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이야기

지난 추석 때 산에서 벌초를 해 보니 동물과 식물의 차이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이 들곤 했다.
톱과 낫으로 식물에게 하는 짓을 동물에게 그대로 했다간.. 그야말로 종류를 불문하고 처참한 광경이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식물은 그렇게 베고 또 베어도 죽지 않고 끈질기게 또 자라난다. 뿌리까지 완전히 뽑아 버리거나 약을 쳐서 화학적으로 말려 죽이지 않는 한 말이다.

식물은 동물 같은 고통을 느낀다는 개념 자체가 없으며, 한쪽에서 발생하는 질병이 다른 쪽에서는 전혀 위험을 일으키지 않는다.
생명을 지니고 있는데 동물과 식물은 그 근원이 어쩜 이렇게 서로 다를까 싶다. 식물은 죽어서 부패하는 과정도 동물(특히 빨간 피가 흐르는 것들)보다는 훨씬 덜 역겹고 덜 징그럽지 않던가..

그리고 한편으로.. 산에서 야생 전투모기에게 수십 군데를 물려서-_- 서울 모기와는 차원이 다르게 오래 가는 가려움과 붓기를 체험해 봤다.;;
모기에게는 사람의 이산화탄소와 땀 냄새가 마치 삼겹살 굽는 냄새처럼 느껴지기라도 하는 걸까? 그리고 모기도 단백질이 그렇게 궁하지 않을 때는(;;) 그냥 평범하게 식물의 진액만 빨아먹는다는데?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모기나 거머리가 사람에게 아무 고통을 주지 않으면서 피부를 찢고 피를 쪽 빨아 가는 기술은 인류가 아직 개발하지 못한(주사기..) 신묘막측의 영역이 틀림없다..;;
이런 일이 있었던 관계로, 오늘은 특별히 식물에 대해서 그 동안 관찰하고 생각해 온 여러 썰들을 풀어 보겠다.

1. 풋사과와 풋고추

우리말에서 '풋-'이라는 접두사가 활발하게 쓰이는 식용 식물이 사과와 고추 말고 또 존재하는가 모르겠다. 둘 다 '풋' 버전은 표면이 초록색이다가, 완전히 익은 놈은 빨간색이 된다는 공통점이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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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의 경우, 빨간 고추는 너무 매우니 단독으로 우적우적 먹는 일은 사실상 없고, 다지고 갈아서 고춧가루나 다른 양념의 형태로 많이 먹는다. 그러나 초록색 풋고추는 복불복으로 아직 덜 맵기도 하기 때문에 얘만 단독으로 된장에 찍어 먹기도 하는 것 같다.

어떤 풋고추가 매운지의 여부를 외형만 봐서는 알 수 없으며, 내 경험상으로는 그냥 복불복 운에 의존해야 하는 것 같다. 다만 "작은 고추가 맵다"라는 속담은 신빙성이 있다. 작고 홀쭉한 놈이 더 매울 가능성이 높으며, 반대로 큼직한 풋고추는 대체로 맵지 않더라.

한편, 사과의 경우 일부 초록색 껍질의 사과를 보면 마치 한국에서 흰 껍질 계란을 보는 것처럼 희귀· 희소함이 느껴진다. 이건 대놓고 설익은 풋사과를 딴 게 아니라 초록색 상태에서 여느 익은 빨간 사과에 준하는 맛이 나는 '아오리'라는 별도의 사과 품종이라고 한다.

배는 사과 같은 껍질의 색깔 변화도 없고, 내부가 공기에 노출되면 갈색으로 변색되는 것도 없으니..
금속으로 치면 철과 구리의 이온화 경향 같은 차이가 생물학적으로 존재하는가 궁금한 생각이 든다.

2. 억새

난 어린 시절부터 억새라고 하면 그냥 길다란 잎의 단면이 날카로워서 맨살이 베이기 쉬운 귀찮은 풀 정도로만 알아 왔다.
줄기에 뾰족한 가시가 숭숭 돋은 물건은 장미를 비롯해 여럿 있지만.. 잎이 저런 구조인 물건은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게 딱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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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은 억새도 갈대처럼 꼭대기에 하얀 이삭들이 달려 있어서 언뜻 보기에 둘이 잘 구분되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인터넷으로 억새를 검색하면 둘의 차이점, 구분 방법이 잔뜩 걸려 나올 정도이다.
둘이 그 정도로 서로 닮았는지는 본인도 미처 몰랐다. 다만, 갈대는 물 주변과 습지에서 더 즐겨 서식하고 억새보다 키가 훨씬 더 크다.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는 1937년도 곡인 '짝사랑'이라는 노래의 가사이다. 으악새는 그냥 억새의 방언인지, 아니면 다른 조류 동물인지 심상이 중의적이어서 영원한 논쟁거리로 남아 있는가 보다. 작사자가 오래 전에 죽고 없으니 말이다.

