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늙은 호박의 모양 분류
하루는 퇴근길에 집 근처 채소 가게를 보니, 호박이 좀 있었다.
단호박들이 상자에 담겨서 여러 개 진열돼 있고, 그 옆에 농구공만 하게 생긴 큼직한 늙은 호박도 '딱 하나' 외로이 놓여 있었다. "날 데려가 주세요~" 같은 눈길...
그렇잖아도 그 당시엔 호박죽이 없이 한 주를 보낸 상태였으니 이 아이를 사서 집에서 곧장 쪼개고 동지와 크리스마스용 호박죽을 쑤었다.
표면에 상처 같은 게 보여서 혹시 속에 썩은 부위가 있지 않나 염려도 했지만.. 분해해 보니 내부엔 그런 조짐이 다행히 전혀 없었다.
그리고 이전의 호박들과 달리, 속에는 여전히 초록색 껍질층이 있었다. 하지만 완성된 죽의 색깔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얘는 내가 지금까지 실물을 봤던 늙은 호박들 중에는 제일 공처럼 둥글고 주름이 별로 없고, 별로 납작하지 않고 종횡비(?)가 괜찮았다. 무게는 3.7kg 정도 나가더이다. 모양이 저러니 속을 파내서 잭꼴랜턴 만들기에도 적합할 것이다.
(1) 저렇게 동글동글하고 주름도 별로 안 보이는 놈
(2) 그리고 적당히 납작하면서 주름도 적당히 보이는 놈
(3) 거의 약과나 타이어 모양이 떠오를 정도로 제일 납작하면서 주름도 아주 깊게 패여 있는 놈
아무래도 뭔가 (3)이 통상적인 맷돌호박의 범주에 가장 정확히 부합하는 놈일 것이다. 하지만 본인은 인터넷으로 주문한 걸로는 대체로 (2)만 접했다. 그리고 (1)은 이번에 처음 봤다.
(1)을 조선호박이라고 부르는 것 같지만, 잭꼴랜턴을 만드는 데 쓰고 신데렐라의 호박 마차에 모티브도 제공한 호박도 (1)형이며, 얘 역시 서양식 호박이다. 종류가 좀 헷갈린다.
늙은 호박은 여느 작은 채소· 과일들과 달리, 상표 붙이고 포장하거나 수박처럼 손잡이 달린 그물줄로 싸서 팔지 않는 것 같다. 수박조차도 1인 가구 증가에 맞춰서 반 통씩 팔거나, 더 작게 개량된 애플수박 같은 품종으로 개량되어 팔리는 형국인데, 늙은 호박은 혼자 취급하기에는 너무 크고 무겁고 취급이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그러니 작은 단호박이 더 각광받고 있고, 늙은 호박은 end user 대상뿐만 아니라 즙이나 죽 형태의 가공용으로도 많이 팔리기는 것 같다.
2. 호박의 품종과 상태 분류
호박의 명칭은 품종 명칭과 상태 명칭이 섞여 쓰이는 게 개인적으로 좀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보통 애호박 아니면 늙은 호박으로 구분하는 편인데, 이건 품종이 아니라 상태(색깔)에 따른 분류이다. 품종으로 분류하는 게 더 정확하다.
앞서 1에서 언급했던 둥글둥글 커다란 전통적인 호박은 '맷돌호박'이라고 불리는 편이다. 하지만 내 개인적으론 (1)~(3)을 모두 통틀어서 '일반호박'이라고도 부르고 싶다.
얘는 열매가 커다랗게 맺힌 뒤에도 밭에서 여름과 가을 햇볕 쬐며 오래오래 누렇게 삭혀서.. 단풍 들듯 '늙은 호박'이 된 뒤에 수확하곤 한다. 그러면 단맛도 느껴지고 영양가도 많다. 얘는 죽을 쑤어 먹는 게 제일 일반적이다.
어지간히 잘 자라서 늙은 호박은 무게가 수 kg 이상이 넘어간다. 몹시 단단해서 잘 잘리지 않을 뿐 아니라, 수박처럼 자르자마자 바로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상태로 사과처럼 껍질을 도려내고 속의 내용물을 긁어내야 하니.. 해체하는 난이도를 과장 좀 보태 표현하면 무슨 가축 도축에 맞먹는다. 뭔가 느리고 시골스럽고 억척같은 느낌이 난다.
