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 사이의 기간에 마소에서 '도움말, 튜토리얼, tour, intro, guide' 장르에 속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한 것들을 좀 회상하고자 한다.
요즘 튜토리얼이라 하면 컴퓨터 게임에서 본게임을 수행하기 전에 기본적인 조작법을 익히는 싱글 플레이어 미션 정도를 가리킨다. 툼 레이더로 치면 Lara's home이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1980년대에는 게임 정도가 아니라 컴퓨터라는 괴상한 기계 자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아주 많았다. '컴맹'이라는 단어 기억하시는가? 1992년에만 해도 '키출판사'라는 곳에서는 <저는 컴퓨터를 하나도 모르는데요>라는 컴퓨터 입문서를 하나 잘 만들어서 전국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자리를 수 년간 석권하며 초대박을 쳤었다.
그런 시절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컴퓨터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컴퓨터 입문을 도와 주는 프로그램도 나올 필요가 있었다. 특정 프로그램의 사용법뿐만 아니라 키보드 타자 내지 심지어 마우스 같은 사치품(?)을 다루는 방법도 사용자가 익혀야 했다.

마소에서는 오래 전부터 뭔가 인터랙티브한 학습/데모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것에 남다른 신경을 썼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거 학습을 잘 시켜야 컴퓨터 사용자를 늘리고 잠재적인 자기 고객도 확보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사실은 방대한 운영체제나 Office 솔루션의 '설치 프로그램'도 단계별로 뭔가가 진행된다는 점에서 UI 구조가 반쯤은 이런 데모 프로그램과 비슷하다. 그러니 마소에서 1990년대에 '마법사'라는 UI 요소를 만들어 냈고 두 개념을 합쳐 '설치 마법사'라는 말까지 만든 것이지 싶다. (다만, 비슷한 시기에 도입했던 '길잡이 clippy'는 너무 과잉 오버 사족으로 여겨져서 오래 못 가고 망했다만..)

아무튼.. 마소에서 지극히 초창기에 만들었던 학습 프로그램의 원조로 본인은 QuickBasic 4.5에 들어있던 (1) QuickBasic express를 기억한다. 실행 파일은 learn.com이고, qbcbt.ctx/scn/sob, 그리고 bx.pgm이라고 내부 구조를 알기 어려운 코드/데이터 복합 보조 파일을 추가로 사용한다.
이들 파일들을 다 합해 봤자 크기는 100K가 채 되지 않으며, 압축된 것도 아니어서 얼추 내부 문자열 같은 건 그대로 확인 가능하다. 그래도 프로그램을 실행해 보면 저 작은 크기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학습 컨텐츠가 많이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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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은 16색 텍스트 모드에서 아스키 아트를 최대한 창의적으로 활용해서 화려하게 꾸몄다. 무려 열차를 그렸으며, 프로그램을 실제로 돌려 보면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기관차의 구동축이 움직이며 선로가 가로 스크롤을 하기 때문에 열차가 진짜 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프로그램 이름에도 BASIC만 빼면 Quick, express 온통 이런 단어들이니 얼마나 스피디한 느낌이 나겠는가? 말 그대로 '퀵베이직 특급· 고속· 급행열차'인 셈이다.

물론, 아스키 128번 이후 문자를 이용한 아스키 아트는 2바이트 단위의 동아시아 문자 코드와는 상극이니 이런 프로그램은 한글화 따위는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니면 아스키 아트들을 2바이트 특수문자 기반으로 완전히 마개조 재창조 초월번역을 해야 할 텐데, 일본은 몰라도 그 당시 한국 마소에서 그런 용자짓을 할 여유와 능력, 재량이 있었으리라 여겨지지는 않는다.

마소에서는 이런 부류의 프로그램에 대해 내부적으로 이미 CBT(computer-based training)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뭐 본격적으로 프로그래밍 언어를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컴맹 왕초보를 위해서 QuickBasic을 구동하고 프로그램을 불러오고 실행하는 것까지만 설명하는 튜토리얼을 상당한 덕력을 담아서 굉장한 고퀄로 만든 것이다.
화차 그림에 쓰인 주의사항 보이시는가? 아주 대단한 선심이라도 쓰는 듯 "주목: 이런 지식은 아무 데서나 알려주는 거 아니야!" 이런 드립까지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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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기: "자, 디스크에 저장된 프로그램을 불러오는 걸 실습해 보시겠습니다."
저장: "짜잔~! 프로그램이 final.bas라는 이름으로 저장됐습니다."

