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중에서 한글에 대해서 정말 경이로운 체계를 가진 우수한 문자라고, 심지어 라틴 알파벳보다도 더 훌륭하다고 극찬을 늘어놓은 석학들이 있다. 개중엔 재레드 다이아몬드처럼 언어학이 아니라 단순히 다른 인문학 분야를 전공한 사람도 있지만, 언어학을 본격적으로 전공한 학자, 그것도 레알 엄청난 괴수 중에도 한글 예찬론자가 있다.
이것 자체는 기록이 다 남아 있고 출처 검증도 가능한 엄연한 팩트이므로 더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무슨 소수 민족에게 한글 보급"과 같은 급의 루머가 아니다.
또한, 창조과학은 생물학이나 지질학, 천문학을 직접 전공하지 않은 타 분야의 공학 박사나 의사들이 민다고 까이는 반면, 한글 예찬론은 일부나마 실제 현업 언어학자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으니 성격이 좀 다르다.
시카고 대학교의 제임스 맥콜리 교수는 잘 알다시피 한글날은 전세계의 언어학계가 다함께 경축해야 하는 날이라면서 10월 9일엔 휴강을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연세 대학교가 배출한 가히 세계적인 언어학 석학인 김 진우 교수도 학부 모교로 돌아와서 석좌교수 명목으로 잠시 강의를 하던 때엔, 2학기에 한글날이 낀 주엔 문자의 역사 강의를 했다. 내가 수업을 듣던 시절에도 종종 한글 감탄을 늘어놓았으며, 한글날이 국경일이 아닌 것은 정말 통탄할 일이라고 말씀을 하셨다. (2011년, 아직 국경일이 아니던 시절에)
물론 꼭 그렇게까지 감흥을 느끼지는 않는 학자들도 있으며, 오히려 저런 식의 생각을 문화 제국주의니, 한글 쇼비니즘이니 뭐 이상한 꼬리표를 붙여서 불쾌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 역시 없지는 않다.
이런 와중에 미천한(?) 본인이 한글이 우수하네 어떻네 하는 오래 된 고리타분한 논쟁에 불을 추가로 지피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관찰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분명한 팩트를 하나 지적하고자 한다.
"한글은 뭔가 천재들을 매료시키고 오덕질 거리를 제공하기에 충분한 특성은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한글이 한국어만 잘 표기해 내는 세계의 여러 평범한 문자들 중 하나일 뿐이라면, 한국어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의 언어학 석학 중에 한글 예찬론자가 나타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공 병우 박사처럼 언어와는 거의 관계 없는 전공이던 천재 공돌이 의학자가 갑자기 하필이면 한글 덕후 타자기 덕후로 돌변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있는 한글 자모나 한글 맞춤법 체계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글을 외국어의 다른 음성을 표기하는 용도로도 쓸 수 있게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여럿 있다. 이 역시 주장자 중에는 이공계 박사나 의사 등, 스펙이 비범하긴 하지만 언어학만을 깊게 공부하지는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음성· 음운론을 통달한 저명한 언어학자도 있다. 이 현복 교수 같은 엄청난 분도 그 중 하나이니까.. 그러니 이것은 단순히 비전문가 한글 덕후의 마이너한 재야 학설 정도로 마냥 치부할 문제도 아니다.
지금의 암호 같이 배배 꼬인 IPA 부호보다 더 체계적이고 알아보기 쉬운 음성 부호 체계가 한글의 제자 원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다면 그건 나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단, 거기에는 여러 전제조건과 단서가 붙어야 하고 현실적인 한계를 감안해야 할 것이다.
1. 당연한 말이지만, 그것은 지금 한국어를 표기하는 한국어 정서법(일명 한글 맞춤법)과는 완전히 별개로 따로 가는 체계가 되어야 한다. 한글의 표기 능력 같은 걸 떠나서 한국어에는 영어 F나 TH 같은 음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R과 L을 똑같이 ㄹ로 적는 이유는 한글을 모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게 한국어에서 음운론적인 변별 요소가 아니며, 고로 굳이 구분해서 적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 조선어 학회가 무단으로, 혹은 심지어 일제와 결탁까지-_-해서 옛한글 자모를 없애고 훈민정음을 한글로 절뚝발이로 만들어 버렸다고 얘기를 하는 분을 보면.. 으음, 숨이 탁 막힌다. 나머지 뒷부분의 주장까지 신뢰성이 팍 깎이게 된다.
