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은 중학생이던 1996년 말, 친구 집의 컴퓨터를 통해 우연히 툼 레이더라는 게임을 접했을 때의 충격을 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페르시아의 왕자 같은 파쿠르 액션이 full 3D로 구현되어 나오고 게다가 주인공이 듀크 뉴켐스러운 마초 근육맨이 아닌 아리따운 아가씨라니!
툼 레이더 시리즈는 전세계적인 히트를 쳤으며 게임 주인공인 라라 크로프트는 역사상 가장 성공한 사이버 모델이 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롤스로이스에 이어 또 '영국'이 만들어 낸(냈던) 명작에 대한 리뷰를 좀 써 보겠다.

본인은 예전에도 몇 차례 글을 썼듯이, 비디오 게임의 역사 중에서 3차원 그래픽 기술이 막 도입되던 1990년대 중· 후반의 과도기가 가장 흥미진진한 시절이었다고 생각한다.
id 소프트웨어의 엔진이 울펜슈타인, 둠, 퀘이크를 거치면서 발전해 가던 시절,
2.5D와 완전한 3D 사이의 과도기이던 켄 실버맨의 빌드 엔진을 쓴 게임(듀크 뉴켐, 섀도우 워리어),
목각인형에서 진짜 사람으로 발전하던 버추어 파이터 시리즈,
실사 사진을 쓰다가 최초로 3D 폴리곤으로 바뀐 모탈 컴뱃 4 등등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툼 레이더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안 그래도 엔하위키나 한국어 위키백과는 각 시리즈 별 설명이 부실한 편이기도 하니 한번쯤 이런 내력을 나열해 보는 것도 흥미롭지 싶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1

그야말로 전설이 아닌 레전드를 창조한 첫 작품이며, PC 플랫폼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도스를 지원했다. 눈이 종종 쌓여 있는 숲, 광활한 고대 유적지, 피라미드 등을 돌아다니면서 말 그대로 묘지를 터는 본분에 충실한 형태였다. 몹 중에 인간은 흔치 않았던 걸로 기억하며, 혼자서 퍼즐을 풀어 나가는 비중이 컸다.
1부터 3까지는 같은 엔진 기반으로, 그래픽이나 게임 진행이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

※ 2 (starring Lara Croft)

1이 대성공을 거둔 뒤, 2부터는 도스 대신 Windows용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2는 1에 비해 폴리곤 수가 늘어서 라라가 아주 약간 더 예뻐졌으며, 기술적으로 무리였던 팔랑거리는 말총머리가 드디어 구현되었다.
그리고 동적 광원을 구현하면서 flare(섬광탄) 아이템이 첨가되었다. 그리고 물에는 언제나 수영만 있던 것과 달리 얕은 물에서 걷는 wading이 추가되었으며, 암반을 오르는 climbing이 추가되었다.

2는 첫 시작을 만리장성에서 하고, 결말부에서 최종 보스도 용일 정도로 배경에 중국에 대한 비중이 가장 높다. 1보다 대인 전투의 비중이 높아졌으며 무덤 말고 도시, 선박 등 인간이 만든 시설도 많이 등장한다. 무기는 샷건뿐만 아니라 M16 소총, 작살총도 추가되었다.
보트나 스노우모빌 같은 탈것을 이용하는 동작도 처음으로 추가되었다. 생각해 보면, 주인공이 탈것을 이용할 수 있는 아케이드 게임은 매우 드물다. 용 정도나 타는 옛날 황금도끼 말고 딴 게 뭐 있었던가??

※ 3 (라라 크로프트의 모험)

3은 2와 같은 맥락으로 더 큰 변화가 이뤄졌다. 그래서 단순한 유적지 털기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로 전세계 방방곡곡을 배경으로 한 액션 어드벤처로 바뀌었다. 덕분에 게임 배경이 역대 툼 레이더 시리즈 중 가장 넓어서 인도, 남태평양 섬, 남극, 미국 AREA 51, 런던 자택 근처가 레벨로 모두 등장한다. 그리고 각 레벨별로 라라의 복장도 가장 다양해졌다. 지역별로 레벨 플레이 순서를 사용자가 임의로 선택할 수 있는 시스템도 3이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갖추고 있었다.