문장들의 문체가 전반적으로 은근히 재치 있고 익살스럽기 때문에, 한국어의 사무적인 해요체 합쇼체로 번역하기에는 너무 무겁고 길이도 너무 길다.
저건 그야말로 디스크와 파일에 대한 개념도 아직 부족해서 하드디스크에 몇백 GB짜리 사진을 저장하면 컴퓨터의 무게가 물리적으로 증가할 것처럼 생각하는 왕초짜를 위한 설명이다..;; C언어라면 몰라도(저 때는 마소에서 아직 C++ 컴파일러를 개발하지 않았던 시절) 베이직만은 그야말로 왕초보라도 접근 가능한 대중적인 프로그래밍 툴로 만들려는 빌 게이츠의 야심이 담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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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끝나고 나면 이 프로그램이 가르쳐 준 lesson의 핵심 요약을 요렇게 쭉~~ 늘어놓아 준다. 잊어버릴까 봐 종이에다 프린트 명령까지 제공하는 배려를 했다.
사실, 영어권에서 뭔가 개념원리 학습 자료를 만들어 놓은 걸 보면 참 대단하고 부러움이 느껴질 때가 많다. 기본기를 탄탄하게 다지는 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령, 컴퓨터 쪽은 아니지만 무려 1930년대에 GM사에서 영업사원들(이미 기계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들 말고) 교육용으로 변속기의 원리를 설명해 놓은 필름을 보면.. 매체의 기술 수준 말고, 강의 자체는 기본적인 물리 법칙부터 시작해서 공학적인 응용에 이르기까지.. 지금 봐도 나무랄 데 없는 고퀄이다. 저렇게 기본기와 실용주의에 충실한 교육이 쌓이고 쌓인 덕분에 미국이 과학 기술 선진국이 된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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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끝나고 나면 다시 열차 그림과 함께 엔딩 화면이 나타나는데..
이번에는 시작 화면과는 달리 화차가 텅 비었고 아무 짐도 실려 있지 않다. 아하.. 이런 차이를 담았구나!!
난 그걸 전혀 눈치 채지 못했는데.. 이번에 스크린샷을 찍기 위해 프로그램을 오랜만에 다시 돌려 보면서 차이를 알게 됐다.

QuickBasic은 시대를 풍미했던 명작이고, 지금도 고전 레트로 레거시 프로그래밍 장난감으로서 외국에 매니아 커뮤니티가 있다.
그런데 QuickBasic의 인지도에 비해 이 자습서 프로그램은 존재감이 너무 묻히고 있는 것 같다. QuickBasic learn.com, Express 등 내가 생각하는 모든 관련 키워드들을 조합해서 검색해도 스크린샷 한 장 뜨는 게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learn.com은 어찌 된 이유인지 도스박스에서 안 돌아가고 시스템이 뻗는다(0.72 기준). 이것 때문에 더욱 접근이 어려웠다. VMware 같은 다른 가상화 유틸에서 돌려야 했다.

QuickBasic 말고 자습서로서 가장 유명한 건 아마 (2) Windows 3.1의 자습서이지 싶다. '프로그램 관리자'의 도움말 메뉴에 당당히 등재돼 있기 때문에 쉽게 접근 가능하다. PC 환경의 판도를 도스에서 Windows로 완전히 뒤바꾸기 위해서는 사용자에게 기본적인 마우스 사용법을 가르치고 Windows의 기본 UI 요소들을 다루는 일에 익숙하게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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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습서야 검색을 해 보면 스크린샷과 동영상들이 이미 넘쳐나니 이곳에서 미주알고주알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고해상도(?) 화면에서 16색+도트 노가다로 깔끔하게 파스텔톤 그림을 그려 놓은 화풍을 개인적으로 좋아했다. 문자 때문에 고해상도가 필요했던 일본 게임들의 그림체도 이런 형태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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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열기' 명령을 내려서 기존 문서를 불러오는 실습은 QuickBasic 자습서와 Windows 자습서에 공통으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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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창 제목을 마우스로 드래그 해서 창의 위치를 옮기는 것, 그리고 라디오· 체크· 콤보 등 기본 GUI 요소들을 실습하는 것도 있다.

사실은 (3) Windows 95에도 자습서가 있다.
1990년대 중후반은 컴퓨터의 기본 조작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에 대한 고려가 여전히 필요한 시기였으며, Windows 95가 3.1에 비해 UI 요소가 바뀐 것도 워낙 많았기 때문에 시작 메뉴, 작업 표시줄, 폴더 같은 것에 대한 학습이 필요했다. 이때는 Windows 95 사용 관련 컴퓨터 서적도 정말 많이 출간됐었다.

단, 95의 자습서는 모든 컴퓨터에 기본으로 깔리지 않았으며, 운영체제를 설치할 때 사용자가 수동으로 자습서를 직접 골라야 했다. 그리고 구동하는 방법도 내 기억으로 도움말 어딘가에 숨겨져 있었고 메뉴에서 바로 선택 가능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3.1의 자습서보다는 훨씬 덜 알려져 있다.

내 기억이 맞다면 95의 자습서는 Visual Basic으로 개발되었지 싶다. 외부 링크로 소개를 대신하고자 한다.
그 당시 Windows 95의 비주얼 컨셉은 푸른 창공, 하늘과 구름이었다. 제품 패키지 박스와 부팅 스플래시 화면부터가 그렇고, 이스터 에그에 내장되었던 음악도 clouds.mid였으니.. 그러니 자습서에도 경비행기 그림이 있는 게 수긍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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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끝으로.. 이거야말로 정말 오래된 기억에만 의지해서 회상하는 것이지만..
MS Word 중에서 16비트 Windows를 지원하는 마지막 버전이었던 (4) 6.0 역시 자습서를 내장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Windows 3.1 자습서와 같은 엔진 기반으로 추정되고 비슷한 톤의 흰색 계열 화면이었다. 하지만 Windows 자습서와는 분명 다른 내용이었고, 배경 그림에 그 당시 Word 특유의 만년필 그림이 있긴 했다.

