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야세노바츠 수용소

나치 독일이 점령지에서 인종 청소 대량학살을 목적으로 운용했던 수용소로는 아우슈비츠가 독보적인 인지도를 자랑한다. 그러나 그것만 있었던 게 아니다. 마치 북괴에서 운용하는 정치범 수용소가 요덕만 있는 게 아니듯이 말이다.

저 시절에 일본이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듯, 나치 독일은 자기 점령지에다가 '크로아티아 독립국'이라는 괴뢰국을 수립했다.
크로아티아가 어떻고 유고슬라비아가 어떻고 보스니아, 세르비아가 어떻고 등등.. 저기도 나라 사정이 엄청나게 복잡하긴 한데, 내가 그런 걸 다 알지는 못한다. 핵심만 말하자면 저기에는 정치 쪽은 골수 크로아티아 인, 종교 쪽은 골수 가톨릭인 '우스타샤'라는 열성당원이 있었다. 근데 걔들이 파시즘에 물들어서 나치 독일과 손잡았다.

나치 독일은 걔들에게 완장을 채워 주면서 이 점령지의 통치를 맡겼다. 그리고 수용소도 떡 지어서 불순 반동분자들을 마음껏 가두거나 죽일 수 있게 했는데.. 이 우스타샤라는 놈들은 나치 독일도 학을 뗄 정도로 또라이들이었다. 상전인 나치로부터 살인 면허를 받자, 얼마 못 가 오히려 나치 측에서 기겁하고 뜯어말릴 정도로 더 미쳐 날뛰었다.

얘네들은 나치의 주적이던 유대인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들과 민족적으로 종교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이웃 세르비아 인들을 더 집중적으로 괴롭히고 조졌다. 쟤들은 혈통도 다르고, 또 종교도 정교회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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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 링크)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에 대한 견해가 다르다거나, 성모 마리아나 유아 세례에 대한 교리적 입장이 다르다고 사람을 죽인 게 아니다. 정교회는 개신교· 침례교보다는 가톨릭과 교리가 훨씬 더 가깝고 호환되는 종파일 텐데..
이거 뭐 성호를 긋는 순서가 다르다고 사람을 죽이다니 이건 중세 종교 재판보다도 더 막장인 것 같다. -_-

야세노바츠 수용소는 사람을 극한까지 부려먹으면서 천천히 죽이는 시설이지, 사람을 바로 죽이는 시설은 아니었다. 그래서 아우슈비츠 같은 가스실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스타샤 놈들이 저지른 만행을 생각하면 차라리 가스실을 구비하는 게 더 자비롭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 또라이들은 절대로 사람을 급소에다 총알 박아서 단번에 죽이지 않았다.
냉병기로 목을 치거나 눈알을 뽑고 사지를 짜르고, 산 채로 배를 갈라서 내장을 끄집어내거나 불지르는 등..
난징 대학살이나 캄보디아 킬링필드 이상의 잔혹한 학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했다. 게다가 아기나 어린애들한테도 이런 짓을 했다.

쟤들은 세르비아 인들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뭐, 목숨이 붙어 있더라도 수용소 내부 환경이 얼마나 끔찍하고 열악했는지는.. 그건 아우슈비츠와 호각이었을 테니 더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더 자세한 설명: 링크1 / 링크2

로마 가톨릭은 무려 교황청 차원에서 이런 극악무도한 만행에 대해 침묵을 넘어 은폐했으며, 우스타샤를 그저 애국 민족주의 독립운동 진영 정도로 미화해 왔다고 한다. 이건 로마 가톨릭의 엄청난 과오 흑역사가 아닐 수 없다.

4. 악당들의 최후

2차 세계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나치 전범들은 다음과 같이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최후를 맞이했다.

(1) 가장 먼저, 수괴인 히틀러는 자살했다. 자기는 죽으면 죽었지 베를린을 떠나지 않을 거라고 못을 박았으며, 한편으로 패자 루저는 더 존재할 가치가 없다면서 주변을 몽땅 다 부수고 불지르라는 광기어린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건 자국(알베르트 슈페어)이든 프랑스 점령지이든(콜티츠 장군) 해당 나와바리 담당자들이 히틀러의 지시를 거부하고 이행하지 않았다.

(2) 히틀러의 심복 나팔수였던 요제프 괴벨스도 순사라도 하듯이 자살했는데.. 히 총통님이 없는 세상에서는 인생을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본인만 자살한 게 아니라 가족을 몽땅 동반 살해했다!!
출산이 애국이라면서 애를 6명이나 낳고 애들 이름도 다 히틀러를 따라 ㅎ(H)로 시작하게 지었는데.. 그 애들을 다 수면제와 독약을 먹여서 죽인 것이다. 저 사람은 정말 상상 이상의 또라이 미치광이였다.

(3) 하인리히 힘러는 친위대 SS와 게슈타포 비밀경찰의 수장이었다. 이 사람은 체포되고 나서 자기 정체가 드러나게 되자.. 즉시 청산가리 앰플을 깨물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 재판 받고 교수대에 서는 비굴한 꼴은 어떻게든 안 당하려고 발악을 했다.

(4)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도 힘러 못지않은 SS와 게슈타포 쪽의 고위 간부였으며, 유대인들을 국가 차원에서 씨를 말려 버려야 한다고 결정한 주동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나치 독일이 점령했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총독의 권한대행을 역임했다. 능력이 좋았는지 겨우 30대 나이에 엄청난 고관대작이 됐으나..

체코 망명정부와 영국이 손잡고 일으킨 암살 작전에 말려들어 밥숟가락을 놓았다. 수류탄 파편을 많이 맞은 것이 패혈증을 일으켰고, 이것 때문에 1주일 뒤에 쇼크사한 것이다. 1942년 6월, 아직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에 비교적 일찍 죽었다.

저 사람은 윤 봉길 의사의 의거로 인해 죽은 일본군 장성인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처지가 비슷해 보인다.
후자의 경우, 폭탄 파편을 맞은 당일에는 멀쩡해 보였지만 100여 군데나 생긴 상처에서 패혈증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결국 당일로부터 딱 1개월 뒤에 사망했다.

(5) 아돌프 아이히만은 수뇌부인 저 하이드리히의 명령(전략)을 정말 성실히 수행하면서 유대인들을 아주 조직적으로 대량 학살한 실무(전술) 책임자였다. 전자가 기업 임원· 회장급이라면 후자는 공장장 정도 되는 듯?
이 사람은 나치의 패망 이후에 자기 신분을 숨기고 아르헨티나로 도피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배신자의 밀고가 아니라 아들이 입을 잘못 놀리는 바람에 인생이 꼬였다.

장남이 여친에게 자기 아버지 자랑을 실컷 했기 때문이다. 여친이 유대인 출신이며 심지어 여친의 부친부터가 당장 홀로코스트 피해자인 걸 정말 까~~맣게 모르고 말이다..;;;
아이히만 저 인간은 자기 행적을 전혀 후회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떠벌려 왔으며, 자신의 반유대주의 신념을 전수받은 후학을 양성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니 자기 아들에게는 평소에 밥상머리 세뇌 교육을 어떻게 했겠는가? 이건 100% 자업자득이었다.

여친은 속으로 기겁을 하면서 남친을 신고했고, 이 소식은 여친 쪽의 아버지를 거쳐 무려 이스라엘 총리의 귀에도 들어갔다. 결국 모사드 요원까지 동원해서 1960년 5월, 현지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을 사냥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를 기어이 이스라엘에서 재판에 넘기고 처형해 버렸다.

쟤들은 유대인 학살 전범이라면 그야말로 지옥까지 쫓아가서라도 제거하려고 눈에 불을 켠 복수귀 상태였다. 감정 같아서는 모사드 요원이 곧바로 그놈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고문해서 한 100번은 죽이고도 남았을 것이다.
허나, 최고 상관인 총리가 절~~대로 그러지 말고 놈을 멀쩡하게 생포해서 반드시 재판정에 보내라고 엄명을 내렸다. 사적 보복을 그렇게 간신히 막았다.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은 무려 9개월이나 걸렸으며, 주요 장면이 전파를 타고 전세계로 모조리 중계됐다고 한다. 이 사람의 배배 꼬이고 뒤틀린 심리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
아이고 아이히만 얘기가 너무 길어졌네.. 암튼 이 사람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을 피해 갔지만 훗날 잡혀서 더 험한 꼴을 당하고 이스라엘 법정으로부터 단죄를 받은 유일한 사람이다.

