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2018년 9월은 본인에게 의미심장한 전환점에 속하는 시기였다. 거의 50일 동안 날 괴롭히던 지긋지긋한 무더위가 드디어 물러가고 계절이 바뀌었다.
그리고 날개셋 한글 입력기 파이널 9.5 버전을 완성했다. 홀가분하고 기뻤지만 그 뒤에도 사소하게나마 프로그램에 수정 작업이 야금야금 진행되었으며, 더 나아가 동시치기 기능도 이게 다가 아닌데 정확도를 더 개선할 수 없을까 고민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한글 입력기 말고 글꼴 쪽 연구도 하면서 학위논문 쓸 걸 준비해야 하는데.. 뭔가 오랜 독재 정권이 갑자기 무너진 뒤에 사회가 혼란스러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러 밀린 숙제들 중 무엇부터 진행하는 게 좋을까?
아.. 그 와중에 재작년에 했던 것처럼 자그마한 발표 논문을 하나 준비해서 투고했다. 이것도 여러 모로 스트레스 받는 작업이었다.
힘든 나날이 계속되었는데 날씨는 너무 좋았다. 낮엔 하늘이 완전 파랗다가 밤에는 싸늘해지고... 도저히 집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추석을 열흘 남짓 남기고 논문 투고까지 마친 타이밍 때.. 본인은 이 억눌린 욕망을 발산하기 위해 남양주의 시골 마을로 차를 몰고 달려갔다. 짤막한 힐링 여행을 떠났다.
남양주는 생각보다 넓기 때문에 북쪽의 경춘선+북한강+가평 방면도 남양주이고, 남쪽의 중앙선+남한강+양평 방면도 남양주이다. 둘을 분리해서 생각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본인이 주목한 곳은 남쪽인 와부읍 일대였다. 그래서 미사대교를 건너서 덕소삼패 IC로 진출했다.
남양주는 도농 복합 도시인 관계로 조금만 교외로 나가면 아주 전원적이고 강과 산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보안 시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군부대뿐만 아니라 상수도 취수· 정화 시설도 있다.
이런 것들 말고 또 남양주의 명물로는 바로..
내가 알기로 거의 세계 유일의 보잉 747 초기 퇴역분 기체가 곁들어진 건물이다. 월문교 사거리 근처에 있다.
열차나 선박을 개조한 건물과 달리 비행기를.. 그것도 그냥 전투기 같은 크기의 물건을 전시만 한 게 아니라 거대한 여객기를 건물 형태로 꾸며 놓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
아쉬운 점은 주날개와 엔진이 완전히 제거되었고, 총으로 치면 마치 sawed-off 샷건처럼 뒷부분도 짤려서 뭉툭해졌다는 점이다. 날개가 없으니 기체가 일면 선박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긴, 옛날에는 기체가 더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긴 했다. 하지만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칠이 벗겨지고 온통 녹슬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관리에 부담 되는 부분이 짤려 나가긴 했지만 그래도 무려 그 육중한 747기가 깡그리 고철로 스크랩 되지 않고, 이렇게라도 형체가 남았다는 점에 위안을 삼아야 할 것이다.
건물주가 기체 내부를 개조해서 뭔가 활용을 할 의향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안은 아직까지 굳게 잠겨 있고 외부인이 접근할 수 없었다.
위의 사진은 기체의 창문 안을 찍은 것이다. 내부가 어서 카페나 박물관으로 개방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비행기 답사를 마친 뒤, 본인은 거기보다 살짝 더 북쪽에 있는 보안 시설을 찾아가 봤다. 알고 보니 한쪽으로는 군부대가 있고 다른 한쪽으로는 '서울 아리수 와부 정수장'의 진입로가 있었다.
가는 길은 이런 한적한 시골길이었다.
그리고 군인 아파트는 전국 어딜 가나 이런 투박한 모양인 듯하다.
참고로 여기 말고 또 다른 정수장으로 추정되는 보안 시설도 여기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전자가 서울시 상수도 사업 본부 소속인 반면, 후자는 한국 수자원 공사 소속이다. 사진은 그냥 생략하고 넘어가지만, 담장의 쇠창살 모양이 팔당댐 근처의 정수장에서 본 것과 동일하긴 했다.
뭐, 이렇게 흥미로운 답사를 했다. 여기 주변은 온통 식당들이 널렸기 때문에 본인은 식사도 했다. 오늘의 마지막 끼니가 될 것이므로..
이제 본인은 시골 농로를 달려서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산을 향해 다가갔다.
지도와 내비상으로는 '어룡지'라고 저수지가 근처에 있는 듯했으나, 본인은 딱히 보지 못했다.
