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루터교 목사 겸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회퍼 (1906-1945).
피끓는 정의감에다 행동하는 양심을 강조했던 대단한 사람으로, 강경한 나치 반대 운동가로 활동했다. 요즘으로 치면 뭔가 폴 워셔 목사 같은 인상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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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론이 독일어로 저렇나??? 레흐트페르티궁...;; 우와 읽지도 못하겠다 ㄲㄲㄲㄲㄲㄲㄲㄲ)

일제 시대를 산 한국인이라면 주 기철 목사 이상으로 신사 참배를 맹렬히 반대했을 것이고, 오늘날 같으면 "북한 동포들을 김씨 부자의 학정으로부터 해방시키자~! 김돼지를 때려잡자! 대북전단 날리자~! 북한으로 성경책 잔뜩 보내자~" 이런 걸 열심히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지론은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다"였다. 그야말로 침묵하는 다수, 악의 평범성, "버스 44" 영화에 나오는 무덤덤한 승객 같은 정신 상태를 아주 극혐했다. 물질적인 도움으로 현실적인 조치가 필요한 사람한테 아가리로 덕담만 해 주는 것도 아주 싫어했다. (약 2:16)

그래서.. "어떤 미치광이 음주운전자가 차를 몰면서 사람들을 치고 있다면.. 목사는 그저 희생자를 애도하면서 한가하게 장례 예배나 인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당장 목숨 걸고라도 그 차에 올라타서 미치광이를 운전석에서 끌어내고 차를 세워야 한다" 이랬다. 그리고 이 말은 당연히 히틀러를 정면으로 겨냥한 비유였다.

이러니 그는 결국 나치에 의해 진작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혔다. 처음에는 그냥 감시만 당했지만, 1944년에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는 것까지 밝혀진 뒤엔 곧바로 체포되고 투옥되었다.
그리고 그는 나치의 패망을 겨우 한 달 남짓 앞두고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한 게 아니라 법대로 사형을 당했다. 그의 유언은 "이것은 마지막처럼 보이지만 나에게는 삶의 시작입니다"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는 좌파 냄새 나는 사회 운동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고, 신학자로서 이론과 내공도 탁월했다. 그는 외국(=미국)으로 망명 가서 신학교 교수만 하면서 안전하고 편하게 살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시에 내 동족과 함께 동고동락하지 않은 먹사는 전후에 조국의 기독교계를 재건하는 데 동참할 자격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간지나는 말을 남기고 고난을 자처하며 호랑이굴로 들어갔다.

바울이 동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뜬금없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던 것처럼,
그리고 6· 25 때 전사한 미군 장교 '윌리엄 해밀턴 쇼'(1922-1950)가 "내 친구 나라 한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도와주지 않고 전쟁이 끝난 뒤에야 슬그머니 선교사로 들어가는 건 내 양심상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의 저서인 '제자도의 댓가(Cost of Discipleship)'가 주 목사로 치면 '일사각오' 정도에 대응하는 것 같다.

이 밖에 디트리히 본회퍼는..

(1) 이름이 '본 회퍼'가 아니고 한 단어 '본회퍼'이다. 내가 아주 오랫동안 잘못 알고 있었네~ 아이고.. -_-;; 폰 von 때문에 편견이 생겼던 것 같다. ^^

(2) 부활절을 치른 거의 직후에 처형 당했구나. 1945년의 부활절은 가톨릭은 4월 1일, 정교회는 4월 8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저 사람이 처형된 날은 4월 9일.
(그 달 말인 28일에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처형 당했고, 이틀 뒤인 30일엔 히틀러도 그 뒤를 따라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애초에 저 사형 집행도 히틀러가 패전을 염두에 두고 죄수들의 뒷정리 차원에서 일괄 지시한 것이었다.)

(3) 그래도 나치 독일의 패망 직전 말기에 처형 당해서 그런지, 참수는 아니고 교수형으로 죽었다.
몇 년 전(1943)만 해도, 나치 반대 운동을 하다가 잡힌 백장미단 멤버들은(조피 숄 등) 다 이동식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

독일은 민족 저력이 너무 뛰어난 나머지 종교 개혁을 주도하고 위대한 수학자와 과학자, 예술가들을 배출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20세기에 세계 대전을 두 번이나 일으키는 사고를 쳤고 나치 독일과 히틀러라는 흑역사를 만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회퍼 정도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목사가 자국민 중에 배출되기도 했다는 건 그나마 진지하게 실드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아 참, 나는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라는 유명한 시를 이 사람이 썼다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는데.. 그건 아니더라.
'마르틴 니묄러'라고 본회퍼와 성향이 비슷했던 다른 독일인 목사의 작품이라고 한다.
"나치가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 노조 등등 이후...) 나치가 나를 덮쳤을 때는 나를 방어해 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