그래도 늙은 호박은 그런 단단한 껍질 덕분에 상온에서 수 개월 장기 보관이 가능하다. 어둡고 통풍 잘 되는 곳, 5~15도대의 서늘한 온도에서 땅이나 다른 호박에 직접 닿지 않게 보관하는 게 제일 이상적이다. 너무 온도가 낮아도 좋지 않으니, 냉장고에 넣을 필요가 없다.
맷돌호박 말고, 오이나 가지처럼 길쭉하게 생긴 호박은 서양호박 내지 주키니 호박이라고 불린다. 늙은 호박 중에도 서양 스타일이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서양호박이라는 명칭도 좀 부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얘는 그냥 초록색일 때, 즉 '애호박/풋호박' 상태일 때 얼른 수확해서 해체 따위 없이 몽땅 통째로 먹는다. (껍질이나 씨가 제대로 형성되기 전이어서 몽땅 꿀꺽 가능~)
탁탁 썰어서 조림· 볶음을 만들기도 하고, 된장국에 넣거나 국수 고명으로 쓴다. 얘를 주 재료로 삼아서 호박국을 만들기도 한다.
걸쭉한 죽으로 바뀌는 늙은 호박보다는.. 애호박이 자기 원형을 더 유지하는 형태로 먹히는 셈이다.
우리의 통념과 반대로 맷돌호박이 시푸르딩딩한 풋호박인 모양은 평소에 매체에서 구경하기가 극히 어렵다. "그 상태로는 상품으로 나오질 않기 때문"이다. 직접 개인 텃밭에다 호박을 심어서 가꿨는데, 심기를 너무 늦게 심어서 누렇게 익기 전에 부득이하게 호박을 따 버렸을 때에나 볼 수 있다.
얘도 애호박의 일종이기 때문에 먹는 덴 아무 문제 없다. 단지, 늙은 호박만치 비싸게 팔 수 없고, 결정적으로 덩치는 큰 주제에 늙은 호박처럼 간편하게 "오래 보관할 수가 없다." 즉, 식품으로서가 아니라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문제될 뿐이다.
또한, 주키니 호박도 오래 놔두면 저렇게 누렇게 변한다.
하지만 기왕 제일 오래 삭힐 거면.. 덩치가 왕창 커지고 양이 많아지는 맷돌호박이 더 수지맞으니 '늙은 주키니'는 보기가 힘든 게 아닐까 싶다. 이런 건 말 그대로 외국에서나 볼 수 있다.
* 단호박은 시간과 지면이 부족한 관계로, 이 글에서 언급을 생략하였다.;;
3. 자이언트 호박
세상에서 가장 큰 동물이 아프리카코끼리(육상)와 대왕고래(해상)라면, 세상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열매를 맺는 게 가능한 식물은 호박이다. 수박만 해도 호박 같은 급의 슈퍼/자이언트(..) 에디션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호박은 식용으로 키운 일반적인 열매만 해도 저런데, 품종과 재배 환경 마개조를 통해 닥치고 제일 크고 무거운 호박을 만드는 게 신기록 분야로 존재한다.
우리나라에서 이 분야의 최고 권위자는 경남 의령에서 호박 농사를 짓는 양 재명이라는 분이다.
보도 자료를 검색해 보면 2010년에 113kg짜리 호박을 키웠고(☞ 링크), 그로부터 10년 뒤인 2020년엔 465kg짜리 호박을 만들었는가 보다(☞ 링크).
이런 호박을 만들려면 좀 특수한 방법으로 심고 물과 영양 공급과 온도 조절을 아주 세밀하게 최적화해 줘야 된다.
그리고 얘는 크기만 엄청 클 뿐, 맛이나 영양은 별로 없고 그냥 수분뿐이기 때문에 사람이 먹을 물건은 못 된다고 한다. 그냥 장식· 관상용인 셈이다. 보면 색깔부터가 빠져서 허옇다..;;
F1 경주용 자동차는 시동 걸고 운전하는 방법이 워낙 특수하기 때문에 정작 일반 공도는 제대로 주행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아주 특수한 용도에 너무 맞춰져 버려서 범용성이 떨어진 셈이다.
4. 멧돼지에 의한 피해
멧돼지가 밭에 침입해서 농작물에 해를 끼치는 사건이야 전국적으로 한두 번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보통은 고구마나 옥수수의 피해가 많은 것 같으나.. 보도자료를 검색해 보면 나무에서 열리는 사과, 여름 과일인 수박, 심지어 벼나 콩까지도 당하는가 보다.
