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기독교 역사에서 성경 번역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찬송가의 번역과 편찬이다.
그리고 한국 교회에서 쓰였던 찬송가 중에 역사적으로 꽤 중요한 물건으로는 <신증 복음가>가 있다.
지금은 장로교가 세력이 크지만 한국 땅에 기독교가 처음 전래되었을 때는 감리교가 대세였다. 그리고 감리교에서 좀 더 심화와 로컬라이징(?)을 거친 교파가 바로 성결교인데..
<신증 복음가>는 성결교 선교사가 세운 "동방 선교회"라는 단체에서 출간하였다. 시기는 1919년 4월, 한반도에서 3·1 운동이 벌어지던 때와 아주 비슷하다.
이 신증 복음가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어서 지금까지 교회에서 불리고 있는 찬송가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거기에는 인제 와서 뭔가 출처를 추적할 수가 없는 짬뽕(?) 번역도 꽤 있다. 이 글에서는 몇 가지 예를 들도록 하겠다.
1. 그 참혹한 십자가에 주 달려 흘린 피
난 지금까지 확 꽂혀서 좋아하게 된 찬송가들이 대부분 구원 카테고리 쪽에 있었다. Wonderful grace of Jesus, 그리고 And can it be that I should gain까지. 그 뒤 최근에 주목하고 있는 곡은 바로 저것이다.
올해는 삼일절이 일요일과 겹치는데, 이런 날엔 신증 복음가 출신 찬송가를 부르는 게 아주 어울린다고 생각되어 본인은 거의 한 달 쯤 전부터 이 날 준비 찬송으로는 이걸 넣으려고 벼르고 있었다.
앞부분 멜로디는 <찬양하라 내 영혼아>에서 "내 속에 있는 것들아"와 닮았다. 계속 듣고 있으면.. 정말 애절하고 화사하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예수님의 피에 대한 한없는 신뢰와 감격이 솟아나는 것 같다. 그래서 후렴에서는 "나 믿노라..!"가 나온다.
그런데 이 곡은 작사· 작곡자가 미상이다. 1919년 당시의 가사는 지금 가사와는 차이가 많았다.
다만, 가사가 There is a fountain filled with blood(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에서 모티브를 약간 딴 거라는 말은 있다.
1절에 '샘물'이라는 단어가 있고(1919년 가사는 '임마누엘') 2절에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강도' 얘기가 있으며 3절에 '어린양'이 나오는 것이 이 가설을 뒷받침한다.
나중에 1930년대에 다른 찬송가가 출간되면서 가사가 좀 바뀌었는데,
그때의 가사도 지금과는 여전히 차이가 좀 있어서 '그 참혹한' 대신 '그 수욕된'(수치스럽고 욕된)이라고 적혔고, '나 믿노라' 대신 '나는 믿소'라고 적혀 있었다.
후렴 절정부에 나오는 Lord, I believe!를 생각해 보자. 한국어 가사에서는 음절수 제약 때문에 '주'가 빠졌지만 1919년 수록 당시부터 이 곡의 설정상 영어 제목은 "주여 내가 믿나이다"였다. 이 표현은 명백히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불신을 도와 주소서)"(막 9:24)라는 아이 아버지의 절박한 절규가 오버랩되기도 하고, 한편으로 선천성 맹인이 시력을 받은 후 예수님을 믿는(요 9:38) 장면도 떠오른다. (막 9:24.. KJV 이외의 성경에서는 '주여'라는 단어가 빠졌다는 건 차치하고라도..;;)
이 찬송가 가사는 그 심상에다가 예수님 영접을 절묘하게 오버랩 시켰다.
죄의 사슬, 죄의 형벌로부터 해방된 것에 감격하면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듯이 이 찬양을 예배당에서 목놓아 불러 보자.
깨알같은 바람이지만, 난 3절 가사대로 영원한 새 나라에 모여서 금거문고보다는.. Looking for you를 흥얼거리고 싶다. 하늘나라에는 철도도 있고 새마을호 열차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본인은 평소에 유튜브에서 다음 찬양 동영상을 즐겨 듣는다.