이 역시 내가 구글링 능력이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진짜로 역사 속으로 묻혀 버려서 그런지 인터넷 상으로는 자습서의 장면이나 동영상을 구할 수 없다.
16비트 시절 회상은 이 정도까지 하겠다.
사실, 도스박스로도 Windows 3.1 정도는 돌릴 수 있다. 이것도 0.6x대의 구버전에서는 안 되다가 후대 버전에서 가능해진 것이다.

도스박스는 여느 가상화 툴처럼 디스크 이미지를 별도로 만들 필요 없이, 기존 파일 시스템의 디렉터리를 곧장 mount 해서 쓰면 되는 게 참 편하다.
Windows 95까지도 돌린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부터는 아무래도 하드웨어 가상화의 도움을 받는 VMware 같은 더 정교한 가상화 프로그램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도스박스에서 Windows 3.1을 설치하면 다 좋은데, 프로그램 그룹의 수집과 생성이 왜 자동으로 되지 않는지가 의문이다. 프로그램 관리자가 기본 프로그램, 보조 프로그램 같은 그룹이 아무것도 없는 채로 시작된다.

한편, Windows 95부터는 부팅 직후에 간단한 welcome 프로그램을 실행하던 관행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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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때는 '알고 계십니까' 팁을 출력했지만 98과 2000에서는 인터넷 연결, 제품 등록 같은 걸 안내하는 것으로 프로그램의 실행 형태가 바뀌었고, ME와 XP부터는 이런 게 없어졌다.
2000년대 ME/XP 시기에는 컴퓨터의 기본 사용법을 가르치는 클래식한 자습서는 사라졌지만, Windows의 새 기능을 소개하는 데모는 플래시 내지 HTA (HTML application) 형태로 잠시 존재했다.
특히 XP에 내장돼 있던 플래시 기반의 "새 기능 투어"는 굉장한 퀄리티였다. 비록 한글화되지 않았으며, 이런 관행 역시 Vista와 그 이후부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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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프로그래머의 직업병을 발휘하여, 이런 자습서 내지 튜토리얼 프로그램들을 만드는 과정은 어떠할까 생각해 보고 글을 맺겠다.
웹이나 플래시는 처음부터 멀티미디어 컨텐츠를 표시하는 데 최적화된 저작도구 내지 플랫폼이라 치지만, EXE 기반의 전통적인 데모 내지 자습서· CBT 프로그램은 어떤 방법론을 동원하여 만들었을까?

순차적인 절차대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을 이벤트 드리븐 방식으로 개조하는 건 만만찮은 작업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과거의 터보 C/파스칼에 존재하던 BGIDEMO 예제처럼 순차적으로 일괄적으로 그래픽 데모가 진행되는 프로그램을 Windows용으로 짜는 걸 생각해 보자. 간편하게 자기가 원하는 타이밍 때 그림을 그리고 마는 게 아니라, 운영체제로부터 그림을 그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에만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러니, 지금은 어느 데모의 그래픽을 출력할 차례인지 내부적인 진행 상태를 추상화해서 잘 관리해야 한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이나 끊임없는 그리기 작업은 스레드나 타이머 같은 완전히 다른 방법론을 동원해서 해야 한다.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자습서 프로그램은 그 특성상 학습 대상 프로그램이 실행된 가상의 화면을 표시할 일이 많고 심지어 그 가상의 화면에서 사용자가 창을 조작하는 것을 흉내까지 내야 할 때가 있다.
모든 그림들을 무식하게 비트맵 이미지로 때려박는 건 공간 효율과 유지 보수(일부 컨텐츠가 수정되었을 때, 화면 해상도가 변경됐을 때 등) 관점에서 별로 좋지 못하다.

저런 건 진짜 윈도우를 생성한 뒤에 서브클래싱 같은 customization으로 내가 원하는 형태로만 동작하게 제약을 추가하는 식으로 구현할 수도 있고, 아니면 윈도우 그림만 가짜로 그린 뒤에, 창의 이동과 크기 조절, 메뉴 표시 같은 당장 학습에 필요한 이벤트에만 임기응변으로 반응하게 만들 수도 있다. Windows 자습서는 정황상 대부분의 UI는 후자 방식으로 구현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건 좀 어설프고 삽질스러워 보이는 면모가 있다.

당신이 Visual Basic의 짝퉁 개발툴을 직접 개발한다고 생각해 보자. VB의 디자인 모드에서 떡 나타나 있는 폼의 '윈도우 프로시저'는 어떻게 구현되어 있을지가 궁금하지 않은가? 평소에는 클라이언트 영역에 일정 간격으로 격자 도트가 찍혀 있을 것이고, 자신의 위치나 크기가 바뀌면 폼의 정보가 수정된다. 자기에게 놓인 차일드 컨트롤을 클릭하면 크기 조절을 위한 8개 모서리가 주변에 표시되며, 이걸 더블 클릭하면 해당 컨트롤에 대한 이벤트 핸들러 코드를 편집하는 창이 뜬다.