Posted by 사무엘

2022/10/25 08:36 2022/10/25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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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가간 역학관계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독일의 히틀러는 세계사에 길이 남을 전쟁광 독재자 쌍두마차로서 역덕 밀덕들의 아주 좋은 비교 분석 대상이다.
끼리끼리 논다더니 히틀러는 살아 생전에 나폴레옹을 굉장히 존경하고 동경했다고 한다.
당대에 히틀러의 직접적인 라이벌은 처칠이나 스탈린이었지만, 이 사람들은 나폴레옹 같은 전쟁광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나폴레옹과 히틀러 모두 러시아/소련으로 쳐들어갔다가 엄청난 영토와 추위 때문에 감당을 못 하고 패배한 이력이 있다.
프랑스와 독일 모두 자국민/자국어 순수주의와 국뽕 국수주의 군국주의 맛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두 나라 모두 전쟁에서 졌을 때 배후중상설.. "원래는 이길 수 있었는데 간첩 배신자 때문에 뒤통수를 맞아서 진 거다~~~ 특히 이거 유대인 때문이다" 망상에도 빠진 적이 있었다. (보불 전쟁, 1차 세계 대전)

프랑스와 독일 모두 외국 식민지가 그렇게 많은 나라는 아니었다. 독일은 그나마 있던 식민지조차 1차 대전에서 지면서 다 빼앗겼고, 그때 특히 해군이 봉쇄당했다. 잠수함이 아닌 전함으로 해전을 치른 게 1차 대전 이후로는 없다.
나치 철십자가가 그려진 항공모함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2. 비슷한 역사

(1) 1936년엔 영국의 군주(조지 5세)가 붕어하고, 일본의 전직 총리가 암살 당했다(사이토 마코토, 2· 26 쿠데타). 그리고 나치 독일이 재무장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3년쯤 뒤에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2) 그 뒤 2022년엔 영국 군주(엘리자베스 2세)가 붕어하고, 일본의 전직 총리가 암살 당했다(아베 신조). 그리고 독일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빌미로 재무장을 시작했다. 이로부터 3년쯤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참 그럴싸하게 끼워맞춘 것 같다. -_-;;

3. 동물만 보호

나치 독일은 정신나간 군국주의나 유대인 학살만 저지른 게 아니라 굉장히 뜬금없는 면모가 있었다.
바로 근현대적인 동물보호법을 세계에서 거의 최초로 제정해서 동물 복지에 힘썼다는 것이다. 그것도 1933년, 나치 집권 초창기부터 말이다.

"동물을 유흥용으로 잔인하게 신체 훼손하거나 죽이는 것 금지, 불법 수렵 금지, 자연보호.." 이게.. 1930년대 나치 독일 치하에서 나온 프로파간다였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이런 법은 히 총통이 개인적으로, 친히, 각별히 관심을 갖고 제정한 것이었다. 그는 개를 완전 좋아해서 개인적인 애완견도 키우던 사람이었다.

일반적으로는 동물을 저렇게 학대할 정도의 흉포한 사람이라면 사람에게도 잔인한 짓을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동물 학대를 처벌한다. 그러나 나치는 그냥 무식하게 흉포한 게 아니라 뭔가 신념을 갖고 냉철하게 조직적으로 인종을 청소했다.

멀쩡한 개· 돼지를 가스실에다 집어넣고 죽이는 건 범죄이지만, 유대인을 가스실에다 집어넣어 죽이고 장애인을 죽인 건 인류의 우수한 혈통 보존을 위해 필요한 행위로 정당화된다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쟤들의 행적은 여느 흉악 범죄나 전쟁 범죄와는 성격이 달랐다고 봐야겠다.

4. 개인과 직책

히틀러는 나치 독일의 초대이자 유일한 '총통', '퓌어러'였다. 하지만 그는 후임부터는 직함을 총리와 대통령이라고 둘로 나눠서 두 명을 지목했다. 총리는 파울 괴벨스이고 대통령은 카를 되니츠가 임명되었다.

