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소프트웨어의 추억을 발굴하는 작업은 변함없이 계속된다.
몇 달 전엔 비트맵 그래픽 에디터 얘기를 했다. 구글링으로도 좀체 정보를 발견할 수 없던 Splash와 Image72를 찾아 냈다. 이어서 오늘은 도스용 셸 유틸리티 얘기를 해 보겠다. 출처를 도저히 알 수 없었던 한 외국산 프로그램의 정체를 또 파악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름하여 Packard Bell이다.
옛날 도스 시절엔 부팅이 끝나면 화면에 뜨는 건 시꺼먼 화면에 C:\ 프롬프트가 전부였다. 이런 인터페이스로는 초보자건 전문가건 컴퓨터를 제대로 활용하기가 몹시 불편했기 때문에, 컴퓨터에 존재하는 다른 프로그램들을 빠르고 편하게 실행시켜 주는 '셸'에 해당하는 프로그램이 별도로 여럿 만들어지곤 했다.
전문가를 위해서는 MDIR이나 노턴 커맨더처럼 파일 관리 유틸리티를 겸하는 셸이 쓰였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파일 정보만 표시하면 되니 보통 텍스트 모드에서 실행되었다.
그러나 초보자를 위해, 당시의 Windows 3.0에 준하는 GUI를 표방하면서 알록달록한 아이콘이 나오는 그래픽 셸도 있었다. 골치 아픈 단축키를 외울 필요 없이 마우스 클릭만 하면 원하는 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있었다.
MS-DOS 버전 4인가 5부터 제공되었던 '도스셸'은 그래픽 모드에서 실행되는 것도 가능했지만 그래도 전자와 후자 중에서는 전자의 성격에 더 가까운 물건이었다. 그래도 GUI의 불모지인 도스에서 나름 마우스 드래그 드롭을 구현했고, 프로그램의 색상과 화면 모드를 다양하게 바꿀 수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자, 그 와중에 저 '패커드 벨'이라는 프로그램은 우리 집 컴퓨터에 처음부터 있었던 프로그램은 아니고, 친구 집 컴퓨터에서 접했다. 그런데 GUI가 굉장히 고퀄이고 화면이 예뻤다. 16색 VGA에서 실행되는데 투박한 표준 팔레트를 쓴 게 아니라 보다시피 자체적으로 팔레트 색상을 재정의했으니 더욱 이색적인 느낌이 났다. 색상도 그렇고 글꼴도 그렇고, 알록달록한 아이콘까지, 뭔가 프로그래머가 대충 발로 그린 게 아니라 그래픽 전문가의 손길이 닿은 티가 났다. 어린 시절에 본인은 저렇게 "나만의 세계가 느껴지는 비주얼"을 보면 아주 사족을 못 썼다.
저 스크린샷에서는 안 보이지만, 원래는 마우스 드라이버가 있건 없건 마우스 포인터도 나타난다. 그런데 포인터도 운영체제가 그냥 기본으로 주는 작고 투박한 화살표가 아니라, 무려 살색의 사람 손가락 모양이다. 요즘으로 치면 웹 브라우저에서 링크를 가리킬 때 나타나는 그 마우스 포인터와 비슷하다.
화살표 키를 누르면 지금의 마우스 포인터 위치에서 그 화살표 방향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버튼으로 포인터가 이동하는데, 이것도 즉시 되는 게 아니라 부드럽게 궤적을 그리면서 이동한다. 이런 것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워드 프로세서나 그래픽 에디터가 아니고, 그렇다고 게임도 아니고.. 자체 한글 같은 것도 필요하지 않는 외국산 도스용 유틸리티가 그래픽 모드에서 가변폭 영문 글꼴 출력까지 구현한 것은 그 당시로서는 몹시 드문 일이었다.
도대체 이 프로그램은 누가 언제 어디서 만들었는지 알고 싶어서 뒤늦게 인터넷을 수소문했지만, 정보를 도저히 얻을 수 없었다.
본인은 이 프로그램의 이름이 Pen Bel(l) Desktop인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왕년에 베이직 프로그래머였으니 PB라고 하면 파워베이직의 이니셜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저 추억의 프로그램의 실행 파일에도 PB라는 문자가 포함되어 있긴 했다. 하지만 저 이름으로는 아무것도 검색이 되지 않았다.
이 프로그램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얻은 곳은 IE is evil!로 유명한 이 사람의 GUI 갤러리 웹사이트였다.
