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터널의 번호

예전에도 남산 터널에 대해서 글을 쓰면서 명칭의 일관성에 대해서 살짝만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서울 남산 터널은 “제1~제3 남산 터널” 같은 식으로 불렀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게 제1~제4 땅굴, 제2 경인 고속도로 같은 유사 분야의 다른 명칭들과 일관성이 있다. 교량조차도 한강대교, 양화대교, 한남대교는 예전 명칭이 각각 제1~제3 한강교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순서를 나타내는 의존명사 ‘-호’는 일반적으로는 보통 제일 끝에 붙는다. 서식 2호, 명령 1호처럼.. 이게 자연스럽다. 그 반면 “남산 1호 터널”은 다른 유사 용례가 없고 너무 이상하게 느껴진다.
참고로 호 뒤에 추가로 더 붙는 ‘호실’, ‘호선’, ‘호기’ 같은 걸 보면 ‘실, 호, 기’도 의존명사이기는 마찬가지다. ‘터널’과 같은 위상의 형태소가 아니다.

요까지만 글을 썼는데..
팔당 역 근처의 국도변에 연달아 등장하는 터널들의 이름도 찾아보니 거기는 '팔당 제1터널', '팔당 제2터널'... 이렇게 이름이 붙어 있었다.;;; 일관성 없는 혼란의 극치이긴 하다만 제n이 그래도 차라리 n호보다는 나은 것 같다.

2. 비슷한 단어

decease (디씨-스) 죽다 / disease (디지-즈) 질병
철자와 발음과 뜻이 서로 은근히 헷갈리기 쉬운 단어쌍인 것 같다.
loyal(충성스러운)과 royal(왕가의)
 jealous(질투심 강한, 시샘하는)와 zealous(열광· 열성· 열심적인)에서도 비슷한 심상이 연상된다.

sharp / pointed
'날카롭다'와 '뾰족하다'의 차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뾰족한 건 진짜 0차원 점으로 모이는 것만 해당하고, 날카로운 건 1차원에도 해당된다. 칼날이 닿는 곳이 선을 형성하니까 말이다. 송곳을 끝이 뾰족하다고는 하지만 날카롭다고는 잘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도 미래에 구분이 없이 모호해질 여지는 있음)

dark는 '어둡다'와 '캄캄하다' 중에 어디에 더 가까울까 궁금해한 적이 있다. 송 명희 시인의 찬송시 중에도 "우리의 어두운 눈이 그를 미워했고, 우리의 캄캄한 마음이 그를 몰랐으며"가 있으니 말이다.
물리적으로 빛이 안 비쳐서 풍경이 시커먼 것 중심인 단어가 있는가 하면, 바깥과는 무관하게 내가 지금 앞이 안 보이는 것 중심인 단어도 있다. 둘 다 dark에 대응할 수도 있지만, "아 문제가 너무 안 풀려서 눈앞이 캄캄하다"라고 말할 때는 "눈앞에 어둡다"라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진짜로 시력이 어둡거나 야맹증을 앓고 있는 건 "눈이 어둡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관계가 서로 오묘하다.

pull / tow / haul
모두 기본적으로 '끌다, 견인하다'라는 뜻이 있다. pull은 뜻이 제일 넓고 보편적이기 때문에 사고 차량이나 불법주차 차량을 다른 기계로 견인하는 건 tow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공항에서 갓 출발한 비행기를 자력 주행 가능한 곳으로 밀거나 끌어 주는 차량도 tow car라고 부른다.
한편, haul은 기관차가 객차를 끌고 간다고 할 때 종종 본 것 같다. tow와는 어감이 미묘하게 다른 상황이어서 그런 것 같다.

3. 중국어

내가 제대로 구사할 줄 아는 외국어는 현재 영어밖에 없긴 하다만, 그래도 중국어에 일말의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은 (1) 열차 안내방송과 (2) 아저씨 대사다.
(1)이야 “번쯔 리에처 목포 더 무궁화 하오 리에처” 같은 것이고, (2)는.. 해당 영화가 정말 명대사가 너무 많은 작품이어서 말이다. “즈 차예시 총 샨양 아이더. 허 디얼바.”

테이큰에 이어 아저씨에 너무 꽂힌 나머지 오죽했으면 도대체 심양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대륙 지도를 꺼내서 찾아 보기까지 했다. 딱히 차가 특산품인 동네는 아닌거 같던데. ㄲㄲㄲㄲㄲㄲ
그나저나 덩달아 같이 알게 된 건, 하얼빈이 우리나라에서 딱 정북향이라는 점이다. 안 중근 의사가 순국한 곳인 다롄-뤼순과도 생각보다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다. 하얼빈도 막연히 황해 건너편 대륙 어딘가에 있지 않겠나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시기적으로 별 관계 없는 임시정부의 망명 동선 같은 것과 헷갈렸던 것 같다. 만주, 훈춘 이런 건 그냥 동쪽 끝이고.

