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영화나 드라마 같은 창작물 매체에는 "열린 결말"이라는 게 있다. 총이 그 수단으로 즐겨 쓰인다.
일례로 웹툰 <26년>은 그냥 건물 밖에서 "탕!" 총성만 나면서 끝난다. 격발은 대머리 전대통령을 저격하려는 그 여주인공이 했는지, 아니면 그녀를 저지하려는 다른 경호원이 했는지 알 수 없는 구도로 끝난다.

완전한 열린 결말은 아니지만 그에 좀 근접한 예로는 <이연걸의 정무문>이 있다. 결말부에서 주인공 진진이 "내가 모든 책임을 져야겠군요"라고 하면서 총을 한 발 쏘긴 하는데, 그래도 죽지는 않고 몰래 빠져나와서 김 두한 코스프레를 하고 택시를 타는 걸로 끝난다. 이건 뭔가 성경적인 심상이 담긴 게 아닌가 싶다. "한 사람이 온 백성을 위해 죽는 것이 유익하다." (요 18:14)

그리고 사실은 성경 내부에도 뭔가 열린 결말처럼 보이는 스토리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스라엘의 사사 시절에 활동했던 '입다'라는 사람이다. 사사기 11장을 읽어 보시라.
이 사람은 사생아 출신이어서 동족들로부터 냉대받으며 서럽게 자랐지만, 훗날 동족을 구하는 영웅이 되었다.

그는 암몬 족과의 전투를 앞두고 하나님 앞에 서원을 했는데.. 내용인즉슨 "하나님이 이 전투를 이기게 해 주신다면, 돌아오는 길에 우리집 문앞에 가장 먼저 마중을 나오는 생명체를 번제 헌물로 바치겠다"였다. 이 사람은 가축을 많이 키웠던 것 같다.
그런데, 전투에서는 대승을 거뒀지만 싸움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자기를 가장 먼저 맞이하며 축하해 준 생명체는...;; 자신의 외동딸이었다.

입다는 대성통곡을 했다. 하지만 그의 딸은 담담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으며, 아버지에게 어서 서원한 대로 행하라고 당부를 했다. 단, 친구들과 함께 자신의 처지로 인해 무려 2개월 동안 펑펑 울면서 애곡을 하고 온 뒤 그렇게 했다.

입다는 "한번 서원한 건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는 말씀 하나만은 일말의 책임감을 갖고 철썩같이 곧이곧대로 실천했다(신 23:21-23). 그러나 그는 아무리 전쟁을 앞둔 위급하고 비장한 상황이긴 했다지만, 일단 생명체 번제 헌물까지 걸면서 애초에 서원을 리스크가 큰 형태로 좀 무리하게 했다.

그리고 서원을 잘못 적용했다. 법과 약속의 적용 우선순위에 무지했다. 서원을 빌미로 다른 사람을 막 죽여도 되는 게 정당화되지는 않을 뿐더러, 설령 사람이 아닌 짐승이라 해도 부정한 짐승인 개나 돼지가 가장 먼저 마중을 나왔다면 그런 건 바칠 수 없다. 허나 입다는 개나 돼지가 1타로 걸렸다면 실제로 그렇게 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이다. =_=;;;

이는 사사 시대에 심지어 정치· 군사 지도자인 사사(판관)들마저도 율법에 대해 굉장히 무지했으며, 요즘 스타일로 고상하게 표현하자면 성경을 바르게 나누어 적용할 줄 몰랐음을 암시한다.
나중에 삼손조차도 율법 따위는 깡그리 무시하고(삿 13:14) 죽은 사자의 부정한 시체에 있는 꿀을 막 먹었으며 부모에게까지 준다. 그러니 입다 정도는 약과였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시작된다.
이때 입다의 딸은 실제로 비참하게 죽어서 번제 헌물로 바쳐진 게 아니라, 그냥 시집 갈 자격을 박탈당하고 평생 처녀로 살면서 하나님께 헌신된 삶을 살기만 한 거라고 해석하는 분들이 있다.
당장 본문만 보면 입다의 딸이 "처녀 됨 / 남자를 알지 아니하였더라"라는 사실만 엄청 부각되어 나오지, "죽었다"라는 직접적인 표현 자체는 안 나오긴 한다.

그러나 직접적인 표현이 없다고 해서 그 문맥에서 딸이 죽지 않고 생존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런 주장을 하는 분들과 딱히 논쟁을 하거나 싸우고 싶지는 않지만.. 그 문맥에서 딸이 실제로 죽은 게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도대체 어떤 해석이 가능한지 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장 핵심 전제 조건부터 제시하겠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이 인신제물/인신공양을 받아들이는 잔인한 신이냐, 그게 율법적으로 맞느냐 아니냐 같은 게 아니다!
오로지 '입다'가 자기 딸을 죽이는 뻘짓을 했느냐 안 했느냐, 그 사건이 실제로 벌어졌냐 안 벌어졌느냐만을 따져야 한다. 잘못을 해도 그건 입다의 개인적인 삽질일 뿐이지 하나님의 성품 같은 건 이 자리에서 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동의하시는가?