히틀러의 후계자가 될 만한 인물로는 이들 말고 하인리히 힘러라든가 마르틴 보어만 같은 다른 유력 후보도 있었다. 그러나 얘들은 권력욕 티를 너무 대놓고 내는 바람에 하극상 반역· 배신으로 간주되어서 히틀러에게 찍히고, 후계자 라인에서 짤렸다.
뭐, 히틀러의 사후에 나치 독일은 곧장 패망하고 연합군에게 항복했다. 그러니 대통령이건 총리이건 저 감투들은 현실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었다. 전범 재판에 불려 다니면서 히틀러가 싼 똥을 치우는 일밖에 할 게 없었다.

현대의 행정 체계에서는 인물과 계급? 직책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다.
나라를 대표하는 제일 높은 권력자라 할지라도 그 사람은 '대통령'이라는 직책을 n년 동안 맡았다가 물러나는 제 n대 대통령이요, 여러 역대 대통령들 중의 한 명일 뿐이다.

무궁화 대훈장을 받고, 퇴임 후에도 최고 수준의 경호에다 재임 당시 연봉의 90% 가까이를 계속 꼬박꼬박 받으면서 떵떵거리고, 죽으면 (큰 사고를 치지 않는 한) 국립 현충원에 묻히는 것까지도 보장되긴 한다만..
그건 그 사람이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예우를 받는 거지, 그 사람 자체를 예우하는 건 아니다.

조선 시대 왕릉은 각 사람별로 뿔뿔이 흩어져 있는 반면.. 지금 현충원에는 그냥 전직 대통령 묘소라고 한 군집...만이 존재하는 것도 그 예시라 하겠다. 그래서 어느 유명 전쟁 영화에 "경례는 계급에다가 하는 거지, 사람에게 하는 게 아니다"라는 대사도 있는 것이다.
뭐, 전직 대통령들이 기껏 만들어 놓은 저 장소에 들어가지를 않아서, 아직까지도 제일 존재감 없었던 최 규하밖에 묻혀 있지 않은 건 좀 이상하지만 말이다.;; 현충원에서 묘지가 특별 취급을 받는 대통령은 이 승만, 박 정희, 김 영삼과 김 대중 네 명 이후로는 더 나오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전재 독재 치하에서는 “하일 히틀러~!!” 이런 경례 구호에서 볼 수 있듯, 아무래도 개인이 숭배 받는다. 그래서 나치 독일 말고 북괴만 해도 개인과 직책이 다 따로 놀아서 김 일성 '주석', 김 정일 '국방위원장', 김 정은 '장군??' 제각각이다. 저 동네에 이런 관행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잘 모르겠다.

5. 영화

<다운폴>(2004)과 <일본 패망 하루 전>(2016)은 2차 세계 대전의 양대 추축국· 전범국들이 패망하고 항복하기 직전에 내부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나름 객관적으로 잘 조명한 영화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하게 <조피 숄의 마지막 날>(2006)과 <아이히만 쇼>(2015)도 나란히 대조해서 볼 만한 작품인 것 같다.

전자는 나치를 반대하는 선전물을 뿌리던 백장미단이 나치 치하에서 잡혀서 재판 받고 처형 당한 과정을 자세히 조명한 반면,
후자는 나치의 패망 이후에 나치 잔당 전범이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모사드 요원에 의해 잡혀서 재판 받고 처형 당한 과정을 자세히 잘 조명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는 1960년대에 벌어졌던 이 전범 재판을 전세계에 무슨 TV 쇼처럼 꾸며서 중계했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 제목도 무슨 '트루먼 쇼'처럼 '아이히만 쇼'라고 적절하게 붙였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꼼꼼히 다 보지는 못했지만, 이 재판을 계기로 인간이 무심하게 벌이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논의와 연구가 세계적으로 이뤄지게 됐다고 한다. 무슨 <파리대왕>처럼 꿈도 희망도 없는 성악설까지는 아니지만, 악에 무덤덤해져 버리는 <버스 44>와 비슷한 심리 말이다.

