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마 빈 라덴이 죽은 지가 벌써 4년이 넘었다.
저 한 사람을 잡으려고 미국이 정말 얼마나 천문학적인 돈(= 국민 세금)을 쏟아부어야 했는지를 생각하면 아마 치가 떨릴 것이다.
정확한 근거는 모르겠다만, 한때 미국 해병대 내부에서는 "빈 라덴을 용서하는 것은 신이 하실 일이겠지만, 둘의 만남을 주선하는 것은 우리 일이다."라는 대박 간지 넘치는 모토가 설정돼 있었다고 한다. 짱이다. 같은 메시지도 단어만 바꾸면 저렇게 센스 넘치게 표현할 수가 있구나!

뱀발을 내밀자면, 비슷한 패턴의 대사가 테이큰 3에도 있었다.
"내게 이틀만 주시오. 그러면 내가 무죄인 것과 진짜 범인이 누군지를 모두 입증해 보이겠소!"
"밀스 씨, 당신의 무죄 여부는 법정에서 판단할 일이지 내 관할이 아니오. 내가 할 일은 당신을 붙잡아서 법정에 세우는 일이지. 단지 그 뿐이오.
당신이 그 길로 도주한다면 LAPD(로스앤젤레스 경찰국), FBI, CIA가 모두 당신을 찾아 나설 것이고 당신을 저지시킬 거요."
"굿 럭." 아, 뿅 갈 거 같다.

뭐, 빈 라덴은 실제로 신에게서 용서받았을 확률은 매우 희박하며(단순 악행 때문만은 아님), 정작 실제로 둘의 만남을 주선한 것도 해병대가 아니라 해군 대테러 특수부대였다.
그 시절을 좀 회상하자면, 그는 하필 킹 제임스 성경 반포 딱 400 주년 당일에 사살당했다. (2011년 5월 2일) 이건 뭐 그냥 우연이라 치자.
듀크 뉴켐 포에버는 원래 북미 기준으로 5월 3일에 나오려 했는데 마지막으로 딱 한 번 더 연기돼서 6월 10일로 낙점됐었다.

이렇게 빈 라덴을 사살하기 위해서 미국은 전국, 전세계 각지에서 놈의 근황과 행동을 추적하고 치밀한 첩보 활동을 벌여야 했다. 미국은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나라이고 그만큼 적도 많으니까.
세계 각국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방첩 활동을 하는 국가 기관이 있다. 그것이 우리나라는 한때는 중앙정보부, 안기부였다가 지금은 국가정보원, 혹은 국정원이다. 미국이나 이스라엘처럼 국내· 국외가 나뉘어 있지는 않고 단일 기관이다.

전철 안에서 111 신고 전화를 홍보하면서 "국가정보원에서는 마약, 국제범죄, 테러, 산업 스파이 등 ..." 어쩌고 하는 방송을 종종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요즘 국정원에서 실제로 하는 일은 예전만치 오로지 대공· 대북 업무보다는 제3세계 산업 스파이 단속의 비중이 더 크다. 이런 교묘한 범죄를 잡아 내는 건 경찰만으로는 증거 확보에 어려움이 있는 관계로, 불시에 확 덮쳐서 범죄 순간의 스냅샷을 떠 주는 전문 첩보 기관의 도움이 필요하다.

국정원 요원은 딸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익을 지키기 위해서 진짜로 리암 니슨처럼 어디에 위장해 들어가고 감시하고, 필요하다면 폭력도 쓰고 희대의 난폭운전도 벌이는 등 별 짓을 다 해야 한다. 그러다 들키면 납치· 고문· 살해 등을 당하기도 하고 이때 모기관으로부터는 필요하다면 "우린 저런 요원을 보낸 적 없는데? 모름." 버림받기까지 하는 것도 국익을 위해 감수해야 한다.

국정원이 워낙 뽀대와 간지가 나고 연봉과 복리후생이 좋다고는 하지만, 그걸 다 공짜로 제공해 줄 리가 없으니.. 그저 간지만 보고 도전할 만한 곳이 결코 아니다. 임기응변과 근성, 예리한 관찰력이 부족한 사람, 그 어떤 사람과도 친근하게 붙어서 원하는 정보를 얻을 정도의 화술과 사회성을 갖추지 못한 사람, 일반인 평균 이상의 지력과 체력이 없는 사람, 미행을 티 안 나게 못 하고 어디서든 거짓말을 실감나게 못 하는 사람은 저런 기관에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특히, 자기 분야의 밥벌이 기술만 평생 연마하며 살고 싶은 사람, 처자식과 평범한 가정 꾸리고 가정적인 남편이 되고 싶은 사람은 더욱 가지 말아야 한다. 고로 국정원 같은 곳은 본인에게 맞는 직장은 전~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정원 요원 신입 공채는 SKY 출신에 외대 출신들이 대거 몰려 경쟁률이 몇십~100몇십 대 1이라고 한다.

본인이야 인간의 죄성의 본질을 아는 크리스천으로서, 절대악을 다스리기 위해 불가피한 필요악의 존재에 대해 긍정적이다. 북한 같은 절대악이 있는 우리나라 같은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그 필요악이 옛날에는 잡으라는 빨갱이는 안 잡고, 반공을 빌미로 도리어 자국민에게 나쁜짓을 한 것도 있음은 사실이다. 그래서 첩보 기관인 국정원 역시 대국민 이미지가 아직까지도 마냥 좋지만은 않다.

이런 위압적이고 코렁탕 스러운-_-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서인지 국정원에서는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꽤 오래 전부터 한 달에 두 번꼴로, 국정원 요원이 하는 일이나 당할 만한 일을 소재로 추리 퀴즈를 연재하고 있다. 국정원 요원이 반쯤은 탐정 같은 일도 하는구나. 기출문제가 이미 몇백 개나 쌓여 있다.
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본 사람들은 어지간히 뻔한 설정이나 스토리, 클리셰를 보면 다음 장면이 바로 예상이 되듯이, 추리 소설 덕후들은 딱 보면 바로 답이 나올 정도의 난이도라고 한다.

