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구에서의 관광 일정을 마친 뒤, 이제 평화의 댐을 보러 화천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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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바다와 산뿐만 아니라 계곡과 강,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이것대로 또 경치가 몹시 아름다웠다. 물에 들어가서 발이라도 담그고 나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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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어마어마한 높이 좀 보소.
평화의 댐은 잘 알다시피 5공 시절에 다소 불순하고 비현실적인 동기 하에 만들어졌다. 하다못해 다목적 댐도 아니고..
하지만 일단 만들어 놓고 보니, 훗날 북한이 진짜로 예고 없이 수공을 퍼부었을 때 물을 제어해서 재앙을 예방하는 역할을 그럭저럭 수행하긴 했다. 소 뒷걸음질치다가 쥐 잡듯이 "어쨌든 결과는 그닥 나쁘지 않았다"처럼 된 셈이다.

사실, 4대강도 그렇고 우리나라처럼 계절 변덕이 심한 나라에서 치수와 관련된 토목 공사 투자가 무의미한 뻘짓인 경우는 별로 없었다. 불볕더위와 가뭄이 조금만 계속돼도 옛날엔 제한급수에 온갖 난리 호들갑을 떨었으며, 반대로 태풍이나 홍수가 한번 났다 하면 TV에서는 전국적으로 수재의연금 성금 모집하던 게 불과 20여 년 전의 관행이었다. 요즘은 지구 온난화다 뭐다 하면서 기상 이변이 예전보다 더 심하면 심해졌지 날씨가 결코 온순해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 같은 난리 호들갑이 왜, 무엇 덕분에 쏙 들어갈 수 있었겠는지를 잘 생각해 보자.

내가 방문하던 당시에도 평화의 댐은 또 무슨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래서 댐 위로 지나가 볼 수는 없었고, 댐 주변에서 댐과 공원의 사진만을 남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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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공원에는 온갖 공격 무기들의 모형이 전시돼 있는데.. 예술 작품을 표방하다 보니 도색은 저렇게 형형색색으로 돼 있다.
평화의 댐 자체는 민통선에 있지 않다. 하지만 근처의 두타연 계곡은 민통선 안이라고 한다. 여기를 들어가려면 또 다른 장소에서 출입증을 끊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검문소에서 즉각 신분증만 까면 되는지 난 잘 모르겠다.

전국의 어느 민통선이든 자가용을 이용한 출입 허가를 받은 외지인은

  1. 받은 임시 출입증을 차 앞유리에 잘 보이게 노출시킬 것.
  2. 이런 데서 교통사고라도 나면 피차 왕창 골치 아파지니 절대적으로 안전 운전할 것.
  3. 목적지가 아닌 길가에 무단으로 주· 정차를 하지 말고 길을 빨리 통과할 것.
  4. 블랙박스를 끄고 다닐 것. (군사 시설을 무단 촬영하지 말 것)
  5. 민간인이 전투복을 입고 다니지 말 것.
  6.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모든 용무를 마치고 퇴장할 것.