자습서 창 내부에서 특정 윈도우의 외형과 동작을 구현하는 일도 이런 것과 비슷한 차원일 것이다. 어떤 물건이긴 한데, 실물이 아니라 뭔가 영화 촬영용 소품과 비슷한 격의 물건을 갖다놓는 격이 된다.
'짝퉁'을 만드는 식으로 접근하는 방법론이 한계에 달했는지, 나중에 마소에서는 실제 프로그램이 돌아가는 상태에서 그때 그때 도움말이 응용 프로그램으로부터 신호를 받아 인터랙티브한 형태로 출력되는 모델을 고안하게 되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윈도우 훅 중에서도 WH_CBT라는 게 있다. 어떤 프로그램이 내부에서 창을 생성하거나 없애고, 포커스가 바뀌고 창의 크기를 조절하는 것.. 자습서는 학습 대상 프로그램에서 요런 특정 동작만 감지하면서 상황에 맞는 도움말을 출력하거나 지시를 사용자에게 내릴 수 있다. 이런 간단한 용도라면 굳이 모든 메시지를 통째로 훔쳐보는 무거운 다른 훅을 설치할 필요 없이 저것만 사용하면 된다.

이런 훅을 사용한 아주 모범적인 사례가 있다. 바로 HTML 도움말인 CHM 말고, Windows XP까지 지원되었던 재래식 HLP 파일을 생성하는 (5) 오리지널 Help Workshop 툴을 보면.. 도움말 프로젝트를 생성하는 요령을 설명하는 traning card라는 자습서 세션이 있었다. 전용 자습서가 거창하게 뜨는 게 아니라, 화면 옆에 아주 자그마한 도움말 창만 추가로 뜬 뒤, 도움말이 시키는 대로 실제로 프로젝트를 만들고 프로그램을 사용하면서 기능을 익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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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지금이야 HLP 도움말 자체가 폐기되었으며, 이런 식의 도움말 디자인 패러다임 역시 완전히 한물 가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Help Workshop에 이런 간소화판 자습서 튜토리얼이 존재했다는 것도 오늘날 인터넷에서는 흔적을 거의 찾을 수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18/01/10 08:33 2018/01/10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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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문서를 처리하는 기계의 역사를 살펴보면 기계식 타자기가 발명된 뒤 나중에는 전자식 타자기가 만들어지고, 그게 더 나중에는 컴퓨터가 달린 휴대용 워드 프로세서 기기 형태로 발전했다.

그 뒤 특정 장치에 구애받지 않고 범용 컴퓨터에서 동작하는 워드 프로세서 소프트웨어도 개발되긴 했지만 이 역시 특정 컴퓨터 내지 프린터 번들의 성격이 강했다. 아무래도 워드 문서의 최종 목적지는 인쇄였던지라 프린터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윤곽선 글꼴이 없었으니 글꼴부터가 애초부터 프린터의 해상도에 따라 도트판/레이저판으로 나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척박한 여건에서 옛날 도스 시절에 '한글'을 처리할 수 있는 워드 프로세서가 몇몇 컴퓨터 선구자들에 의해 개발되었다. 그래픽 모드에서 실행되었던 도스용 한글 워드 프로세서로 제대로 살아남은 건 아래아한글밖에 없다.
관공서에서 많이 쓰였던 '하나' 내지, 삼보 컴퓨터 번들로 제공되었던 '보석글'(엄밀히 말하면 순수 국산 프로그램은 아님)은 그래픽 기반이 아니었기 때문에 편집 중에 각종 속성들은 태그 부호로 표시되었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0.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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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까지 금성이 아닌 LG 소프트웨어라는 브랜드로도 생각보다 오랫동안 개발됐다. 95년이면 아래아한글은 이미 Windows용까지 나왔을 정도였으니 시대에 너무 뒤쳐지긴 했다. 물론 금성/LG 소프트웨어에서도 그 시기에 다른 팀을 꾸려서 Windows용 '윈워드'라는 제품을 개발했으며 이걸 2.0까지도 만들긴 했지만... 더 오래는 못 갔다.

‘하나’도 아래아한글처럼 문서 확장자가 hwp였다. 하지만 둘은 동일한 포맷은 물론 아니었다. 아래아한글이 하나 문서를 읽거나 쓰는 건 ‘공용(공통) 파일’이라는 이름으로 최소한 아래아한글 2.5나 3.0 등 도스용 에디션의 막바지 시절에야 추가됐다. 자기 hwp와 구분을 위해 확장자는 일부러 kwp라고 했다.

하나와 아래아한글 모두 관공서에서 사랑받은 프로그램답지 않게 한때 보안이 좀 허술했다. 하나의 경우 암호를 걸어서 저장해도 암호가 문서 파일의 헤더에 평문으로 버젓이 저장되었는지 군대에서 이렇게 암호를 뚝딱 풀어서 중대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는 분의 무용담이 전해진다.

