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대화 수단

한국어는 체언보다 용언을 좋아하는 언어이고, 수식도 형용사보다 부사 위주로 하는 걸 좋아하는 언어이다. 어색한 번역투라는 건 대체로 영어의 문장 구조를 따라 체언의 주변에다 자꾸 무리해서 수식어를 붙이다 보니 생긴다.
간단한 예로 "많은 사람이 있다" vs "사람이 많이 있다"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된다. 더구나 한국어에 more, no 같은 단어는 부사(더)나 형용사(없다)로만 있지, 영어와 대등한 관형사 같은 품사로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어가 얼마나 동사를 좋아하면.. '모르다'조차도 동사 한 단어로 딱 존재한다. 이게 보통일이 아니다. '모르다'와 동일한 의미의 타동사가 존재하는 언어는 내가 아는 언어 중에는 모국어인 한국어가 유일하다.

영어(do not know)· 독일어(kennen nicht)· 중국어(不知)는 물론이요, 한국어와 그나마 구조적으로 비슷하다는 일본어도 '知らない'(알지 않는다)로 우회해서 표현하고.. 그렇지 않은가? 동사 한 단어로 존재하는 게 편할 때도 물론 있다. "난 그런 거 몰라요~ 난 모른다! / 전쟁을 모르는 세대"처럼..
'모르다'는 '없다, 아니다'와 더불어 '너무, 전혀' 같은 부정 담당 부사가 직통으로 붙을 수 있는 소수의 용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렇듯, 한국어는 부사와 서술어를 좋아하는 언어여서 그런지 체언인 명사의 쓰임이 까다롭지 않고 아주 단순하다. 그냥 그 명칭 자체만 들었으면 장땡이지 그게 단수냐 복수냐, 아무 물건이냐 그 특정 물건이냐(부정관사 정관사) 같은 건 별로 엄밀하게 따지지 않는다.
이건 존재에 대한 인지 방식 자체가 한국어 사고방식과 영어 같은 서양 언어의 사고방식은 서로 매우 다르다는 걸 시사한다. 솔직히 어떤 개체의 개수가 0(없음)이냐 1(유니크)이냐 다수(* 양산형)냐 하는 것은 차이가 꽤 크긴 하다.

영어를 기준으로 고유명사는 첫 글자를 대문자로 쓰기도 하니, 이건 외국어 학습자의 입장에서는 생소한 단어이더라도 딱히 번역을 할 필요 없고 음역만 하면 된다는 게 시각적으로 보장된다. 무척 편리하다.

다만, 표기를 넘어 언어 차원에서 명사의 종류를 매번 꼬박꼬박 구분해하는 게 다 좋기만 한 건 아니다. 그게 더 복잡하고 피곤하고 헷갈리는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어떤 명사가 일반-보통명사냐 고유명사냐 하는 기준은 굉장히 주관적이며, 우리 생각만치 절대불변으로 딱딱 떨어지지 않는다.

고유명사라도 너무 흔해지고 의미가 확장되면 보통명사로 바뀌기도 한다.  영어도 특이한 문맥에서는 고유명사 앞에서 부정관사(!!)를 잘만 붙여 쓰고 심지어 복수형도 만든다.
가령, 자동차 이름인 쏘나타, 그랜저, 아반떼 같은 것은 명백히 첫 글자를 대문자로 적는 고유명사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차가 아니며, 같은 종류의 차가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 "그랜저 네 대, 쏘나타 다섯 대"랑 "사과 네 개, 귤 다섯 개"에서 각 명칭들이 서로 완전히 다르게 취급되어야 할 이유는 별로 없을 것이다.

아울러, 한국어는 명사에 성 구분도 없다. 유럽 언어에 존재하는 성 구분은 동양 철학의 전유물이라 여겨지는 음양설의 서양 버전이 아닌가 싶다. 국가나 선박을 she로 가리키는 거, 혹은 성경에서 지혜까지 she로 가리키는 것은 동양권 언어의 화자로서는 선뜻 이해하기 어렵고 곧이곧대로 번역하기도 난감해 보인다.