이라는 수칙이 존재한다. 도로 통과형이 아닌 일반적인 민통선 구간들은 반드시 들어갔던 초소로 나오는 게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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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지막 목적지가 있는 홍천으로 가기 위해 경로를 남쪽으로 바꿨다. 양구, 화천 다음으로 계속 서쪽으로 가면 철원이 나온다. 하지만 철원은 예전에 간 적이 있으며, 어차피 우리나라의 최북단에서 서울로 가는 고속도로를 타기 위해서는 춘천-홍천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남행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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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경치가 아주 아름다운 어느 쉼터를 발견했다. 이 사진엔 담기지 않았지만 뒤에는 지붕 달린 정자도 있다. 저 벤치에 앉아서 노트북 PC를 들여다보는 인증샷도 남기고 싶었으나.. 본인은 싱글 솔로이다 보니 사진을 찍어 줄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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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에 화천 수력 발전소를 발견했다. 역시 사진에는 담기지 않았지만 여기 근처에는 군부대 포병 훈련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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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계획에는 없었는데, '파로호' 안보 전시관이라는 게 있어서 여기도 잠시 들렀다. 파로호란 근처에 있는 호수의 이름이다. 북한강 상류가 화천댐에 가로막히고 고여서 호수를 형성한 것이다.
여기 일대의 댐과 수력 발전소는 일제 강점기 말기(1944년)에 건설되었으며, 6· 25 전쟁 중이던 1951년 4~5월 사이에는 북한군의 수공에 맞서 이 댐을 점령하거나 파괴하기 위해서 국군· UN군과 북한· 중공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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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호의 풍경은 이 사진 한 장만 남겼다.
이렇게 화천을 지나고 드디어 춘천에 진입했다. 춘천, 그리고 더 남쪽의 홍천에서는 군사 훈련 중인 탱크들이 줄지어 도로를 달리는 걸 유난히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여러 대의 차량들이 저속으로 일종의 떼빙(대열운행)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민간인 자동차들의 통행이 좀 지장을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반적인 군용차와는 달리 탱크는 엔진 소리가 뭐랄까.. 유별나게 시끄럽고 더 기괴했다. 여느 중장비의 엔진 소리와도 달랐다. 차마 말과 글로 묘사할 수가 없다. 게다가 탱크는 차체의 폭도 여느 자동차보다 더욱 크기 때문에 좁은 도로에서 교행이나 추월하기가 더욱 난감했다.

그래도 저것도 다 나라 지키려고 저러는 건데 신기한 구경 하나 하는 셈치고 관대히 넘어갔다. 6· 25 전쟁이 벌어지던 당시에 우리나라는 저런 탱크가 아예 한 대도 없었다. 그 반면 북한군은 242대 보유. 이 숫자 통계는 초딩 시절부터 배워서 알고 있었다.
안전 운전에 지장을 줄 정도로 졸음이 밀려 와서 춘천 외곽에서는 잠시 차를 세워서 20분 남짓 쪽잠을 잔 뒤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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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곳의 공식 명칭은 '강 재구 소령 추모 공원'이고 입구 주변이 이렇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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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기철 목사 하면 '일사각오'가 떠오르듯 강 재구 소령은 그야말로 '희생정신', '살신성인'의 아이콘이다.
1960년대에 한국군이라는 게 조직 분위기가 지금 군대보다 결코 더 좋지 않았다. 아직 우리나라가 북한보다 못살던 시절이었고 북한의 무력 도발 위협은 임팩트가 지금보다 훨씬 더 컸다.

그러면 군대를 열악한 자원이라도 최대한 잘 활용해서 나라를 잘 지키기라도 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합리적인 시스템 대신, 까라면 까 식의 미개한 일본군 관행에 사람 잡는 구타· 똥군기가 만연했다. 그래 놓고는 "나 간부다" 편법 한 마디에 초소가 숭숭 뚫리기도 했으니 군대가 제 역할 제대로 못 했다.

그리고.. 지금이니까 연간 군대 내 전체 자살자· 사고 사망자가 두 자리 수이지 그때는 세 자리 수를 가뿐히 넘어서곤 했다. 옛날 군대가 지금 군대보다 좋은 건 딱 하나, 아직 출산율 높고 인구가 많던 시절이다 보니 조금만 몸이 안 좋으면 방위· 면제로 빠지는 길도 지금보다야 훨씬 더 꽤 관대하게 열려 있었다는 것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부하가 실수로 병사들 한가운데로 떨어뜨린 수류탄을 수습하려고, 그것도 다른 방법이 없으니 상관이라는 사람이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그걸 온몸으로 웅크려 덮어서 막은 뒤 산화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건 정말 전군의 사기를 진적시키는 미담이 아닐 수 없었다.