한편, 1994년경엔 아래아한글 2.1 (2.1과 2.5 공용) 파일 포맷의 암호도 어느 서울대 출신의 천재 해커에 의해 뚫려서 화제가 됐는데..
이건 이적행위 증거를 찾으려고 지금의 국정원, 당시의 안기부에서 작정을 하고 해커를 고용해서 뚫은 것이었다고 한다. 개발사인 한컴이 이적행위를 했다는 건 물론 아니고, 사용자 중에 불온문서를 만든 사람이 있었다는 뜻.
단순한 오덕질이나 사적 이익 때문이 아니었다는 점이, 그리고 또한 단순히 한 특정 문서의 암호만 brute force 방식으로 대입해서 알아낸 게 아니라 전반적인 암호화 알고리즘 자체를 파악하고 예측하는 데 성공해 버렸다는 점이 무척 놀랍다.

그 당시 한컴은 2의 32승 운운하면서 “암호를 걸었던 사람이 암호를 잊어버리면 우리조차도 암호를 풀 수 없다. 암호를 뚫으려면 130년은 족히 걸릴 것”이라고 언론 보도까지 내면서 아주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3.0 버전에서는 즉시 암호화 알고리즘을 변경해야 했다.

그럼 다음부터는 자체한글 '그래픽' 모드에서 실행된 프로그램 얘기를 하겠다.
본인은 오래 전에 윤곽선 글꼴로 한글을 찍는 기능이 어떤 형태로든 있었던 도스용 프로그램을 주목하여 몇 가지 예를 든 적이 있다.
아래아한글 2.x를 제외하면 그래픽 에디터 내지 배너 프로그램이 걸려들곤 했는데, 그것들 말고 아래아한글과 비슷한 급의 상업용 워드 프로세서로는 다음 두 프로그램이 있다. 단, 본인은 어렸을 때 이들 프로그램을 직접 써 보지는 못했다.

1. 사임당

난 10여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5만원권 지폐를 신권 형태로 첫 발행했을 때 이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지폐에 들어간 모델 때문이긴 하지만, 그래도 써 본 적도 없는 프로그램을 어떻게 그렇게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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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은 윤곽선 글꼴, 위지윅, 컬러 지원, 그래픽 처리 등의 기술적인 면에서는 아래아한글 2.x 초반대 버전보다 더 뛰어나면 뛰어나지 절대로 못하지는 않았던 매우 우수한 프로그램이었다. 그런 기능들은 따지고 보면 오히려 아래아한글이 도입 타이밍이 더 늦거나 전문용에만 오랫동안 봉인돼 있었다. GUI만 봐도 뭔가 비범한 구석이 느껴지지 않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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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무른연모'라는 글자를 보아하니 휴먼샘체/팸체(안상수체는 아님) 같은 한글 가변폭 글꼴도 잘 지원하고 있었다.
사임당은 분명 시대를 앞서갔던 프로그램이었지만, 위키백과의 설명에 따르면 비싼 가격과 강경한 복제 방지 정책 때문에 그리 많이 보급은 못 됐으며 아래아한글을 실질적으로 위협하지 못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사임당의 개발사인 한컴퓨터 연구소/주식회사도 오늘날의 한글과컴퓨터 못지않은 워드 프로세서 개발 전문 기업이었다. 예전부터 사임당의 전신인 '한글 2000'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사임당 말고도 저가 보급형 프로그램인 '쪽박사, 글박사' 같은 프로그램을 따로 개발했다. 글박사의 경우 본인도 초딩 시절에 컴퓨터 잡지에 소개된 걸 본 기억이 있다. 무려 1992년에! 하지만 이 역시 실물을 직접 써 보지는 못했다.

사임당, 글박사 등의 스크린샷을 보면 저기서 만든 워드 프로세서들은 전통적으로 세로획도 1픽셀인 고딕 계열 글꼴을 UI 표시용 한글 글꼴로 써 왔다. 세로획이 2픽셀인 명조 계열 글꼴을 사용한 아래아한글과는 대조적이다.

2. 21세기 워드

아래아한글과 사임당으로도 모자라서 도스에서 한글 윤곽선 글꼴을 지원했던 그래픽 워드 프로세서가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지금은 알집과 카발(온라인 게임)로 유명한 그 회사가 먼 옛날 초창기에 만들었던 제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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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실물을 써 보지는 못했지만 컴퓨터 잡지에서 광고를 한 건 봤다. 글꼴을 가지고 대놓고 아래아한글을 디스하고 있었다.
모 제품은 가격이 8만 8천원이나 하는데도 글꼴이 꼴랑 다 깨지는 비트맵 명조로밖에 안 나오는 반면,
우리 21세기 워드는 그거 거의 반값으로도 아주 미려한 윤곽선 글꼴 신명조가 나온다고...;;

디스 당한 모 제품은 뭔지 직접적으로 언급은 안 돼 있지만, 누가 봐도 아래아한글 2.0이던가 2.1의 일반용인 건 뻔한 노릇이었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아래아한글도 2.5 버전에 와서야 일반용/전문용 구분을 없애고 16비트 컴퓨터에서도 컬러와 윤곽선 글꼴을 실현시켰지만.. 때가 좀 늦은 조치였다.

