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블레이크 스톤 (Blake Stone)

먼 옛날 기억을 되살려 보니, 본인은 1990년대 중반에 울펜슈타인이나 둠 같은 id 사의 게임 말고 다른 계열의 3D FPS 게임을 친구 집 컴퓨터에서 본 적이 있었다. Doom처럼 좀 SF스러운 분위기이지만 Doom은 아니고 그것보다는 기술 수준이 뒤떨어졌다. 열쇠가 없는 상태로 잠긴 문을 열려고 하면 깜찍한 소리로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피드백이 왔다. (울프와 둠에는 청각 피드백이 없음)

그리고 제일 결정적인 단서로는.. 체력이 막대기나 숫자나 주인공의 얼굴 상태로 표시되는 게 아니라 검은 배경에 초록색 파형인 심전도 그래프로 나타났다. 완전히 죽어 버리면 물론 심장 박동이 없어진다.
이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게임을 검색해 보니.. Blake Ston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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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적으로는 얘는 울펜슈타인 3D 엔진을 기반으로 개발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높이를 표현할 수 없으며 레벨 배경은 여전히 건물 안으로 제한된다. 그러나 얘는 울프와는 달리 (1) 바닥과 천장에도 텍스처를 얹어서 그래픽을 고급화했으며, (2) 시점에서 먼 곳은 살짝 더 어둡게 표시되는 걸 구현했다. 게다가 얘도 미래가 배경이기 때문에 높이가 없다는 것만 빼면 전반적으로 둠과 분위기가 비슷해 보인다.

얘는 분명 나쁘지는 않은 게임이었으나, 스케일과 기술 수준 등에서 둠의 적수가 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너무 늦게 나왔다. 출시일이 1993년 12월. 얘가 발매되고 나서 겨우 1주일 뒤에 Doom이 출시되는 바람에 블레이크 스톤은 존재감이 싹 묻혀 버렸다.

2. 퀘이크 1의 베타 3

본인은 중학교 말년에 어느 이웃집 형이 가져온 불법복제 백업CD를 통해서 퀘이크라고 둠의 다음 세대 게임을 처음으로 접했다. 그때는 지금 같은 고속 인터넷망이 없었으니 어둠의 경로에서 소프트웨어 불법복제를 책임지던 매체는 CD였다.
요즘은 아무 컴퓨터에나 당연하게 달려 있는 CD 쓰기/굽기 기능도 그때는 고가의 기계를 따로 돌려야 할 수 있는 첨단 기능이었다. 어디 그 뿐이랴? 요즘은 인터넷, USB 메모리, 외장 하드의 발달로 인해 광학 드라이브의 필요 자체가 극도로 줄어들어 있으니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본인은 오랫동안 도스용 퀘이크 1을 즐겼다. 486 66MHz짜리 컴퓨터로는 퀘이크는 기본 최저 해상도인 320*200/240대에서나 제대로 프레임이 나왔지 640*480으로는 도저히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동일한 영어 이니셜을 갖고 "그 FPS(1인칭 슈팅) 게임은 이런 사양의 컴터에서 FPS(초당 프레임 수)가 얼마나 나오냐?" 이런 드립을 치는 게 가능하구나.;;

세월이 흘러 2000년대 중반이 되었고, 본인의 컴퓨터는 퀘이크를 처음 접하던 시절보다 당연히 성능이 월등히 더 향상된 걸로 바뀌었다. 본인은 옛날 생각에 Windows용으로 포팅된 퀘이크를 고전 게임 사이트에서 구해서 돌려 봤다.
그런데 이 퀘이크는 내가 옛날에 하던 퀘이크와는 미묘하게 다른 게 많았다. 정자체에 가깝던 화면 글꼴은 bloody한 분위기를 내려는 듯 좀 흘리고 날린 형태로 바뀌었다. 메뉴를 꺼내면 뒤의 게임 배경이 단순히 팔레트만 바뀌는 게 아니라 시꺼먼 하프톤 점이 쫙 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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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에피소드별로 모아야 하는 아이템의 이름을 본인은 10여 년 가까이 sigil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 게임은 rune이라고 표현했다.
그 이름도 유명한 무기 파워업 아이템은 quake power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게 이 퀘이크에서는 quad damage였다.
새로 구한 퀘이크는 에피소드 2의 마지막 레벨은(비밀 레벨 말고) 물웅덩이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이동해서 다리를 내는 형태였는데 내가 기억하는 맵이 아니었다. 또한 에피소드 3의 마지막 레벨의 끝부분에서 Vore 두 놈은 높은 곳에서 튀어나왔으나, 이 게임은 다리 아래 용암 바닥에서 튀어나왔다.