강 소령이 소속되었던 부대는 북한과 대치해 있는 평범한 전방 부대는 아니고, 베트남 파병을 갈 예정이던 부대였다. 박통이 외화벌이와 국력 신장을 위해서 선진국 군인에 비해 저렴한 인건비와 높은 가성비를 메리트로 내세우며 베트남전 파병을 결의했다. 그러자 맨주먹과 근성밖에 가진 게 없고, 시골에서 농사만 짓는 것보다야 더 짧고 굵게 돈을 많이 벌어 와서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 한 장정들이 여기에 많이 지원한.. 그런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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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재구 소령 추모비와 추모탑이 이렇게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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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은 아담한 크기이고 강 소령의 흉상, 초상화, 유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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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소령은 나이 30도 못 되어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그 대신 그야말로 불멸의 이름을 남기고 영예를 얻었다. 고인의 모교에서는 육사는 말할 것도 없고 서울 고등학교까지 다 고인을 기리고 있고, 육군 부대에도 '재구 대대'라는 이름의 대대가 생겼다.

어릴 때부터 "나도 저런 사람이 되어야겠다"라는 모델격의 인물을 마음에 두는 게 참 좋은 것 같다. 육사 32기 출신의 엘리트 군인으로 대장까지 역임한 정 승조 장군(1976년 임관, 2013년 예편)이 있는데, 이분이 1976년 당시에 육사를 수석 졸업하고 신문 기자와 인터뷰를 했을 때에도 "강 재구 소령의 전기를 읽고 큰 감화를 받아서 육사를 갈 생각을 하게 됐다"라고 밝힌 바 있다. 군사정권 시절에 육사는 학비 걱정 없지, 진로도 안정적이지, 가히 오늘날의 SKY급 대학에 맞먹는 위상과 입결을 자랑했다는 점도 생각할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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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세로쓰기여서 읽기가 어렵다. 강 소령 역시 처음에는 수류탄을 다른 데로 멀리 던져 버리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몸으로 폭발을 막는 방법을 선택하게 됐다.

이분에 대해서 상훈 기록을 찾아보면, 어디서는 태극 무공 훈장이라는 최고 등급 훈장을 받았다고 돼 있고 다른 어디서는 4등 공로 훈장을 받았다고 돼 있는데.. 무슨 성경의 모순 구절을 보는 것 같다.
이것도 성경의 모순 구절 풀듯이 문제를 풀면 된다. 본문 텍스트에 나와 있듯, 정답은 '둘 다 받았다'이다. 더 높은 훈장은 나중에 추가로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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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산화하던 당시에 입었던 전투복은 수류탄 파편을 맞아서 저렇게 너덜너덜해져 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다른 군인의 증언에 따르면 수류탄 폭발로 인해 고인은 사지가 절단될 정도의 치명상을 입었고, 그래도 폭발과 함께 즉사한 건 아니고 잠시 살아 있었다고 한다.

수류탄을 실수로 떨어뜨린 병사의 실명(박 해천 이병)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저 병사는 비록 무슨 범죄를 저지른 건 아니지만, 평생 얼마나 큰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채 살았을지 모르겠다. =_=;; 지금은 그 운명적인 사건이 일어난 지 반세기가 넘게 지나기도 했고, 저분의 근황이 어떤지는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전해지는 게 없다.
이름이 기록으로 남아 버린 이상, 나라면 은폐(?)를 위해 개명부터 했을 것 같은데, 그 시절은 지금처럼 쉽게 개명이 가능한 때도 아니었다는 게 문제다. -_-;;

실제로 생존 무장공비 출신인 김 신조 씨는 얼굴이 알려진 건 말할 것도 없고, 이름까지 교과서에 대문짝만 하게 실려서 그 당시 남조선 군필자들의 웬쑤가 됐다. "니놈 때문에 내가 군대 전역도 늦어지고 말년에도 얼마나 조뺑이 치고 고생했는지 알아?" 야사에 따르면 길거리에서 어느 예비역 아저씨에게 뒤통수를 까이기까지 했다고.. 결국 그는 부담감을 견디다 못해 실제로 '김 재현'으로 개명까지 했다. 최소한 법적으로는 김 신조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근황이 더 검색되지 않게 하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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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에 와서 새롭게 처음 알게 된 사실은 강 재구 소령도 생전에 크리스천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금까지 인터넷으로만 봐 오던 곳들을 실제로 돌아다니면서 답사를 잘 마쳤다.
날씨가 여전히 덥고 물과 전기가 부족하고, 또 배고프고 피곤하기도 해서 여기서 더 놀지는 않았다. 조양 IC에서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집에 돌아갔다.