도스는 말할 것도 없고 Windows 3.1 시절까지만 해도 기존의 허접 구닥다리 '프로그램 관리자'를 대체하는 싸제 셸 유틸이 수요가 있었다. 노턴 데스크톱, 그리고 MS의 흑역사 Bob 같은 프로그램들이 있는데.. 어? Packard Bell 내비게이터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3.5 버전은 완전히 Bob처럼 그래픽 기반으로 바뀌었지만, 1.1은 보아하니 도스용과 완전히 같지는 않아도 색상과 외형이 웬지 도스용 프로그램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튜토리얼, Support, your software처럼 큰 메뉴 구성이 꽤 비슷해 보이는 데다 자음 이니셜이 일치하기도 하니 동일 회사의 프로그램일 거라는 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이 키워드로 구글링을 계속했다.. 그러나 일단 '패커드 벨'은 컴퓨터 제조 회사인지라 걸려 나오는 것은 온통 컴퓨터 사진밖에 없었다.
그랬는데 어느 국내 블로그에서 드디어 월척을 낚는 데 성공했다. 내가 찾던 바로 그 프로그램의 스크린샷이 나온 것이다. 프로그램과 개발사 이름이 동일하게 '패커드 벨'인 듯하다.
이 회사는 소프트웨어가 아닌 하드웨어가 주력 상품이고, 프로그램은 자기 컴퓨터에 번들로 설치되는 것 위주로만 개발한 듯하다. 소프트웨어만 전문으로 만든 게 아닌데도 1991년경에 도스와 Windows용 셸을 모두 그것도 상당히 뛰어난 퀄리티로 만든 것이 무척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 도스용 '패커드 벨' 셸은 메뉴 구조가 좀 특이했다. ESC를 누르면 도스셸이나 '로터스 웍스' 같은 붙박이 고정 프로그램이 있고, 'Your software'을 골라야만 아까와 같은 프로그램 아이콘 리스트가 나타났다. 패커드 벨 컴퓨터에는 원래 '로터스 웍스'도 번들로 제공되었던 듯하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등록하는 화면이다. 아이템에 사용할 '아이콘', 밑에 표시할 텍스트, 그리고 실제로 실행할 프로그램 이렇게 세 가지 정보를 서로 다른 화면에서 지정해 줄 수 있다. 아이콘은 저 35종류의 기성 그림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고 다른 외부 그림 파일을 사용할 수는 없다는 게 특이하고 한편으로는 아쉬운 점이다. 기성 그림들은 각각 어떤 컨셉으로 만든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저 스크린샷에서는 제대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원래 이 프로그램은 하드디스크에 존재하는 모든 실행 파일들을 아래의 리스트에다가 표시해 준다. 그래서 사용자는 일반적인 파일 열기 대화상자를 다룰 때처럼 매번 디렉터리를 오갈 필요 없이 한 목록에서 실행 파일을 곧장 선택할 수 있었다. 이건 사실 MS 도스 셸에도 있던 기능이다. 2~30여 년 전, 한 하드디스크가 크기가 수십~100수십 MB밖에 하지 않던 시절에나 가능했던 일이다.
지금 다시 저 프로그램을 접할 수 있다면 무척 감회가 새롭고 흥미진진할 것 같다.
도스 셸 하니까 생각나는데, 옛날에 MS-DOS 4.0은 우리가 아는 그 4.0만 있는 게 아니라 '멀티태스킹 에디션'이라고 유럽 쪽에서 주로 쓰인 다른 브랜치가 있었다고 한다. 16비트 Windows가 사용하던 New Executable 포맷도 사실은 이때 처음으로 제정되었다고 하고.
또한, 국내에서 개발된 그래픽 위주 도스 셸로는 먼 옛날(1993년쯤) 이 종하 씨가 개발한 '능금'이라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옛날에는 '파란연필'이라는 텍스트 에디터도 개발했던 분인데 본인은 요것들은 옛날 컴퓨터에서 다 직접 써 봤다.
'능금'은 셰어웨어였으며, 비등록 공개판은 등록할 수 있는 그룹과 프로그램 개수에 제한이 걸려 있었다.
그래픽 셸로서 '능금'이 지닌 가장 독특한 점은.. 한 아이템에 대한 아이콘을 최대 5개까지 연달아 지정해서 초보적인 수준의 '움짤'을 만들 수가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외부 파일 사용 가능함. 저 스크린샷을 보면 '그래픽'의 경우 물결이 출렁거렸고, '게임'은 테트리스 블록이 내려가는 모습이 반복되곤 했다.
그래도 '능금'의 기본 팔레트 화면과 저 아이콘들은 '패커드 벨'에 비하면 좀 아마추어 같은 느낌이 들긴 한다. ^^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