(6) 다음으로 '요제프 멩겔레'. 이 사람은 일본 731 부대의 사령관이었던 '이시이 시로'의 독일판이었다.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들을 마루타 취급하면서 자기 꼴리는 대로 온갖 잔혹한 생체실험을 벌였던 인간백정인데.. 전후엔 그 아이히만처럼 남미로 도주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안 잡히고 천수를 누렸다!!

기록에 따르면 1970년대 말에 브라질에서 수영을 하던 중에 심장마비로 60대 후반의 나이에 급사했다고 하는데.. 행적에 비하면 정말 편안한 최후였다.
다만, 이 사람도 아이히만이 덜컥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는 정말 엄청나게 쫄고 겁 먹고 멘탈이 약해지기는 했었다고 한다.

참고로, 생체실험에 관여한 나치의 악마 의사는 멩겔레 말고도 '카를 브란트'라든가 '카를 게프하르트' 같은 사람이 더 있었다. 얘들은 다행히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회부돼서 사형 판결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7) 하인리히 뮐러는 히틀러 친위대의 간부에다 게슈타포 국장을 역임했던 나치의 핵심 간부였다.
저 아돌프 아이히만의 상관이었으며.. "아이히만 같은 일꾼이 우리 독일에 50명만 더 있었으면 유대인들은 금세 씨가 말랐을 것이고 우리나라가 전쟁을 이겼을 것이다~" 이런 말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독일의 패전이 임박했고 히틀러가 자살한 직후~~ 싹 증발해 버렸다. 나치 고위 간부 전범들 중에 유일하게 '실종'돼서 전후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다!
남미로 도망쳐서 완벽하게 잠적하고 자연사했다기보다는 아마 실종 당시에 폭격을 맞아서 죽고 시체가 사라진 게 아닐까 싶다.
참고로 나치당의 우두머리에다 히틀러의 개인 비서까지 역임했던 '마르틴 보어만'도 베를린 포위전 이후로 실종 상태였다.. 허나, 이 사람은 1972년에야 시신이 발견되면서 사망이 확인됐다.

(8) 헤르만 괴링은.. 히틀러빠 광신도에 유대인 혐오로 똘똘 뭉친 뚱뚱한 아저씨였다. 자세한 행적은 잘 기억이 안 난다만 이 아저씨는 체포돼서 전범 재판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총살형을 내려 달라는 요청이 소련 측에 의해 묵살되고 교수형이라는 통보를 받자 매우 실망=_=, 낙담하여 몰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살이라는 점은 힘러와 동일하지만, 그 타이밍이 다르다.
한편,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 출신인 '루돌프 회스'는 아이러니하게도 동일한 수용소에 세팅된 전용 교수대에서 처형 당했다.

(9) 회스 말고 '루돌프 헤스'는..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을 받아 적은 이력이 있을 정도로 히 총통의 오래된 최측근이었다. 허나, 1941년에 일찌감치 연합군에게 체포돼 버리는 바람에 전쟁 중에 대놓고 사고를 치고 전쟁 범죄를 저지른 건 없었다. 그는 이 점이 감안되어 전범 재판에서 사형까지는 안 당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는 다른 여러 나치 전범들과 함께 '슈판다우 교도소'에 수감됐는데.. 어쩌다 보니 무려 1980년대까지 살아남으면서 넓은 교도소를 혼자 전세 내어 사는 처지가 돼 버렸다. 다른 죄수들은 만기 출소하거나 건강이 너무 나빠져서 죽거나 가석방 됐는데 이 사람만 그 어떤 조건에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나치에게 제일 치를 떨던 소련조차도 "쟤는 이제 그만 풀어 주자"에 동의할 지경이 됐으나.. 그는 1987년에 무려 93세의 나이로 굳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 사람이 죽으면서 슈판다우 교도소는 통째로 철거됐다.
나치 전범들 중에 이런 식으로 감옥에서 죽은 사람은 헤스가 유일했다.

5. 뒤끝

(1) 독소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됐던 1941년 11월, 나치 독일은 흑해에서 소련의 병원선 아르메니아 호를 폭격기로 공격해서 격침시켰다. 배에는 5000명이 넘는 피난민과 상이 군인들이 타고 있었는데 모조리 몰살당해 버렸고, 생존자는 단 8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 뒤 전쟁이 끝나 가던 1945년 1월에는 반대로 소련 잠수함이 독일의 유람선 ‘빌헬름 구스타프 호’를 어뢰로 공격해서 격침시켰다. 이때는 무려 1만 명이 넘는 피난민과 상이 군인들이 타고 있었는데 그 중 9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두 케이스 모두 엄밀히 따지면 군함이 병원선이나 민간 선박을 공격한 것이기 때문에 제네바 협약 위반이고 전쟁범죄였다. 특히 빌헬름 구스타프의 경우, 이건 인류 역사상 단일 선박에서 사람이 제일 많이 죽은 침몰 사고였다. 우리나라의 우키시마 호? 대한항공 007 격추? 그것들 희생자를 아득히 능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자기 배를 격침시킨 소련에다가 항의하고 따질 수 없었다. 자기들이 먼저 한 짓이 정상적인 짓이 아니었으니까.. 공론화하지 않고 그냥 쉬쉬 하고 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2) 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2차 대전이 끝난 직후에.. 홀로코스트에서 겨우 살아남은 유대인들, 가족과 친지를 나치에 의해 잃은 사람들은 당연히 독일이 죽이고 싶도록 미울 수밖에 없었다. 이건 한국인들이 해방 직후에 가졌을 반일 감정보다도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트라우마로 인해 더 극단적인 신념을 갖게 됐다. 나치 전범 윗대가리 겨우 수십 명만 감방에 가두거나 죽이는 걸로는 텍도 없으니 니들도 우리와 똑같이 죽어 보라고.. 독일놈들이 유대인을 수용소에서 600만 명 죽였으니까 이젠 우리도 독일인들을 신분 지위 불문하고 똑같이 600만 명 죽여야 직성이 풀리겠다고..
그걸 시도했던 유대인이 있었다. ㄷㄷㄷ

이들은 ‘나캄’(히브리어로 ‘복수’!!)이라는 이름의 비밀 결사를 만들어서 독일 내부의 상수원에다가 독을 타고 수용소에 납품되는 식료품에다가 독을 집어넣는 식으로 공작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공작이 허술했는지 금세 잡혔다.

독일 경찰은 나캄 조직원들을 체포하기는 했지만.. 이제 막 나치가 패망했던 와중에 이 사람들을 도저히 단죄하고 처벌할 수 없었다. 저들의 원한과 빡침을 생각하면 그들을 잘못 건드렸다간 독일의 이미지만 더 나빠졌을 것이다.
그러니 독일 측에서는 그들을 기소하지 않고 이건 서로 없던 일로 하고 유야무야 넘겼다.;

이상이다.
원래 연합국 진영에서는 일본이나 독일 같은 패전· 전범국들을 국가와 민족을 유지는 시켜 주지만 차 떼고 포 떼고 농업이나 경공업밖에 못 하는 나라로.. 앞으로 전쟁의 전 짜도 입에 담지 못하는 약소국으로 거세시키고 싶어했다. 쟤들이 워낙 크고 끔찍한 사고를 쳤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같은 연합국 진영에서 미국과 소련이 이념 차이로 갈라졌다. 그러니 미국은 공산주의를 견제하려는 속셈으로 이런 전범국들을 슬그머니 다시 소생시켜 주게 됐다. 나라가 너무 못 살고 백성들이 굶주리면 사상적으로도 그만큼 취약해지며, 적화되기가 상대적으로 더 쉬워지기 때문이다.

저런 나라들은 전쟁에서 지고 인프라가 다 파괴됐어도, 고급 인재들 머릿속에 있는 지식과 노하우는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금방 다시 일어나서 강대국이 될 수 있었다. 일본은 전쟁 폐허 상태이던 1947년에 최초로 노벨 상 수상자까지 배출했고 말이다.