추리소설의 설정에만 파묻히면, 마치 Doom 2를 너무 많이 한 것처럼 정말 세상에 어디 믿을 놈 없고 기술을 어디 팔러 홀몸으로 나갔다가는 반드시 살해당할 것만 같고, 마약 조직이나 사이비 종교에 있다가 탈출하게 되면 정말 목숨을 부지 못할 것 같다.
시신을 전기 장판으로 덮어서 따뜻하게 유지해서 체온 감소로 사망 시각을 추정하지 못하게 하는 건 2008년 부산 청테이프 살인 사건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이걸로 모티브를 딴 건지?
또한 커피에 독을 타서 누구를 독살한 건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이 어린 시절에 비슷하게 당한 일이다. 국정원 간부라면 역사· 시사· 상식의 달인일 테니 이런 것에서도 소재를 차용했을지도 모르겠다.

추리 문제를 푸는 건 어찌 보면 거짓 증언에서 설정 오류를 찾아내는 것이니, 역덕후들이 사극을 보면서 고증오류 찾아내며 낄낄대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뭔가 교집합이 있다. 나 같아서도 당장 떠오르는 철도 추리 퀴즈는 전철이 절연구간에 진입해서 좀 어두워졌을 때 객실에서 무슨 살인 사건이 터졌고, 어느 철도 덕후 탐정이
"범인이 제시한 사진은 합성· 조작된 것입니다. 2014년에는 아직 수인선 전철이 거기까지 개통하지 않았습니다."
"그 복복선 선로 구간에서 일반열차가 내선을 주행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데서 단서를 찾아내면 무척 아름다운 이야기가 완성될 것 같다.
이와 관련된 본인의 옛날 글을 한번 보시라. 거기서도 이미 '셜록 홈즈' 같다는 댓글이 있었다. ^^

실제로, 국정원 추리 퀴즈 기출문제들 중 다른 건 내가 뭔 소리인지 몰라서 대부분 그냥 해답을 봤지만,
이것만은 그냥 문제를 다 읽기도 전에, 저거 그림만 보고는 출제 의도와 논리상의 헛점을 0.n초 만에 바로 알아챘다. <전철 3호선 살인 사건> 편.

우측통행을 하는 전동차 선로 사진을 들이밀면서 '1호선 보산 역'이라고 주장하며 알리바이를 내세우다니 거 참.. ^^
아 추가로, 그림에 나와 있는 전동차가 폭이 좀 작은 편인지라,
혹시 지방 지하철의 중형 전동차 사진을 찍어 갖고 와서는 서울· 수도권 전철이라고 사기 치는 건 아닌가도 생각을 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정말로 아는 만큼 보이고 시뮬레이션이 된다.
추리 소설은 걸핏하면 정체불명의 시신이 발견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역사적으로 시신의 신원이 전혀 밝혀지지 않아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은 사건도 있다. 1948년 12월, 오스트레일리아 소머튼 해수욕장의 "Taman shud" 사건은 그 많은 똘똘이들이 추리를 하고도 도저히 답을 못 구한 사건 중 하나이다. 그는 아마 어느 나라에서 보낸 흑색 첩보 요원이 아니었나 싶다.

뭐, 그런 현실 설정 말고도
"다음과 같은 도로 지도에서 다리를 최소 몇 군데를 끊으면 A에서 B지점까지 테러리스트의 도주 경로를 완전히 차단할 수 있을까?"
이건 그래프에서 단절점 내지 브릿지를 찾는 문제이니 컴공/전산 전공자에게는 익숙할 것이고,
A~E가 전부 범인이라 지목하는 사람이 다 다를 때 진짜 맞는 증언을 찾는 문제는, 이건 가로· 세로로 O X 표 만들어서 IQ 테스트 하듯이 풀면 되겠다. 실제로 이런 문제는 정보 올림피아드 문제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간단한 문자/문자열 암호 풀이 문제도 있고.
국정원 추리 퀴즈 중에서 누군가가 남긴 추상화 형태의 다잉메시지 퍼즐을 푸는 건...
지난 2009년에 어떤 만화가가 원주 시정 홍보지의 삽화에다 대통령 욕설을 교묘하게 적어 놓은 걸 찾아 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_-;;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무튼, 세상엔 걍 생업 전선에서 자기 근로만 하면서 갑님으로부터 월급 받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저렇게 맨날 머리 굴리면서 세상을 참 복잡하고 스릴 넘치게 사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한편으로 인간은 죄 때문에 죄를 감시하고 죄의 결과를 수습하느라 정치 권력이 없을 수가 없게 되었으며, 그 비효율적인 일에 무지막지한 양의 세금이 쓰이게 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난 저렇게 외국에서 탐내고 국내에서 보호해야 할 가치가 있는 기술을 개발할 능력이라도 좀 있으면 좋겠다. =_=;;

* 끝으로, 국정원과 아무 관계 없는 여담..;;
국정원은 영어로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여서 영어 이니셜이 NIS이다.
그런데 본인이 난생 처음으로 본 NIS라는 글자는 페르시아의 왕자 2의 구성 파일 중 하나인 NIS.DAT였다.
크기가 거의 1MB에 달하고 아마 가장 큰 파일이었는데, 이름의 의미는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컷씬 그래픽이 들어있었다.
20여 년 전에 페르시아의 왕자 2를 디스켓으로 불법복제를 해 봤기 때문에 인상적인 파일 이름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5/08/15 08:39 2015/08/15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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