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구한말
- 김 정호는 지도를 만든 죄로 대원군의 노여움을 사서 주리를 틀리고 옥사한 게 아니다. 한편으로, 훗날 일제는 자기들이 최신 장비로 더 정확하게 한반도 지형을 측량해 갔지, 굳이 김 정호의 작품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최 남선은 1920년대에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역사왜곡을 저지른 걸까..??)
- 김 구(그 당시는 김 창수?)는 무슨 칼 찬 육군 장교를 격투 끝에 제압은.. 개뿔, 그냥 무고한 민간인 상인 일본인을 강도살인 저지른 것이었다.
- 우금치 전투 때 관군과 일본군이 기관총을 동원해서 동학 농민군을 학살하긴 했는데..
**기관총을 쏴 제낀 진영은 일본군이 아니라 조선 관군이었다!!!** 이때 같이 있던 일본군은 그냥 보병 예비군 수준의 부대여서 중화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청나라와 일본이 싸웠는데(청일 전쟁) 정작 전쟁터는 조선 땅이었던 것만큼이나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안 중근 의사도 소싯적에 동학군의 토벌에 참여했었다. 동학 고위 간부였던 김 개남의 경우, 다른 항일 의병장이었던 임 병찬의 신고로 잡혀서 처형 당하기까지 했다. 여러 정황상 그 시절엔 반드시 “동학 = 구한말 의병 항일 독립운동”도 아니었던 것 같다.
조선은 초기에 고려 왕족들을 학살한 것부터 잔혹했는데 훗날 홍 경래의 난을 진압한 것도 잔혹했고(단순 가담자까지 몽땅 처형), 외세까지 끌어들여 동학 운동을 진압한 것에 이어 갑신정변 개화파를 축출한 것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잔혹했다.
태평양 전쟁의 책임이 도조 히데키 같은 군 수뇌부뿐만 아니라 히로히토 천황에게도 있듯, 고종은 외제 기관총으로 외적인 일본군이 아니라 자국민을 학살하는 참극이 벌어진 것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동학뿐만 아니라 개화파도 마찬가지다.
서 재필은 그야말로 삼족이 완전히 멸문지화를 당했으며, 고종은 김 옥균에 대해서는 국외로까지 집요하게 자객을 보내서 결국은 암살해 버렸다. 청과 일본으로부터 야만적이라는 지탄을 받으면서까지 기어이 김 옥균의 시신을 송환해서는 이 지경을 만들었다. (혐짤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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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부도옥균" -- 천하의 개쌍놈 김 옥균 역적패당놈의 최후 ... 정도의 뜻이다. 글씨는 암살범인 홍 종우가 썼다. 아무리 실패한 쿠데타였기로서니, 젊은 개화파 브레인들이 그 정도로 나쁜짓을 한 것이었을까..?? 고종이 다른 건 등신이어도 자기 권력 지키는 일엔 귀신이었다.
이런 선례를 남겼으니 "일본도 조선 저 나라는 국력은 쥐뿔 없는 주제에 완전 무법 야만인들 동네이군. 신사적으로 대할 필요 없고 우리도 마음놓고 더 적극적으로 무력으로 제압해도 되겠다"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로부터 얼마 못 가 을미사변이 일어난 건 우연이 아니었지 싶다.
그리고 이야기가 이게 끝이 아니다. 하나 더 생각할 점이 있다.
1880년대 중반에는 갑신정변 때문에 친일 성향의 개화파들이 멸문지화를 당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10년쯤 뒤인 1890년대 중반엔, 고종의 아관파천 조치와 함께 이번에도 친일 성향의 김 홍집과 몇몇 대신들이 희생양으로 버림받고 역적으로 몰려 비참하게 죽었다.
저기서 친일이라는 건 일제 시대 이후에 등장한 악질적이고 부정적인 친일이 아니다. 고종의 어영부영 오락가락 양다리 행보 때문에 애꿎은 유능한 인재들만 화를 입곤 했다.