2. 옛한글 자모는 어떻게 활용할 것이며 한국어에 없는 소리를 어떤 규칙대로 새로운 글자에다 대응할지.. 통일이 잘 돼야 한다. 허나, 국내에 계신 한글 확장 연구가들은 내가 알기로 제각각 정말 개성 넘치고 자기 지론과 고집이 강한 분들이다. 과연 호락호락 합의가 가능할까? 아래아의 음가조차도 정확하게 모르는 마당에 하물며 다른 글자들은.. 글쎄다.
또한 한글이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모음이 풍부한 건 사실이지만, 발성 기관의 모양을 본뜬 자음과는 달리 모음은 기하학적인 수직· 수평선과 점뿐이다. 이런 제자 컨셉만으로 단순히 이중모음이 아니라 IPA의 온갖 이상한 모음들을 다 그려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
3. 알다시피 유니코드가 제정되고 BMP 영역은 마치 IPV4 주소만큼이나 사실상 고갈이 임박한 이 시점에서..
인제 와서 컴퓨터에서 예전에 없던 문자를 새로 만들어 통용하는 건 굉장히 부담이 큰 모험이다. 더구나 조합을 해서 상황에 따라 달리 표현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졌다고 봐야 한다. 새로운 한글 확장 부호가 겨우 PUA 영역에만 머무르는 듣보잡이 아니라 정식으로 등재되어 쓰이려면, 국가 표준이든 대중적인 표준이든 정말 갈 길이 멀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4. 새로운 한글 입력법을 같이 제안하는 분도 있다. 단, 이들도 PC에서의 표준 두벌식 글자판과 대놓고 싸우지는 않는다.
그나마 표준 두벌식 다음으로 인지도가 제2순위로 높고 모든 데스크톱 운영체제에서 이미 지원까지 되고 있는 가장 이상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이 바로 공 병우 세벌식인데.. 이마저도 전체 사용자 수는 1%가 채 안 된다.
그러니 하물며 이것보다도 더 마이너들은 동일한 조건에서는 전혀 승산이 없다고 봐야 한다. 그 대신 다른 차별화 요소를 통해 틈새시장을 공략하는데, 크게 (1) 모바일, (2) 장애인 접근성, (3) 지금까지 얘기했던 외국어 표기를 위한 다른 정서법으로 나뉜다. 허나 내가 보기엔 이것들도 이젠 그 많은 연구자들이 아웅다웅 다투기에는 그릇 크기가 너무 작은 레드 오션이다.
마치 이족 보행 로봇이 창작물이 아니라 현실에 등장할 가능성만큼이나 이건 녹록치 않은 문제이다.
그래서 나는 없는 정서법을 새로 만들려는 시도는 감히 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음성 부호 연구보다는 이미 있는 한글 체계에 대해서 세벌식 글자판 연구나 훨씬 더 중요하게 국가 차원에서 진행했으면 좋겠다. 한국어+한글 기성 체계만으로 domain을 한정하더라도 입출력 기술 쪽으로 한글의 고유한 특성을 활용해서 새로 개발해야 할 것이 즐비하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관심사이다. 자세한 사항은 아직 기밀이다만.
각 사람들이 자기 오덕 기질과 똘끼를 발휘하여 한글을 응용한 솔루션을 내놓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시장의 선택을 받아서 채택되거나 도태한다면 나쁠 게 없는 현상이다. 허나 시장이라는 게 그렇게 건전하게만 돌아가는 게 아니고, 또 얼치기 한글 장사꾼이 나랏돈 타서 병크를 다 저질러 놓음으로써 나중에 동일 분야의 후학에게 돌아갈 혜택과 지원까지 막아 버린다면.. 이건 좀 큰 문제이고 비극인 것 같다. 이 문제를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된다.
한 줄 요약: 한글은 독창적이고 과학적이고 충분히 우수한 문자인 건 틀림없다. 허나, 한글의 우수성을 살리고 싶다면 솔까말 음성 부호 연구보다는 지금 상황에서는 세벌식 연구가 훨씬 더 필요하고 절실하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