21세기 워드는 글자 크기 조절과 윤곽선 글꼴을 빼면 나머지 워드로서의 기능은 아래아한글 1.5x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화면을 딱 봐도 색상이나 글꼴은 아래아한글 1.5x를 대놓고 오마주한 것 같지 않은가? ㅎㅎ
단, 한글의 비트맵 글꼴 명조체는 아래아한글 1.5x가 사용하던 그 명조와는 다르다. 아래아한글은 custom 3차원 조합 테이블을 사용한 약간 더 정교한 글꼴인 반면, 21세기는 그냥 그 당시에 널리 통용되던 초중종 8*4*4벌 도깨비 조합 규칙으로 구현된 명조이다.

어떻게 아냐고? 다 방법이 있다.
도깨비 조합형은 세로줄형 모음에서 받침 ㄴ일 때와 이외의 다른 모음일 때의 구분이 없다. 그래서 '편'(집)일 때와 (입)'력'일 때 ㅕ가 길이가 똑같아서 받침 ㄴ일 때 아래 공간이 약간 허해 보인다.
그 반면, 지금 <날개셋> 편집기의 '바탕'으로 채용돼 있는 아래아한글의 명조는 받침 ㄴ일 때 세로 모음들이 딱 1픽셀 더 길어서 아주 조금 더 균형이 잡혀 보인다. 이런 작은 차이가 존재한다.

사소한 글꼴 디테일 얘기는 그렇고.
그 당시 이스트소프트는 파릇파릇한 공대생 몇 명이 갓 창업한 벤처/스타트업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에 기술과 영업 역량에 한계가 있었다. 물론 그 여건에서 천재 프로그래머 몇 명이 이 정도를 뚝딱 만든 건 정말 대단한 일인 건 맞지만, 그런 몇 가지 차별화 요소만 갖고 아래아한글이라는 기득권 아성을 무너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21세기 워드는 사임당 정도의 엘리트주의로 간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렇게 망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걸 계기로 이스트의 창립자분은 뭔가 깨달은 게 있었는지, "그냥 기술적으로 뛰어나기만 한 제품"이 아니라 "사용자에게 잘 어필되고 실질적으로 팔리는 제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실용주의 노선으로 생각을 급선회하게 됐다고 한다. 하긴, 에디슨도 처음엔 자기 오덕질대로만 외곬스러운 발명을 하다가 나중에야 그렇게 깨닫는 계기가 있었다고 들었다.

21세기 워드를 만들었던 회사는 그로부터 6, 7년쯤 뒤 21세기가 실제로 임박하자, 이번엔 '새 폴더'를 비롯해 아주 익살스러운 외형의 압축 프로그램을 무료로 뿌리면서 컴백했다. 본인은 2000년 말, 알집을 4.8대 버전 때 처음으로 접했다. 그런 식으로 잘나갈 수도 있었고 "개인에게만 무료, 기업은 유료" 정책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는데.. 프로그램이 압축 본연의 기능이 탄탄하지 않다는 나쁜 소문이 2000년대 초중반에 워낙 퍼지면서 안 쓰게 됐고.. 지금은 빵집을 거쳐서 반디집이 국민 압축 프로그램 타이틀을 물려받았다. 빵집은 퀄리티가 나쁘지는 않았으나 보다시피 개발이 중단됐으니 말이다.

워드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딴 얘기가 길어졌네.
아무튼, 저 두 프로그램들은 아래아한글에 밀려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20여 년 뒤, 도스가 아닌 Windows 얘기이긴 하지만 지난 2014년 가을엔 삼성조차 1992년 이래로 개발돼 왔던 훈민정음을 완전히 포기하고 MS 워드로 복귀를 선언했다. 훈민정음은 처음부터 Windows용으로 개발됐고, 버전 4.5 시절엔 마치 Visual Basic 4처럼 16비트용과 32비트용이 동시에 따로 출시된 탄탄한 제품이기도 했는데 말이다.

훈민정음이 GG를 쳤는데 그럼 아래아한글은? 지금까지 쌓인 인프라가 워낙 많고, 또 아래아한글과 워드는 내부 구조가 서로 너무 다르다 보니 사용자가 하루아침에 전멸하고 쫄딱 망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갈라파고스화' 알박기 덕분에 겨우 연명하고 있는 비중도 크며, 학교· 군대· 관공서가 아닌 사기업에서 HWP의 입지는 이미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젠 워드, 엑셀 같은 너무 흔한 필수 프로그램은 그냥 다 공짜로 뿌리는 거나 다름없는 세상이 되기도 했고.
그러니 이스트도 결국은 돈 되는 건 게임이라고 생각하고 진작부터 과감하게 카발을 개발한 것 같다. 이 컴퓨터 소프트웨어 업계가 앞으로 어찌 되려나 참 눈 돌아가겠다.

