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숙명론

(1) 하나님이 태초에 천당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을 다 예정해 놓았고 다 로보트 조종하듯이 움직인다는 말은 완전히 잘못됐고 거짓이고 오류이다.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만.. 그런 거라면 죄에 대한 책임도 인간이 아니라 신에게 있어야 마땅하다. 나는 그런 나쁜 신은 믿고 싶지 않으며, 내 블로그에 당당하게 소개하지도 않는다.

(2) 하긴, 그러고 보니 구원 여부뿐만 아니라 성경의 영감에 대해서도 그런 식의 오해가 많은가 보다. 하나님이 사람을 갑자기 무아지경에 빠지게 하고 정신줄을 놓게 만든 뒤 신들린 듯이 조종해서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글을 의식의 흐름대로 휘갈겨 쓰게 해서 성경을 완성시켰다...??? 무슨 울날랄랄따따따 방언의 손글씨 버전처럼? 절대 그렇지 않다.
제정신으로 자기 의지대로 쓴 글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숨결이 자연스럽게 깃들고 권위가 선 것이다. 자필 원본뿐만 아니라 킹 제임스 성경도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3) 하나님 쪽에서 인간이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죄값을 미리 다 치렀고 구원의 길을 모든 인간 누구에게나 공짜로 마련해 놓으셨다. 그러나 인간 쪽에서도 그 사실을 "자기 의지로 동의하고" 그 선물을 자발적으로 믿고 받아들여야 그게 그 개인에게 실제로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인간이 자기 믿음을 행사해야 하지, 그것조차 무슨 믿음을 따로 받아야만 구원받는 게 절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받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받고 그걸로 구원받을 뿐이다.

2. 양 극단 오류

성경은 "행위 없이 믿음으로 은혜로 주어지는 구원, 영원히 보장되는 구원"을 말한다. 이걸 배배 꼬아서 행위 구원 내지 "죄 지으면서 계속 회개하지 않으면 다시 구원 상실" 이러는 것은 아주 비성경적인 오류이다.
대한민국 땅에 들어온 북한 주민은 그 어떤 흉악범죄를 저질러도 북한으로 도로 송환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신체의 자유와 각종 권리, 재산을 빼앗기고 교도소나 사형장에서 인생을 마치게 될 수 있다. 그것처럼 크리스천은 죄를 계속 지을 경우, 구원이 영원히 보장된다 해도 다른 잃을 게 아주 많다. 간증, 예수님과의 관계, 보상, 최악의 경우 건강과 생명 등등..

다시 말하지만 구원의 영원한 보장은 마음대로 죄 지어도 된다는 프리패스가 절대 절대 아니다.
선행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고 하니까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았으니까 무슨 죄 짓고 회개를 할 필요가 없다느니, 요일 2:27을 단단히 오남용해서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느니 이상한 해괴망칙한 도덕성 해이와 양심마비를 조장하는 헛소리가 일각에서 나도는가 보다. 구원과 관련된 양 극단 오류에 현혹되지 말라.

3. 인과관계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한 주 원인은 창세기에서 묘사되어 있듯이 동성애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에스겔서에서는 의외로 뱃대지 부름과 게으름(16장)이 지목되며, 동성애를 옹호하는 좌독들은 이걸 거론하는 걸 더 좋아한다. 둘은 상호 모순인 걸까..??
그렇지 않다. 뱃대지 부르고 게을러지고 군기가 빠지고 사치 향락에 빠지고 타락하면서 결과적으로 최악 막장인 동성애까지 탐닉하게 된 것이다. 둘을 배타적인 상호 별개 대립 관계로 볼 게 아니라, 총체적으로 종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성경에는 이런 관계인 개념 쌍이 가끔 나온다. 믿음과 행위, 구원과 침례도 전자의 결과가 후자로 이어지는 걸로, 이들은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어쩌면 상관을 넘어 인과관계라고 볼 수도 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있는 건 구원이라는 자동차 엔진이 내 안에서 시동 걸려서 돌아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외부에서는 차가 실제로 굴러가는지, 물리적으로 일을 하는지 여부만을 볼 것이다. 그걸 입증해 보이려면 변속기를 D를 눌러서 엔진을 바퀴와 연결하고 차를 실제로 굴려야 한다.