이틀 동안 1분 1초가 버릴 게 없는 즐거운 여행을 했다. 산과 계곡과 바다를 모두 구경했으며 고속도로부터 엔진 브레이크 비탈길까지 골고루 750km에 달하는 거리를 운전했다. 이 정도로 욕구를 해소했으니, 당분간은 또 서울을 빠져나간다거나 차 끌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은 생각이 안 들 것 같다. 시골은 차량 운행이 뜸하고 어디든지 주차 걱정 없이 차를 세울 수 있는 것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았다.

강원도는 꽤 넓다. 내년 여름에는 정선, 영월, 태백, 동해처럼 태백선 철도와도 인접해 있는 강원도의 '남부'를 돌아다녀 볼 예정이다. 영역이 공교롭게도 강릉 이남이냐 이북이냐로 나뉘는 것 같다. 이번에 다닌 곳은 온통 북부이니 말이다.
또한 내년엔 이제 병특 마친 직후에 만들었던 여권이 유효 기간이 1년 남짓밖에 안 남는데, 아직도 여권엔 사증란이 많이 남아 있다. 어딜 가든 외국 여행도 한번 다녀오고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6/09/23 08:31 2016/09/23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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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y 2: 내륙 산악 드라이빙

아침에 눈을 뜨니 숙소 주변은 안개가 자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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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바다를 뒤로 하고 양구로 가기 위해 꼬불꼬불 고갯길을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둘째 날엔 하루 종일 이런 길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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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위성 사진 지도를 보면, 동북부는 온통 초록색 삼림으로 뒤덮였는데 양구 일대만 사람 머리로 치면 땜통처럼 동그랗게 패여 있다. 양구는 대구처럼 일종의 분지 지형이며 6· 25 전쟁 당시에 외국인 종군기자는 우묵한 사발(punch bowl)이라는 애칭을 붙였다. 한글로는 장모음의 표기가 생략되어 '펀치볼'이라고 적는데, '볼'이라고 해서 ball인 건 아니다. ball은 단모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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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옛날 서체가 참 정겹다. 옛날에 우리나라는 각종 표지판과 간판, 자막에 이런 어설픈 둥근고딕 형태의 서체를 굉장히 많이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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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한번 탔다가 다시 내려오니 '사발의 안'에 자리잡은 양구 시내가 나타났다.
을지 전망대와 제4 땅굴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양구 통일관에 가서 입장료를 내고 민통선 출입 신고를 하면 된다. 절차가 고성 통일 전망대를 관람하는 것과 비슷하다. 단, 오후에 늦게 도착해서 시간이 충분치 않으면 둘 중 하나는 못 볼 수도 있다.
양구 통일관 자체도 북한의 실상 같은 안보 자료를 전시하고 있으며, 양 옆에는 각종 전적비· 충혼탑과 탱크가 놓여 있고 또 독특한 외형을 한 '전쟁 기념관'도 있다. 나름 볼것들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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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화해와 협력을 통한 '1민족 1국가 1체제 1정부' 평화 통일을 지향한다. 이 좁아 터진 땅덩어리에 1국가 2체제가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냐. 그에 반해 북괴는 여전히 자기 체제의 유지를 위해 주체사상과 남조선 혁명, 공산화 통일 구도를 접은 적이 없다.
하지만 북괴의 마귀적인 현 체제를 갈아엎지 않으면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를 선사할 수 없으며, 그럼 남북은 통일을 하는 아무 의미가 없다. 안 하는 것만도 못하다. 그러니 현실은 둘 중 하나가 물리적으로 없어져야만 통일이 될 것이고 남한 주도의 통일은 사실상 무력 흡수 형태가 될 공산이 크다.