2. 일제 시대
- 일제의 제암리 학살은 무슨 싸이코패스마냥 여자와 갓난아기까지 다 죽인 건 아니었고, 소총보다 키가 큰 15세 이상의 남자만 가둬서 죽인 것으로 증언과 기록이 정정되었다.
- 유 관순 역시 시체 토막설은 주작으로 판명되어 폐기되었다. 애초에 생년과 형량조차도 형무소 동기들의 증언과 기억이 아니라 기록의 발견으로 인해 2000년대가 넘어서도 막 정정되곤 했다.
- 청산리 대첩이라는 말은 이제 폐기됐고 그냥 청산리 전투라고 부른다. 사기 진작과 희망고문을 위해서 전과가 터무니없이 너무 부풀려져 보고되었으며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일제라고 해도 그 정도 대패 참패의 책임소재를 따지는 군 내부 보고서까지 은폐 조작할 수는 없다.
- 그나마 1920년대 초에 잠깐 있었던 독립군이 왕창 와해된 건 학교에서 잘 안 가르치는 자유시 참변 때문이다. 일본의 적이니까 우리의 친구일 거라는 생각에 소련 공산당을 과신했다가 낭패 본 격이다.
- 조선어 학회 사건은 일제의 고등경찰이 아주 어이없는 꼬투리를 잡고 한 건 꾸며서 국어학자들이 필화를 당했던 사건이다. 그 당시의 민족 말살 정책과는 별개로, 국어사전을 편찬하는 것 자체는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놨던 상태였다.
3. 해방 후
- “일본이 좀 더 늦게 항복해서 광복군이 제대로 참전만 했으면 우리나라도 2차 대전의 정식 승전국이 돼서 분단도 되지 않았을 텐데...”라고 아직까지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이제 없을 것이다.
- 건국 초기에 반민특위를 해체한 주역 중 한 사람은 우리나라 초대 법무부 장관을 역임한 애산 이 인이다.
일제 시대 때 독립운동가들을 무료 변호했으며,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기도 하고, 훗날 한글학회 건물 건립에 엄청난 사재를 기부했던 이 민족주의자 법조인이 보기에도.. 건국 초기엔 꼴리는 감정대로 남을 단죄하는 것보다, 군경 경력자 간부들을 이용해서 빨갱이 잡고 사회 혼란을 바로잡는 게 더 중요했던 것이다~!
- 6 25 개전 초기에 피난민들이 위에서 멀쩡히 건너고 있는 중에 나라에서 한강 다리를 폭파한 건 아니었다. 단지, 폭파 후에 사후수습이 제대로 안 돼서 깜깜한 밤에 앞을 못 본 피난민 행렬이 주루룩 앞의 낭떠러지로 떨어진 경우는 있었다.
하다못해 1500년대 말의 기록인 이 순신의 난중일기는 당대의 타 문헌과 고증이 일치하고 교차검증이 되어 사료로 인정받고 있는 반면, 300여 년 뒤의 기록인 백범일지는 일본인 강도살인이나 전화 개통 등 여러 부분이 역사 고증과 맞지 않고 과장· 주작이 의심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 정체성을 탐구하려면 백범일지보다 독립정신이 훨씬 더 중요하게 다뤄지고 읽혀야 할 것이다.
※ 여담 1: 일제 부역자가 등장하는 문학 작품
내가 소싯적에 접했던 국내 현대 문학 작품 중에서 대놓고 주인공이 친일 부역자 악역으로 등장하면서 친일파 척결(?)을 주제로 내세운 작품은 둘 정도이다.
하나는 희곡 <살아 있는 이 중생 각하>(1949), 다른 하나는 소설 <꺼삐딴 리>(1962).
그나마 전자는 주인공이 재산이 몰수되고 자식한테까지 버림받고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걸로 끝난다. 발표된 시기도 해방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는 걸 생각해 보자.