뭐, 일본은 헌법에다가 군대 미보유와 전쟁 포기를 명시했고, 독일은 탈나치화를 워낙 빡세게 했더니 통상적인 애국심 민족주의조차 없어지고 밍밍해져서 난리일 지경...이다.
특히 이 두 나라들은 핵 무장은 일~~절 안 하고 조용히 지내고 있다. 걔들이 전범국 주제에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핵을 개발하겠다고 깝친다면.. 이건 국제 어그로를 제대로 끌면서 진짜 작살이 났을 테니 말이다.;;

오늘날의 UN 상임이사국을 제외하면 오히려 인도, 중국 등 신흥 강국들, 2차 대전 이전에는 식민 지배도 받고 약골이었던 나라들이 핵을 보유하려 난리를 치는 편이다.
그 대신 독일은 몰라도 일본은 상임이사국 자리를 아주 오래 전부터 탐내고 있다. 하지만 과거의 피해자인 한국과 중국의 견제와 뒤끝 때문에 그건 쉽지 않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5/07/11 08:35 2025/07/1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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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에서 1933년부터 1945년은 뭐랄까 광란과 암울의 시기였다. 세계적인 경제 호황 황금기였던 1920년대가 대공황이라는 날벼락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이때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의 치욕을 갚으려고, 일본은 나락으로 가는 경제를 살리려고 군국주의로 폭주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국부를 창출할 방법이 없으니 남의 나라를 쳐들어가고 빼앗고 식민지를 늘려서 문제를 해결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일본은 딱 저 무렵에 상하이 사변을 일으키고 만주국을 세웠으며.. 국제 연맹을 탈퇴하고 해군 군축 규제를 생까기 시작했다.
독일은 권력이 나치에게 완전히 넘어갔으며, 히틀러가 총통 자리에 올랐다. 히틀러는 주변 강대국들이 머뭇거리는 동안(1차 대전의 트라우마 때문에..) 체코나 오스트리아 같은 이웃 나라들을 야금야금 먹기 시작했고, 유대인들을 조직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런 폭주가 나중엔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 독소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재앙을 만들어냈다. 얘들은 명분 없는 침략 전쟁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점령지에서 정말 반인륜적이고 끔찍한 학살을 저질렀고, 그러면서 결국 연합국에게 지기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빼박 악의 축으로 전락했다.
정말 신기하게도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딱 정확하게 이 기간 동안 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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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절에 있었던 일들 중에 본인 기억에 인상깊게 남아있는 것을 몇 가지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폴란드, 퀴리 부인

우리나라는 위로는 중국, 아래로는 일본에 치이면서 19세기 말~20세기 초의 현대사가 불운하고 기구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폴란드가 역사적으로 처지가 한국과 매우 비슷했다고 한다.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껴서 19~20세기 사이에 양쪽으로부터 번갈아가며 지배 받고, 걔네들 마음대로 영토가 분할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당장 2차 세계 대전부터가 바로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는 걸로 시작됐었다.
오죽했으면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도 폴란드 땅에 만들어졌다! 독일 본토가 아니다.
그러니 나중에 독일이 전황이 점점 불리해지고 점령지를 상실했을 때는 거기 수감자들을 점점 더 독일 본토에 가까이 있는 수용소로 이감을 해야 했다.

그랬는데.. 더 옛날 19세기 중후반엔 폴란드가 러시아 제국의 식민지였다.
마리 퀴리(퀴리 부인)가 그 시기에 이 지역 출신이었다.

아마 중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였던가..?? 마리 퀴리의 학창 시절 일화가 실려 있었다.
러시아에서 불시에 학교 시찰을 보내서 수업 중인 선생한테 "이 교실에서 제일 똘똘한 애를 하나 지목하시오. 당신이 학생들을 우리 교육방침대로 잘 가르치고 있나 확인해 보게" 대뜸 이런 요구를 했다.

애들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얼어붙어서 'ㄷㄷㄷㄷㄷ 제발 저는 지목하지 마세요!!!ㅠㅠㅠ' 이러던 와중에 넘사벽급 우등생 모범생이던 마리 퀴리가 답정너 지목됐다.
교과 내용 질문뿐만 아니라 국가관 사상 검증 질문까지 모든 답변이 러시아어로 막힘없이 술술..

러시아 장학사인지 누군지는 아주 흡족해하며 떠났다. 허나, 그렇게 위기를 넘긴 뒤에 그 선생과 마리는 부둥켜안고 서럽게 엉엉 울었다... 이런 내용이었다. 비슷한 시기의 "마지막 수업" 소설과 비슷한 분위기다.

햐, 러시아에 나치에.. 이런 지경이었으니 훗날 동아시아에서 중-일 전쟁이 터졌던 것과 비슷한 구도로 독-소 전쟁이 터졌나 싶기도 하다.
그 사이에 낑겼던 폴란드는 2차 대전 피해를 극심하게 당했다. 뭐, 마리 퀴리는 프랑스 과학자와 결혼해서 프랑스로 귀화했고, 2차 대전이 터지기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험한 꼴을 보지는 않았다.

마리 퀴리가 그냥 타고난 천재이고 독한 공부기계 괴수였다고만 말하는 건 고인에 대한 모독일 거다.
이 사람은 약소민족 차별과 설움, 학계에서 여자라는 성차별 유리천장, 하루에 사과 하나 빵 한 조각밖에 못 먹을 정도의 가난과 굶주림..

그야말로 신체 장애만 빼고 어지간한 역경과 핸디캡을 다 겪었는데 이걸 오로지 실력과 노력만으로 다 극복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방사성 원소 라듐이 그런 과정을 거쳐서 최초로 발견되었다.

퀴리 부인의 둘째딸이 "어머니, 아버지, 언니, 내 남편.. 다 노벨 상 받았는데 나만 못 받았으니 나는 가문의 수치입니다" 이런 정신나간(...) 소리를 늘어놓을 정도였는데.. 그런 가문이 저런 배경 속에서 만들어졌다.

마리 퀴리는 독일의 그 유명한 과학자.. 공기로 빵을 만든 과학자, 하지만 동족을 죽이는 독가스의 개발에도 참여했던 과학자 '프리츠 하버'와 생년 몰년이 거의 같은 동갑내기였다. 암모니아를 인공 합성한 거나, 방사성 원소를 처음으로 발견한 거나.. 다 비슷하게 넘사벽이었다.

2. 연설과 선동의 천재

꼭 과학 쪽에만 천재가 있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의 소파 방 정환 선생은 동화 구연의 천재였다.
이 사람이 감방 안에서도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하면 동료 죄수들은 물론, 밖의 간수들도 실실 쪼개거나 눈물 짰다는 전설적인 일화가 전해진다.
옛날이 지금보다 오락거리가 없고 신파가 더 잘 통하는 시절이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저건 비범한 능력이었음이 틀림없다.

근데 히틀러는.. 연설· 웅변의 천재였다.
"비겁하게 팩트 따위 들이대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날조와 선동으로 승부하자!! 대중들에게 막연한 공포와 적개심을 팍팍 조장하자!"의 훌륭한 모범을 보였다.

"여러분, 살기 힘드시죠? 우리 위대한 게르만 민족이 국력이 부족해서 전쟁에서 진 게 아닙니다.
우리가 요 모양 요 꼴이 된 거, 알고 보면 이게 다~~~ 노뭏... 아니 유대인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배신자 쥐새끼들로부터 비열하게 뒤에서 총질을 당했기 때문에 졌을 뿐입니다!!"
이 말을 눈짓 손짓 총동원해서 고래고래 고함 치듯이 외치니까 다들 입 헤 벌렸다.

히틀러는 쿠데타(뮌헨 맥주홀 폭동)가 실패하고 붙잡혔는데, 재판정에서도 연기까지 가미해서 이렇게 피 끓는 호소를 했댄다.
"이러쿵저러쿵.. 그러니 존경하는 판사님, 제 눈을 똑바로 보십시오. 저에게 죄가 있다면 내 나라 내 민족을 사랑해서 국민의 권리를 지키려고 싸운 죄밖에 없을 것입니다!"

얼마나 말빨이 좋았는지, 저 호소에 법정 방청석에서는 "옳소!" 환호와 박수가 터져나오고 검사와 판사까지 정신줄을 놔 버렸댄다.
"응..?? 여기서는 우리가 피고인을 심문하고 판결을 내려야 되는데.. 왜 반대로 우리가 피고인한테서 연설을 잔뜩 듣고 있는 거지..???? 병신 같지만 아주 멋있는걸? 우리가 설득 당하겠어?"

그 결과, 히틀러는 내란 정치범으로 금고 5년이 나오긴 했지만.. 책상 있고 침대 있는 넓은 독방에서 외부인 접견도 자유롭게 하면서 진짜 편하게 잘 쉬었다. 최소한의 형식적인 솜방망이 처벌만 받다가 겨우 13개월 만에 석방됐다.

