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구에서의 관광 일정을 마친 뒤, 이제 평화의 댐을 보러 화천으로 떠났다.
이제 바다와 산뿐만 아니라 계곡과 강,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이것대로 또 경치가 몹시 아름다웠다. 물에 들어가서 발이라도 담그고 나오고 싶었다.
저 어마어마한 높이 좀 보소.
평화의 댐은 잘 알다시피 5공 시절에 다소 불순하고 비현실적인 동기 하에 만들어졌다. 하다못해 다목적 댐도 아니고..
하지만 일단 만들어 놓고 보니, 훗날 북한이 진짜로 예고 없이 수공을 퍼부었을 때 물을 제어해서 재앙을 예방하는 역할을 그럭저럭 수행하긴 했다. 소 뒷걸음질치다가 쥐 잡듯이 "어쨌든 결과는 그닥 나쁘지 않았다"처럼 된 셈이다.
사실, 4대강도 그렇고 우리나라처럼 계절 변덕이 심한 나라에서 치수와 관련된 토목 공사 투자가 무의미한 뻘짓인 경우는 별로 없었다. 불볕더위와 가뭄이 조금만 계속돼도 옛날엔 제한급수에 온갖 난리 호들갑을 떨었으며, 반대로 태풍이나 홍수가 한번 났다 하면 TV에서는 전국적으로 수재의연금 성금 모집하던 게 불과 20여 년 전의 관행이었다. 요즘은 지구 온난화다 뭐다 하면서 기상 이변이 예전보다 더 심하면 심해졌지 날씨가 결코 온순해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 같은 난리 호들갑이 왜, 무엇 덕분에 쏙 들어갈 수 있었겠는지를 잘 생각해 보자.
내가 방문하던 당시에도 평화의 댐은 또 무슨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래서 댐 위로 지나가 볼 수는 없었고, 댐 주변에서 댐과 공원의 사진만을 남길 수 있었다.
평화 공원에는 온갖 공격 무기들의 모형이 전시돼 있는데.. 예술 작품을 표방하다 보니 도색은 저렇게 형형색색으로 돼 있다.
평화의 댐 자체는 민통선에 있지 않다. 하지만 근처의 두타연 계곡은 민통선 안이라고 한다. 여기를 들어가려면 또 다른 장소에서 출입증을 끊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검문소에서 즉각 신분증만 까면 되는지 난 잘 모르겠다.
전국의 어느 민통선이든 자가용을 이용한 출입 허가를 받은 외지인은
- 받은 임시 출입증을 차 앞유리에 잘 보이게 노출시킬 것.
- 이런 데서 교통사고라도 나면 피차 왕창 골치 아파지니 절대적으로 안전 운전할 것.
- 목적지가 아닌 길가에 무단으로 주· 정차를 하지 말고 길을 빨리 통과할 것.
- 블랙박스를 끄고 다닐 것. (군사 시설을 무단 촬영하지 말 것)
- 민간인이 전투복을 입고 다니지 말 것.
-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모든 용무를 마치고 퇴장할 것.
이라는 수칙이 존재한다. 도로 통과형이 아닌 일반적인 민통선 구간들은 반드시 들어갔던 초소로 나오는 게 원칙이다.
이제 마지막 목적지가 있는 홍천으로 가기 위해 경로를 남쪽으로 바꿨다. 양구, 화천 다음으로 계속 서쪽으로 가면 철원이 나온다. 하지만 철원은 예전에 간 적이 있으며, 어차피 우리나라의 최북단에서 서울로 가는 고속도로를 타기 위해서는 춘천-홍천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남행을 선택했다.
중간에 경치가 아주 아름다운 어느 쉼터를 발견했다. 이 사진엔 담기지 않았지만 뒤에는 지붕 달린 정자도 있다. 저 벤치에 앉아서 노트북 PC를 들여다보는 인증샷도 남기고 싶었으나.. 본인은 싱글 솔로이다 보니 사진을 찍어 줄 사람이 없었다.
가는 길에 화천 수력 발전소를 발견했다. 역시 사진에는 담기지 않았지만 여기 근처에는 군부대 포병 훈련장이 있었다.
여행 계획에는 없었는데, '파로호' 안보 전시관이라는 게 있어서 여기도 잠시 들렀다. 파로호란 근처에 있는 호수의 이름이다. 북한강 상류가 화천댐에 가로막히고 고여서 호수를 형성한 것이다.
여기 일대의 댐과 수력 발전소는 일제 강점기 말기(1944년)에 건설되었으며, 6· 25 전쟁 중이던 1951년 4~5월 사이에는 북한군의 수공에 맞서 이 댐을 점령하거나 파괴하기 위해서 국군· UN군과 북한· 중공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고 한다.