옛날에 "가장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이다"라는 인종차별적인 말이 있었다. 그 사람은 인디언이 맞긴 하지만 죽었기 때문에 더는 백인들을 귀찮게 하지 못하고 원래 자기 종족들의 전통을 지키지 못한다.
같은 맥락으로 사탄 마귀의 입장에서는 "가장 좋은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이지 않겠는가? (약 2:17,20) 아무리 200마력, 1000마력짜리 엔진 자체는 레알이어도 변속기가 P, N에만 머물러 있으면? 예수 믿는 우리의 믿음이 역사하는 힘을 잃고 밖으로 입증하지 못하는 '죽은 믿음'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 침례는 구원의 수단 내지 조건인가?

4. 행 2:38

행 2:38과 막 16:16은 "침례라는 행위가 구원의 선행 조건이란 말인가~~~"를 갖고 많은 논란을 일으키는 난해 구절인 것 같다.
이것 때문에 말보회 한킹은 "죄사함 받기 위해 침례"가 아니라 "죄사함 받았으니까 이로 인한 침례"라고 for을 특이하게 번역하기까지 했다.

이 전통적인 문제를 회피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인 것 같다.

(1) 먼저, 그게 별개가 아니라고 반박하는 관점이 있다. 저기서 침례라는 건.. 믿었으니까 자연스럽게 뒤따르고 이어진 반응일 뿐이다. 쉽게 말해 '영접기도'나 마찬가지라는 것.
"저요 저요, 선물 좀 주세요"라고 의사 표현을 하는 것조차 무슨 선물에 대한 값을 치르는 짓이라고 매도하는 바보는 없다. 저 상황에서 영접기도 하는 걸 행위라고 트집잡는 건 그냥 생트집일 것이다. 회개(믿음) 따로 침례 따로도 비슷한 방식의 어거지이다.

약간 원천봉쇄 오류 같은 냄새가 안 나는 건 아니지만 일면 수긍은 간다.
막 16:16 명제를 봐도 p는 "믿고 침례받는 자"이지만, ~p는 그냥 "믿지 않는 자"이다. "침례 안 받는 자"에 대한 언급은 없다.

(2) 다음으로, 저 구절들은 현재의 신약 크리스천에게 100% 직접 적용되는 구절이 아니라고 반박하는 관점이 있다.
막 16:16의 바로 다음 구절을 보면.. 믿는 자가 마귀 내쫓고 방언(?) 터지고, 뱀들 집어올리고 독약 마셔도 안 죽고, 아무 환자한테나 손만 얹으면 병이 바로 낫고.. 등등등 '사도들의 표적'이 나온다.
헐~ 그게 지금도 존재한다고 사람들을 홀리는 "은사주의자"가 있긴 하지만 그건 일단 논외로 한다. (저 표적들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한 치의 예외 없이 내 눈 앞에서 즉시 행해 보시라)

17~18절의 표적이 지금 끝나서 존재하지 않는 것과 동급으로 16절은 지금 우리에게 문자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행 2:38도 마찬가지. 앞의 본문을 읽으면서 문맥을 살펴보시라.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 동참했던 그 당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서 조금은 추가적인 회개 정산 절차가 필요했다. 이거 자연스러운 논리이지 않은가?

리 승만 할배가 아들에게 유언 남길 때도 "울나라는 세계 모든 나라들과 통상하며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 하지만 일본하고는 워낙 특이한 과거사가 있기 때문에 우리만의 고유한 정책이 있어야 할 거다" 이랬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예수님-유대인이 무슨 한일 같은 대등한 관계인 건 아니고, 저 말이 울나라는 일본과는 영원무궁토록 생까고 원수지간으로 지내라는 말도 아니다. 하지만 고유한 화해 절차나 과거사 청산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런 차원에서 그 당시 유대인들은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서 성부 성자 성령도 아닌 '예수'만의 이름으로 특별한 회개의 침례가 먼저 필요했다고 받아들이는 거.. 이 역시 충분히 자연스럽고 수긍이 간다. (복음서에 나오는 성령 모독죄만 해도 성육신한 예수님의 동시대 사람들만 지을 수 있는 죄이지 않던가?)

