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다음으로는 오랜만에 호박 차례이다. 호박 호박, 호박~~~ 호~~~~~박..!!
사 먹은 거, 직접 키운 거, 그리고 호박에 대한 보편적인 얘기들을 차례로 늘어놓도록 하겠다.
1. 먹은 호박
늙은 호박이 제철이던 작년 가을엔 그냥 집 근처 채소 가게에서도 지름이 35cm를 넘는 거대한 호박.. 무게가 거의 10kg, 개당 2~3만 원에 달하던 아이들을 구할 수 있었다.
이것들은 집에 두 달 정도 놔 두다가 잘 쪼개서 먹어 치웠다. 과육과 씨 모두 상태가 양호하고 맛도 달콤하고 좋았다.
그리고 요건 지난달 말과 이 달 초에 먹은 호박이다.
겉이 초록색, 속이 주황색인 호박은 품종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단호박도 아니고..;;
초록색 호박은 일반적인 누런 늙은 호박보다는 내구성이 부족한 것 같았다. 보관한 지 3개월쯤 되니 꼭지 부위부터 물러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즉시 도축을 해서 먹었다.
호박의 품종에 따라서 과육과 죽의 색깔도 살짝 차이가 나더라. 무슨 물감 같다^^
맛은.. 초록색 말고 누런 늙은 호박의 노란 죽이 더 달콤하고 좋았다.
뭔가 유월절 어린양을 잡는 심정으로 호박을 쪼개고,
서예에서 먹 갈듯이 인격 수양하는 마음으로 호박 껍질을 깠다.
호박죽이 완성되는 건.. 뭔가 끓는 물에 돌아가셨다가 3분 만에 부활한 라면교 교주를 영접하는 순간 같다~~ ㅋㅋㅋㅋㅋ
2. 키운 호박
이건 작년 10월 말.. 날씨가 추워져서 야외에서 개인적으로 키우던 호박들이 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수분돼서 맺히던 열매를 따서 먹은 것이다. 아주 파릇파릇한 애호박이니 열매 내부에 씨는 거의 생겨 있지 않다.
왼쪽은 지난 1월 말에 수분이 성공해서 실내에서 맺히기 시작한 단호박이다. 수분된 지 1주일 정도 지난 모습인데, 지금은 이때보다 색깔은 더 짙어졌지만 크기는 별 차이가 없다. 귤 내지 양파 정도 크기가 됐다.
그 반면, 오른쪽은.. 암꽃이 피긴 했지만 하필 주변에 수꽃이 없어서 수분되지 못하고 그냥 떨어진 호박 씨방이다. 아까비~~~
암꽃이 꽃가루를 받지 못하면 꽃이 시든 뒤에 씨방도 쭈글쭈글 말라 비틀어지고 떨어진다.
그렇게 되기 전에 얘를 미리 잘라서 씨방 위에 붙어 있던 꽃잎을 떼어내니, 암술은 여전히 붙어 있다. 이거 무슨 기계 부품을 분리한 것 같다.. ^^
호박 씨방이 요렇게 된 모습도 볼 일이 매우 드물 것이다.
아아~ 저 노란 암술 소켓에다가 수꽃 수술의 꽃가루를 묻혀 주면.. 꽃가루에 담겼던 유전자 정보가 저 씨방 안으로 전달된다..!!
수많은 정자 중에 단 하나만 난자와 합체를 하는 건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나중에 암술과 꽃잎 같은 부속품은 몽땅 떨어지고 없어지지만, 저 씨방은 그대로 부풀고 자라서 먹음직스러운 호박이 된다. ^^ 호박에서 북극의 꼭지 말고, 아래 남극의 배꼽 같은 부위는 과거에 꽃과 암술이 붙어 있던 자리라는 뜻이다~!!
호박은 충매화에 속씨+쌍떡잎식물이고 씨방이 꽃잎의 안이 아닌 밖에 있고, 암꽃과 수꽃이 따로 피는 덩굴식물이다.
살다 살다 중학교 과학 시간에 배운 내용을 다시 검색해 보게 됐다.
20여 년 전, 철도가 내게 학창 시절에 정말 싫어했던 역사· 지리 과목에 통찰을 주었다면..
호박은 학창 시절에 과학 과목 중에 제일 싫어했던 생물-_-에 통찰을 주고 있다. ^^
오른쪽의 저 씨방이 암술이 수분됐으면 왼쪽처럼 됐을 것이다.
피지 못한 왼쪽 씨방도 썩혀서 자연으로 돌려보내기엔 아까우니 내가 생걸로 그냥 꿀꺽 먹어 버렸다.
쟤도 콩알 같은 애호박이나 마찬가지이니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스티브 잡스가 회사 이름을 애플이라고 안 짓고 펌킨이라고 지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_=;;;; ^^
3. 벌레
애호박 말고 누렇게 잘 익은 '늙은 호박'은 내부 중심부가 막 깔끔하게 생기지는 않았다. 축축하고 걸쭉한 주황색 펄프들이 가득하고, 거기에 씨들이 매달려 있는 게 무슨 저그 건물 내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_=;;
그런데 호박이 그 상태로 오래 방치되면 씨들이 그 내부에서 스스로 싹이 나 버리기도 한다.