Windows의 개발 역사에 대해서는 현직 마소 고참 개발자인 레이먼드 챈 아저씨가 The Old New Thing이라는 개인 블로그에서 10년이 넘게 오늘날까지도 구수한 입담으로 그때 그 시절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것처럼 개인적으로는 아래아한글 1.0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몽땅 꿰뚫고 있는 어떤 개발자가 아래아한글 내지 그 시절 경쟁 워드 프로세서들의 역사를 구구절절 회상하는 코너가 좀 있으면 좋겠다. 필기체가 개발된 사연, 1.2 버전에서 테트리스 게임이 개발된 사연, 한컴 2바이트 코드의 제정 경위, 옛날 공 병우 박사와의 인연 등등 얘기가 엄청 많을 것 같은데..!

Posted by 사무엘

2015/10/30 08:34 2015/10/30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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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소프트웨어의 추억을 발굴하는 작업은 변함없이 계속된다.
몇 달 전엔 비트맵 그래픽 에디터 얘기를 했다. 구글링으로도 좀체 정보를 발견할 수 없던 Splash와 Image72를 찾아 냈다. 이어서 오늘은 도스용 셸 유틸리티 얘기를 해 보겠다. 출처를 도저히 알 수 없었던 한 외국산 프로그램의 정체를 또 파악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름하여 Packard Bell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옛날 도스 시절엔 부팅이 끝나면 화면에 뜨는 건 시꺼먼 화면에 C:\ 프롬프트가 전부였다. 이런 인터페이스로는 초보자건 전문가건 컴퓨터를 제대로 활용하기가 몹시 불편했기 때문에, 컴퓨터에 존재하는 다른 프로그램들을 빠르고 편하게 실행시켜 주는 '셸'에 해당하는 프로그램이 별도로 여럿 만들어지곤 했다.

전문가를 위해서는 MDIR이나 노턴 커맨더처럼 파일 관리 유틸리티를 겸하는 셸이 쓰였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파일 정보만 표시하면 되니 보통 텍스트 모드에서 실행되었다.
그러나 초보자를 위해, 당시의 Windows 3.0에 준하는 GUI를 표방하면서 알록달록한 아이콘이 나오는 그래픽 셸도 있었다. 골치 아픈 단축키를 외울 필요 없이 마우스 클릭만 하면 원하는 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있었다.

MS-DOS 버전 4인가 5부터 제공되었던 '도스셸'은 그래픽 모드에서 실행되는 것도 가능했지만 그래도 전자와 후자 중에서는 전자의 성격에 더 가까운 물건이었다. 그래도 GUI의 불모지인 도스에서 나름 마우스 드래그 드롭을 구현했고, 프로그램의 색상과 화면 모드를 다양하게 바꿀 수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자, 그 와중에 저 '패커드 벨'이라는 프로그램은 우리 집 컴퓨터에 처음부터 있었던 프로그램은 아니고, 친구 집 컴퓨터에서 접했다. 그런데 GUI가 굉장히 고퀄이고 화면이 예뻤다. 16색 VGA에서 실행되는데 투박한 표준 팔레트를 쓴 게 아니라 보다시피 자체적으로 팔레트 색상을 재정의했으니 더욱 이색적인 느낌이 났다. 색상도 그렇고 글꼴도 그렇고, 알록달록한 아이콘까지, 뭔가 프로그래머가 대충 발로 그린 게 아니라 그래픽 전문가의 손길이 닿은 티가 났다. 어린 시절에 본인은 저렇게 "나만의 세계가 느껴지는 비주얼"을 보면 아주 사족을 못 썼다.

저 스크린샷에서는 안 보이지만, 원래는 마우스 드라이버가 있건 없건 마우스 포인터도 나타난다. 그런데 포인터도 운영체제가 그냥 기본으로 주는 작고 투박한 화살표가 아니라, 무려 살색의 사람 손가락 모양이다. 요즘으로 치면 웹 브라우저에서 링크를 가리킬 때 나타나는 그 마우스 포인터와 비슷하다.
화살표 키를 누르면 지금의 마우스 포인터 위치에서 그 화살표 방향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버튼으로 포인터가 이동하는데, 이것도 즉시 되는 게 아니라 부드럽게 궤적을 그리면서 이동한다. 이런 것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워드 프로세서나 그래픽 에디터가 아니고, 그렇다고 게임도 아니고.. 자체 한글 같은 것도 필요하지 않는 외국산 도스용 유틸리티가 그래픽 모드에서 가변폭 영문 글꼴 출력까지 구현한 것은 그 당시로서는 몹시 드문 일이었다.
도대체 이 프로그램은 누가 언제 어디서 만들었는지 알고 싶어서 뒤늦게 인터넷을 수소문했지만, 정보를 도저히 얻을 수 없었다.

본인은 이 프로그램의 이름이 Pen Bel(l) Desktop인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왕년에 베이직 프로그래머였으니 PB라고 하면 파워베이직의 이니셜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저 추억의 프로그램의 실행 파일에도 PB라는 문자가 포함되어 있긴 했다. 하지만 저 이름으로는 아무것도 검색이 되지 않았다.