그러나 후자는 정반대. 주인공이 얄밉게도 일본· 소련을 거쳐 미국으로 빌붙는 처세가 탁월하고, 본업이던 의술도 비현실적으로 너무 뛰어났다. 그래서 끝까지 승승장구하며 잘나가는 동심파괴 엔딩으로 끝난다.
저렇게 나라 정세가 통째로 엎치락뒷치락하던 시절엔.. "앞으로 미국이 뜰 거다, 소련이 뜰 거다" 예측하고 대처하는 게 지금으로 치면 앞으로 어느 지역 집값이 오르느냐 마느냐, 주식을 하냐 코인을 하냐 하는 것과 딱 정확하게 대응했지 싶다.
이건 대놓고 나라를 팔아먹고 보상도 일제로부터 직접 받아서 부귀영화를 누린 구한말 매국노 윗대가리라든가, 완장 차고 현장에서 동족을 대놓고 고문하고 괴롭히는 지저분한 짓을 한 부역자하고는 성격이 다르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박 정희가 1940년대가 다 돼서야 만주군을 거쳐 일본군 장교로 입대한 것은 전시 상황에서 조선인에게 단순 순사 보조원-_- 이상으로 정식 군문이 슬금슬금 열리고 있었고, 그게 흙수저 조선인에게도 출세의 기회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일 뿐이었다. "기왕 갈 거면 더 노력해서 병이 아니라 간부가 돼서 가자~! 실력만 좋으면 진급해서 심지어 왜놈들을 자기 부하로 부리게 될 수도 있다" 같은 생각?
더 현실적으로 비유하면, 과학고에 국립대 공대를 나와서 취업했는데, 불만족스러워서 의대나 로스쿨로 진로를 바꾸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일탈일 뿐이라는 것이다. 자기들도 똑같이 사리사욕이 있기는 마찬가지이면서 '도 넘게' 남을 욕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 여담 2: 관과 민의 관계
우리 선조들도 마냥 평화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 엄청난 전투종족이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자기들끼리 싸우든 외적과 싸우든 무엇이든 말이다.
임진왜란 때 임금이 피난을 가고 관청이 항복하고 튀었을 정도이면, 밑의 백성들은 보통은 당연히 항복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조선 백성들은 윗대가리의 부재 상태에서도 자체적으로 의병을 조직해서 잡초같이 끈질기게 저항해서 왜군에게 트라우마를 심겼다고 한다. 보스를 죽였는데도 곁의 졸개 잡몹이 끝까지 버티고 저항하는 게임처럼 말이다. 구한말 의병은 시즌2 정도 되려나?
그래서 한국인은 윗대가리가 아니라 민초가 늘 위기 때 일어나서 나라를 지켰네 마네 이런 말이 나돈다. 본인은 이런 말을 예비군 정신교육 때도 여러 번 들었다.
하지만 군대라는 엄청난 먹튀 소비 조직이 보급과 지원이 없이 어찌 유지되겠나..?
조선 정부가 처음부터 유사시를 대비해서 예비군/민병대 비스무리한 조직을 꾸려 놓은 상태였으며, 민간인의 전투력(?)을 석전 훈련을 통해서 유지시키고 있었고, 이런 민병대 자경단에게 국가적으로도 지원을 알음알음 했기 때문에 저런 대응이 나온 거라고 한다.
요컨대, 민초들이 나라를 지킨 것에도 윗대가리들이 평소에 기여를 전혀 안 한 건 아니라는 뜻이다. 하다못해 그 무능한 암군 고종도 구한말 의병을 일제 몰래 알음알음 지원하긴 했다.
그런 지원 없이 조선의 정치인· 관리들이 몽땅 무능한 탐관오리밖에 없었다면 20세기까지 갈 것도 없이 임진왜란 때 백성들은 옳다구나 왜군에게 진짜로 모조리 투항해 버렸을 것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 나라가 통째로 망하지는 않았지만, 도자기 기술자들은 처우의 차이로 인해 일본으로 많이 유출 당하게 된 게 사실이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