기술적으로 보자면 라라에게는 그냥 달리는 게 아니라 기력을 소비하면서 잠시 동안 전력질주를 하는 sprinting이 추가되었으며 엎드리기(crouching), 천장을 잡고 건너기 같은 동작이 추가되었다. 그래픽이 개선된 건 총기 격발 후에 발생하는 탄피와 연기 흔적, 그리고 물에서 나타나는 특수효과가 일부 개선된 정도다. 슬슬 엔진의 약발이 다할 때가 되고 있었고, 라라 팬으로부터 불만도 들어오고 있었다. 3이 이룬 것은 같은 시스템 하에서 단순 양적 팽창 위주일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다음 편부터는 시대에 맞추어 엔진이 교체되었다.

※ 4 (마지막 계시)

프로그램이 처음부터 싹 다시 개발되었다. 시작 화면, GUI 글꼴 같은 게 전부 바뀌었다. 여권 수첩 형태의 메뉴나 동그란 고리 형태로 나오던 인벤토리 링도 다 없어졌다.
4는 오로지 이집트 주변만 공략하여 순수하게 유적지 털기 미션으로 되돌아갔으며, 라라의 의상도 시종일관 기본 단일 복장으로 바뀌었다. 그렇잖아도 툼 레이더 4가 나온 1999년은 <미라>(Mummy)라는 영화가 인기를 끌었던 해이기도 해서 더욱 이집트스러운 기억이 깊게 남아 있다.

4는 엔진이 교체되면서 그래픽이 예전보다 대대적으로 향상되었다. 드디어 모든 텍스처에는 하이컬러 안티앨리어싱이 적용되기 시작했고 라라의 외형도 더욱 매끄럽고 예뻐졌다. 복잡한 지형에서 발생하던 1~3 엔진 특유의 그래픽 glitch가 거의 다 사라졌다. 3에서 바뀌었는지 4에서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이템이 여전히 2D 스프라이트로 표현되던 것들도 드디어 순수 폴리곤으로 바뀌었다.

4에서는 예전 시리즈에서 전통적으로 등장하던 라라 저택 연습 미션이 없어졌고, 그 대신 게임 전반부에서 라라가 어렸을 때의 모습이 잠깐 나온다. 그리고 줄을 타고 오르는 동작이 추가되었으며 여러 아이템을 조립해서 새로운 아이템을 만드는 시스템이 도입됐다. 또한, 4는 역대 툼 레이더 시리즈 중 레벨 수가 가장 많고 플레이 시간이 가장 길었다고 한다. 그 중 열차 안에서 미션을 수행하는 사막 열차 레벨은 상당히 참신한 디자인.
이 게임의 엔딩은 라라가 죽는 걸(최소한 그걸 암시하는)로 끝난다. 왜 그 잘 나가는 캐릭터를 죽이는지, 시리즈를 벌써 종결지으려는 건지 제작사의 의도를 알 수 없는 대목이다.

※ 5 (크로니클 연대기)

1부터 5까지는 각각 1996년부터 2000년까지 1년 간격으로 그 해의 하반기에 제품이 출시되었다. 5편인 크로니클은 4편과 거의 같은 엔진 기반에 컨텐츠만 다르다. 라라 크로프트는 죽고 없는데 그녀가 살아 생전에 남긴 무용담을 회상하며 플레이한다는 설정. 그래서 3편만큼이나 다양한 복장으로 과거 유물과 현대 도시를 아우르면서 다양한 미션을 수행한다.

5는 이상한 설정으로 인해 예전 시리즈만 한 대박은 못 친 걸로 본인은 기억한다. 다만, 이때 제작사가 무슨 생각이 있었는지 상당히 대인배적인 조치를 취했는데, 바로 레벨 에디터를 게임과 더불어 공식 배포했다. 스타크래프트로 치면 걸출한 캠페인 에디터인 StarEdit인 셈.

덕분에 툼 레이더 4~5 엔진은 내가 알기로 역대 툼 레이더 시리즈들 중 단순 의상 패치 이상으로 full-featured custom 레벨 MOD가 존재하는 최후의 엔진이다. 그래서 인터넷엔 라라 크로프트 하앍하앍 하는 전세계의 양덕후들이 만들어 올린 custom 레벨 파일 및 플레이 동영상들이 즐비하다.
1~3 엔진은 에디터가 있다 하더라도 요즘 기준으론 그래픽이 너무 심하게 후져서 별로. 4~5 엔진 정도는 돼야 그나마 할 만하다.