결국 저런 구절들은 1번과 2번을 감안해서 이해하면 된다고 목사나 교사가 보충 설명해 주면 될 것 같다.
침례는 교회에서 직분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충분히 내걸 만하다. 그러나 교회 회원으로 가입하기 위한 조건은 조금 아리까리하니 생각을 해야 할 것 같고, 하물며 개인 구원 조건이 돼서는 교리적으로 절대 안 될 것이다.

이게 무슨 니 목숨 바쳐 순교를 하라는 소리도 아니고, 구원 조건도 아니고.. 평생에 물놀이나 목욕 한 번 못 하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는가? 침례가 너무 힘들고 번거로워서 시행하지 못한다는 말은 변명이 되지 않는다.

5. 벧전 3:21

그리고 다음으로 벧전 3:21이 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왕년에 행 2:38에서 침례와 관련하여 오해하기 쉬운 논란의(?) 발언을 남겼는데.. 나중에 베드로전서에서도 고난에 대한 권면· 격려를 하던 중에 좀 어려운 말을 툭 던졌다.

앞의 19~20절부터 살펴보자면.. 예수님이 그 옛날 노아의 홍수 시절의 악인 내지 악령들과 접점이 있었다는(그들에게 말씀 선포) 생소한 얘기가 나온다. 노아의 홍수 때 생존한 사람이 딱 8명밖에 안 됐다는 얘기와 함께 말이다.
21절은 "그 옛날 사건이 바로 여러분을 구원하는 침례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어쨌든 baptism saves us/you 이런 것처럼 번역이 많이 돼 있다.

비록 그 내부 메커니즘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란 게 있다는 단서가 명시돼 있긴 하지만.. 어쨌든 이 말만 읽어보면 우리 입장에서는 침례가 구원의 조건인 것처럼 읽힌다. 킹/비킹 막론하고 말이다. 어찌 된 일일까?
오죽했으면 개역성경이나 말보회 한킹은 "물은 우리를 구원하는 모형이고 이게 곧 침례이다".. 침례 구원론을 피하려고 말을 임의로 좀 바꾼 듯하다. 좋게 말하면 교리적으로 오해 여지가 없지만, 삐딱하게 보면 출발어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번역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엔 21절의 난해함은 20절의 표현과 연계해서 생각하면 그럭저럭 풀 수 있을 것 같다.
baptism doth also now save us가 어색하기에 앞서 앞의 eight souls were saved by water도 동급으로 어색하다. 아니 saved by grace도 아니고 왜 by water이지?
20절에서 물은 구원이 일어나는 밑밥 배경일 뿐, 구원을 실질적으로 이루는 수단· 방법이 아니다. by에 전자의 의미도 있는 것 같다.

모형이라고 했으니까 진짜 말 그대로 "노아의 가족의 생존: 물: 방주"랑.. "우리 신약 성도의 구원: 침례: 예수 부활" 이렇게 비례식을 세워서 생각하면 될 듯하다.
빵과 잔이 진짜 주님의 살과 피가 아니라 상징일 뿐이듯, 침례도 구원과 관련된 상징일 뿐이다. "침례는 구원의 모형이고, 노아의 홍수 사건은 침례의 모형이다. 물과 노아 가족 구원의 연관성만큼이나 침례와 성도 구원이 관련돼 있다?" 베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이 정도인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걸 '모세에게 침례를 받은 것'에다가 비유했다. 거 참 심오하고 난해하다. 그러니 노아의 홍수도 얼마든지 침례에다 비유할 수 있겠다.
그리고 성경의 심상은 어떤 경우든 물에 온몸이 잠기고 젖는 것이지, 물방울 조금 뿌리고 마는 수준은 아니어 보인다.

Posted by 사무엘

2024/04/08 08:35 2024/04/0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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