6. 반면교사와 대조

(1) 2차 세계 대전의 태평양 전쟁이 끝날 무렵에.. 미 해병대가 이오지마 섬을 간신히 점령해서 미국 깃발을 꽂는 장면이 사진으로 전해진다.
그것처럼, 2차 대전의 독소 전쟁이 끝날 무렵엔.. 소련군이 베를린 시내를 점령해서 제국의사당에다가 붉은 깃발을 꽂는 장면이 사진으로 전해진다(베를린 공방전). 각각 시기가 1945년 3월 말과 4월 말로, 한 달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일본이야.. 폭격기로부터 소이탄과 원자폭탄만 먹었지, 상륙 작전이 행해진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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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45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처형되고 시체가 거꾸로 매달려 조리돌림 당한 것은, 같은 추축국 진영이던 독일의 히틀러와 일본의 도조 히데키에게도 굉장히 큰 충격을 줬다. “이제 나도 저 꼴 나겠구나. 저런 치욕을 당하느니 자결해야겠다”라고 당연히 결심을 하게 됐을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1989년 말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공개 처형 당하자 북괴의 김 일성 부자는 심장이 완전 쫄깃해졌다고 전해진다.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자기들도 저 꼴을 당할 것이니 내부의 사상 단속을 더욱 강화하고, 인민들 간 가스라이팅을 더욱 강화해서 나라를 더욱 가난하고 폐쇄적인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3) 히틀러는 자살에는 성공했지만, “적이 자기를 절대 알아보지 못하도록 시체를 확실하게 훼손해서 없애라”라는 지시는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그 반면, 도조 히데키는 자살에 실패해서 전범 재판에까지 회부되고, 교수형을 당해서 생을 마감했다.

7. 때깔

끝으로..
우리나라는 반일 감정이 강하고 욱일기를 정서적으로 싫어할 뿐이지.. 나치 독일이나 히틀러 쪽은 반감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거리가 너무 멀고 직접적으로 침략이나 착취, 학살을 당한 게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10~20여 년 전에는 나치 독일 코스프레를 잔뜩 한 클럽인지 카페인지가 있었다가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으로부터 강한 항의를 받고 시정됐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리고.. 서울 모처에는 독일차 부품을 파는 듯한 가게가 있는데.. 이름이 무려 ‘히틀러 상사’이다. 와~ 이런 곳도 있구나..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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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끔찍한 홀로코스트나 유대인 학살 같은 짓을 빼고 독일이 2차 대전도 1차 대전처럼 평범하게만(?) 진 것이었으면.. 히틀러에 대한 평가가 지금처럼 최악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런 죄악들을 빼고 히틀러의 소싯적 연설만 생각한다면 진짜 피끓는 듯하고 대단하고 멋있어 보인다.;;
SS 친위대의 검은 군복 봐라.. 일본군 군복보다야 독일군 군복이 훨씬 더 멋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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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22/10/22 08:36 2022/10/22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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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현장 몰카 사진

카메라라는 물건이 발명된 이래로 세상에 많고 많은 몰카가 촬영됐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진귀하고 중요한 몰카 축에 드는 사진은 바로 1944년 8월,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스실 근처에서 정말 목숨 걸고 몰래 촬영된 이 사진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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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나치 독일에 의해 고용되어 학살된 동족들 시체를 치우는 등의 뒷정리를 하던 소극적 부역자.. 일명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에 속하는 유대인들의 협조로 도촬됐다.
존더코만도는 식사와 보급은 일반 수용자보다 약간 더 좋게 받았지만, 동족을 적극적으로 괴롭히거나 밀고· 통제하지 않았으며, 용도가 다하면 역시 가스실로 가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카포 같은 급의 악질 끄나풀은 아니었다.

글쎄, 나치 수용소 내부에서 수감자들의 처참한 몰골이라든가 시체더미를 치우는 실제 사진(연출이 아닌)이나 동영상이야 물론 있다. 하지만 그건 연합국이 전쟁에서 이겨서 해당 지역의 수용소가 해방된 뒤에 연합군의 주도로 촬영된 것들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나치 독일에 의해 현업으로 돌아가고 있는 동안에.. 선전용으로 만들어진 관제 어용 기록 말고, 현장 내부의 라이브 사진이 몰래 찍힌 것은 놀랍게도 저게 유일하다고 한다.

삼청교육대에서 웃통 벗고 목봉 체조 열심히 하면서 "저희는 여기서 참교육 받으면서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습니다~!" 대본만 읊는 입소자 인터뷰 영상이랑, 거기 내부 음지에서 온갖 끔찍한 가혹행위가 저질러지는 게 몰래 카메라에 찍힌 것은.. 퀄리티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서로 다르지 않겠는가?

