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아쓰기와 풀어쓰기

  한글을 풀어서 쓰게 되면 모아쓸 때보다 글자의 형태가 더 단순해진다는 것 그 장점 하나는 나도 절대적으로 인정한다. 한글도 알파벳처럼 지금보다 훨씬 더 작은 픽셀 속에도 들어갈 수 있게 되고, 글자 하나하나가 더 큼직하고 알아보기 쉬워지며 글자를 더 작게 만들어도 되고 책 크기가 더 작아져도 되고, 모아쓸 때보다 글자를 기계적으로 다루기도 훨씬 더 쉬워지고... 언뜻 듣기만 하면 이 얼마나 솔깃한 매력인가!

본인 역시 한글 풀어쓰기 자체가 한글 파괴이고 세종대왕에 대한 모독이네 하는 감정적이고 원색적인 비난은 하지 않으며 할 필요도 없다. 지금 한글 풀어쓰기를 제일 배척하고 있는 진영은 오히려 소위 한자파들이다(주 시경, 최 현배 같은 사람까지 들먹이면서 엄청 욕을 한다). 하지만 예전의 풀어쓰기 옹호론자들이 주로 공 병우 박사와는 다른 노선을 간 한글 기계화 연구인들 위주였다면, 요즘은 음성학, 한글 맞춤법 쪽에 조예가 있는 국어학자 위주로 풀어쓰기 지지자를 찾을 수 있는 편이다.

  그런데 현실적인 장벽은 한글은 각각의 낱자들이 풀어쓰기에 그렇게 최적화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
모아쓰던 한글 자모를 기계적으로 있는 그대로 쫙 풀어 버리는 것만으로는 변별성, 시각성 면에서 도저히 모아쓰기를 따라잡을 수 없다. 이건 단순히 모아쓰기에 익숙해서 좋은 차원이 절대 아니다. 마치 일본어 히라가나를 쭈욱 풀어서 써 놓은 것과, 한자가 적당히 섞여 있는 것의 차이라고나 할까.
자음 ㅇ을 생략해야 할 것이고 모음 ㅡ는 도저히 있는 그대로 쓸 수 없으니 U자처럼 기울인다거나 어떻게든 변형을 해야 한다. 폭도 문제. 전각으로 쓰기엔 글자가 너무 널널하고, 그렇다고 반각으로 써도 ㅏㅓㅣ 같은 부류가 아닌 이상 그다지 보기가 좋지 못하다. 풀어쓴 한글 자모들이 실제 문장인지 아니면 "이니셜"인지 구별을 하기 위해 로마자 알파벳처럼 대소문자 같은 개념도 필요해질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모아쓰기에 최적화되어 있던 한글 맞춤법도 상당수 뜯어고쳐야 한다. 명사하고 토씨 사이도 띄어야 할 것이고 모아쓰기를 하던 시절보다 띄어쓰기의 필요성이 월등히 더 커지고 쓰임이 엄격해질 것이다.
모아쓰던 시절보다 풀어쓰기 정서법이 더 간편해질 수 있을지는 모르나, 어쨌든 현 체계를 다 뜯어고치고 어떤 점에서는 모아쓰기가 지니고 있던 장점마저도 희생해야 할 것들이 적지 않다. 한글을 모아쓰면서 야기되는 단점이 풀어쓰기가 해결해야 할 저 숱한 과제들을 상쇄하고 남을 정도로 치명적이고 큰 단점인 것일까?