그런데 (1) 저 주장을 하는 분들은 먼저 그걸 혼동하는 것 같다.
마치 사형 제도가 하나님이 제정한 제도이며 성경적으로 옳다는 주장을 하는데, 그걸 마치 "우리가, 교회가 흉악범에게 직접 보복을 하는 것인양" 이상한 비약을 혼자 자기 상상 속에서나 하면서 반발하는 것과 비슷한 부류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2) 단순히 잔인하다는 이유만으로 '애비가 딸을 정말로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실드를 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성경에는 애비가 외동딸을 죽인 것보다 더 잔인한 장면도 많다.
다윗이 이방 민족들을 톱과 써레로 잘랐다는 말도 있고, 개독안티들이 맨날 욕하는 가나안 백성 진멸도 나오고... 비록 실행은 안 됐고 문맥이 좀 다르긴 하지만, 하나님은 애초에 아브라함 보고도 외아들 이삭을 번제 헌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신 적이 있다. 요 문맥만 딱 떼어서 생각하면 발상 자체는 영락없이 인신제물인 것이다.

심지어 변개된 잘못된 성경들은 원어 드립을 치면서 그걸 '보정'하기까지 했다. 톱과 써레로 잘랐다는 표현을 톱과 써레로 강제 노동을 시킨 것으로 바꾸고, 지옥을 삭제하고 음부· 스올로 바꾸고, devil을 덜 자극적인 단어인 demon으로 바꾸는 등..

입다의 외동딸 생존을 주장하는 분들은 비록 성경 변개자들처럼 악의적이지는 않겠지만, 혹시 자신도 부지중에 저런 성경 변개자의 심정에 동조하고 있지는 않나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모세는 정말로 홍해를 건넌 게 아니라 갈대밭을 건넌 것이다"와 "입다의 딸은 정말로 죽은 게 아니라 그냥 평생 동정으로 산 것이다"의 차이는 의외로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3) 원래 서원을 보면 대명사가 he가 아닌 it으로 표현돼 있고 사람이 아니라 동물을 바치는 서원이었을 뿐이라는 해석이 있는데 이 역시 금방 반박되는 어불성설일 뿐이다. 그럼 딸이 마중 나왔을 때 부녀가 애초에 슬퍼하고 난리를 칠 필요가 없지 않았겠는가.

이런 것들 외에도 입다의 딸의 생존 가능성을 0으로 확인사살하는 요소는, 그녀의 또래 친구들이 단순히 1회로 그치지 않고 해마다 무려 나흘씩이나 그녀의 '처녀 됨'을 애곡했다는 것이다(삿 11:40).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주께 바쳐져서 수녀처럼 헌신하며 사는 게 무슨 무인도 염전이나 꽁치잡이 어선 노예로 팔려가는 것이기라도 하나? 영원히 연락이 끊기는 실종이기라도 하나?
사무엘처럼, 혹은 누가복음 2장의 안나처럼 사는 게 그렇게까지 충격적인 엽기 뉴스이고 매년 애곡할 만한 엄청난 비극인가? 일단 당사자가 목숨이 붙어 있는데..?

우리 조선 시대에는 팽형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그건 실제로 죽이지만 않을 뿐이지 그 죄인의 존재를 사회에서 완전히 지워 버리는 형벌이었다. 유족들은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의 장례식을 치르고 제사까지 지내야 했다.
사사 시절의 이스라엘 사회에 그런 팽형에 준하는 제도라도 있지 않았다면, 입다의 딸은 정황상 도저히 살아 있을 수가 없다. 게다가 그녀는 자기가 무슨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가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행하니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니라." (삿 11:39 did with her according to...)를 보면, 본인은 창세기 9장의 다음 구절도 오버랩 된다.
"노아가 포도주에서 깨어나 자기의 작은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what his younger son had done unto him)

이때도 do만 나오지만, '함'은 자기 아버지가 술 취해서 곯아떨어진 사이에 아버지의 몸에다 굉장히 흉한 짓을 했음을 성경은 암시하지 않은가 말이다. 함이 한 짓이든, 입다가 딸에게 한 짓이든, 그리고 발람이 민수기 24장에서 25장 사이에 발락에게 무슨 조언을 줬는지 같은 것은.. 성경이 굳이 구차하고 민망스럽게 일일이 묘사를 할 필요가 없다. 성경의 저자가 쑥덕같이 말했으면 우리 신자들은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한다. 하긴, 생각해 보니 창 1:1-2 사이의 "간극"도 이런 implicit한 어려운 주제에 속하는구나!

입다 하나를 갖고 정말 다양한 얘기를 했다.
그런데, 믿거나 말거나 이 '입다'는 히브리서의 믿음장에 이름이 올라 있다. (히 11:32)
'입다'가 실수· 오타가 아님을 인증하기 위해, 심지어 입다 이상의 좌충우돌 사고뭉치이고 자폭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삼손도 믿음장에 등재되어 있다. 이건 반전이며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긴, 입다든 삼손이든 삽질만 했지 확실히 심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마치 롯처럼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05/28 08:25 2015/05/28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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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무엘 2015/07/10 09:42 # M/D Reply Permalink

    참고로 입다의 딸과는 달리, 민 31:40에서 주께 바쳐진 사람들은 그냥 산 채로 제사장 휘하의 종이 됐다는 뜻이다. 인신공양이 아님. 분간을 잘해야 한다.
    http://av1611.net/4081 글을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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