그 동안 담당 간수가 "저 같은 미물이 감히 선생님을 곁에서 모시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이랬다. -_-;; 히틀러는 애국자 VIP 양심수로 예우받으면서 이 전과가 정치 커리어에서 커다란 플러스로 추가됐다.;;
울나라로 치면 안 두희를 살해한 박 기서 씨가 받았던 대우와 비슷했다. 저 사람도 살인죄 5년을 최대한 감경해서 3년형이 나왔지만.. 17개월 남짓 만에 삼일절 특사로 석방됐으니 말이다.

히틀러의 선동 기술은 그야말로 악마의 나팔수였던 괴벨스의 도움이 합쳐져서 최고의 시너지 효과를 냈다.
미국은 나라가 부유하고 잘 살다 보니 1920년대에 이미 중산층 서민들이 자가용을 굴리고 라디오도 갖고 있었다고 하던데.. 독일에서는 국민들을 히틀러 연설로 세뇌시키려고 저가형 '국민라디오'를 저렴하게 찍어내서 뿌렸다. 주파수는 특정 채널로 답정너 고정돼 있었고..

히틀러를 유대인 학살 같은 죄악을 빼고 평범하게 정치인, 군인(패배하긴 했지만)으로서만 생각하면 뽀대나기는 한다.
한자 문화권도 아닌 동네에서 웬 卍짜를 심볼로 쓴 것도 그 당시엔 꽤 참신한 디자인이었을 것이고, 나치 SS 군복이 일본군 군복보다야 비주얼이 멋있는 건 사실이니까. =_=;;;

히틀러의 종교관은 김 일성의 종교관과 비슷한 유형의 떡밥인 것 같다.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결국 개인 숭배로 빠지고 이상한 쪽으로 흑화했다는 공통점이 있으니까.

히틀러는 영화 배우 찰리 채플린과 생년월일이 겨우 4일밖에 차이 나지 않는 완전 동갑내기였다. 찰리 채플린은 나치 독일을 풍자하는 영화에서 히틀러 역을 맡아서 연기를 했으며, 히틀러 역시 그 영화를 보기도 했다.

Posted by 사무엘

2025/07/08 08:35 2025/07/0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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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는 화학이 인류의 삶을 마법처럼 바꿔 놓은 경이로운 시기였다.
자고로 유기물이라는 건 생명체가 아니면 얻는 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는데 그걸 인간이 부분적으로나마 인위로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 기술을 기반으로 플라스틱, 합성 섬유, 합성 고무, 화학 비료, 농약, 살충제, 새로운 냉매 등등이 연이어 발명됐다. 없는 물질이 새로 만들어지기만 한 게 아니고, 기존 물질도 동· 식물의 부산물에 의존하지 않고 아주 저렴하게 팍팍 많이 찍어낼 수 있게 됐다.

하임 바이츠만이 아주 저렴한 아세톤 합성 방법을 개발한 것,
프리츠 하버가 질소 고정법을 개발해서 암모니아를 치트키처럼 대량 생산하게 된 것.. 이런 게 1910년대의 전설적인 업적의 예이다.

그런데 저런 것만 발명되면 섭섭하기라도 한지, 저 시절엔 그 과학 기술로 인간을 죽이는 물질도 응당 개발됐다. 이는 마치 원자력 발전과 핵무기, 우주 로켓과 장거리 미사일과 비슷한 관계인 것 같다.
20세기 이래로 인류 역사상 독가스라는 게 인명 살상용으로 쓰였던 큼직한 사건은 대략 이렇게 분류된다.

1. 정규군끼리의 교전: 1차 세계 대전 서부전선 (1915)

이건 참호를 뚫기 위해 발명된 양대 발명품 중 하나였다.
참호라는 벙커에다가 기관총이라는 시즈 탱크를 구축해 놓으니 이건 뭐.. 통상적인 알보병들 돌격으로는 도저히 뚫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근대 시절의 공성전이라든가 어지간한 해병대 상륙전에 필적하는 난이도였다.

소총도 아니고 대포도 아니고 기관총이라는 공용화기는 예전과는 차원이 다른 끔찍한 대량 살상 무기였다.
처음에는 제국주의 백인들이 미개한 식민지 주민들한테나 이걸 갈겼지만, 얼마 못 가 같은 백인들끼리 서로 쏴 제끼게 됐다.

참호는 병력을 지표면 아래로 짱박히게 해서 그들을 총알로부터는 생존률을 크게 끌어올려 줬다. 하지만 그 참호 속 생활이 얼마나 비위생적이고 끔찍하고 생지옥 같았는지는 두 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그래서 이 전쟁은 19세기까지 유럽에서 몇몇 나라들끼리 툭탁거리던 전쟁과는 차원이 다른 전쟁이 됐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참호전을 파훼하기 위해서 1차 세계 대전 때 발명된 신무기가 바로 (1) 탱크와 (2) 독가스였다.
탱크야 기관총이나 소총의 총알에 뚫리지 않으면서 참호고 뭐고 다 짓밟으면서 전진하기 위한 물건이었다. 다만, 아직 자동차조차 허접하던 시절에 처음으로 개발된 탱크는 성능이나 안정성, 신뢰성 같은 게 많이 빈약했다. 가격도 너무 비쌌고..

다음으로 독가스는 물리적인 파괴력 없이 적군 병력을 고통스럽게 죽이거나 도망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탱크와는 완전히 다른 '화생방'이라는 영역을 개척한 셈이다.
초창기의 독가스는 호흡기를 망가뜨리는 염소 계열이 쓰였다. 시퍼런 쌩 Cl 염소 기체부터 시작해 나중에는 포스겐(COCl2), 겨자가스((Cl-CH2CH2)2S) 같은 거. 이제는 병사들에게 방어를 위해 방탄조끼나 헬멧뿐만 아니라 방독면까지 필요해졌다.

선견지명인지 모르겠다만, "탄환에다가 독가스를 달아서 쏴서는 안 된다"라는 국제 협약은 놀랍게도 1차 대전 이전, 1899년부터 존재했다(헤이그 협약).
그래서 독일이 독가스를 투입하면서 "우리는 독가스를 총이 아니라 손으로 던지거나(수류탄), 혹은 바람에다 실어서 퍼뜨렸다. 그러니 국제법 위반이 아니다~!" 이렇게 둘러댔던 것이 잘 알려져 있다.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급이랄까.

전쟁에서 우리 다같이 쓰지 말자고 결의하는 무기는 단순히 위력이 너무 강하거나 적군을 너무 잔인하게 죽이기 때문에 금지하는 게 아니다. 위력이 아군/적군, 군인/민간인 통제가 안 되고 종전 이후까지 후유증이 남기 때문에 금지하는 것이다.

독가스는 위력이 바람 부는 방향의 영향을 받아 복불복이 심하며, 기껏 적진을 점령했는데 아군조차 독가스의 여파 때문에 거기서 제대로 못 있었다. 즉, 통제를 제대로 하기 어려웠다.
그 와중에 내가 독가스를 쓰면 상대방도 보복 차원에서 독가스를 썼다. 이러면 전쟁이 굉장히 골치 아파졌다.

이런 이유 때문에 독가스는 1차 대전 때 잠깐 등장하고 그 뒤에는 정규전에서 쓰이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그 인간 백정 악마 히틀러조차 전장에서 독가스를 투입하는 걸 반대했을 정도였다.
그래도 탱크에 독가스가 등장한 1차 대전의 모습은 이것만으로도 무슨 SF 소설이라든가 성경의 계시록에 등장하는 괴물, 살이 썩는 괴질 묘사를 떠올리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예전에는 꿈에도 생각을 못 했던 충격적인 전투 양상이었다.

2. 인종 청소 대량학살: 나치 독일 홀로코스트 (1941)

자, 나치 독일은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독가스를 군사용으로 활용하지는 못했다. 그 대신 그걸 인종 청소라는 더 정신나간 짓에 활용했다.
히틀러는 우생학에 근거한 극단적인 인종주의 망상에 빠졌다. 유대인, 집시 등 열등(?) 인종은 딱히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어도, 군사적으로 위협이 되지 않더라도 그냥 모조리 씨를 말려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신념을 몸소 실천했다.

맨 처음 1930년대 중반부터는 이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주고, 재산을 빼앗고, 격리 및 추방을 시켰다. 그러다가 2차 대전이 터진 뒤에는 대피를 못 하고 점령지에 있던 열등분자(?)들을 수용소에 가뒀다. 여기서도 처음에는 노동을 시켜서 알아서 병이나 굶주림으로 죽게 만들었지만.. 나중에는 노동력조차 필요 없는지 아예 대놓고 학살을 했다.
'명예훼손, 협박'이던 게 '사기, 절도, 강도'로, 그 다음은 '납치, 감금 치사'로, 마지막으로는 대놓고 '살인'으로.. 갈수록 죄질이 나빠지고 탄압의 수위가 더욱 올라간 것이다.