“중국서 조폭영화 좀 봤는갑네. 깜장으로 쫙 빼.. 무슨 장례식 왔나. ㅋㅋㅋㅋ” 를 통역할 수 있으려면 중국어 공부를 많이 해야 할 듯하다.

인터넷 글을 통해 보게 된 새로운 영단어들을 단어장으로 정리해서 틈틈이 외우고 있다. 일본어도 최소한 글자(히라/가타)는 좀 읽을 수 있게 테이블을 암기하고 있는데 머릿속에 정말 안 들어가진다. 특히 읽는 거 말고 쓰는 건..;;

어학이라는 게 사람에게 매우 큰 지적 자산이요 스펙이 되는 건 사실이다. 언어 장벽으로 사람들을 갈라 놓은 게 괜히 신의 한수가 아니다. 이거 생각 이상으로 극복하기 어렵다. 언어를 뒤엎는다는 건 아예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 놓는 거니까.
본인은 창조론자에 언어 신수설을 믿는 사람으로서, 언어마다 문법과 어휘에 이유 없이 존재하는 온갖 괴상한 굴절과 불규칙들도 배후에 일종의 지적 설계가 있다고 추측할 정도이다. -_-;;

이 와중에 그나마 영어 같은 언어가 세계어가 된 건 축복이다. 철자법이 개판인 것만 빼면 그나마 글자도 형태가 간단하고, 이 정도면 굴절어가 아닌 그냥 고립어(형태론)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굴절이 굉장히 단순해졌고, 그러면서 정/부정관사 단/복수처럼 엄밀해야 할 건 엄밀하게 남아 있고, 쓸데없는 높임법 따위 없이 2인칭은 하나님이래도 you라고 간단하게 호칭할 수 있고..

그렇다고 해서 모국어가 쓰레기라는 소리는 아니다. 본인은 이런 주류 영어· 알파벳과는 구조가 극과 극으로 너무 다른 한국어· 한글이 그 때문에 오히려 유니크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창의적인 활용 방안을 찾는 중이다. 하지만 한국어도 언어의 사회성을 심각하게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는 최대한 모호하고 무질서한 면모를 없애고 문법과 어휘를 조금씩 개량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4. More..

  • 우리말의 '보통'은 생각보다 뜻이 굉장히 많고 중의적이다. 부사로서 in general이라는 뜻과 형용사로서 ordinary라는 뜻이 있는 품사통용어이다. 아, 거기에다 빈도부사(sometimes) 같은 뜻도 지닌다. 와/과(접속조사 and & 부사격조사 with), 그리고 '다른'(형용사 different & 관형사 another)만큼이나 어떨 때는 굉장히 불편하게 느껴진다.
  • 친정, 처가, 외가 .. 다 기본적으로 같은 의미인 거 맞지?
  • 똑같이 '돌'이 들어가는 이름인데 리빙스턴 / 산돌(서체 회사 이름이기도!), 아인슈타인 / 일석..;; 어감이 굉장히 다르다.
  • 똑같은 lawyer이어도 성경에 나오는 율법사와 오늘날의 변호사는 완전히 다른 개념임. 유대교의 priest와 천주교의 priest가 완전히 다르듯이 말이다.
  • 정신승리, 영적 승리.. 영어로는 똑같이 spiritual victory인데 그야말로 천차만별로 뉘앙스가 달라진다. 영어는 <아Q정전>의 영문 번역본에서 실제로 쓰인 단어이기도 하다.
  • 영어는 I/Y 같은 고모음에서 장모음/단모음이 오락가락 하는 편인 것 같다. vitamin(바이/비타민), missile(미싸이얼/미쓸), direct(다이렉트/디렉트). 비타민은 그렇다 치지만 미국 영어는 뒤의 두 단어에 대해서 영국식 국제 영어와는 달리 단모음을 선호한다.
  • 난 '이름'이 full name(성명)도 되고 first name(...)도 되는 게 불편하고 싫었는데 잘 알다시피 영어에도 어차피 day(날/낮), man(사람/남자), egg(알/달걀) 같은 어정쩡한 의미 관계는 얼마든지 있다. 특히 man과 day는 성경 번역과도 아주 직접적인 관계가 있을 정도의 의미 중의성을 제공한다.
  • pray, bless, repent 이런 단어들은 기본적인 심상은 공통이지만 동작 주체 내지 대상이 사람이냐 하나님이냐에 따라서 구체적인 번역이 달라지는 단어이다. (기도하다/부탁하다, 복을 빌다/복 주다/찬송하다, 회개하다/돌이키다)
  • 난 개인적으로 '미덥다 미쁘다' 이런 용언이 안 그래도 믿음 짱 종교의 경전인 성경에 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솔직히 정치색만 없으면 두음법칙도 없는 게 더 낫고.. 친구와 동무, 국민과 인민도 구분해서 쓰는 게 더 나을 것이다. 굳이 얼음보숭이 같은 이상한 말 만들 필요 없이 이미 있는 말이라도 적절히 구분해서 잘 쓰면 된다.

