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휘 관련 여러 생각들

1. 빛과 색

본인은 기업 이미지 광고의 최고봉으로 2006년쯤, 동요풍의 한전 CM송 "빛으로 만드는 세상"을 꼽는다.

"빛이 있어 세상은 밝고 따뜻해~ 우리들 마음에도 빛이 가득해. 빛은 사랑 빛은 행복.."
정말 이걸 누가 작사· 작곡했는지 진지하게 궁금해진다. '유 재광'이라는 사람이 검색되지만, 더 자세한 프로필· 근황이나 다른 활동 내역이 알려진 건 없다. 노래가 딱히 상업적인 분위기가 아니니 초등학생용 동요로 실제로 불리기도 한다.

저 CF의 궁극적인 의도는 그 빛이라는 게 전기 에너지가 있으니까 1년 내내 존재 가능한 것이고, 그러니 전기를 공급하는 우리 한전이 최고... 라는 메시지일 것이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백열등과 형광등을 거쳐서 인류 역사상 가장 효율이 높은 전기 광원인 LED등까지 발명하는 지경에 다다랐다. LED 덕분에 그 자그마한 스마트폰에 달린 꼬마전구가 어지간한 휴대용 손전등 역할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굳이 그런 물리적인 빛에 국한시키지 않더라도 성경도 빛에다가는 거의 무조건적으로 긍정적인 심상을 부여하고, 반대로 어둠은 일관되게 나쁘다고 디스한다.
창 1:2에 나오는 어둠, 고후 4:6와 6:14에 나오는 빛과 어둠, 엡 5:8과 살전 5:5에 나오는 '빛의 자녀', 요한일서에서 시종일관 나오는 '빛'... 이루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니 "빛으로 만드는 세상" 가사가 신앙적으로도 뭔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1950년대에 만들어진 옛날 동요인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은 어떨까?
얘도 가사와 곡이 매우 아름다우며 2005년부터 일본의 소학교 음악 교과서에도 실렸을 정도로 명곡이긴 하다만.. 이 곡의 가사는 딱히 광명과 암흑을 비교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냥 "여름엔 파랄 거예요, 겨울엔 하얄 거예요"이다.

저기서 '빛'은 그냥 '색'이라는 의미이다. 한국어는 green과 blue를 별로 구분하지 않고 '푸르다'라는 말을 썼듯이, 심지어 color와 light도 별로 구분하지 않고 '빛'이라는 말을 썼다. 그래서 한자도 光(빛 광)뿐만 아니라 色도 "빛 색"이라고 불렀고, 색깔뿐만 아니라 '빛깔'이라는 말도 있었던 것이다.

즉, 결론적으로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의 가사는 "빛으로 만드는 세상"이 아니라 포카혼타스 "Colors of the wind"(바람의 빛깔)와 더 비슷한 공감각적 심상이라고 보면 정확하겠다.
저 동요가 일본어로 번역될 때도 응당 光이 아니라 色이 쓰였다.

영어에 man 남자/사람, good 좋다/선하다, day 낮/날 같은 중의성이 있는 것처럼.. 한국어에도 저 정도 중의성은 감수해야 하는가 보다. 사전만 보고 무식하게 곧이곧대로 번역하다간 실수하기 쉽다.

내 모국어인 한국어는 한편으로 괴상망측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 ㅁ과 ㅂ 대응(어머니 아버지, 물 불, 맑다 밝다, 묽다 붉다)이라든가, 빛과 색의 중의적 관계,
내가 아는 다른 어떤 외국어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딱 한 단어짜리 '모르다' 동사,
하필 흑백과 삼원색만 활용 가능한 용언 형태로 말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꽤 심오하다는 생각도 든다.
(잘 알다시피 영어는 '빛'이 '색'이 아니라 '가벼운'과 동음이의어 관계다.)

2. 긍정적인 심상과 부정적인 심상의 구분

'친히'는 화자 내지 주체가 더 높은 사람이라는 뉘앙스가 깔려 있는 걸까, 아니면 꼭 그런 의미 없이 단순히 '내가 직접'이라는 뜻만 있는 걸까? 쉽게 말해 "내가 친히 주님을 만나 보리라" 같은 찬송가 가사는 어법 격식에 어긋난 불경스러운 표현일까, 아닐까?
일단은 전자인 것 같지만 국립 국어원 코퍼스를 뒤져 보면 후자의 용례도 없는 건 아니다.