처음에는 학살을 위해서 이 많은 수용자들한테 기관총을 갈겼는데.. 생각해 보니 이건 그렇잖아도 전시에 총알이 아까운 짓이었다. 그리고 명령에 따라 밥 먹고 이 짓만 하던 병사들이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호소했다.

글쎄, 극심한 전투 스트레스도 shell shock 같은 장애를 남기겠지만, 저렇게 비무장 민간인을 상대로 아무 명분 없이 저지르는 양학도.. 전투 스트레스와는 다른 방향으로 사람 양심을 자극하고 정신 건강을 해쳤던 것이다. 피해자 유족의 보복을 대행하는 흉악범 죄수 처형도 아니고, 나라 지키는 전투도 아니고 도대체 뭔 짓이냐?

사람들을 구덩이에다 한데 몰아넣은 뒤 안전핀 뽑은 수류탄을 떨구는 건 소음, 진동, 뒷감당이 난감할 테고..
많은 사람들을 한 명씩이 아니라 한꺼번에 떼거지로 많이, 조용히, 저렴하게, 주변 건물 구조물에 대미지 가하지 않고.. 자기가 살해 당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만들지 않으면서 "효율적으로" 죽이는 방법은..???

해골 굴리면서 고민하다 보니 사람을 물리적으로 대미지를 가하는 유혈 공법 대신에 화학적인 독가스가 채택된 것이다.
처음에는 일산화탄소 중독을 생각해 봤는데, 가성비가 맞지 않아서 최종적으로는 치클론 B 독가스 깡통이 선택됐다.;; 이건 HCN 청산가리를 주입시키는 것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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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해 보시라! 이 시스템은 저놈들이 나름 엄청 "많이" 고민하고 애쓴 결과물이었다. 완전 싸이코 그 자체였다. =_=;;;
수용소에서 독가스를 이용한 최초의 집단 학살은 1941년 가을이니 태평양 전쟁과 독· 소 전쟁이 발발한 때와 시기적으로 비슷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소련군 포로, 폴란드의 반동분자, 몇몇 유대인들에게 베타테스트가 행해졌는데.. 결과가 괜찮았다!
그 뒤 1942년 1월, '반제(지명 Wannsee) 회의'에서 나치 수뇌부는 "유대인들을 이런 식으로 죽여서 완전히 씨를 말리자~! 절멸시켜 버리자" 이렇게 정식으로 결의를 했다.

이때부터 쟤들이 운용하는 살인 공장에서 가스실은 1945년 초까지 거의 3년 동안 쉬지 않고 꾸준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원래 치클론 B는 오늘날에도 선박이나 대형 창고처럼.. 엄청 넓고 사람이 상주하지 않고, 안전보다는 가성비와 위력이 더 중요한 공간에서는 살충제 구서제로 잘 쓰이고 있다. 나치 수용소에 납품되는 치클론 B는 고객의 요청(..)에 따라, 안전을 위해 원래 일부러 첨가하는 악취· 구토 유발제를 "빼고" 납품되었다.

앞서 언급했던 하임 바이츠만은 아세톤 합성으로 탄약· 폭약 생산을 혁신시켰다.
그러나 프리츠 하버는 1차 대전 시절에 군용 독가스의 개발을 주도했으며, 나중엔 저 치클론 B의 개발에도 참여했었다. 사람을 살리는 발명도 하고 죽이는 발명도 한 셈이다.

3. 불특정 다수 테러: 옴진리교 (1995)

이렇듯 독가스는 저렇게 1차 대전 시절의 끔찍한 군용 무기, 2차 대전 시절의 극악무도한 활용 사례로 인해 인간에게 정말 진절머리 나는 악몽을 안겼다. 이제 독가스라는 건 어디 공업 단지에서 산업 재해가 터졌을 때에나 유출되지, 국가 공권력이 대놓고 살포할 일은 없어졌다.
그나마 옛날에는 과격한 시위· 데모를 진압하기 위해 경찰이 최루가스 같은 걸 살포했지만 이건 사람을 대놓고 죽이려는 목적은 아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참 뒤, 일본의 옴진리교가 저지른 도쿄 지하철 ‘사린’ 가스 테러는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독가스를 대량 살상 무기로 사용한 테러 사건이었다.
이건 북괴? 알 카에다? ISIL? 그 어떤 악당들도 시도한 적이 없었던 또라이짓이었다.

옴진리교는 자기가 저지른 범죄가 수사되고 추적되는 걸 더 큰 사고를 쳐서 무마시키려고 한 미친놈들이었다. 빚을 빚으로 막는 것도 아니고..
하긴, 일본 제국이 옛날에는 자기가 전쟁 벌여서(중일 전쟁) 사고 친 걸(석유 금수 조치) 더 큰 사고를(태평양 전쟁) 쳐서 무마하는 상또라이짓을 한 적이 있긴 했다.

결국 옴진리교는 공권력에 의해 강제 해산됐고, 머리 치렁치렁하던 교주는 이때 체포돼서 2018년에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4. 요인 단독 테러: 김 정남 피살 (2017)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엔 북한 김 정일의 장남 김 정남이.. 말레이시아의 공항에서 괴한에 의해 VX라는 독극물을 얼굴에 강제 접촉 당하고는 곧장 목숨을 잃었다.

VX는 옴진리교 시절의 사린보다 독성이 훨씬 더 강하고 위험한 물질이다.
검색을 해 보니 사린은 화학식이 C4H10FO2P이고 VX는 C11H26NO2PS이네.. 어쨌든 VX가 더 복잡하고 정교하고 더 흉악한 물질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앞의 1~3처럼 호흡기로 독가스 주입이라기보다는.. 황산 테러 쪽에 가깝다. 그래도 화학 무기의 범주에 드는 건 변함없다고 하겠다. 화약의 힘으로 금속 파편을 박아 넣는 것 말고 다른 방법으로 사람을 죽였으니 말이다.

이상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독가스의 사용 범위가 작아지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방면에 대한 위험이 완전히 없어질 수는 없으니 각종 군사 훈련이나 민방위에도 '화생방'은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 같다.
다음은 이런 독가스· 독극물에 대한 자잘한 여담들이다.

(1) 위에서 소개된 저런 독가스들은 상당수가 반도체의 제조에도 쓰인다고 한다. 우리가 주변에서 너무나 값싸고 흔하게 접하는 컴퓨터 부품들이 평범한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겨우 인간문화재 장인 급 스킬과는 차원이 다른 복잡하고 정교하고 위험한 공정이 필요하다.

(2) 살충제는 사람에게 전혀 무해하면서 벌레만 골라서 죽여 주는 물질이 아니다. 사람이 죽기 훨씬 전에 벌레부터 먼저 죽게 해 주는 물질일 뿐.. 에프킬라는 파리· 모기의 입장에서는 극악의 독가스일 것이다.

(3) 독사의 독은 신경독 아니면 출혈독으로 나뉘는데, 독가스나 살충제도 신경을 조지거나 아니면 폐를 조져서 질식· 익사시키는 것으로 작용 기질이 나뉜다.

(4) 먹는 독이나 폐로 흡입하는 독은 성격이 많이 다르다. 독사의 독은 물려서 혈관에 다이렉트로 주입 당하는 게 아니라 입으로 평범하게 먹는다면 그냥 단백질로서 위장에서 소화될 뿐이라고 한다. 복어 독 같은 독이 아니랜다.