바로 여기. 30분마다 한 대씩 다닌다는 99-2라는 마을 버스가 서는 곳이 등산로의 입구이다. 하지만 이 등산로에는 차도도 있기 때문에 더 깊숙한 곳까지 차로 진입할 수 있었다.
포장 도로가 끝나고 차가 더 들어갈 수 없는 곳에는 차를 세 대 정도 세울 수 있는 주차 공간이 있었다. 이제 여기서부터 본인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굉장히 오랜만에 등산을 했다.
계곡에는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한 주 내내 날씨가 왕창 좋다가 하필 본인이 여행을 떠난 날에만 하늘이 허옇고 잔뜩 흐려진 게 아쉬웠지만, 이런 날씨도 차분한 분위기가 느껴지고 괜찮았다.
산길은 울타리와 깔개, 계단 같은 게 만들어져 있을 정도로 잘 정비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ATV나 산악 자전거가 지나갈 수는 있을 정도로 폭이 확보되어 있었다. 일부 구간은 의외로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기도 했다.
숲길을 지나서 산 속에서 하늘이 보이는 공터를 발견하면 뭔가 느낌이 굉장히 새롭다.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이 등산로도 무슨 누리길 누비길처럼 시에서 이름을 붙여 놓은 게 있었다. '큰사랑 산길'.
길은 꼬불꼬불 가팔라지기까지 하다가..
드디어 능선에 도달했다. 주변엔 쉬어 가라고 벤치와 평상이 놓여 있었다.
알고 보니 여기는 '새재고개'라고 한다. 성남-광주 사이에는 '이배재, 태재고개'가 있더니만..
성남과 광주 사이에 산들이 잔뜩 늘어서 있듯, 남양주 동부와 양평 사이에도 갑산, 예봉산, 예빈산 같은 산들이 잔뜩 늘어서 있다. 능선을 타는 길을 '천마지맥 누리길'이라고 부르더라.
본인은 그쪽으로 등산은 예봉산 한 번밖에 못 가 봤지만 여기도 기회가 되는 대로 차차 개척해 나가고 싶다.
하지만 오늘은 산을 하나 골라서 꼭대기까지 오른 게 아니라...
이 새재고개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을 했다. 산등성이에서 혼자 단잠을 잤다. 바닷가와 강가에서 텐트를 치고 자 봤으니 언젠가 꼭 산에서 텐트를 치고 자고 싶었는데 드디어 소원을 이뤘다.
마침 평상이 하나 있던 덕분에, 그 위에다 텐트를 치니 완전 딱이었다.
노트북 PC가 든 백팩뿐만 아니라 텐트와 돗자리까지 들고 산을 오르느라 몹시 힘들었다. 그러니 좁고 험한 길은 가지 못하고 처음부터 이런 큰길(?) 위주로, 그리고 산 중턱까지 최대한 차로 접근 가능한 등산로를 선택했던 것이다.
사실, 여기 주변의 샛길로 빠져서 적갑산이나 갑산의 정상으로 갈 수도 있지만 본인은 그러지 못했다. 짐 때문에 산에서의 이동성을 일부 희생한 대신, 산 속에서 극한의 주거성을 얻었다.
두어 시간 남짓 만에 해가 졌다. 인적이 완전히 끊기고 주변은 칠흑같은 어둠으로 뒤덮혔는데.. 텐트 안에만 있으면 비바람과 추위를 다 피할 수 있고 아늑하고 포근하기 그지없었다. 거기에다 침낭까지 뒤집어쓰면 밖이 영하의 혹한이어도 아무 걱정 없을 것 같았다. 난 이런 상태에 있는 게 노무노무 좋았다.
산 속 야영과 관련해서 혹시 법적인 문제는 없냐고 문의하는 분이 계신다.
해가 지면 모두 나가야 하고 야영을 해서는 안 되는 곳은 국립공원, 아니면 청와대 뒷산 정도이다. 그리고 서울 시내의 한강· 청계천 공원 같은 곳도 공식적으로 야영 금지이다.
하지만 그냥 저런 평범한 산들은 (1) 쓰레기 안 버리고 (2) 불을 피우지만 않으면 산 속에 짱박혀서 뭘 하든 문제될 것 없다.
이튿날 아침에 개운하게 눈을 뜬 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서 집으로 귀환했다. 공공시설인 평상을 너무 오랫동안 혼자 전세 내면 안 되니까..
산에서 야영을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밖에 안 한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날씨가 더 추워지면 또 오지에 있는 다른 산에서 야영을 할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