Posted by 사무엘

2017/02/24 08:34 2017/02/24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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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세카이 2017/02/28 15:53 # M/D Reply Permalink

    터널 명칭같은것은 일관성 있게 만드는게 좋다고 동의는 하지만
    문법과 어휘를 개량한다는 발상은 지나친거 같습니다.
    언어가 수학공식처럼 예외없이 맞아떨어져야할 필요도 의무도 없고 누가 강제할 수도 없는데
    (외국인들 한국어 공부하기 편하라는 배려?)
    사람들이 쓰는 현상을 관찰해서 규칙을 찾아내는것은 좋지만
    어떠한 규칙에 맞게 예외를 줄이도록 강제한다는 것이 가능할련지
    누가 자기 무의식에 각인된 습관을 바꾸려고 할까요?

    말(언어)은 사람의 정신을 담는 그릇이이기에
    세월이 흐르고 사회가 변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언어도 흘러가는데로 되는거겠죠
    청각성이 약한 불필요한 한자어들은 조금씩 사라질 것이라 예상합니다

    그나저나 문자생활에서
    한자를 섞어 쓰지 않는다는 점은 다행인거 같습니다

    1. 사무엘 2017/02/28 17:13 # M/D Permalink

      오랜만에 뵙네요~ 반갑습니다~!
      저는 한국어가 좀 더 외국인이 학습하기 편하고, 외국인뿐만 아니라 기계 처리도 용이한 언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최대한 수학 공식처럼 맞아떨어지고 활용 형태가 예측 가능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와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이고 실현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발상 자체가 잘못되었으니 제가 생각을 바꿔야 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전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개량이라고 하니 어감이 좀 강해 보이긴 합니다만, 별거 아니고요.
      시간과 시각(두 시각의 차이가 시간), '다르다'와 '틀리다' 같은 이미 있던 구분이 문란해지는 건 최소한 막자~
      '장'이 한글로만 쓰면 동일한 문맥에서 pieces와 chapter가 구분 안 되고 소리로 변별이 안 되어 매우 불편하니 다른 말을 만들어 보자
      그 대신, 아무 영양가 없이 쓸데없이 복잡하기만 한 '서, 석, 세' 같은 구분은 없애자. (평소에 그냥 종이 세 장이라고 하지, 일일이 '석 장' 그러나요 요즘?)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시도조차 안 하고는 모국어로는 뭐가 불편하고 개념 표현이나 구분이 안 되니까 학문 한답시고 영어나 한자 글자 들먹이지는 말자는 뜻입니다. 아니면 언어에는 우열이 존재하는 게 맞으니 언어의 상대성 같은 얘기를 처음부터 하지를 말아야겠죠.

  2. 신세카이 2017/03/22 13:24 # M/D Reply Permalink

    어휘에 대해서 조금 더 제 견해를 말씀드리자면
    저 같은 경우는 전공공부를 하면서
    영어 원서도 많이보고 번역본도 많이 봤는데
    왜 이 단어를 이렇게 번역을 했을까라는 의문이 든 경우가 많아서요
    또 번역본마다 번역이 달라서
    전문분야에서는 우리말로 번역하기 보다는 그냥 영어를 그대로 쓰는것이
    훨씬 낫겠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단, 영어를 우리말로 그대로 가져올 때 확실한 규칙을 만들어서
    모두가 잘 지킬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고는 생각했습니다.
    외래어 표기법이 있긴하지만 사람들이 잘 안 지키더라고요

    전문분야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말에 없는 어휘는 그걸 그대로 쓰되 표기법만 정확히 통일하는것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데 훨씬 나을거라고 봅니다

    한국인들은 언어의 프레임 자체가 한국어에 맞게 되 있기 때문에
    어휘를 굳이 우리식으로 바꾸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은 한국화 될 수 밖에 없다고 보거든요

    사실 지금 현대 한국인이 쓰고 있는 많은 어휘들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들여온 말이 많습니다. (과학,민주주의 등등)
    문화라는 것은 상호교류를 통해 발전하는 것이죠

    1. 사무엘 2017/03/22 18:38 # M/D Permalink

      번역과 외래어 표기법에서 일관성이 결여되어 발생하는 불편 사항들은 대학 나올 정도의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거의 모두가 이미 공감하고 있을 겁니다.
      용어 정도야 영어식으로 직통으로 이해하면 참 편하겠지만 이미 한국어 문법이 정착해 버린 저같은 토박이들은 영어로 "만" 돼 있는 텍스트는 도저히 빠르게 읽을 수가 없으니.. 양 언어의 장점만을 우리 실정에 맞게 얻는 방법을 고민하고 연구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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