그걸 감당할 리스크가 없다면? 그냥 영구분단, 고립, 봉쇄이라도 제대로 해서 북한이 스스로 붕괴라도 하게 내버려 둬야지.
매정· 냉정하게 들리더라도 저 북괴한테 평화를 구걸하며 계속 퍼주는 것보다는 저거야말로 훨씬 올바르고 더 인간적인 조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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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 전쟁 기념관은 전쟁터를 형상화한 기발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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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증을 받은 뒤엔 양구 통일관의 북쪽(12시 방향)으로 간다. 로터리가 나오는데, 오른쪽 3시를 선택하면 을지 전망대로 가며, 계속 12시 방향으로 직진하면 땅굴로 갈 수 있다. 난 먼저 을지 전망대로 갔다.
전망대도 북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길이 먼저 3시 방향으로 나 있는 이유는.. 산을 오르는 우회로를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그야말로 엄청난 길이의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을지 전망대는 해발 고도가 무려 1000미터가 넘고 국군 GOP가 코앞인 곳에 있기 때문이다.

지도에서 높이를 무시하고 보면 전망대와 땅굴은 직선 거리가 상당히 가까우며 길이 서로 연결돼 있다. 하지만 보안 때문인지 안전 때문인지는 몰라도 민통선 안에서 이 두 장소를 곧장 왕래할 수는 없었다. 전망대를 본 뒤엔 다시 민통선 밖으로 나와서 그 로터리까지 갔다가 그야말로 수십 km를 뺑이를 치면서 땅굴을 보러 가야 했다. 동선이 아쉽다.

뭐 아무튼..
앞서 얘기했듯이 을지 전망대는 본격 군사 시설이기 때문에 전망대 건물 자체와 양구 시내 방면으로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북한 쪽은 촬영이 절대 금지.
하긴, 파주의 도라 전망대는 금이 그어져 있어서 카메라질은 금 밖에서 어깨 너머로만 할 수 있던데, 여기는 통제가 더 심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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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 전망대에서는 나무로 뒤덮인 빽빽한 산과 숲, 그리고 끝없이 둘러진 철조망, 띄엄띄엄 설치된 우리나라와 북한의 GOP를 볼 수 있었다. 도라 전망대는 평지, 철원의 평화 전망대는 초원, 고성의 통일 전망대는 바다인데 여기는 그냥 산이다.

믿어지지 않는 얘기이지만 가이드 아가씨의 설명에 따르면, 옛날에는 북한이 남한 병사들을 꾀어 내려고 자기네 여군들을 근처의 계곡에서 목욕하는 모습을 대놓고 노출시켰다고 한다. 이거 무슨 선녀와 나무꾼 얘기도 아니고..
이에 우리나라에서도 미인계엔 미인계로 대응했는데, 1992년 미스코리아 수영복 심사를 일부러 을지 전망대 GOP 근처에서 했다고 한다. 이 1992년도 대회에서 진을 차지한 우승자가 바로 이 승연 씨. 하지만 이분은 각종 부적절한 언행들로 인해 지금은 몸값이 많~이 하락하고 망가진 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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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전망대와는 달리 이 전망대는 응당 내비 지도에 나와 있지 않다.
산을 내려갈 때는 2단 고정 엔진 브레이크를 단단히 걸면서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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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목적지인 제4땅굴 광장에 도착했다. 얘는 서부가 아닌 동부 전선에서 최초이자 현재까지 최후로 발견된 땅굴이다.
과거의 제1과 제2 땅굴은 지상에서의 이상 징후를 토대로 발견된 반면, 제3과 제4는 귀순자의 증언을 토대로 발견되었다. 다만, 제4 땅굴을 제보한 귀순자는 우리나라 군 내부에까지 드나들었다가 나중에 또 중국에서 잠적해 버렸기 때문에 쟤 혹시 이중간첩이 아닌가, 제4 땅굴은 그저 역정보 떡밥 유포일 뿐인가 하는 불안한 음모론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귀순자가 얘기하는 장소 일대에서 시추공을 이곳 저곳 내리꽂으며 수백 번이나 허탕을 친 뒤에야 땅속의 빈 공간을 발견했다. 우리나라가 땅굴의 존재를 확실히 인지한 때는 1989년 12월 24일이다. 그 뒤 우리 쪽에서 역갱도를 파기 시작해서 북한의 땅굴과 실제로 관통에 성공한 것은 그로부터 3개월 정도 뒤인 1990년 3월 3일이다.