파로호의 풍경은 이 사진 한 장만 남겼다.
이렇게 화천을 지나고 드디어 춘천에 진입했다. 춘천, 그리고 더 남쪽의 홍천에서는 군사 훈련 중인 탱크들이 줄지어 도로를 달리는 걸 유난히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여러 대의 차량들이 저속으로 일종의 떼빙(대열운행)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민간인 자동차들의 통행이 좀 지장을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반적인 군용차와는 달리 탱크는 엔진 소리가 뭐랄까.. 유별나게 시끄럽고 더 기괴했다. 여느 중장비의 엔진 소리와도 달랐다. 차마 말과 글로 묘사할 수가 없다. 게다가 탱크는 차체의 폭도 여느 자동차보다 더욱 크기 때문에 좁은 도로에서 교행이나 추월하기가 더욱 난감했다.
그래도 저것도 다 나라 지키려고 저러는 건데 신기한 구경 하나 하는 셈치고 관대히 넘어갔다. 6· 25 전쟁이 벌어지던 당시에 우리나라는 저런 탱크가 아예 한 대도 없었다. 그 반면 북한군은 242대 보유. 이 숫자 통계는 초딩 시절부터 배워서 알고 있었다.
안전 운전에 지장을 줄 정도로 졸음이 밀려 와서 춘천 외곽에서는 잠시 차를 세워서 20분 남짓 쪽잠을 잔 뒤 이동했다.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곳의 공식 명칭은 '강 재구 소령 추모 공원'이고 입구 주변이 이렇게 생겼다.
주 기철 목사 하면 '일사각오'가 떠오르듯 강 재구 소령은 그야말로 '희생정신', '살신성인'의 아이콘이다.
1960년대에 한국군이라는 게 조직 분위기가 지금 군대보다 결코 더 좋지 않았다. 아직 우리나라가 북한보다 못살던 시절이었고 북한의 무력 도발 위협은 임팩트가 지금보다 훨씬 더 컸다.
그러면 군대를 열악한 자원이라도 최대한 잘 활용해서 나라를 잘 지키기라도 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합리적인 시스템 대신, 까라면 까 식의 미개한 일본군 관행에 사람 잡는 구타· 똥군기가 만연했다. 그래 놓고는 "나 간부다" 편법 한 마디에 초소가 숭숭 뚫리기도 했으니 군대가 제 역할 제대로 못 했다.
그리고.. 지금이니까 연간 군대 내 전체 자살자· 사고 사망자가 두 자리 수이지 그때는 세 자리 수를 가뿐히 넘어서곤 했다. 옛날 군대가 지금 군대보다 좋은 건 딱 하나, 아직 출산율 높고 인구가 많던 시절이다 보니 조금만 몸이 안 좋으면 방위· 면제로 빠지는 길도 지금보다야 훨씬 더 꽤 관대하게 열려 있었다는 것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부하가 실수로 병사들 한가운데로 떨어뜨린 수류탄을 수습하려고, 그것도 다른 방법이 없으니 상관이라는 사람이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그걸 온몸으로 웅크려 덮어서 막은 뒤 산화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건 정말 전군의 사기를 진적시키는 미담이 아닐 수 없었다.
강 소령이 소속되었던 부대는 북한과 대치해 있는 평범한 전방 부대는 아니고, 베트남 파병을 갈 예정이던 부대였다. 박통이 외화벌이와 국력 신장을 위해서 선진국 군인에 비해 저렴한 인건비와 높은 가성비를 메리트로 내세우며 베트남전 파병을 결의했다. 그러자 맨주먹과 근성밖에 가진 게 없고, 시골에서 농사만 짓는 것보다야 더 짧고 굵게 돈을 많이 벌어 와서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 한 장정들이 여기에 많이 지원한.. 그런 상황이었다.
강 재구 소령 추모비와 추모탑이 이렇게 놓여 있었다.
기념관은 아담한 크기이고 강 소령의 흉상, 초상화, 유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강 소령은 나이 30도 못 되어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그 대신 그야말로 불멸의 이름을 남기고 영예를 얻었다. 고인의 모교에서는 육사는 말할 것도 없고 서울 고등학교까지 다 고인을 기리고 있고, 육군 부대에도 '재구 대대'라는 이름의 대대가 생겼다.