※ 6 (어둠의 천사 AOD)

툼 레이더의 제작사인 코어 디자인은 라라 크로프트라는 희대의 대박 아이템이자 황금알 낳는 거위를 창조해 놓고는 영업이랄까 운영을 썩 잘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 3에서 4로 넘어갈 때 좀 혁신을 한 걸 제외하면, 계속 같은 엔진과 게임 시스템만 지겹게 우려먹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배가 산으로 가는 듯한 스토리를 전개하며 4편에서 라라 크로프트를 덥석 죽여 버린 건 팬들의 원성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런 와중에 거의 3년간의 침묵을 깨고 툼 레이더의 다음 시리즈인 어둠의 천사가 나왔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기술은 분명 크게 발전했다. 물리 엔진이 도입되었고 라라의 손발 모션은 지형을 반영하여 더욱 자연스럽게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픽 디테일 레벨을 올리면, 그림자도 그냥 바닥에 시꺼먼 타원으로만 나오는 게 아니라 실제 광원과 라라의 체형대로 나오기 시작했다.

다만, 이 작품에서 라라 크로프트는 과거에 죽었다가 아무 개연성 없이 불쑥 살아서 돌아왔으며, 고대 유적지를 돌아다니는 묘지 도굴꾼 컨셉에서도 더욱 멀어졌다. 전통적인 복장 대신 군복과 청바지 차림으로 의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6은 기술의 진보는 분명 있었으며 국내에서는 툼 레이더 시리즈 중 최초로 완전 한글화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저런 괴상한 정체성과 많은 버그들 때문에 완성도가 떨어지고 뭔가 핀트가 안 맞는 작품으로 전락했으며,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 7 (레전드)

툼 레이더의 본디 제작사이던 코어 디자인은 6 이후로 제작사 타이틀을 반납하고 그저 그런 게임 개발사로 남아 있다가 2007년쯤에 망했다. 그 뒤 툼 레이더의 개발은 영국이 아닌 미국의 크리스탈 다이나믹스로 넘어갔는데 얘가 툼 레이더 시리즈를 다시 물건으로 회복시켜 놓았다.

2006년 봄에 출시된 레전드는 툼 레이더의 '제2기' 시대를 열었다. 툼 레이더의 기본 복장이 되돌아왔으며 유적지 탐험 패턴도 복귀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조작도 다 뭔가 현대적인 감각으로 바뀌었다. 언제나 자동 세이브가 되고 굳이 별도의 키를 누르지 않아도 절벽에서는 자동으로 매달리는 등, 퍼즐 난이도는 예전보다 더 쉬워졌는데 이건 요즘 게임기용 게임들의 추세가 다 그런 게 아닌가 싶다.

레전드에 대한 반응은 전반적으로 좋았다. 하지만 예전하고는 너무 이질적으로 바뀐 게임 시스템에 대해서는 게이머들 사이에 호불호가 갈리기도 했다. 맨날 동료하고 얘기를 주고받는 것도 예전에는 없던 관행이었으니까.
아무튼, 이렇게 레전드로 희망찬 데뷔 선언을 한 크리스탈 다이나믹스는 그 이듬해에 Anniversary라고 불리는 시리즈도 내놓았다. 이것은 툼 레이더 1을 오늘날 스타일로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 8 (언더월드)

레전드의 명성을 계승한 후속 시리즈이다. 라라 크로프트가 배를 타고 세계 각지를 이동하면서 미션을 수행한다. 덕분에 레전드에 비해 잠수와 수영의 비중이 더 높다. 고전 복장은 사라졌으며, 그나마 이것과 가장 비슷한 복장은 태국 숲 미션에서 입는 까만 셔츠와 핫팬츠 복장이다.

라라 크로프트의 집이 난장판이 되는 건 옛날에 2의 맨 마지막 레벨 Home Sweet Home에서 침략자들과 총격전을 벌이는 게 전부였는데... 이번 언더월드에서는 첫 미션에서 집이 불바다가 되는 걸로 시작한다. 그래서 집에서 겨우 빠져나왔는데.. 이번엔 레전드 시절의 동료가 라라에게 무슨 원한이 생겼는지 권총을 쏴 댄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다행히 원한을 살 만한 짓은 라라가 아니라 라라의 도플갱어의 소행으로 밝혀져 오해는 나중에 풀리지만... 스토리 전개가 재미있다.

