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이 6일 전쟁에서 기적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뭐 모세 다얀 장군의 영도력, 하나님의 기적, 국민들의 근성과 애국심, 미국의 지원 버프 등등 여러 얘기가 나도는데, 그 승리의 비결 중에는 첩보 활동도 있었다.
‘엘리 코헨’(1924-1965)은 이스라엘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급의 스파이였다. 아마 국정원 공채 같은 걸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인물일 게다. 우리나라 군대에서 정훈 시간에 강 재구 소령이나 연평해전 영웅을 가르치듯이 말이다.
엘리 코헨은 유창한 외국어와 수려한 외모, 그리고 모사드가 지원해 준 자금빨을 총동원해 인심 후한 사업가로 위장해서 적국 시리아의 고위 공직자들과 인맥을 맺었다. 그러면서 전장인 골란 고원을 관광 가는 척 방문해서는, 주변에 있는 것들을 몽땅 비상한 기억력으로 암기하거나 도촬해서 이스라엘군에게 보내 줬다. 우리로 치면 북한으로 침투해서 북한의 고위 간부들을 교묘히 속인 후, DMZ 안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거기 있는 북한군 GP 등의 군사 시설 위치와 상황을 고스란히 알려 준 것과 같다. 1960년대 초엔 구글어스 같은 게 없었으니까. 그야말로 스타크래프트 맵핵의 실사판이다?
“여기서 근무하는 장병들은 땡볕에 고생이 참 심할 텐데, 빨리 자라는 유칼립투스 나무를 심어서 그늘을 만들어 놓는 게 어떨까요?”라고 제안까지 슬쩍 했는데 그게 받아들여졌다. 덕분에 이스라엘군은 나중에 유칼립투스 나무가 있는 쪽에다가만 포를 쏘면 되게 됐다. Oh shit;;
그는 무전기로 정보를 너무 오랫동안 많이 보내다가 “꼬리가 길면 밟힌다”와 같은 과정으로 결국 정체가 탄로나고 체포됐다. 기가 막힌 연전연패에 이거 아무래도 우리 내부에 첩자가 있는 것 같다는 의심을 시리아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정체 불명의 전파가 송신되는 것으로 의심되는 지역의 건물들을 일부러 강제 정전시켜 봤는데, 하필 혼자 배터리를 이용한 기기로 전파가 발사되고 있는 지점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소련으로부터 기술과 장비 원조를 받고서야 잡아 낼 수 있었다.
범인이 잡히자 시리아 당국은 충격에 빠졌다. 그 인심 좋게 생긴 사업가가 자국의 고위직 인사들을 몽땅 농락한 골수 간첩이었다니! 그는 숱한 고문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협력자를 더 불지 않았으며, 자국에다 교란용 역정보를 송신하라는 강요에 응하지 않았다. 그 대신 교묘한 테크닉으로 모스 부호를 만들어서, 어째 자기가 체포 당했다는 사실을 자국으로 알렸다고 한다.
이스라엘은 애국자 엘리 코헨을 “우린 저런 요원 보낸 적 없는데?”라고 외면하지 않았다. “우리가 체포해 있는 시리아 간첩/포로 10명과 교환하자, 그걸로 모자라면 현금박치기에 트럭 등 원하는 거 다 주겠다!”고 제안했으며, 국제 여론까지 동원해서 그의 석방 내지 감형을 촉구했다.
그러나 시리아는 자기네 약점과 기밀을 너무 많이 알아 버린 엘리 코헨을 도저히 살려 둘 수 없었다. 시민들이 지켜보는 데서 그를 교수대에 매달고, 처형 과정을 동네방네 생중계했다. 사실, 생각 같아서는 그들은 그를 아예 각을 뜨고 능지처참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처형 당시 그의 몸에는 아랍어로 온갖 문구가 써진 커다란 종이가 붙어 있었는데,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
이에 이스라엘은 시신이라도 돌려 달라고 요청했으나 이 역시 단칼에 씹혔다. 그것조차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시리아의 분노와 증오심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는 돼지의 오물이 뒤섞인 채(유대교 율법에서 돼지란..) 대충 아무렇게나 매장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제 와서는 유해를 찾을 수도 없다.
국익을 위해서라지만 거짓말과 위장을 능수능란하게 해야 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달성한다”에 따라야 하는 국정원 요원 같은 업종에 크리스천이 종사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건 크리스천이 정치인이 되는 것과도 비슷한 맥락의 문제 같다.
세상 사람들이야 믿음이 아닌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국가 대 국가끼리는 개인 대 개인과는 달리, 힘에는 더 큰 힘으로 대응하고 악에는 악으로 맞서야 할 때가 있다. 성경에서 간첩은 창세기의 요셉도 알고 경계할 정도의 직업이었다(창 42:9). 곧이어 출애굽기의 히브리 산파는 비록 첩보는 아니지만 일단 거짓말을 했는데도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경우가 있고, 이스라엘 역시 전쟁 과정에서 당연히 정탐꾼을 운용했다. 거짓말을 동원해서 정탐꾼을 숨겨 준 창녀 라합은 완전 의인으로 칭찬받기까지 했다. 물론 그건 하나님이 “목표는 수단을 정당화한다” 급의 철학에 입각해서 인정하신 건 아니며, 믿음의 행위에다 정당방위· 긴급피난 같은 정황이 인정된 것에 가깝다.
시간과 분량 관계상 이 글에서 모든 디테일을 논하기는 어렵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예수 믿는다고 해서 국정원 요원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여겨진다. 애초에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는 군인부터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든지 인정받는 직업이고 병역 거부는 잘못된 행동인데, 그걸 대놓고 하나 좀 자기 정체를 숨기고 하나 무슨 차이이겠는가? 상관의 명령대로 나라 지키는 궂은일만 하는 거라면 말이다.
다만, 개인적으로 이런 일이 자기 양심에 걸리고 적성상 도저히 못 하겠으면 절대로 손대지 말아야 할 것이다. 너무 비위가 약해서 해부 실습을 못 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공부를 잘한다 해도 의대에 가지 말아야 하듯이. 양심에 거리낀다면 그건 죄가 된다.
적성국가에서의 첩보 임무는 실패하면 자기만 죽는 게 아니라 동료 요원까지 다 죽게 만드는 경우가 태반이니 말이다. 국정원 요원은 존재감이 있어서는 안 되는 관계로, 순직해도 전사 군인과는 달리 현충원에도 못 간다. 저렇게 대대적으로 알려진 엘리 코헨이 오히려 굉장히 예외적인 경우이다.
따지고 보면 엘리 코헨이 한 일은 엘리사가 한 일의 정확한 판박이였다. (비록 엘리사는 본업이 대언자이지 전문적인 간첩· 공작원은 아니었지만..;;) 열왕기하 6장을 쭉 읽어 보시라. 게다가 이 시절에도 이스라엘의 적국은 시리아였다!
그의 신하들 중의 한 사람이 이르되, 오 내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에 있는 대언자 엘리사가 왕께서 왕의 침실에서 하시는 말씀이라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나이다, 하니라. (왕하 6:11-12)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