이 사진들은 주변 배경을 자르고 사람이 나온 부분만 확대하고 보정을 많이 한 것이다. 더구나 사진에는 안 나왔지만 촬영자와 카메라의 근처에도 나치 간부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멀리서 줌 당겨서 정말 몰래 급하게 허겁지겁 찍느라 각도와 구도는 엉망이고 초점도 흐리고.. 퀄리티는 열악함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사진이 찍히는 곳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현장감과 섬뜩함이 더 느껴진다. 한 트럭 가득한 시체들을 불태우는 장면, 여성 수용자가 야외에서 나체로 가스실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

마지막 장은 도저히 피치 못할 상황에서 각도를 너무 높게 든 걸 확인도 못 하고 셔터를 누른 바람에, 사람과 건물을 찍지 못하고 하늘과 나무만 찍었다.
찍고 나서 필름은 치약 튜브 안에다 넣어진 채로 폴란드의 레지스탕스에게 무사히 전달됐다고 한다.

2. 승리의 날에 기습 키스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본이 원자폭탄을 두 방 맞고 무조건 항복했을 때..
저 괴물 같던 일제가 "드디어, 드디어" 항복했고 지긋지긋하던 전쟁이 완전히 끝났다고 미국 시민들은 기뻐서 난리가 났다.

길거리에 뛰쳐나와서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얼싸안고 춤추고 날뛰었다.
우리나라의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 결승 진출..?? 그 분위기쯤은 저리 가라였다.
그 당시 영상 기록을 보면 무슨 미국이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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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J day in Times Square이라는 제목으로 남겨진 이 사진은..
1945년 8월 14일, 길거리에 나와 있던 한 간호사가 근처의 어느 생면부지의 해군 수병에게서 기습 키스(!!)를 당하는 순간이 절묘하게 기자의 카메라에 담긴 것이다. (누군지는 검색해 보면 다 나옴ㅋㅋ)
저 VJ는 비디오자키 따위의 뜻이 당연히 아니고 victory over Japan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지만 저 두 사람은 커플이 아니다.
그러니 평소 같으면.. 특히 요즘 같으면 저런 짓은 영락없이 성추행 성희롱이고, 여자 쪽으로부터 귀싸대기가 날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저 당사자 아가씨는 "오늘은 정말 기쁜 날인데, 그리고 여느 괴한도 아니고 지금까지 조국을 위해 정말 고생했던 군인 아저씨인데" 하는 생각으로 눈 딱 감고 키스를 받아 줬다고 한다. 눈을 감은 채, 저 남자가 누군지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간호사는 저 사건을 마음속에만 묻어 놓은 채로 훗날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다. 저 간호사가 자신이었다고는 한 1970년대가 돼서야 언론에다 털어놓았다.
하지만 기습 키스를 날린 수병이 누군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그 수병은 어차피 저 아가씨에게만 키스를 날린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_=;;;

Posted by 사무엘

2020/11/30 19:35 2020/11/30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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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이나 단체에 대해서 잘잘못과 선악 구도를 평가할 때 어지간해서는 병크라도 그런 짓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는 정황이 감안되고 "그 상황에서는 너를 포함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 얘도 사실 알고 보면 착한 놈이다 / 시대적인 한계였다" 같은 실드가 작용한다. 하지만 정말 도저히 실드가 안 쳐지고 절대적인 악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나쁜놈들도 드물게 있다.

과거 20세기 중반까지는 양대 추축국이던 일본 제국과 나치 독일, 그리고 현재는 북한 정권과 IS가 이 정도의 악명을 떨치고 있다. 공산주의가 들어섰다고 해서 다 북한처럼 된 건 아니었는데 왜 저 동네만 저렇게 최악에 최악의 막장으로 곪았을까? 김 일성은 처음에는 소련의 꼭둑각시로 시작했다가 어떤 정치 수완을 발휘하여 다른 정치 라이벌들을 몽땅 숙청하고 김씨 왕조를 이뤄 냈을까? 북한 정권의 수립 과정을 잘 숙지해야 종북 좌빨들이 벌이는 역사 왜곡 싸움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히틀러도 마찬가지다. 저 사람은 처음에는 총통 같은 절대권력에 이를 수 있는 처지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야당들을 야금야금 몰아내고, 천부적인 웅변술로 대중들을 현혹시키고, 특히 국회 의사당 방화 사건을 빌미로 대중 공포심을 조장하여... 누구의 진술에 따르면 그야말로 합법적인 방법의 약점만 최대한 요리조리 파헤쳐서 결과적으로 비합법적인 꼼수만으로 권력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고 그런다.
북한과 나치에 비해 IS나 일제는 생성 과정이 상대적으로 덜 궁금한 편이다. 이 글에서는 나치 얘기를 주로 늘어놓도록 하겠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1차 세계 대전 때의 전쟁 영웅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히틀러를 키워 준 꼴이 되어 오늘날 독일 국민들로부터 좋은 평은 못 받는 지도자로 전락했다. 나치는 권력을 잡은 뒤 국민들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야금야금 통제하고 학교와 유치원까지 작은 병영처럼 꾸며서 자라나는 애들을 히틀러의 홍위병 총알받이로 키웠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켜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유대인 학살에 장애인 말살 등 끔찍한 반인륜 범죄를 저질렀다.