이 프로그램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얻은 곳은 IE is evil!로 유명한 이 사람의 GUI 갤러리 웹사이트였다.
도스는 말할 것도 없고 Windows 3.1 시절까지만 해도 기존의 허접 구닥다리 '프로그램 관리자'를 대체하는 싸제 셸 유틸이 수요가 있었다. 노턴 데스크톱, 그리고 MS의 흑역사 Bob 같은 프로그램들이 있는데.. 어? Packard Bell 내비게이터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3.5 버전은 완전히 Bob처럼 그래픽 기반으로 바뀌었지만, 1.1은 보아하니 도스용과 완전히 같지는 않아도 색상과 외형이 웬지 도스용 프로그램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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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토리얼, Support, your software처럼 큰 메뉴 구성이 꽤 비슷해 보이는 데다 자음 이니셜이 일치하기도 하니 동일 회사의 프로그램일 거라는 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이 키워드로 구글링을 계속했다.. 그러나 일단 '패커드 벨'은 컴퓨터 제조 회사인지라 걸려 나오는 것은 온통 컴퓨터 사진밖에 없었다.

그랬는데 어느 국내 블로그에서 드디어 월척을 낚는 데 성공했다. 내가 찾던 바로 그 프로그램의 스크린샷이 나온 것이다. 프로그램과 개발사 이름이 동일하게 '패커드 벨'인 듯하다.
이 회사는 소프트웨어가 아닌 하드웨어가 주력 상품이고, 프로그램은 자기 컴퓨터에 번들로 설치되는 것 위주로만 개발한 듯하다. 소프트웨어만 전문으로 만든 게 아닌데도 1991년경에 도스와 Windows용 셸을 모두 그것도 상당히 뛰어난 퀄리티로 만든 것이 무척 대단하게 느껴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래서 이 도스용 '패커드 벨' 셸은 메뉴 구조가 좀 특이했다. ESC를 누르면 도스셸이나 '로터스 웍스' 같은 붙박이 고정 프로그램이 있고, 'Your software'을 골라야만 아까와 같은 프로그램 아이콘 리스트가 나타났다. 패커드 벨 컴퓨터에는 원래 '로터스 웍스'도 번들로 제공되었던 듯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새로운 프로그램을 등록하는 화면이다. 아이템에 사용할 '아이콘', 밑에 표시할 텍스트, 그리고 실제로 실행할 프로그램 이렇게 세 가지 정보를 서로 다른 화면에서 지정해 줄 수 있다. 아이콘은 저 35종류의 기성 그림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고 다른 외부 그림 파일을 사용할 수는 없다는 게 특이하고 한편으로는 아쉬운 점이다. 기성 그림들은 각각 어떤 컨셉으로 만든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저 스크린샷에서는 제대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원래 이 프로그램은 하드디스크에 존재하는 모든 실행 파일들을 아래의 리스트에다가 표시해 준다. 그래서 사용자는 일반적인 파일 열기 대화상자를 다룰 때처럼 매번 디렉터리를 오갈 필요 없이 한 목록에서 실행 파일을 곧장 선택할 수 있었다. 이건 사실 MS 도스 셸에도 있던 기능이다. 2~30여 년 전, 한 하드디스크가 크기가 수십~100수십 MB밖에 하지 않던 시절에나 가능했던 일이다.

지금 다시 저 프로그램을 접할 수 있다면 무척 감회가 새롭고 흥미진진할 것 같다.

도스 셸 하니까 생각나는데, 옛날에 MS-DOS 4.0은 우리가 아는 그 4.0만 있는 게 아니라 '멀티태스킹 에디션'이라고 유럽 쪽에서 주로 쓰인 다른 브랜치가 있었다고 한다. 16비트 Windows가 사용하던 New Executable 포맷도 사실은 이때 처음으로 제정되었다고 하고.

또한, 국내에서 개발된 그래픽 위주 도스 셸로는 먼 옛날(1993년쯤) 이 종하 씨가 개발한 '능금'이라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옛날에는 '파란연필'이라는 텍스트 에디터도 개발했던 분인데 본인은 요것들은 옛날 컴퓨터에서 다 직접 써 봤다.
'능금'은 셰어웨어였으며, 비등록 공개판은 등록할 수 있는 그룹과 프로그램 개수에 제한이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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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셸로서 '능금'이 지닌 가장 독특한 점은.. 한 아이템에 대한 아이콘을 최대 5개까지 연달아 지정해서 초보적인 수준의 '움짤'을 만들 수가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외부 파일 사용 가능함. 저 스크린샷을 보면 '그래픽'의 경우 물결이 출렁거렸고, '게임'은 테트리스 블록이 내려가는 모습이 반복되곤 했다.
그래도 '능금'의 기본 팔레트 화면과 저 아이콘들은 '패커드 벨'에 비하면 좀 아마추어 같은 느낌이 들긴 한다. ^^

Posted by 사무엘

2015/07/07 08:34 2015/07/07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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