적당히 따뜻하고 축축하고 주변에 양분이 많다는 조건이 맞아서 발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주변은 온통 깜깜한 암흑천지일 것이고 뿌리 내리고 잎을 낼 만한 곳은 없다.
그러니 그 싹튼 줄기는 허연 콩나물 신세를 면치 못하며, 얼마 못 가 죽어 버린다. 흠..
어째서 이런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지는지 잘 모르겠다. 걸쭉한 주황색 펄프로도 모자라서 씨가 콩나물처럼 돼 있는 모습도 약간은 징그럽게 느껴질 수 있다.
그리고 내부 발아한 호박씨보다 더 징그러운 건.. 호박 내부에 구더기들이 들끓는 것이다. ㅠㅠㅠㅠㅠㅠ
이 아이는 표면에 아직 초록색이 남아 있고 표면이 유난히 오돌토돌한 게 좀 독특했는데.. 썰어 보니 ‘호박과실파리’ 구더기들 수십 마리가 중심부를 점령해 있었다.
이놈은 박과의 식물의 암꽃 안에다가 알을 까는가 보다. 그러면 열매가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중심부는 애벌레들이 파먹으면서 차차 변질되고 썩는다. 그래도 얘의 경우, 겉의 과육에는 그닥 피해가 없어서 대부분의 부위는 여전히 먹을 수 있었다.
이렇게 구더기에게 점령당한 호박 파편은 곱게 땅에 파묻기만 하는 식으로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걔네들이 정상적으로 번데기를 거쳐서 성충으로 자라 버릴 테니, 번거롭더라도 불이나 펄펄 끓는 물로 파편을 처리해서 유충을 박멸해야 한다.
4. 보석 호박과의 오해
흔히 늙은 호박은 출산 후 붓기의 해소에 좋다고 많이 알려져 있다. 실제로는 꼭 그렇지 않은가 보다.
"산후부종의 호박과 남과의 오용에 대한 문헌고찰" (안 상영 외, 한국 한의학 연구원) -- 대한한의학 방제학회지 제17권2호, 2009
요 논문에 따르면, 출산 후 붓기를 해소하는 데 효능이 있는 약재로 전통적으로 알려진 것은 늙은 호박이 아니라...;; 동음이의어인 보석 호박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게 훗날 채소 호박으로 와전된 거라고.. 엥...????
이 논문 내용을 바탕으로 현직 한의사가 건강 칼럼을 언론에다가 기고한 것도 몇 건 검색되어 나온다.
일단 동의보감에는 채소 호박이 절대 등장할 수 없는 게.. 그때는 조선에 호박이라는 채소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면 최소한 널리 보급되고 효능이 검증되기 전이다.
그런데 송진을 굳힌 보석 호박은 먹기는 어떻게 먹는 거냐..?? 달여서 먹나..?? 헐?? 좀 의외다.
5. '후박'과의 오해
울릉도에서는 오징어와 호박엿이 유명하다.
근데 이것도 호박엿이 아니라 원래는 후박엿이다. =_=;;
울릉도에 후박나무라는 게 많이 났다. 이 나무의 진액과 열매가 무슨무슨 효능이 있는 한약재이고, 이걸 넣어서 엿을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박씨 성을 나타내는 친숙한 한자 朴도 저 '후박나무 박'이다~!! 큼직한 과채류 박꽈 할 때의 박이 아니다. 그 박은 한자가 없는 순우리말이다.
근데 이게 소리가 와전돼서 호박엿이 돼 버렸고.. 이제는 울릉도에서도 원래 만들던 후박엿 대신, 진짜 호박을 집어넣은 호박엿을 팔게 됐다고 한다. 마라도에서 웬 뜬금없는 계기로 짜장면 장사를 하게 된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_=;;
뭐든지 호박으로 와전되는 건 좋은 일인 것 같다. 호박이 들어간 엿 말고 떡이야 이미 존재하고 있으니까..
우리 모두 호박 많이 사서 관상용으로 놔두고, 먹기도 많이 먹자~!! ^^
꼭 저런 게 아니어도 호박은 그냥 보기에 좋고 몸에도 좋고 맛도 좋기 때문이다.
끝으로 보너스.
이건 요 최근에 포천에 있는 '왕뎅이선생'이라는 한정식 식당에서 너무 반가운 아이들을 목격하고 사진을 찍은 것이다.
음식과 별개로 식당 주인이 호박 농장을 직접 운영하거나 인맥이 있는가 보다. 난 지름신이 당연히 강림하여 두 덩이를 사 왔다. ^^
호박이 폭삭 늙어서 색이 누래진 걸로도 모자라서 표면에 흰 가루 같은 것까지 앉는 건 아주 좋은 징조이다. 이래서 호박한테만 '늙은'이라는 수식어를 쓰는가 보다. 이건 사람의 흰머리만큼이나 영예로운(?) 변화이다.
그 반면, 파릇파릇 초록색이어야 할 호박 잎에 흰 가루가 끼는 건 병이며, 좋지 않은 현상이다. 이런 차이가 있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