제2와 제3 땅굴은 민통선 검문소를 통과한 뒤에도 북쪽으로 엄청 깊숙히 들어간 곳에 있지만, 이 제4 땅굴은 가는 경로의 대부분이 의외로 민통선으로 잠겨 있지 않았다. 단지, 땅굴 광장으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무슨 군부대 입구처럼 막혀 있었고, 여기 안으로 들어가려면 아까 양구 통일관에서 발급받은 출입증을 제시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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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 땅굴은 자가용을 끌고 개인 단위로 찾아갈 수가 있기 때문에, 가는 길목에 이런 표지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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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굴 광장의 중앙에는 이런 멸공탑이 세워져 있고, 땅굴 발견 당시에 육군 참모총장이던 이 진삼 대장이 작성했다는 '건립취지문'이 새겨져 있다.
저 사람은.. 리즈 시절에 자기가 북파공작원 신분으로 휴전선을 몰래 넘어가서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북한군 수십 명을 사살했다는 이빨 무용담을 늘어놓아 왔으나... 그게 사실인지 주작인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그는 군인 신분을 벗어난 정치질과 똥별질 때문에 안 좋은 평판이 구설수에 오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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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견 헌트 소위의 무덤과 동상을 드디어 현장에서 실물로 보게 됐다. 제1과 제2 땅굴을 저지하던 시절엔 우리 군인들이 북한군의 총격을 당하거나 지뢰를 밟아서 죽거나 다치곤 했다. 제3 땅굴이 발견됐을 때는 다행히 그런 얘기가 없었음.
어쨌든, 과거 경험을 토대로 인명의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제4 땅굴을 정찰할 때는.. 화약 냄새를 맡을 줄 아는 군견을 처음으로 투입하여 먼저 보내 봤다.

그리고 이 전략은 매우 현명했음이 입증되었다. 저 군견은 땅굴 안에서 이상한 냄새를 맡고 혼자 앞으로 뛰어가다가 북한군이 설치한 지뢰를 밟고 폭사했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죽을 걸 군견이 대신 죽어 준 거나 마찬가지였다.
너무 값진 공을 세웠기 때문에 이 군견은 사후에 이렇게 떠받들여지게 되었고, 소위라는 장교 계급과 인헌 무공 훈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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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굴의 입구는 이렇게 생겼다.
제2 땅굴은 그냥 전구간 걸어다녀야 한다.
제3 땅굴은 북한군이 판 땅굴 내부에서는 걸어야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판 역갱도는 걸어서 오르내리는 갱도도 있고 전동차로 오르내리는 갱도도 있다. 전동차를 타려면 땅굴 입장료에다 전동차 이용료를 추가로 지불해야 한다.

그 반면 제4 땅굴은 역갱도에서는 걸어야 하고 땅굴 내부는 전동차로 다닌다. 터널의 단면적이 너무 작아서 사람이 걸어 다니려면 어정쩡한 오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그마한 전동차를 타고 쪼그리고 앉은 채로 이동해야 한다. 안 그래도 북한은 가평 남이섬과 임진각 공원에 있는 꼬마열차를 연상케 하는 협궤 레일을 제4 땅굴 내부에 부설해 놓기도 했었다.