그래서 문득 의문이 들었다. 혹시 호박은..??? 멧돼지가 호박도 먹을까?
유의미하게 검색돼 나오는 건 아마추어 개인용 텃밭에서 발생한 다음 두 건인 것 같다. (☞ 2020년, 2021년) 호박밭이 멧돼지한테 털리면 대략 이런 꼴이 나는가 보다.
고라니는 그 단단한 늙은 호박을 저렇게 깨 부숴서 먹지 못한다. 그러니 저건 빼박 멧돼지의 소행이라고 한다.
2021년자 블로그의 경우, 근처의 다른 글을 보면 심지어 진흙 목욕을 한 흔적까지 있다고 하네.. ㄲㄲㄲㄲ
애호박도 아니고 그 껍질 단단한 늙은 호박을 주둥이의 엄니로 부숴서 잘 쳐먹었는가 보다. 변두리의 과육 부위보다는 중심부의 씨앗과 펄프 면발을 먹은 건지..?
5. 호박 내부 발아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호박 열매는 시퍼런 풋호박 애호박 상태일 때 따면 열매를 몽땅 다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잘 익은 늙은 호박은 껍질이 단단해지고 중심부에 딱딱한 씨앗들도 형성됐기 때문에 통째로 먹을 수 없다. 요리하려면 껍질을 벗기고(가죽) 속을 긁어내서(내장) 가장자리의 과육 부분만 추출해야 한다.
호박 열매가 익으면 중심부는 과육이 아니라 뭔가 펄프(?), 촉수 같은 축축한 재질로 바뀌면서 그 공간에 씨앗이 들어선다.
호박을 잘라서 단면을 보면.. 씨가 들어있는 중심부는 생각보다 징그럽게 생겼다. 뭔가 저그 건물의 입구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수박과 달리, 씨가 있는 구획과 과육이 있는 구획이 구분되어 있으니 인간의 입장에서 먹기는 더 편하다.
3kg 남짓한 늙은 호박 한 덩이 안에 씨앗은 거의 200개에서 500개 가까이 들어있다고 한다. 어쨌든 수십 개는 절대 아니고, 수백 개 단위이다. 세포 분열의 위력이 이런 것이군..
늙은 호박은 단단한 껍질 덕분에 상온에서도 몇 달 정도 보관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한없이 오래 보관 가능한 건 아니다. 겉의 과육이 아니라 축축한 중심부부터 곰팡이 피고 상하고 썩을 수 있다고 한다. 내부가 썩는 주된 징조 중 하나로는 열매의 내부와 연결되어 있는 꼭지-줄기의 연결이 갑자기 끊어지는 거라고 한다. 마치 낙과될 때처럼 말이다.
심지어는.. 호박 안에서 호박씨가 스스로 싹이 터 버리는 경우도 있다! 적당히 수분과 영양소가 있으니 여기가 땅 속이라고 판단했는가 보다.
하지만 싹을 틔워 봐도 호박 안은 어두컴컴 암흑천지일 뿐이니, 천상 콩나물 수준으로밖에 자라지 못하고 그걸로 아웃이다. 뭐, 그래도 이런 일은 매스컴을 탈 정도로 극히 드물게 발생한다.
그 가녀린 호박 덩굴 줄기의 말단에서 벌어지는 일은 참 오묘하기 그지없다. 식물은.. 씨앗도 그렇고 수확된 열매도 그렇고 산 거랑 죽은 것 경계가 참 애매한 거 같다...;;
그리고 호박은 영양과 온도 같은 환경적인 한계가 없으면 이론적으로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으며, 덩굴이 몇 미터 길이까지 뻗을 수 있을까..?? 이것도 노무노무 궁금하다.
이상이다.
호박은 꼬불꼬불 덩굴과 노란 꽃, 둥글둥글 꿀단지처럼 생긴 열매가 참 매력적인 채소이다. 겨울 동안 다들 호박 많이 드시기 바란다. ^^ 본인은 무슨 호박 농가의 이익을 위해서 이런 말 하는 게 아니다.
검증된 실험까지는 아니지만.. 요 한 달간 체중이 약간 줄고 살이 빠진 게.. 아침과 저녁에 호박죽을 먹은 것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