도플갱어라.. 옛날에 1편에서 베이컨 라라가 있긴 했고.. 더 옛날 고전 게임 중엔 페르시아의 왕자 1에서도 왕자를 골탕먹이다가 나중에 합체하는 영혼 도플갱어가 있었다. 정말 별의 별 걸 게임에다 다 집어넣었다.

※ 9

자... 1996년 이래로 근 15년간 라라 크로프트를 쌍권총 찬 고고학자로 우려먹어 온 건 약발이 다한 모양이다.
크리스탈 다이나믹스는 5년간의 잠수 끝에, 이제 예전의 스토리를 다 뒤집어엎은 리부트작을 내놓았다. 이 작품은 1편과 마찬가지로 부제가 없이 이름이 그냥 툼 레이더이다.

라라는 더욱 어려졌으며, 도도한 특수요원 같은 이미지가 아니라 이제 막 생존술을 터득해야 하는 연약한 여고생/여대생 컨셉으로 바뀌었다. 어린 라라 떡밥은 지난 4편에서 잠시 등장한 적이 있지만 그걸 떠올려서도 물론 곤란하겠다. 예전의 라라가 인디아나 존스 컨셉이었다면, 지금의 라라의 위상은 거의 생존왕 로빈슨 크루소나 심지어 베어 그릴스-_-를 생각해도 될 것 같다.

9의 설정상 배경은 일본 열도 인근에 있는 어느 섬이다.
사실, 툼 레이더 시리즈에서 일본이 등장하는 것 자체가 코어 디자인 시절에는 없었고 크리스탈 다이나믹 때 레전드와 9에서 딱 두 번이었다. 코어 시절에 툼 레이더의 배경은 오히려 중국, 네팔, 티베트 같은 대륙이 더 자주 등장했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서 한국은 영토가 너무 작기도 하고 게임이나 영화 같은 매체에 선뜻 등장하기에는 정치적 민감성도 크고 역시나 콩라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픽이야 뭐, 피부에 핏자국이 묻고 각각의 머리카락들이 찰랑거리는 걸 볼 수 있을 정도로 사실에 가깝게 발전했다.
AOD에서 레전드로 넘어갈 때를 능가하는 엄청난 쇄신이 있었는데, 반응은 역시 좋은 편이다. 9 이후로 툼 레이더 시리즈가 과연 또 어떻게 변할지가 궁금해진다.

Posted by 사무엘

2013/12/07 08:32 2013/12/07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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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포도같은블루베리 2013/12/07 08:37 # M/D Reply Permalink

    의외로 젊으시네요. 좀 더 나이가 드신 분이라 생각했어요.

    1. 사무엘 2013/12/07 13:26 # M/D Permalink

      하하, 반공 성향 강한 것과 옛날 프로그래밍 얘기를 많이 하는 걸 보면, 제 나이가 많게 느껴질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전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평균보다 좀 일찍부터 시작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중학교 시절엔 저는 아직 C/C++도 몰랐어요. ^^

  2. 김 기윤 2013/12/10 17:16 # M/D Reply Permalink

    어렸을 적에 툼 레이더 2를 했던 기억이 나는데다가, 마침 최신작(위에 설명된 9 버전)에도 관심이 있었고, 스팀에서 툼 레이더의 모든 시리즈(!!) 를 묶어서 팩으로 할인 판매를 한 적이 있길래, 지른 적이 있습니다.

    툼레이더 2는 어릴적에 진행했던 건 전체 볼륨의 반도 안되는 양이었다는 것에 좌절했고, 9 는 진행이 막혀서 봉인 상태이고, 나머지 버전은 건드리지도 않았네요. 툼레이더 1은 단지 도스 박스 위에서 돌린다는 것(=도스 버전이라는 것)에 놀랐구요.

    어쨋던 팩으로 구매했기에, 모든 툼 레이더 시리즈를 정품으로써 언제든지 플레이 가능한 환경은 되었는데, 정작 손은 잘 안가는 느낌입니다... 명작이긴 한데, 딱히 해야 한다는 느낌은 받기 힘든?ㄲㄲ

    1. 사무엘 2013/12/11 04:33 # M/D Permalink

      저는 데모 형태로조차도 전혀 접해 보지 않은 버전은 어둠의 천사, 언더월드, 9 정도네요.
      다들 컨텐츠가 굉장히 많고 플레이 시간이 길긴 합니다. 제 정도의 게임 실력으로는 공략집 없이 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난이도이기도 했구요.
      PC 통신 내지 잡지로 공략 보면서 퍼즐을 풀어 나가던 추억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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