물론 제2와 제3 땅굴도 공간이 충분히 큼직한 건 아니다. 성인 남자가 간신히 서서 걸을 수 있는 정도이며, 울퉁불퉁한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기 쉽기 때문에 안전모는 반드시 쓰고 다녀야 한다.

제4 땅굴은 길지만 민간인에게 공개된 구간은 겨우 100여 m 남짓에 불과하며, 생각했던 것만치 거창하게 볼 건 없었다. 지하로도 민통선 영역까지만 가지, 남방한계선을 넘어 DMZ까지 가지는 않는다. 위도를 비교해 보면 제4 땅굴의 입구는 을지 전망대보다는 훨씬 남쪽에 있다(몇백 m 정도 차이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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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도 간단한 안보 전시관이 있어서 6· 25 전쟁 때 양구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에 대해 소개하고 있었다. 또한 제4 땅굴의 특징도 잘 설명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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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 땅굴 역시 내비게이션 지도에는 보이지 않는다. (4편에서 계속됨)

Posted by 사무엘

2016/09/20 19:32 2016/09/20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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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선의 역사

금강산선에 이어서 이번 기회에 우리나라의 산악 철도 얘기를 좀 더 늘어놓아 보겠다. 즐거운 한국 철도 역사 탐방 -- 태백선 편이다.

태백선은 중앙선(제천)과 영동선(동백산) 사이에 있으며, 우리가 서울에서 강릉으로 열차를 타고 갈 때 거치는 노선이다. 고속철이나 대도시 광역전철이 아니면서 대한민국에 2013년 현재 마지막으로 건설된 지방 대 지방 ‘신규 간선 철도’로도 잘 알려져 있다.

태백선이 없던 시절엔 서울에서 강릉을 갈 때 무려 경상북도 영주까지 내려가서 영동선을 타고 다시 올라가야 했으니, 이는 어마어마한 우회와 낭비가 아닐 수 없었다.

태백선은 경부선처럼 처음부터 서울-부산 같은 식으로 전구간이 작정하고 한 번에 확 구상되고 건설된 게 아니다. 서로 다른 여러 소규모 철도들이 독립적으로 찔끔찔끔 건설되고 연장되어 왔는데 그것들을 통합하면서 최종적으로 태백선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뿐이다. 이름도 여러 번 바뀌었다.

위키백과의 다음 그림이 태백선의 복잡한 내력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철도 동호계에서 유명한 ‘조사부장’이라는 분이 만든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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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선은 일제 강점기 때 건설되었다가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에 새로 치면 마치 멸종한 '모아'(moa)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태백선은 해방 이후에 전적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주도 하에 건설되었다.
생각을 해 보시라. 예전에 한반도에는 탄광과 공장이 거의 다 북부 지방에 몰려 있었는데 그게 이제 전부 북한 차지가 되어 버렸다. 남한으로서는 목숨을 걸고 자기네 지역에 있는 탄광이라도 개발해야 하지 않겠는가. 산업선 철도의 건설은 국가의 생존이 걸린 과업이나 마찬가지였다.

1955년에 처음으로 제천-영월(약 34.1km) 구간이 건설된 것이 영월선으로, 이것이 태백선의 전신 되시겠다. 그 후 이 철도는 연장되어 함백 역까지 이어졌으며 함백선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다.

그런데 함백 역에서 동쪽으로 더 연장을 하기가 어려웠다. 지형의 특성상 급커브와 급경사가 불가피했다.
그래서 함백이 아니라 전역인 예미에서 새 선로를 뻗어서 조동, 증산, 정선을 이었으며, 제천에서 정선까지를 통틀어 정선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함백선은 예미에서 함백까지 가는 구선로만을 가리키는 지선이 되었다.