어릴 때부터 "나도 저런 사람이 되어야겠다"라는 모델격의 인물을 마음에 두는 게 참 좋은 것 같다. 육사 32기 출신의 엘리트 군인으로 대장까지 역임한 정 승조 장군(1976년 임관, 2013년 예편)이 있는데, 이분이 1976년 당시에 육사를 수석 졸업하고 신문 기자와 인터뷰를 했을 때에도 "강 재구 소령의 전기를 읽고 큰 감화를 받아서 육사를 갈 생각을 하게 됐다"라고 밝힌 바 있다. 군사정권 시절에 육사는 학비 걱정 없지, 진로도 안정적이지, 가히 오늘날의 SKY급 대학에 맞먹는 위상과 입결을 자랑했다는 점도 생각할 점이다.
아이고, 세로쓰기여서 읽기가 어렵다. 강 소령 역시 처음에는 수류탄을 다른 데로 멀리 던져 버리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몸으로 폭발을 막는 방법을 선택하게 됐다.
이분에 대해서 상훈 기록을 찾아보면, 어디서는 태극 무공 훈장이라는 최고 등급 훈장을 받았다고 돼 있고 다른 어디서는 4등 공로 훈장을 받았다고 돼 있는데.. 무슨 성경의 모순 구절을 보는 것 같다.
이것도 성경의 모순 구절 풀듯이 문제를 풀면 된다. 본문 텍스트에 나와 있듯, 정답은 '둘 다 받았다'이다. 더 높은 훈장은 나중에 추가로 추서되었다.
고인이 산화하던 당시에 입었던 전투복은 수류탄 파편을 맞아서 저렇게 너덜너덜해져 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다른 군인의 증언에 따르면 수류탄 폭발로 인해 고인은 사지가 절단될 정도의 치명상을 입었고, 그래도 폭발과 함께 즉사한 건 아니고 잠시 살아 있었다고 한다.
수류탄을 실수로 떨어뜨린 병사의 실명(박 해천 이병)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저 병사는 비록 무슨 범죄를 저지른 건 아니지만, 평생 얼마나 큰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채 살았을지 모르겠다. =_=;; 지금은 그 운명적인 사건이 일어난 지 반세기가 넘게 지나기도 했고, 저분의 근황이 어떤지는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전해지는 게 없다.
이름이 기록으로 남아 버린 이상, 나라면 은폐(?)를 위해 개명부터 했을 것 같은데, 그 시절은 지금처럼 쉽게 개명이 가능한 때도 아니었다는 게 문제다. -_-;;
실제로 생존 무장공비 출신인 김 신조 씨는 얼굴이 알려진 건 말할 것도 없고, 이름까지 교과서에 대문짝만 하게 실려서 그 당시 남조선 군필자들의 웬쑤가 됐다. "니놈 때문에 내가 군대 전역도 늦어지고 말년에도 얼마나 조뺑이 치고 고생했는지 알아?" 야사에 따르면 길거리에서 어느 예비역 아저씨에게 뒤통수를 까이기까지 했다고.. 결국 그는 부담감을 견디다 못해 실제로 '김 재현'으로 개명까지 했다. 최소한 법적으로는 김 신조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근황이 더 검색되지 않게 하려고 말이다.
기념관에 와서 새롭게 처음 알게 된 사실은 강 재구 소령도 생전에 크리스천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금까지 인터넷으로만 봐 오던 곳들을 실제로 돌아다니면서 답사를 잘 마쳤다.
날씨가 여전히 덥고 물과 전기가 부족하고, 또 배고프고 피곤하기도 해서 여기서 더 놀지는 않았다. 조양 IC에서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집에 돌아갔다.
이틀 동안 1분 1초가 버릴 게 없는 즐거운 여행을 했다. 산과 계곡과 바다를 모두 구경했으며 고속도로부터 엔진 브레이크 비탈길까지 골고루 750km에 달하는 거리를 운전했다. 이 정도로 욕구를 해소했으니, 당분간은 또 서울을 빠져나간다거나 차 끌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은 생각이 안 들 것 같다. 시골은 차량 운행이 뜸하고 어디든지 주차 걱정 없이 차를 세울 수 있는 것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았다.
강원도는 꽤 넓다. 내년 여름에는 정선, 영월, 태백, 동해처럼 태백선 철도와도 인접해 있는 강원도의 '남부'를 돌아다녀 볼 예정이다. 영역이 공교롭게도 강릉 이남이냐 이북이냐로 나뉘는 것 같다. 이번에 다닌 곳은 온통 북부이니 말이다.
또한 내년엔 이제 병특 마친 직후에 만들었던 여권이 유효 기간이 1년 남짓밖에 안 남는데, 아직도 여권엔 사증란이 많이 남아 있다. 어딜 가든 외국 여행도 한번 다녀오고 싶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