차이점은 이 뿐만이 아니다. 에피소드 1의 보스인 Chthon의 생김새도 내가 기억하던 모양이 아니었다. 내가 하던 퀘이크는 얼굴도 몸통과 비슷한 색깔이고 눈이 있었던 반면, 이 퀘이크는 딱히 눈 같은 게 없고 얼굴 전체가 세로로 난 입의 이빨 같은 것으로 둘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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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으로 게임 전체의 최종 보스인 Shub-Niggurath와 싸우는 마지막 레벨은 완전히 다른 맵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맵은 요렇게 뭔가 에피소드 4의 비밀 레벨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나중에는 천장이 청록색인 거대한 필드에 도달하고, Shub-Niggurath가 있는 곳까지도 갈 수는 있지만 여기서 더 보스를 죽이거나 게임을 진행해서 엔딩을 볼 수는 없었다. 적을 다 죽인 뒤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나저나 퀘이크는 다 뭘 참고해서 몬스터들의 이름을 지었는지, 스펠링이 다 읽기 힘든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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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내가 경험했던 퀘이크에 차이가 존재했던 이유는 이미 제목에 쓰여 있다. 내가 중딩 시절 옛날에 했던 퀘이크는.. 바로 퀘이크 정식 버전이 발매되기 불과 2주 남짓 전에 유출된 '0.8 베타 3 버전'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어째 어떤 복돌이가 만든 백업 CD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난 10년이 넘게 베타 버전 퀘이크가 정식 퀘이크인 줄로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런 것도 이제 검색해 보면 구체적인 출시 내역을 다~ 알 수 있고.. 옛날 기억도 어지간한 건 다 복원 가능한 세상이 됐으니 참 대단하다.

beta 3 구버전의 구동 및 플레이 동영상을 짤막하게나마 유튜브로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다. 구버전은 마지막 레벨을 클리어 하는 엔딩이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게 맞았다. 미완성이었다.
그에 반해 정식 버전은 적절한 타이밍에 순간이동 장치로 들어가서 Shub-Niggurath의 몸 속으로 '텔레프래깅'을 하는 방식으로 적을 죽여서 엔딩을 볼 수 있다.

더 생각나는 걸 열거하자면, 몬스터 Ogre가 톱질 하는 소리가 구버전 것은 정식 버전의 것보다 피치가 좀 더 낮았다. Vore가 쏘는 탄환이 구버전은 그냥 용암 fireball과 동일했지만 정식 버전은 보라색 공으로 바뀌었다.

또한, 주인공이 뭔가에 깔려 죽었을 때 구버전은 be crushed라는 말을 썼지만 정식 버전은 be squished라고 말을 바꿨더라. 본인은 crush라는 단어를 둠과 퀘이크를 통해서 알게 됐다. Doom 2에서도 레벨 6이 The crusher이기도 하고 말이다. 끝으로, 구버전에서는 Ogre 이상 몬스터들은 로켓 같은 무기로 오버킬을 당해도 결코 육편 피떡으로(gibbed) 변하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id에서 1990년대 중반에 개발했던 Doom과 Quake들은 묘사가 잔혹할 뿐만 아니라 오각형, 염소 뿔 등 의도적으로 오컬트나 사탄 숭배교를 표방하는 듯한 비주얼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자국 내에서도 이런 비판을 많이 받았는가 보다. 파일로 제공되는 도움말 문서를 보면, FAQ 중 하나로 "Are you guys Satan-worshipers?"가 있고, 이에 대한 답변은 No 한 마디로 간단히 일축해 놓았다.