그럼 함백은 막다른 종착역(terminal)으로 전락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함백에서도 조동으로 가는 선로는 1975년에 추가로 건설되어 함백선에 편입되었다. 단, 저 그림에서 볼 수 있듯, 급경사를 감안하여 동그란 똬리를 그리면서 우회하는 형태가 되었다. 이것은 2013년 현재 대한민국 철도에 등장하는 4개의 똬리굴 중 하나이다. (중앙선에 두 곳, 영동선에 스위치백을 대신하여 건설된 솔안 터널, 그리고 저것)

결국 예미에서 조동으로 가는 길은 곧은 길과 함백을 경유하여 우회하는 길 두 갈래가 존재하게 됐다. 요약하자면 함백으로 가는 길이 가장 먼저 생겼지만, 그 뒤에 함백을 거치지 않고 바로 조동으로 가는 지름길이 나중에 생겼고, 함백에서도 조동으로 똬리를 틀며 가는 길이 가장 늦게 생겼다.

지선인 함백선과 태백선 본선은 지리적으로 서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건 혹시 태백선의 부분복선 구간으로 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으며 이들은 서로 독립적인 단선이 둘 존재하는 형태일 뿐이다. 양 선로에서 상행과 하행이 모두 오간다.

다만, 똬리굴이 없는 지름길은 우회가 없는 대신, 법적인 설계 한계에 육박할 정도의 급경사를 자랑한다(30퍼밀). 2도가 채 안 되는 오르막도 철도 차량에게는 굉장한 부담이다.
그래서 무거운 화물 열차들은 상· 하행을 막론하고 함백선을 거쳐 가는 편이었다. 여객 열차는 맞은편에서 오는 열차와 원활히 교행하기 위해 함백선으로 진입하는 경우가 있었다고는 하는데 요즘은 그쪽으로 지나는 열차가 없다고 그런다.

태백선과 함백선의 관계는 이 정도로 충분히 설명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새로 건설된 예미-조동 지름길 선로(현재의 태백선 본선)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라멘(독일어 Rahmen) 식 교량 위에 놓여 있다. 일명 라멘교. 열차가 여기를 지날 때 창 밖으로 아래를 보면 함백선이 응당 내려다 보인다. (이 시점에서 FSM교의 'RAmen!' 구호라든가, 면발과 국물과 김치의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라면교가 떠오른다면 지는 거다 ㄲㄲ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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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960년대에 조동-예미 구간이 개량되고 정선선이 건설되고 있던 동안, 증산(현재의 민둥산)에서는 정선뿐만 아니라 고한으로 가는 철도도 건설되었으며, 동쪽에서도 황지(현재의 태백)에서 백산까지 현재의 영동선으로 치면 지선에 해당하는 철도가 건설되어 있었다. 이제 슬슬 두 철도가 동서로 한데 이어져야겠다는 스멜이 스물스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3년에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가장 마지막으로 고한과 황지가 연결됨으로써 중앙선과 영동선을 한데 잇는 철도가 완성되어 최종적으로 태백선이 완성되었고, 정선선은 함백선과 마찬가지로 태백선의 지선이 되었다. 서울 방면에서 강릉으로 바로 올라가는 용도로 쓰이는 태백삼각선은 함백선의 똬리굴과 마찬가지로 1975년에 건설되었으며, 이 시기에 중앙선과 태백선, 영동선 구간은 전철화까지 완료되었다.

하지만 자동차 도로 교통이 발달하고 석탄 산업이 망하면서 이들 산업선의 지위 역시 오늘날 매우 쇠락한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뭐, 화물 수요가 꾸준히 있고 사북-고한 구간은 강원랜드-_- 때문에 여객 수요가 있으니, 완전히 망한 수준은 아니지만 말이다.

다만, 평창 동계 올림픽에 맞춰서 제천도 아니고 아예 원주에서 분기하는 강원도 행 철도가 복선 전철로 깔끔하게 건설된다면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릉에 빨리 갈 수 있게 될 테고, 기존 태백선의 여객 수요는 크게 감소하는 게 불가피하지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3/05/29 08:40 2013/05/29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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