그 대신 한국어가 상당히 꼼꼼하게 구분하는 건 사람이냐 물건이냐, 혹은 생물이냐 무생물이냐 하는 것이다. 솔직히 한국인은 마우스라는 컴퓨터 장치를 발명했어도 거기에다가 생쥐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었을 것이며, 크레인이라는 기계를 발명했어도 거기에다가 학이나 두루미라는 이름을 선뜻 붙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예로, 영어의 명사화 접미사 -er, -or는 그 동작을 담당하는 사람이나 물건, 추상명사를 아무 구분 없이 모두 가리킬 수 있는 굉장히 요긴한 형태소이다. speaker는 기계 스피커도 되고 연설자도 되며, printer는 기계 프린터도 되고 옛날 인쇄공도 된다.

하지만 이는 한국어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사고방식이다. 한국어에서는 물건일 때는 -개, -기 등으로, 사람일 때는 -꾼, -장이/쟁이, -자, -사 따위로 꼭 구분해서 번역돼야 한다. 포괄적인 대명사 one의 번역도 이와 비슷한 이유로 인해 좀 난감해진다.
이게 불편해서 그런지 저 영어 접미사가 인터넷 통신체 위주로 국어에 이미 많이 유입된 것도 현실이다. 악플러, 갤러, 불편러 등~

둠 코믹스에서 "아 전기톱! 훌륭한 대화수단이지!"가 원문으로 the great communicator인데.. 이게 원전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별칭이었다고 한다. '위대한 소통가'라고.. 이건 정치인으로서 정말 영광스러운 타이틀이 아닐 수 없다. 당연히 '커뮤니케이터'가 사람도 가리키고 물건 도구도 가리킬 수 있으니 저런 패러디가 가능하다.

Allow me to communicate to you my desire to have your guns!
너희 총을 원한다는 갈망을 담소 나누고 싶구나!
C'mere boys, I got somethin' to say!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물론 저 만화에서 둠가이는 말 대신 주먹... 아니, 말 대신 전기톱으로 좀비맨들을 썰어 버리는 게 담소이고 의사소통이다. ㅡ,.ㅡ;; 뭐, 현실에서도 좋은 말이 안 통하고 꼭 폭력을 동원하고 힘으로 찍어눌러야 말귀 알아듣고 버로우 타는 부류들도 없지는 않다.

국민이나 의회와 그렇게도 소통을 잘 했다던 레이건 대통령도 공산주의자 같은 악의 무리와는 일체의 대화도, 타협도 없었다.
그는 굉장히 독실 신실한 크리스천이었고 사상 건전하고 성경관 쪽으로도 당장 기억은 안 나지만 명언을 남겼던 사람이다.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때는 소련을 맹비난하면서 악의 제국 드립까지 구사하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무척 마음에 든다.

좌파들은 그걸 '포용정책'이라고 부르더군요.
우리가 적을 적대시하지 않기만 하면, 그 잔인한 독재자가 반인륜적 범죄를 멈추고 평화를 사랑할 거라고 말입니다.
그들을 반대하는 사람은 다 전쟁광이고 말이죠.
... 전쟁만은 피하기 위해 우리의 자유를 팔아넘기는 것은 전체주의의 내리막길로 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운 것이 있다면, 적에 대한 순진한 포용 정책이나 대책 없이 희망적인 사고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국선열들의 희생을 배신하는 짓이고, 우리의 자유를 탕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폭탄이 무섭다고 우리의 안전과 자유를 팔아넘기는 비윤리적인 짓을 저지를 순 없습니다.
그건 공산국가의 철의 장막 뒤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에게 "자유에 대한 희망을 버리세요. 우린 우리가 무사하기 위해서라면 당신들의 지배자와도 타협할 겁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위험보다 치욕을 택하는 나라는 지배당하기 딱 좋은 마음 상태이며, 지배 당해야 마땅하다"


1964년 10월 27일, 월남전이 진행 중이고 일본에서는 신칸센이 갓 개통했던 시절에 했던 A time for choosing이라는 연설에다가 1982년 6월 8일자 대국민 담화가 섞여 있긴 한데.. 완전 아멘 사이다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청와대에 서식하고 있는 누가 보기에는 완전 자기 저격이고, 엄청 거슬리고 불편한 내용이지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9/02/05 08:33 2019/02/05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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