비슷한 예로 '기념'도 있다. 결혼 기념, 생일 기념, 완공 기념처럼 꼭 긍정적인 사건, 기쁜 소식만 기리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중요하고 의미 있고 잊지 말아야 할 일들은 모두 기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걸까?
이런 인식에 대한 혼란 때문에 일각에서는 당장 '전쟁 기념관'이라는 박물관 명칭부터가 제대로 된 작명인지 이의를 제기하곤 한다. 하긴, 더 심한 예로 '2010년 국권 피탈 100주년 기념'이라고 하면 다소 어색해 보이긴 한다.

그런데 '기념'을 안 쓰면 딱히 다른 대안이 있어 보이지도 않으니 더 난감하다. 전몰자라면 '추모, 추도'라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war memorial은 기념이 아니면 도대체 뭐라고 번역하란 말인가?
사실 이렇게 꼭 긍정적인 뜻으로만 써야 한다, 부정적인 뜻으로만 써야 한다는 식의 제약과 구분은 세월이 흐르면서 문란해지고 없어지는 편이다. '너무'가 아주 대표적인 예이고, 또 '장이'와 '쟁이'의 구분도 비슷하게 슬금슬금 흔들리는 중이다.

3. '우리' (we, our)

한국이라는 나라의 민족 문화는 개인보다 집단, 서열을 좋아한다. 그래서 서구· 영어권에서는 I, my라고 표현할 것도 '우리'라고 표현하는 게 많다. 우리집, 우리나라처럼.. 그래도 영어로도 논문 쓸 때는 내 경험상 we를 의도적으로 썼던 듯하다. 한국어로는 주어가 '나'나 '우리'가 아니라 아예 '본 연구/본 논문' 같은 무생물이 됐을 상황이어서..

그런데, 이렇게 개인주의적인 영어로도 our을 당당히 쓰는 상황이 있으니 바로 '우리 은하'이다. 겨우 집이나 나라가 아니라 우주 차원이다. 인간 중에 이 은하, 아니 태양계조차 벗어나서 사는 개체는 전무하니, 이 정도 되면 단일 집단 의식과 소속감을 갖기에 충분할 듯하다. =_=;;

물론 오글거리는 Our Galaxy 말고 the Galaxy, the Milky Way 같은 말도 쓴다.
영어에서 정관사 the는 아까 언급되었던 그것을 가리키는(a cup -> the cup) 포인터라는 용법은 아주 명백한 반면, 한편으로 보통명사로만 이뤄진 '준' 고유명사를 가리킬 때도 쓰이고(the sun, the Great Wall), 그 명사에 속하는 집단을 가리킬 때도 쓰인다.

그런데 한편으로 완전히 생판 새로운 이름인 고유명사의 앞에는 관사가 붙지 않는다. 이거 무슨 국기에 대한 경례 앞에서만 충성 구호를 생략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으로는 정관사가 쓰이는 방식이 원칙이 없고 귀걸이 코걸이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렵다.;;

4. 정확하게 알고 구분해서 써야 할 한자어들

(1) 전기세가 아니라 전기료가 맞다. 먼저 한전은 엄연히 정부 기관이 아닌 공기업인 관계로, 전기 요금은 세금(稅)이 아니다. 또한 전기는 무형의 에너지일 뿐, 무슨 부동산이나 고가의 장비처럼 임대 형태로(貰) 빌려 사용하는 물건도 아니다. 그러니 수도나 가스처럼 비(費)나 료(料)만 붙으면 된다.