2절과 그 이후로 갈수록 알토 한 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유난히도 부각되어 들린다. 투개월의 김 예림 목소리처럼 독특하다!
2.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
우리에게 친숙한 요것도 신증 복음가에서 처음 소개된 찬송 중 하나이다.
한국어 가사를 보면 영락없이, 딱 전형적인 '영적 전투와 승리' 카테고리이다. 그러나 본고장인 미국에서는 이 곡이 하드코어 전천년주의 종말+재림 가사가 붙은 찬송인 걸 아시는 분 계신가?
영어 가사는 "내 눈이 주님의 재림의 영광을 보았노라"로 시작하며, 예수님이 수많은 성도들과 함께 지상 재림을 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He is trampling out the vintage where the grapes of wrath are stored;
He hath loosed the fateful lightning of His terrible swift sword:
His truth is marching on.
Glory, glory, hallelujah! Glory, glory, hallelujah!
Glory, glory, hallelujah! His truth is marching on.
"진노의 포도즙 틀을 밟는다. 입에서 날카로운 검이 나온다." 이런 표현은 평소에 요한계시록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서(특히 19장) 성경적 종말론을 공부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생소할 것이다.
기독교 음악 중에서 특별히 찬양보다 영적 노래에 가까운 범주라면 가사에 응당 성경 말씀과 직설적인 성경 교리를 담고 있어야 한다. 오늘날의 CCM이 영적으로 다 나쁘지는 않겠지만 CCM이 옛날 클래식 찬송가에 비해서 영성이 부족한 면모 중 하나가 교리가 노골적으로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냥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은 듣기 좋은 내용만 있지 대놓고 예수님의 피, 죄와 심판, 지옥, 재림 같은 원색적인 얘기를 점점 안 하는 것이 비단 설교 스타일뿐만 아니라 기독교 음악의 트렌드에까지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은 198, 90년대 이후의 CCM까지 갈 것도 없이 한국 교회의 찬송가는 클래식들부터가 영어 가사에 비해서 전반적으로 '찐한' 교리 표현의 수위가 좀 약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앞으로 또 내 블로그에서 다룰 기회가 있으면 언급을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마귀들과 싸울지라>의 영어 원판 가사는 본인에게 무척 인상적으로 보였다.
한국어 가사는 일본인 목사가 쓴 다른 찬송시를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말 가사와 영문 가사가 같이 일치하는 건 후렴의 "영광 영광 할렐루야"밖에 없는 셈이다.
이 노래의 곡에 대해서도 사연이 많다. 원래 이 멜로디는 19세기에 미국에서 소방대원의 행진곡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멜로디가 적당히 경쾌하고 듣기 좋다 보니 이 곡은 여러 종류의 가사가 붙어서 다른 행진곡이나 군가 등으로도 애창되었다. 그랬는데 "이거, 곡 멜로디는 좋은데 가사가 영 좋지 않다. 뭔가 좋은 찬송시를 붙여서 부를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을 한 어느 크리스천 작사자가 있었고, 성경을 묵상하다가 예수님의 재림을 동경하는 가사가 붙어서 저런 곡이 만들어진 거라고 한다.
이렇듯, 성경의 각 책만큼이나 찬송가도 각 곡들이 작사· 작곡· 번역된 과정이 독특한 게 많다. 그런 것들을 알고 부르면 재미있다. 지금은 인터넷 검색만 하면 이런 정보들은 정말 금방 쉽게 얻을 수 있기도 하고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작년 봄에 세월호 침몰이라는 국가적인 대참사가 벌어졌을 때는 It is well with my soul(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 내 영혼 평안해)라는 찬송이 잠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거 작사자도 선박 사고로 처자식을 잃은 와중에 하늘로부터 오는 평안을 되찾고 가사를 썼기 때문이다.
* 그리고 몇 가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실은..
- 본인은 지금 다니는 교회에서 찬양 인도자이다. 비록 기악이든 성악이든 음악을 전공한 이력은 전혀 없지만 찬송은 그냥 의욕 있게 크고 기계적으로 정확하게만 부르면 장땡이니까..
- 본인은 킹 제임스 진영에 들어가기 전에 고향에서는 성결교 출신이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