그런데, 이것도 구버전의 도움말 문서는 간단히 No만 있는 게 아니라.. "아니요, 우리는 그냥 오각형과 666을 좋아할 뿐입니다."라는 부연 설명도 들어있었다. 중고딩 시절에 분명히 읽었던 기억이 있다.
id는 전통적으로 종료 확인 메시지도 그렇고 말을 전반적으로 익살스러운 농담조로 하는 걸 좋아하긴 한데, 이 질문에다가도 답변을 그런 식으로 하면 기독교 단체 같은 데에다가 더 큰 논란과 어그로를 일으킬 것 같으니 저 말을 삭제한 듯하다.

3. 기타

10대 중반의 나이로 접했던 FPS들은 나의 가치관 형성에 많은 영향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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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렇게 거의 270도 턴을 해서 미로처럼 꼬불꼬불 들어가게 돼 있는 건물 화장실을 이용한 적이 있었다.
벽면 텍스처도 규칙적인 형태인 게 무슨 둠 맵 같다. 문은 좌우로 열리는 게 아니라 셔터처럼 위로 열릴 것 같다.
이런 모양의 맵을 설계하면 bsp 파일이 어떤 형태로 만들어질까 이런 게 머리에 어른거린다. -_-;;

정확하게 1인칭 시점인 건 아니지만 툼 레이더도 있다.
선유도 공원을 가 보면 거긴 잡초가 낀 야외 콘크리트 구조물이 영락없이 툼 레이더 1 맵 같다.
손에 쌍권총 쥐고 옆으로 점프라도 하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다치겠지.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내 생각에 적당히 스토리만 잘 짜 놓으면 우리나라 DMZ를 배경으로 툼 레이더 커스텀 레벨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본다. GP에 들어가서 아이템 먹고 북한군을 때려잡는 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Demilitarized Zone 이름도 얼마나 근사하냐? ㅋㅋ

Posted by 사무엘

2016/12/28 08:35 2016/12/2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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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근성인 2016/12/28 13:01 # M/D Reply Permalink

    판교에 저런 화장실이 좀 있지

    1. 사무엘 2016/12/28 15:57 # M/D Permalink

      그렇다? 공공장소에서 화장실은 밖에서 안이 한눈에 노출돼 보이지 않도록 입구를 일부러 좀 꼬불꼬불하게 만들기도 하고. ㄲㄲㄲ

  2. 허국현 2017/01/02 10:08 # M/D Reply Permalink

    실제로 DMZ에서 움직여야 할 때 툼 레이더를 떠 올려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누님(?, 이제는 여동생인가요? 나이를 거꾸로 드셨으니?)이 얼마나 강력하신 분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길이나 그런게 전부 자연이고, 콘크리트도 적당히 섞여 있어서 진짜 통일 되서 그 동네 지형 마음대로 써도 되면 한 번 만들어 볼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1. 사무엘 2017/01/02 11:14 # M/D Permalink

      ㅋㅋㅋ 그렇죠, 그 생각을 저 혼자 했을 리는 없을 겁니다.
      자연 속에 간간이 섞여 있는 콘크리트 인공 구조물 + 군사 각개전투.
      인공 구조물이란 게 고대 유적 유물이 아니고 현대 유물이긴 하지만 그래도 역사적인 중요도는 굉장히 높지요.
      툼 레이더 시리즈들 중에 특별히 3편(남극, 미국 51구역 등 세계 방방곡곡!)이나 '어둠의 천사'(본격적으로 군인 코스프레), 레전드에는 들어가기에 아무런 손색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언더월드는 다시 고대 유물 + 판타지 컨셉이어서 좀 제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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