이런 짓의 원흉인 히틀러가 열성적인 동물 보호론자였다는 것은 대단한 아이러니이다. 동물 학대를 처벌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동물 학대는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에 반하며, 그걸 저지르는 사람은 사람까지도 학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대로 동물 보호론자와 인간 백정 성질을 모두 지닌 캐릭터는 저런 통념(?)으로는 존재 이유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마치 음란물과 폭력적인 게임을 많이 접한 사람이 실제로 유사 범죄를 많이 저지르는지 상관 관계만큼이나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라 여겨진다.

나치 당 + 히틀러의 재임 기간은 미국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재임 기간과 거의 동일하다(1933-1945, 약 12년). 미국 대통령은 전쟁을 다 끝내 놓고 좋은 세상이 오기 직전에 히틀러보다 불과 몇 달 일찍 병사했다.
히틀러의 휘하에서 독일이 미쳐 가는 와중에, 나치의 지배를 받는 외국 국민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독일 자국민들은 그저 총칼 위협에 굴복하여 침묵만 했을까? 아니면 한 술 더 떠서 히틀러가 하는 광기 어린 인간 숙청과 정복 활동에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동조만 했던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았다. 일부 저항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백장미단'(White Rose)이라고 청년이 주축이 된 소규모 비정치 비폭력 저항 단체가 있었다.
백장미단은 백색 테러 같은 것과는 전혀 관계 없고 정말로 "펜은 칼보다 강하다" 스타일로 움직였다. 주된 활동 방식은 공공장소에서 몰래 '삐라'를 살포하는 것이었다. 히틀러를 비판하고 나치의 비인간적 만행을 폭로하고 "우리나라는 연합국을 상대로 전쟁을 결코 이길 수 없다. 나치는 얼마 못 가 패망한다. 정부의 선전선동에 속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라. 우리는 세계 인류 앞에, 역사 앞에서 죄인으로 기록되지 말자." 이런 메시지가 담긴 논리정연한 글을 배부했다.

이 단체의 핵심 인물은 겨우 20대 초중반 나이인 '한스 숄'과 '소피 숄'(1921-1943)이라는 이름의 남매였다. 독일어에서는 음절 초의 s는 z로 발음되기 때문에 여동생의 이름은 '조피'가 더 정확한 표기이지만, 국내에서는 영어 스타일의 '소피'라는 표기가 더 유명한 듯하다. 이들은 그 어려운 시절에 남매가 모두 뮌헨 대학교에 진학했을 정도로 똑똑했고, 한편으로는 집안도 남매의 대학 학비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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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에 대학생인 게 얼마나 큰 특권이냐 하면, 대학교 재학생은 국가적인 엘리트이기 때문에 군대 징집이 면제되었을 정도였다. 게다가 이건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그 미친 군국주의 국가에서 그것도 전시에 얼마나 큰 혜택을 줬는지 상상이 되는가? 대학은 개나 소나 다 가는 필수가 됐고 군대 휴학이라는 게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지금의 우리나라와는 사정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저 남매도 어린 시절엔 남들이 다 그러는 것처럼 히틀러 유겐트에 열심히 동참했으며, 히 총통에게 충성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크면서 남과 다른 견해를 허용하지 않는 몰개성 세뇌 교육에 회의와 환멸을 느끼게 됐으며, 자기 나라 정부가 저지르고 있는 침략 전쟁과 장애인과 유대인 학살까지 접하면서 저항하는 쪽으로 성향이 완전히 바뀌었다. 1941년, 오빠가 먼저 백장미단 활동을 시작했고 그 뒤에 동생도 동참하고 일부 대학 교수 등 동지가 조금씩 더 붙었다.

