출범한 지 1년 남짓 뒤에 북한에 의한 비행기 하이재킹 사건이 또 발생했다. 강릉에서 출발하여 서울 김포 공항으로 가던 대한 항공 여객기인데, 지금 같은 운행편 번호는 모르겠고 비행기 기체가 일제 YS-11이었다는 것만 전해진다.
이번에도 뻔하다. 승객으로 위장해 타고 있던 북한 공작원 내지 간첩이 승무원을 위협하는 바람에 비행기는 원산의 선덕 비행장에 착륙하게 됐다. 북한은 역시 남조선 인민의 자진 입북이라고 선전했으나 그런 거짓말이 통할 리가..
결국 북한은 사건 이후 2개월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이듬해 2월 14일에야 승객 50명 중 39명은 돌려보냈으나 11명(승객 7, 승무원 4)은 여전히 그리하지 않았으며, 그 뒤에도 이들의 생사조차도 알려 주지 않았다. 참고로 1969년은 김 신조 사건, 강릉· 삼척 무장공비 등 북한이 온통 무력 도발을 벌였던 살벌한 1968년의 바로 이듬해이다.
돌아오지 못한 승객은.. 듣자하니 대체로 1년 전의 이 승복처럼 북한에서 투철한 반공 정신을 너무 발휘해서 세뇌 교육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고, 북한 사람들에게 밉보인 나머지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 듯하다. 다만, 전부 싸그리 처형 당하거나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간 것까지는 아니고 지방 어디선가 정착해서 살고 있는 경우도 있으며, 더러는 지난 이산가족 상봉 행사 때 가족이 잠깐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뭐, 어떤 경우든 6· 25 전쟁으로도 모자라서 하루아침에 멀쩡한 가정을 찢어 놓고 이산가족을 또 만든 북한은 천하의 개쌍놈이 맞다. 이 사건 역시 북한이 비행기를 돌려 줬을 리는 만무하고..
요즘 항공 업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관행이 정착해 있다.
- X선을 동원한 정밀한 짐 검사: 두 말할 나위가 없음. 이런 첨단 기술이 일제 강점기 때부터 존재했다면 굳이 비행기가 아니어도 안 중근, 윤 봉길 등 여러 항일 의사들의 거사들 역시 이뤄질 수 없었을 것이다.
- 기내에서 절대 금연: 일부 승무원이 간접흡연으로 폐암에 걸린 뒤에야 정착했다. 화재의 위험도 있는데 과거엔 비행기 내에서 액체 연료 라이터까지 반입해서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 수하물과 탑승객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절대로 출발하지 않음: 수하물을 가장한 폭탄 테러를 몇 번 겪은 뒤부터 도입됐다. 마치 사격 훈련 후에 모든 탄피를 반드시 수거해서 개수를 확인하는 것과 비슷한 격의 안전 조치이다.
- 비행 중에 조종실을 절대로 개방하지 않음: 9· 11 테러를 겪은 뒤. 단, 테러범이 아니라 반대로 파일럿이 혼자 미치거나 맛이 간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외부에서 그를 전혀 제압할 수가 없는지라 최근에(2015. 3. 24.) 저먼윙스 9525편 고의 추락 사고 같은 일도 발생했다.
- 나이프는 기내식의 스테이크를 써는 플라스틱제조차도 기내에 반입하지 않고 액체 역시 기내 반입을 제한함: 이것도 9· 11 테러를 겪고서 미국이 신경이 바싹 곤두서서 내린 조치이다.
한국은 북한의 테러에 이골이 나 있는 관계로, 비행 중에 조종실을 절대로 개방하지 않는 건 진작부터 시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조치로도 하이잭이 아닌 1987년의 대한 항공 858 폭탄 테러를 막지 못한 건 안타까운 점이다. 승객과 짐이 다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건 이미 그때 다 정착돼 있지 않았나?
북한은 서울 올림픽의 개최를 방해할 목적으로 비행기도 폭파하고 1986년 9월엔 김포 공항에서 외국인을 사주하여 폭탄 테러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번에도 명불허전 천하의 개쌍놈 북괴 인증이다.
본인은 건국 초기에 우리나라의 친일 청산과 민주화를 제일 방해하고 가로막은 원흉도 결국 따지고 보면 북괴라는 지론이 예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이 없다. 걔네들 때문에 결국 보안을 빌미로 국민의 자유를 제약하는 복잡한 법이 필요하고 강한 공권력이 필요하고, 일제에 부역했던 형사와 경찰들에게 또 일자리를 줘야 하게 됐다.
요런 절대악에 대한 배경 설명을 쏙 빼고 필요악이 좀 한계를 지녔고 일부 잘못하고 병크 저지른 것만을 편파적으로 부각시키면서 남을 속이고 역사 왜곡하고 선동질 하는... 입에 들어가는 쌀이 아까운 인간들에게 절대로 속지 말라.
일제 강점기 때는 그나마 우리가 힘이 없어서 나라를 빼앗겼으니 실력을 양성해서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일말의 건전한 구호라도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북한엔 도대체 무슨 선한 것이 있고 우리가 뭘 배울 게 있단 말인가? 그저 걔네들의 교묘한 간첩질과, 종북 세력들의 이적 행위만을 잘 감시하고 잡아내면 될 뿐이다.
우리가 중동에 노동자를 보내서 달러를 벌어 온 동안 쟤들은 위조지폐와 마약으로 외화를 벌었다. 살아 온 게 늘 그런 식이다. 민족? 통일? 꿈 깨라. 김돼지 왕조나 그에 준하는 막장 통치 체제가 살아 있는 한,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쟤들은 비교하는 것조차 수치스러운 악의 무리들이다. 민족이 일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관이 일치하는 것이다.
특히 어떤 경우든지 남한이나 북한이나 하나도 다를 바 없고 똑같다는 말은 내가 정말 극혐한다. 인간이라면 뚫린 입이라고 말을 그 따위로 지껄이지 말라.
우리나라 진보, 중도라고 하는 진영이 종북 빨갱이라는 오명을 만년 벗지 못하는 이유는,
북한이 아주 정상적으로 외교를 하는 국가이고 인민들을 정상적으로 먹여 살리고 있는데도.. 아주 불가피하게 가난하고 못사는 줄로 그쪽 동네를 거짓으로 미화하기 때문이다. (왜 안 도와 주느냐, 왜 대화를 안 하느냐, 왜 안 퍼 주느냐, 쟤들이 막나간다고 우리까지 막나가면 우리도 쟤들하고 똑같게 되는 거다) 법과 규칙을 지키지 않으며 그저 힘에 굴복할 줄밖에 모르는 놈들은 힘으로 제압해 줘야 할 뿐이다.
철도야 국토 분단과 함께 곧장 찢어졌으며, 장단 역 기관차, 김 재현 기관사, 월정리 역 등 안보 주제와 관련해서 할 얘기가 넘쳐난다.
그러나 철도뿐만 아니라 비행기· 항공에다가도 뭔가 색다른 분위기로 이런 현대사와 안보 주제를 연결할 수 있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