(5) 꼭 생물독이 아니어도.. 옛날에 인간이 과학 지식이 부족하던 시절엔 납이나 수은을 화장품으로 취급하면서 얼굴에 쳐발쳐발 했었다(으악~).
20세기 초에는 뭐.. 방사성 원소인 라듐 같은 걸 영롱한 빛이 나니 신비롭다면서 보석처럼 몸에 지니고 다녔다. 심지어 먹기도 했었나..?? 그러기도 했다.
제일 최근에는 석면이 위험성이 너무 늦게 알려져서 세계적으로 허겁지겁 봉인하고 없애는 추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5/05/29 08:35 2025/05/2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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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가간 역학관계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독일의 히틀러는 세계사에 길이 남을 전쟁광 독재자 쌍두마차로서 역덕 밀덕들의 아주 좋은 비교 분석 대상이다.
끼리끼리 논다더니 히틀러는 살아 생전에 나폴레옹을 굉장히 존경하고 동경했다고 한다.
당대에 히틀러의 직접적인 라이벌은 처칠이나 스탈린이었지만, 이 사람들은 나폴레옹 같은 전쟁광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나폴레옹과 히틀러 모두 러시아/소련으로 쳐들어갔다가 엄청난 영토와 추위 때문에 감당을 못 하고 패배한 이력이 있다.
프랑스와 독일 모두 자국민/자국어 순수주의와 국뽕 국수주의 군국주의 맛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두 나라 모두 전쟁에서 졌을 때 배후중상설.. "원래는 이길 수 있었는데 간첩 배신자 때문에 뒤통수를 맞아서 진 거다~~~ 특히 이거 유대인 때문이다" 망상에도 빠진 적이 있었다. (보불 전쟁, 1차 세계 대전)

프랑스와 독일 모두 외국 식민지가 그렇게 많은 나라는 아니었다. 독일은 그나마 있던 식민지조차 1차 대전에서 지면서 다 빼앗겼고, 그때 특히 해군이 봉쇄당했다. 잠수함이 아닌 전함으로 해전을 치른 게 1차 대전 이후로는 없다.
나치 철십자가가 그려진 항공모함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2. 비슷한 역사

(1) 1936년엔 영국의 군주(조지 5세)가 붕어하고, 일본의 전직 총리가 암살 당했다(사이토 마코토, 2· 26 쿠데타). 그리고 나치 독일이 재무장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3년쯤 뒤에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2) 그 뒤 2022년엔 영국 군주(엘리자베스 2세)가 붕어하고, 일본의 전직 총리가 암살 당했다(아베 신조). 그리고 독일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빌미로 재무장을 시작했다. 이로부터 3년쯤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참 그럴싸하게 끼워맞춘 것 같다. -_-;;

3. 동물만 보호

나치 독일은 정신나간 군국주의나 유대인 학살만 저지른 게 아니라 굉장히 뜬금없는 면모가 있었다.
바로 근현대적인 동물보호법을 세계에서 거의 최초로 제정해서 동물 복지에 힘썼다는 것이다. 그것도 1933년, 나치 집권 초창기부터 말이다.

"동물을 유흥용으로 잔인하게 신체 훼손하거나 죽이는 것 금지, 불법 수렵 금지, 자연보호.." 이게.. 1930년대 나치 독일 치하에서 나온 프로파간다였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이런 법은 히 총통이 개인적으로, 친히, 각별히 관심을 갖고 제정한 것이었다. 그는 개를 완전 좋아해서 개인적인 애완견도 키우던 사람이었다.

일반적으로는 동물을 저렇게 학대할 정도의 흉포한 사람이라면 사람에게도 잔인한 짓을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동물 학대를 처벌한다. 그러나 나치는 그냥 무식하게 흉포한 게 아니라 뭔가 신념을 갖고 냉철하게 조직적으로 인종을 청소했다.

멀쩡한 개· 돼지를 가스실에다 집어넣고 죽이는 건 범죄이지만, 유대인을 가스실에다 집어넣어 죽이고 장애인을 죽인 건 인류의 우수한 혈통 보존을 위해 필요한 행위로 정당화된다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쟤들의 행적은 여느 흉악 범죄나 전쟁 범죄와는 성격이 달랐다고 봐야겠다.

4. 개인과 직책

히틀러는 나치 독일의 초대이자 유일한 '총통', '퓌어러'였다. 하지만 그는 후임부터는 직함을 총리와 대통령이라고 둘로 나눠서 두 명을 지목했다. 총리는 파울 괴벨스이고 대통령은 카를 되니츠가 임명되었다.

히틀러의 후계자가 될 만한 인물로는 이들 말고 하인리히 힘러라든가 마르틴 보어만 같은 다른 유력 후보도 있었다. 그러나 얘들은 권력욕 티를 너무 대놓고 내는 바람에 하극상 반역· 배신으로 간주되어서 히틀러에게 찍히고, 후계자 라인에서 짤렸다.
뭐, 히틀러의 사후에 나치 독일은 곧장 패망하고 연합군에게 항복했다. 그러니 대통령이건 총리이건 저 감투들은 현실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었다. 전범 재판에 불려 다니면서 히틀러가 싼 똥을 치우는 일밖에 할 게 없었다.

현대의 행정 체계에서는 인물과 계급? 직책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다.
나라를 대표하는 제일 높은 권력자라 할지라도 그 사람은 '대통령'이라는 직책을 n년 동안 맡았다가 물러나는 제 n대 대통령이요, 여러 역대 대통령들 중의 한 명일 뿐이다.

무궁화 대훈장을 받고, 퇴임 후에도 최고 수준의 경호에다 재임 당시 연봉의 90% 가까이를 계속 꼬박꼬박 받으면서 떵떵거리고, 죽으면 (큰 사고를 치지 않는 한) 국립 현충원에 묻히는 것까지도 보장되긴 한다만..
그건 그 사람이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예우를 받는 거지, 그 사람 자체를 예우하는 건 아니다.

조선 시대 왕릉은 각 사람별로 뿔뿔이 흩어져 있는 반면.. 지금 현충원에는 그냥 전직 대통령 묘소라고 한 군집...만이 존재하는 것도 그 예시라 하겠다. 그래서 어느 유명 전쟁 영화에 "경례는 계급에다가 하는 거지, 사람에게 하는 게 아니다"라는 대사도 있는 것이다.
뭐, 전직 대통령들이 기껏 만들어 놓은 저 장소에 들어가지를 않아서, 아직까지도 제일 존재감 없었던 최 규하밖에 묻혀 있지 않은 건 좀 이상하지만 말이다.;; 현충원에서 묘지가 특별 취급을 받는 대통령은 이 승만, 박 정희, 김 영삼과 김 대중 네 명 이후로는 더 나오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전재 독재 치하에서는 “하일 히틀러~!!” 이런 경례 구호에서 볼 수 있듯, 아무래도 개인이 숭배 받는다. 그래서 나치 독일 말고 북괴만 해도 개인과 직책이 다 따로 놀아서 김 일성 '주석', 김 정일 '국방위원장', 김 정은 '장군??' 제각각이다. 저 동네에 이런 관행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잘 모르겠다.

5. 영화

<다운폴>(2004)과 <일본 패망 하루 전>(2016)은 2차 세계 대전의 양대 추축국· 전범국들이 패망하고 항복하기 직전에 내부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나름 객관적으로 잘 조명한 영화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하게 <조피 숄의 마지막 날>(2006)과 <아이히만 쇼>(2015)도 나란히 대조해서 볼 만한 작품인 것 같다.

전자는 나치를 반대하는 선전물을 뿌리던 백장미단이 나치 치하에서 잡혀서 재판 받고 처형 당한 과정을 자세히 조명한 반면,
후자는 나치의 패망 이후에 나치 잔당 전범이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모사드 요원에 의해 잡혀서 재판 받고 처형 당한 과정을 자세히 잘 조명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는 1960년대에 벌어졌던 이 전범 재판을 전세계에 무슨 TV 쇼처럼 꾸며서 중계했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 제목도 무슨 '트루먼 쇼'처럼 '아이히만 쇼'라고 적절하게 붙였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꼼꼼히 다 보지는 못했지만, 이 재판을 계기로 인간이 무심하게 벌이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논의와 연구가 세계적으로 이뤄지게 됐다고 한다. 무슨 <파리대왕>처럼 꿈도 희망도 없는 성악설까지는 아니지만, 악에 무덤덤해져 버리는 <버스 44>와 비슷한 심리 말이다.

6. 반면교사와 대조

(1) 2차 세계 대전의 태평양 전쟁이 끝날 무렵에.. 미 해병대가 이오지마 섬을 간신히 점령해서 미국 깃발을 꽂는 장면이 사진으로 전해진다.
그것처럼, 2차 대전의 독소 전쟁이 끝날 무렵엔.. 소련군이 베를린 시내를 점령해서 제국의사당에다가 붉은 깃발을 꽂는 장면이 사진으로 전해진다(베를린 공방전). 각각 시기가 1945년 3월 말과 4월 말로, 한 달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일본이야.. 폭격기로부터 소이탄과 원자폭탄만 먹었지, 상륙 작전이 행해진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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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45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처형되고 시체가 거꾸로 매달려 조리돌림 당한 것은, 같은 추축국 진영이던 독일의 히틀러와 일본의 도조 히데키에게도 굉장히 큰 충격을 줬다. “이제 나도 저 꼴 나겠구나. 저런 치욕을 당하느니 자결해야겠다”라고 당연히 결심을 하게 됐을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1989년 말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공개 처형 당하자 북괴의 김 일성 부자는 심장이 완전 쫄깃해졌다고 전해진다.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자기들도 저 꼴을 당할 것이니 내부의 사상 단속을 더욱 강화하고, 인민들 간 가스라이팅을 더욱 강화해서 나라를 더욱 가난하고 폐쇄적인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3) 히틀러는 자살에는 성공했지만, “적이 자기를 절대 알아보지 못하도록 시체를 확실하게 훼손해서 없애라”라는 지시는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그 반면, 도조 히데키는 자살에 실패해서 전범 재판에까지 회부되고, 교수형을 당해서 생을 마감했다.