글로써 싸운다는 건 같은 나라에서 수백 년 전에 있었던 마틴 루터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루터의 종교 개혁도 인쇄술의 대중화로 인한 성경과 여타 책, 유인물의 대량 보급이 없이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40년대는 아직 컴퓨터 시대는 아니었지만, 그때는 루터에게는 없었던 타자기와 등사기가 있는 덕분에 글로 싸우는 것이 좀 더 수월했다. 단, 전쟁 중이라 물자가 부족해서 종이가 지금만치 싸고 풍부하게 있지는 않았다는 점은 감안할 점이다.

하긴, 우리나라에서도 방 정환의 경우 3· 1 운동 때에 <독립 신문>이라는 반일 성향의 소식지를 몰래 인쇄해서 배부했는데, 이게 발각되어 집이 형사들에게 몽땅 포위당했다. 그는 인쇄된 신문과 등사기를 몽땅 우물 속에다 던져 버리고 시치미 뚝 뗀 덕분에, 1주간 구금을 당하긴 했지만 혐의를 겨우 피했다. 오염된 우물의 뒷수습은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중요한 상황은 아니었겠지..;; 그에 비해 오늘날의 변기는 종이를 아주 잘게 쪼개서 버릴 수는 있지만 여전히 막히는 거 걱정을 해야 하며, 등사기까지 처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방 정환의 경우 등사기만 갖고 있었지 타자기는 그 시절에 존재하지 않았다. 원고를 그냥 손으로 써야 했으니 얼마나 불편할까? 그러니 동양 한자 문화권의 선각자들은 서양 사람들의 획기적인 문자 기계를 보고 좌절했으며, 자국 문자도 타자기로 만들 수 있는 형태로 과감하게 개조해야겠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으리라 여겨진다.

흠, 갑자기 주제를 벗어난 이야기가 좀 길어졌다만..
백장미단의 활동은 불행히도 오래 가지 못했다. 몇 차례 불온삐라가 발견되자 정부 역시 통제와 단속을 강화했다. 운명의 그 날, 그들은 낮에 과감하게 뮌헨 대학교 강의동에 들어가서 유인물을 몰래 뿌리고 오기로 했는데.. 한번 뿌리고 나왔다가, 아직 유인물이 더 남아 있는 걸 보고 또 건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수상한 행적이 나치 끄나풀이던 건물 경비에게 눈에 띄고.. 이들은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때가 1943년 2월 18일이었다.

남매는 서로 격리된 채로 "넌 정체가 뭐냐? 이 유인물 어디서 났냐? 누가 작성했냐? 누가 이 일을 시켰냐? 배후에 또 누가 있냐? 뭐, 우리가 전쟁에서 진다고라? 등등등등~~" 게슈타포로부터 끝없는 심문을 받았으며 결국은 혐의가 인정되어 구속됐다. 그리고 단심으로 진행된 형식적인 인민 재판에서 무려 내란· 반역· 이적행위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고 전원 사형이 선고됐다.

이 재판은 북한의 인민 재판과 별 다를 바 없는 쇼에 지나지 않았다. 답은, 아니 판결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백장미단을 재판한 사람은 '롤란트 프라이슬러'라는 악질 판사였는데... "대학까지 간 애들은 국가에서 특별히 배려해서 군대에도 안 보내고 공부를 더 시켜 줬더니만 이노무 자슥들이 은혜를 모르고 이딴 짓거리나 해? 대가리에 똥만 가득한 새퀴들 같으니!" 식으로 판사가 검사보다도 더 피고를 더 몰아세우면서 고래고래 욕설까지 퍼부었다.

그는 사법 권한을 이용하여 흉악범이나 간첩뿐만 아니라 반나치 인사들도 대거 사형으로 숙청했기 때문에 엄연한 나치 전범이다. 전후에는 판사복이 아니라 죄수복을 입은 피고인으로 법정에 다시 섰어야 할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나치가 패망하기 얼마 전, 길 잃은 포탄의 포격을 받고 죽어 버리는 바람에 험한 꼴을 용케 피해 갔다.