  이런 점에서 볼 때 본인은 풀어쓰기야말로 장점보다는 문제점, 위험성이 더 크다고 여긴다. 제한적인 상황에서 특수하게 쓰일 수 있을지는 모르나 한글을 활용하는 방법 면에서 main이 될 수는 없다.
한글은 어차피 근본 철학이 알파벳과는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졌다. 분명 알파벳의 장점이 한글의 단점일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가령 이제 와서 한글에다 대문자, 이탤릭체 따위를 만들거나 한글로 수학식, 프로그래밍 언어를 표기해 보겠다는 것은 무의미한 바보짓에 가깝다. (내가 보기에 가장 도전장을 내밀어 볼 만한 곳은 그나마 음성 기호 분야 정도..) 하지만 승부를 할 분야가 겨우 그것밖에 없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타자를 예로 들어 보자. 한글이 무음 ㅇ을 언제나 채워넣는 것은 불필요한 1타 추가라는 점에서는 단점이지만, 이 덕분에 양손 교대 타자가 수월하게 이뤄진다는 점에서 보면 한글만의 장점인 것이다. 무리하게 한글에다가 알파벳의 장점을 어설프게 끼워 넣으려다 죽도 밥도 못 쑤게 되는 실수를 범하기보다는, 한글의 특성을 이용한 장점을 더욱 살리고 부각시키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더 바람직한 문제 접근 방식이라 여겨진다. 한글에 일면 이런 단점이 있다는 것을 부정은 하지 않되, 이를 별 의미 없는 단점으로 가리고 오히려 더 큰 장점으로 승화하는 시도를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본인은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고, 거기에 가장 부합하는 기계화 성과가 바로 글자판과 글꼴과 코드를 한데 아우르는 "세벌식, 직결식" 철학임을 알 수 있었다. 공 병우 박사는 정말로 한글의 본질에 대해서 잘 알고 진정어린 애정을 갖고 오랜 연구를 한 분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남들이 겨우 '한글로는 안 돼' 내지 '그래도 한자가 없으면 안 되지' 같은 미개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고 그나마 조금 선각자라는 사람은 기껏 '한글도 언젠가는 알파벳처럼 다 풀어쓰기로 바꿔야 기계화를 제대로 할 수 있어'에 머물러 있던 시절,
과감하게 쌍촛점 타자기를 만들고, 모아쓰기 체계를 근본적으로 건드리지 않으면서 가벼운 문자의 장점은 그대로 살릴 수 있는 방식을 생각해 낸 것이다. 한글을 2350 상형문자로 본 게 아니라 초중종 각 낱자라는 관점에서 보되, 이 셋이 하나라는 일종의 삼위일체(?) 관점으로 본 셈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0/01/12 09:47 2010/01/12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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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민 2011/08/27 05:20 # M/D Reply Permalink

    음성기호로 쓰기에는 못 적는 소리가 너무 많고 말이죠. Neo한글 프로젝트를 생각하지 않는 한.

    개인적으로는 음성학자들이 왜이렇게 모아쓰기에 반대하나 싶습니다. 현행 IPA의 가장 큰 문제점이 어절 구분이라고 생각하구요, 훈민정음 특성상 받침 ㄱㄷㅂ 등은 초성과 달리 내파음으로 발음해야 하는데(성조가 입성이므로) 같다고 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ㅇ은 초성에서는 음 없고 종성에서 ŋ소리를 내는데)

    부엌을 부어크로 수박을 수바그로 읽는다면야 할말없지만...

    1. 사무엘 2011/08/27 20:00 # M/D Permalink

      음성학적으로 음절(syllable)이란 건, 공명도가 높은 음운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고개’의 형태로 결정되는데요, 그거 구분하는 게 무척 어렵고 언어별로 논란도 많습니다. 그래서 임의로 구분하는 것보다는 아예 구분 안 하는 범용적인 문자를 언어학계가 음성 부호로 그냥 쓰는 것 같습니다.
      영어식으로 ‘허ㅂ(ㅡ) hub’ 하는 소리는 한국어의 ‘허브’도, ‘헙’도 아니죠. 당연히 다르게 표기됩니다.

    2. 인민 2011/08/28 10:24 # M/D Permalink

      그나마 음절 구분을 할 수 있는 언어여서 다행이겠죠. 혹은 한글·한자가 음절 구분이 되기 때문에 딱 떨어지게 나왔거나(일본 한자 등은 예외.)
      하여튼 우리말에서만큼은 초성과 종성은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고 튀면 딱 좋겠죠
      덧)영어선생님 曰“candle가 몇음절일까요 우히히”

    3. 사무엘 2011/08/28 20:44 # M/D Permalink

      그거 대표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죠.
      저는 어렸을 때 1음절이라고 배웠지만, 요즘 영한사전들은 말미의 ‘들’도 별도의 음절이라고 인정하는가 보더군요.

  2. 비밀방문자 2011/11/03 14:50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1. 사무엘 2011/11/03 22:48 # M/D Permalink

      누구신지 대략 알 것 같습니다. 뜻밖의 손님이군요. 반갑습니다.
      그런 문제는 아무래도 한글뿐만이 아니라 아스키 코드 영역 밖에 있는 모든 문자들이 공통으로 겪는 현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3. 백성 2011/11/15 12:38 # M/D Reply Permalink

    앗차, 음성학 연구가가 왜 풀어쓰기를 지지하는지 알 수가 없네요.
    초중종성의 세벌식을 지지하는 증거가 음성학에 널리고 널렸습니다, 사실은.

    1. 사무엘 2011/11/15 23:16 # M/D Permalink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음성학적으로도 분명히 onset, vowel, coda라는 초중종 세벌 개념은 있습니다.
      하지만 한글의 모아쓰기 체계가 딱 형태적으로 한국어처럼 V, CV, VC, CVC 같은 정형화된 음절 구조에만 최적화돼 있는 반면(이 최적화라는 게 정말 놀랍고 경이로운 것임!), 풀어 쓰면 여러 자음이나 모음이 연달아 오는 다른 외국어 발음을 범용적으로 표기하는 데 ‘더’ 유리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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