7. 때깔

끝으로..
우리나라는 반일 감정이 강하고 욱일기를 정서적으로 싫어할 뿐이지.. 나치 독일이나 히틀러 쪽은 반감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거리가 너무 멀고 직접적으로 침략이나 착취, 학살을 당한 게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10~20여 년 전에는 나치 독일 코스프레를 잔뜩 한 클럽인지 카페인지가 있었다가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으로부터 강한 항의를 받고 시정됐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리고.. 서울 모처에는 독일차 부품을 파는 듯한 가게가 있는데.. 이름이 무려 ‘히틀러 상사’이다. 와~ 이런 곳도 있구나..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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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끔찍한 홀로코스트나 유대인 학살 같은 짓을 빼고 독일이 2차 대전도 1차 대전처럼 평범하게만(?) 진 것이었으면.. 히틀러에 대한 평가가 지금처럼 최악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런 죄악들을 빼고 히틀러의 소싯적 연설만 생각한다면 진짜 피끓는 듯하고 대단하고 멋있어 보인다.;;
SS 친위대의 검은 군복 봐라.. 일본군 군복보다야 독일군 군복이 훨씬 더 멋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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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22/10/22 08:36 2022/10/22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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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이나 단체에 대해서 잘잘못과 선악 구도를 평가할 때 어지간해서는 병크라도 그런 짓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는 정황이 감안되고 "그 상황에서는 너를 포함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 얘도 사실 알고 보면 착한 놈이다 / 시대적인 한계였다" 같은 실드가 작용한다. 하지만 정말 도저히 실드가 안 쳐지고 절대적인 악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나쁜놈들도 드물게 있다.

과거 20세기 중반까지는 양대 추축국이던 일본 제국과 나치 독일, 그리고 현재는 북한 정권과 IS가 이 정도의 악명을 떨치고 있다. 공산주의가 들어섰다고 해서 다 북한처럼 된 건 아니었는데 왜 저 동네만 저렇게 최악에 최악의 막장으로 곪았을까? 김 일성은 처음에는 소련의 꼭둑각시로 시작했다가 어떤 정치 수완을 발휘하여 다른 정치 라이벌들을 몽땅 숙청하고 김씨 왕조를 이뤄 냈을까? 북한 정권의 수립 과정을 잘 숙지해야 종북 좌빨들이 벌이는 역사 왜곡 싸움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히틀러도 마찬가지다. 저 사람은 처음에는 총통 같은 절대권력에 이를 수 있는 처지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야당들을 야금야금 몰아내고, 천부적인 웅변술로 대중들을 현혹시키고, 특히 국회 의사당 방화 사건을 빌미로 대중 공포심을 조장하여... 누구의 진술에 따르면 그야말로 합법적인 방법의 약점만 최대한 요리조리 파헤쳐서 결과적으로 비합법적인 꼼수만으로 권력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고 그런다.
북한과 나치에 비해 IS나 일제는 생성 과정이 상대적으로 덜 궁금한 편이다. 이 글에서는 나치 얘기를 주로 늘어놓도록 하겠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1차 세계 대전 때의 전쟁 영웅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히틀러를 키워 준 꼴이 되어 오늘날 독일 국민들로부터 좋은 평은 못 받는 지도자로 전락했다. 나치는 권력을 잡은 뒤 국민들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야금야금 통제하고 학교와 유치원까지 작은 병영처럼 꾸며서 자라나는 애들을 히틀러의 홍위병 총알받이로 키웠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켜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유대인 학살에 장애인 말살 등 끔찍한 반인륜 범죄를 저질렀다.

이런 짓의 원흉인 히틀러가 열성적인 동물 보호론자였다는 것은 대단한 아이러니이다. 동물 학대를 처벌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동물 학대는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에 반하며, 그걸 저지르는 사람은 사람까지도 학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대로 동물 보호론자와 인간 백정 성질을 모두 지닌 캐릭터는 저런 통념(?)으로는 존재 이유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마치 음란물과 폭력적인 게임을 많이 접한 사람이 실제로 유사 범죄를 많이 저지르는지 상관 관계만큼이나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라 여겨진다.

나치 당 + 히틀러의 재임 기간은 미국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재임 기간과 거의 동일하다(1933-1945, 약 12년). 미국 대통령은 전쟁을 다 끝내 놓고 좋은 세상이 오기 직전에 히틀러보다 불과 몇 달 일찍 병사했다.
히틀러의 휘하에서 독일이 미쳐 가는 와중에, 나치의 지배를 받는 외국 국민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독일 자국민들은 그저 총칼 위협에 굴복하여 침묵만 했을까? 아니면 한 술 더 떠서 히틀러가 하는 광기 어린 인간 숙청과 정복 활동에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동조만 했던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았다. 일부 저항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백장미단'(White Rose)이라고 청년이 주축이 된 소규모 비정치 비폭력 저항 단체가 있었다.
백장미단은 백색 테러 같은 것과는 전혀 관계 없고 정말로 "펜은 칼보다 강하다" 스타일로 움직였다. 주된 활동 방식은 공공장소에서 몰래 '삐라'를 살포하는 것이었다. 히틀러를 비판하고 나치의 비인간적 만행을 폭로하고 "우리나라는 연합국을 상대로 전쟁을 결코 이길 수 없다. 나치는 얼마 못 가 패망한다. 정부의 선전선동에 속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라. 우리는 세계 인류 앞에, 역사 앞에서 죄인으로 기록되지 말자." 이런 메시지가 담긴 논리정연한 글을 배부했다.

이 단체의 핵심 인물은 겨우 20대 초중반 나이인 '한스 숄'과 '소피 숄'(1921-1943)이라는 이름의 남매였다. 독일어에서는 음절 초의 s는 z로 발음되기 때문에 여동생의 이름은 '조피'가 더 정확한 표기이지만, 국내에서는 영어 스타일의 '소피'라는 표기가 더 유명한 듯하다. 이들은 그 어려운 시절에 남매가 모두 뮌헨 대학교에 진학했을 정도로 똑똑했고, 한편으로는 집안도 남매의 대학 학비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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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에 대학생인 게 얼마나 큰 특권이냐 하면, 대학교 재학생은 국가적인 엘리트이기 때문에 군대 징집이 면제되었을 정도였다. 게다가 이건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그 미친 군국주의 국가에서 그것도 전시에 얼마나 큰 혜택을 줬는지 상상이 되는가? 대학은 개나 소나 다 가는 필수가 됐고 군대 휴학이라는 게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지금의 우리나라와는 사정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저 남매도 어린 시절엔 남들이 다 그러는 것처럼 히틀러 유겐트에 열심히 동참했으며, 히 총통에게 충성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크면서 남과 다른 견해를 허용하지 않는 몰개성 세뇌 교육에 회의와 환멸을 느끼게 됐으며, 자기 나라 정부가 저지르고 있는 침략 전쟁과 장애인과 유대인 학살까지 접하면서 저항하는 쪽으로 성향이 완전히 바뀌었다. 1941년, 오빠가 먼저 백장미단 활동을 시작했고 그 뒤에 동생도 동참하고 일부 대학 교수 등 동지가 조금씩 더 붙었다.

글로써 싸운다는 건 같은 나라에서 수백 년 전에 있었던 마틴 루터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루터의 종교 개혁도 인쇄술의 대중화로 인한 성경과 여타 책, 유인물의 대량 보급이 없이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40년대는 아직 컴퓨터 시대는 아니었지만, 그때는 루터에게는 없었던 타자기와 등사기가 있는 덕분에 글로 싸우는 것이 좀 더 수월했다. 단, 전쟁 중이라 물자가 부족해서 종이가 지금만치 싸고 풍부하게 있지는 않았다는 점은 감안할 점이다.