이런 과정을 거쳐 숄 남매와 유인물 가담자에게는 사형이 집행되었다. 체포에서 사형 집행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나흘(2월 22일!)에 불과했을 뿐만 아니라, 그 방식은 총살도, 교수형도 아니고 무려 단두대 참수였다. 자기 정책을 반대하는 유인물을 뿌렸다는 이유로 여자까지 낀 20대 대학생을 반역죄로 몰아 목을 베어서 죽인 것이다. 그것도 1940년대에, 피지배 식민지 주민도 아니고 자국민을 상대로..;; 나치가 얼마나 잔혹한 집단인지를 알 수 있다. 단두대는 프랑스 대혁명 때에만 쓰인 물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행 중에서는 여자인 소피가 가장 먼저 집행되었다. 이거 집행 순서도 은근히 중요하다. 남이 죽는 걸 다 보고서야 제일 나중에 집행되는 게 사형수의 입장에서는 제일 무섭고 끔찍하니까. 사형과 정반대인 시상식에서도 1등상을 제일 나중에 주는 것처럼 말이다.
참고로 나치는 악질적인 죄인을 단두대로 처형할 때는 죄수를 엎드리게 한 게 아니라, 눕혀서 칼날이 떨어지는 걸 보게 하기도 했다. (그래 봤자 눈을 감으면 안 볼 수 있겠지..) 조선 시대에 정 약용의 형 정 약종도 천주교를 믿다 순교할 때, 하늘을 보면서 죽겠다고 하면서 비슷한 자세를 자처하며 참수를 당했다고 하지만 그것과는 분위기가 영 딴판이다.

숄 남매를 비롯해 백장미단은 꽃을 제대로 피우지 못하고 그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의 의로운 행적은 잊혀지지 않았다. 나치가 패망한 뒤 그들은 독일 내부에서 추모와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의 고향에는 동상이 세워졌으며, 각종 길거리의 명칭에 그들의 이름이 붙여졌다.
이들의 일대기는 책과 영화로도 응당 나왔다. 영화로는 <백장미>(1982)와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2006). 전자는 활동 중심이고 후자는 활동보다는 체포 후의 길고 지린 심문과 재판 과정을 더 중점적으로 다뤘다.

그 당시에 단두대를 가동한 사형 집행관들은 흔한 제복이나 작업복이 아니라, 무슨 마술사처럼 검은 연미복에 실크햇, 나비넥타이 정장 차림이었던 게 인상적이다. 나름 자신들의 직업 의식을 표현하고 사형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영화에도 잘 묘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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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나치 시절까지 단두대 처형(백장단 단원까지 포함해)을 전문으로 맡았던 실존 인물인 '요한 라이히하르트(1893-1972)'의 근무 복장이다. 영화가 정말로 사실 고증을 반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사람이야 그냥 위에서 시키는 대로 사형 집행을 한 죄밖에 없으니 딱히 전범으로 처벌받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연합국 측에 재고용되어서 사형 선고를 받은 다른 나치 전범들을 교수대에 매다는-_-;;; 일에도 동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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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실전 참전 용사들이 전쟁 영화를 싫어하듯, 사형 집행관들은 사람을 죽이는 게 직업이다 보니 그쪽 방면으로 극도의 트라우마와 거부 반응이 있다. 옛날에 성 바돌로매 대학살(1572) 때도 다른 시민들은 광기에 휩쓸려서 크리스천들을 마구 죽였지만, 이때 오히려 사형 집행관 망나니들은 그 일에 전혀 가담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형 집행 이야기는 됐고... 백장미단의 일대기를 다룬 책은 유족들에 의해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1978년에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이거 한때는 운동권에서의 필독서이기도 했다.

아시다시피 본인은 국내 정치에 한해서는 종북 좌경화 역사 날조라는 변수 때문에 소위 말하는 '보수 우파' 성향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 변수만 없으면 난 얼마든지 성장과 분배, 진보와 보수의 장단점을 골고루 인정하고 중도를 갈 의향이 있다. 공권력에 저항하는 것 자체를 좌파 빨갱이 식으로 몰아갈 생각은 물론 전혀 없다. 북한에 대해서도 정치적으로 접근하는 관점과, 비정치 학술적으로 접근하는 관점 정도는 서로 구분할 줄 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과거 군사 독재 정권이 무슨 북한 정권이나 나치와 똑같다는 식의 매도에도 전혀 공감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부 비판이나 북한 관련 병크만 빼면 나머지 국민의 자유는 별로 침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를 침략하거나 인종 학살을 저지른 건 더욱 아니고. 차라리 '진보 좌파'들이 반정부 투쟁을 안 벌이고 염전 노예라든가 형제 복지원처럼 그 당시 사회의 구석에서 벌어지는 비정치 분야의 인권 유린 같은 것만 폭로하고 비판했으면 그런 건 본인도 얼마든지 인정하고 공감했을 것이다.

글이 길어지니 백장미단 인물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만한 인물들 열전은 다음 시간에 소개하도록 하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6/03/01 08:35 2016/03/0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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