(2) 교육부 노동부 법무부.. 이럴 때는 部를 쓰지만,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이럴 때는 府를 쓴다. 전자는 행정부를 구성하는 하위 조직들을 가리키고, 후자는 국가 권력을 지탱하는 세 축의 구성원이다. 뭔가 辭典과 事典의 차이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3) 이제는 완전히 폐지됐으니 역사 속의 유물이긴 하다만, 사법고시가 아니라 '사법 시험'이 정확한 명칭이다.
옛날에 행정· 기술· 외무 고시는 말 그대로 '고시'였다. 이 고시(高試)라는 말 자체가 무슨 재귀적인 영어 이니셜처럼(GNU is Not Unix ???) 저런 시험을 가리키는 '고등고시(考試)'의 준말이다. 사법 시험도 반세기도 전 옛날에는 고등고시의 사법과에 속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바뀐 게 무려 1963년의 일이다.

한편, 교사를 뽑는 시험도 공식 명칭은 '임용 시험'이다. 임고, 임용고시라고 부를 때도 考試이지, 고등고시의 준말인 高試는 아니다.

(4) 대장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집단의 우두머리, chief, leader라는 뜻으로는 한자로 隊長이라고 쓴다. 隊가 특공대, 구급대, 심지어 군대, 소대, 중대 등등의 그 '대'이기 때문이다.
포스타 대장은 大將이니 한자가 완전히 다르다. 여기서는 그냥 장군이 아니라 큰 장군이라는 뜻이다.
의외로 '큰 어른'(大長)이라는 직관적인 한자어는 딱히 안 쓰이는 것 같다. 큰창자를 나타내는 대장(大腸)은 당연히 논외로 하고..

(5) '전쟁/사건 발발' 이럴 때 사용하는 '발발'은 勃發이구나. 설마 發만 두 번 중첩시켜서 發發인가 했는데 그건 아니다. 勃은 한국어 한자어에서 다른 용례가 있긴 한가 모르겠다.

(6) 궤도(軌道)는 동일한 한자로 영어의 orbit과 railway를 모두 의미하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천체의 공전 궤도와, 궤조-궤도-선로의 순으로 연결되는 철도 용어는 문맥이 완전히 달라 보이는데 말이다.

(7) 핵 분열(核分裂)도 한자는 동일하지만 '핵'이라는 게 생물학적인 의미도 있고 물리학적인 의미도 있기 때문에 nuclear division (세포)과 nuclear fission (원자 공학)을 모두 포함한다. 예전에 봤던 '고립어'(언어 유형 vs 계통)의 중의성을 보는 것 같다. 동일한 단위가 무게와 부피, 화폐 단위(톤, 달란트..)를 오락가락 하고 열량과 에너지(칼로리..)를 오락가락 하는 것과도 비슷하게 느껴진다.

(8) 배터리에다 전기 에너지를 보충하는 것도 충전이고 교통 카드에 돈을 보충하는 것도 충전인 게 개인적으로 좀 의아하게 느껴진다. 이 경우 한자는 물론 다르다. 후자는 혹시 돈 전(錢)을 쓰기라도 하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塡이라는 다른 생소한 한자가 쓰인다. 영어로는 전반적으로 charge, load, replenish 이런 뜻이다.

5. 나머지 생각들

(1) 귤과 오렌지, 회전 교차로와 로터리처럼.. 동일 개념에 대한 외래어와 순화어 관계인 게 아니라, 실제로는 가리키는 개념이 서로 미묘하게 다른 것들이 세상에 많다. 이런 예가 얼마나 더 있으려나 궁금하다.

(2) 교통사고 뉴스 보도를 시청하다 보면 "이 사고로 승용차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찌그러졌으며..." 이런 표현을 자주 듣는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라는 길고 긴 부사구를 좀 간결하게 표현할 수 없을까? 저 표현을 영작을 했다면 이렇게 장황하고 길지 않을 것 같다. ****ly 같은 미지의 한 단어로 간단하게 끝나지 않을까?
언론에서 '평당' 대신에 '3.3제곱미터당'이라고 말하는 게 참 바보 같고 부자연스럽고 불편해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3) 알맹이는 '-맹이'인데 돌멩이는 '-멩이'인 게 문득 굉장히 이상하게 느껴지며, 서로 어떤 어원의 접미사가 붙은 것인지 진지하게 궁금해진다.
또한 어미 '-려고', '-러'도 정확한 용도 구분이 모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려고'가 그냥 '-려'로 줄어드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8/09/14 08:33 2018/09/14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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