하긴, 우리나라에서도 방 정환의 경우 3· 1 운동 때에 <독립 신문>이라는 반일 성향의 소식지를 몰래 인쇄해서 배부했는데, 이게 발각되어 집이 형사들에게 몽땅 포위당했다. 그는 인쇄된 신문과 등사기를 몽땅 우물 속에다 던져 버리고 시치미 뚝 뗀 덕분에, 1주간 구금을 당하긴 했지만 혐의를 겨우 피했다. 오염된 우물의 뒷수습은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중요한 상황은 아니었겠지..;; 그에 비해 오늘날의 변기는 종이를 아주 잘게 쪼개서 버릴 수는 있지만 여전히 막히는 거 걱정을 해야 하며, 등사기까지 처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방 정환의 경우 등사기만 갖고 있었지 타자기는 그 시절에 존재하지 않았다. 원고를 그냥 손으로 써야 했으니 얼마나 불편할까? 그러니 동양 한자 문화권의 선각자들은 서양 사람들의 획기적인 문자 기계를 보고 좌절했으며, 자국 문자도 타자기로 만들 수 있는 형태로 과감하게 개조해야겠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으리라 여겨진다.

흠, 갑자기 주제를 벗어난 이야기가 좀 길어졌다만..
백장미단의 활동은 불행히도 오래 가지 못했다. 몇 차례 불온삐라가 발견되자 정부 역시 통제와 단속을 강화했다. 운명의 그 날, 그들은 낮에 과감하게 뮌헨 대학교 강의동에 들어가서 유인물을 몰래 뿌리고 오기로 했는데.. 한번 뿌리고 나왔다가, 아직 유인물이 더 남아 있는 걸 보고 또 건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수상한 행적이 나치 끄나풀이던 건물 경비에게 눈에 띄고.. 이들은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때가 1943년 2월 18일이었다.

남매는 서로 격리된 채로 "넌 정체가 뭐냐? 이 유인물 어디서 났냐? 누가 작성했냐? 누가 이 일을 시켰냐? 배후에 또 누가 있냐? 뭐, 우리가 전쟁에서 진다고라? 등등등등~~" 게슈타포로부터 끝없는 심문을 받았으며 결국은 혐의가 인정되어 구속됐다. 그리고 단심으로 진행된 형식적인 인민 재판에서 무려 내란· 반역· 이적행위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고 전원 사형이 선고됐다.

이 재판은 북한의 인민 재판과 별 다를 바 없는 쇼에 지나지 않았다. 답은, 아니 판결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백장미단을 재판한 사람은 '롤란트 프라이슬러'라는 악질 판사였는데... "대학까지 간 애들은 국가에서 특별히 배려해서 군대에도 안 보내고 공부를 더 시켜 줬더니만 이노무 자슥들이 은혜를 모르고 이딴 짓거리나 해? 대가리에 똥만 가득한 새퀴들 같으니!" 식으로 판사가 검사보다도 더 피고를 더 몰아세우면서 고래고래 욕설까지 퍼부었다.

그는 사법 권한을 이용하여 흉악범이나 간첩뿐만 아니라 반나치 인사들도 대거 사형으로 숙청했기 때문에 엄연한 나치 전범이다. 전후에는 판사복이 아니라 죄수복을 입은 피고인으로 법정에 다시 섰어야 할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나치가 패망하기 얼마 전, 길 잃은 포탄의 포격을 받고 죽어 버리는 바람에 험한 꼴을 용케 피해 갔다.

이런 과정을 거쳐 숄 남매와 유인물 가담자에게는 사형이 집행되었다. 체포에서 사형 집행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나흘(2월 22일!)에 불과했을 뿐만 아니라, 그 방식은 총살도, 교수형도 아니고 무려 단두대 참수였다. 자기 정책을 반대하는 유인물을 뿌렸다는 이유로 여자까지 낀 20대 대학생을 반역죄로 몰아 목을 베어서 죽인 것이다. 그것도 1940년대에, 피지배 식민지 주민도 아니고 자국민을 상대로..;; 나치가 얼마나 잔혹한 집단인지를 알 수 있다. 단두대는 프랑스 대혁명 때에만 쓰인 물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행 중에서는 여자인 소피가 가장 먼저 집행되었다. 이거 집행 순서도 은근히 중요하다. 남이 죽는 걸 다 보고서야 제일 나중에 집행되는 게 사형수의 입장에서는 제일 무섭고 끔찍하니까. 사형과 정반대인 시상식에서도 1등상을 제일 나중에 주는 것처럼 말이다.
참고로 나치는 악질적인 죄인을 단두대로 처형할 때는 죄수를 엎드리게 한 게 아니라, 눕혀서 칼날이 떨어지는 걸 보게 하기도 했다. (그래 봤자 눈을 감으면 안 볼 수 있겠지..) 조선 시대에 정 약용의 형 정 약종도 천주교를 믿다 순교할 때, 하늘을 보면서 죽겠다고 하면서 비슷한 자세를 자처하며 참수를 당했다고 하지만 그것과는 분위기가 영 딴판이다.

숄 남매를 비롯해 백장미단은 꽃을 제대로 피우지 못하고 그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의 의로운 행적은 잊혀지지 않았다. 나치가 패망한 뒤 그들은 독일 내부에서 추모와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의 고향에는 동상이 세워졌으며, 각종 길거리의 명칭에 그들의 이름이 붙여졌다.
이들의 일대기는 책과 영화로도 응당 나왔다. 영화로는 <백장미>(1982)와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2006). 전자는 활동 중심이고 후자는 활동보다는 체포 후의 길고 지린 심문과 재판 과정을 더 중점적으로 다뤘다.

그 당시에 단두대를 가동한 사형 집행관들은 흔한 제복이나 작업복이 아니라, 무슨 마술사처럼 검은 연미복에 실크햇, 나비넥타이 정장 차림이었던 게 인상적이다. 나름 자신들의 직업 의식을 표현하고 사형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영화에도 잘 묘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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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나치 시절까지 단두대 처형(백장단 단원까지 포함해)을 전문으로 맡았던 실존 인물인 '요한 라이히하르트(1893-1972)'의 근무 복장이다. 영화가 정말로 사실 고증을 반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사람이야 그냥 위에서 시키는 대로 사형 집행을 한 죄밖에 없으니 딱히 전범으로 처벌받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연합국 측에 재고용되어서 사형 선고를 받은 다른 나치 전범들을 교수대에 매다는-_-;;; 일에도 동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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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실전 참전 용사들이 전쟁 영화를 싫어하듯, 사형 집행관들은 사람을 죽이는 게 직업이다 보니 그쪽 방면으로 극도의 트라우마와 거부 반응이 있다. 옛날에 성 바돌로매 대학살(1572) 때도 다른 시민들은 광기에 휩쓸려서 크리스천들을 마구 죽였지만, 이때 오히려 사형 집행관 망나니들은 그 일에 전혀 가담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형 집행 이야기는 됐고... 백장미단의 일대기를 다룬 책은 유족들에 의해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1978년에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이거 한때는 운동권에서의 필독서이기도 했다.

아시다시피 본인은 국내 정치에 한해서는 종북 좌경화 역사 날조라는 변수 때문에 소위 말하는 '보수 우파' 성향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 변수만 없으면 난 얼마든지 성장과 분배, 진보와 보수의 장단점을 골고루 인정하고 중도를 갈 의향이 있다. 공권력에 저항하는 것 자체를 좌파 빨갱이 식으로 몰아갈 생각은 물론 전혀 없다. 북한에 대해서도 정치적으로 접근하는 관점과, 비정치 학술적으로 접근하는 관점 정도는 서로 구분할 줄 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과거 군사 독재 정권이 무슨 북한 정권이나 나치와 똑같다는 식의 매도에도 전혀 공감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부 비판이나 북한 관련 병크만 빼면 나머지 국민의 자유는 별로 침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를 침략하거나 인종 학살을 저지른 건 더욱 아니고. 차라리 '진보 좌파'들이 반정부 투쟁을 안 벌이고 염전 노예라든가 형제 복지원처럼 그 당시 사회의 구석에서 벌어지는 비정치 분야의 인권 유린 같은 것만 폭로하고 비판했으면 그런 건 본인도 얼마든지 인정하고 공감했을 것이다.

글이 길어지니 백장미단 인물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만한 인물들 열전은 다음 시간에 소개하도록 하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6/03/01 08:35 2016/03/0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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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이제 애호박, 단호박, 늙은호박 이 셋은 항상 있으나, 그 중에 제일은 늙은호박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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