옛날에 "화왕산 억새 태우기"라는 행사가 경남 창영에서 3년 주기로 개최되어 왔다. 그러나 딱 10년 전의 6회 때 불을 잘못 질러서 방문객이 5명이나 숨지는 참사가 터지는 바람에 이 행사는 영원히 폐지되었다.

3. 관목(灌木 shrub)

세상의 식물 중에는 가로수 같은 아름드리 나무가 아니고, 나팔꽃처럼 덩굴 줄기밖에 없는 부류도 아니고..
굳이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나무이긴 한데 나무라는 걸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키가 왕창 작아서 몸통이 안 보이는 물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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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을 관목이라고 부르는가 보다. 다 자라도 키가 2미터를 안 넘고 작고, 초록색 잎만 둥그렇게 무성하면서 줄기· 몸통이 안 보이는 작은 나무(?) 말이다.
길거리나 정원 같은 데서 조경용으로 맨날 보는 식물이니 하나도 생소할 것 없다. 어떤 도로에서는 길가가 아니라 정중앙에 중앙분리대 대용으로 이런 부류의 식물이 심겨 있기도 하다.

얘들은 지면까지 차지하는 부피가 골고루 크기 때문에 조밀하게 심어서 사실상의 울타리 역할도 한다.
내가 이런 식물의 존재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별로 생각을 안 했던 것 같다.

하긴, 대나무는 잘 알다시피 나무가 아니라 풀이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과일과 야채의 경계도 많이 헷갈리는 편이다.

4. 잔디

정원을 구성하는 식물 중에서 나무, 관목보다도 더욱 키가 작고 지표면을 가장 낮게 덮고 있는 건 잔디일 것이다.;; 얘는 뿌리와 잎만 있지 줄기가 있는 것 같지 않다.
사람이나 동물들에게 허구헌날 밟히고, 초식동물에게 뜯어먹히지만 얘는 그래도 끈질기게 버티고 살아남는가 보다. 아 그러고 보니 땅뿐만 아니라 무덤 봉분을 뒤덮고 있는 것도 이런 부류의 잔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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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잔디가 심어져 있으면 미관에 더 좋은 건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온도와 습도 조절이 되고, 운동 경기를 할 때 선수들의 부상 위험도 크게 줄여 준다. 또한, 돗자리를 깔 때도 밑면에 흙먼지가 덜 묻게 해 준다. 신이 창조해 주신 정말 고맙고 유용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잔디도 겨울에는 죽어서 누래지는 놈이 있는가 하면, 언제나 초록색이 유지되는 상록(?) 잔디 또한 있다고 한다.

5. 잡초

'잡초'라는 건 발효와 부패의 차이만큼이나 매우 인위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분류이다. 잡초라는 종이 생물학적으로 따로 있다거나, 얘들이 무슨 해충· 병원균 급으로 인간이나 자연에게 심각한 해를 끼친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똑같은 초록색이라고 해서 모든 식물이 식용 가능한 건 아니다. 글쎄, 상추나 깻잎 같은 건 인간이 먹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모든 채소잎을 뜯어먹을 수 있는 건 아니니 말이다. 심지어 초식동물조차도 아무 식물이나 마음대로 먹을 수 있지는 않다.
그렇기 때문에 밀림· 정글은 녹색 사막이라고 불릴 정도로 보기보다 인구 부양력이 형편없다. 그냥 지구의 허파 역할을 한다는 의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잡초는.. 광합성을 해서 산소를 만들고 뿌리로 흙을 붙잡아 두는 등 식물의 아주 기본적인 공통 역할을 하는 것 외에 딱히 인간에게 기여하는 게 없고, 심고 관리하지 않아도 자라기는 왕창 잘 자라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인간이 진짜로 재배하려고 하는 농작물(생산성이 더 높은)의 성장을 방해하기 때문에 잡초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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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가 무성한 뻘밭. 잔디밭과 비교하면 풀들의 키부터가 들쭉날쭉이고 미관에 좋지 않다. 마치 난개발로 스프롤 현상이 심한 도시의 건물들 모습 같다.)

아니면 농사와 무관하게.. 그냥 아무것도 없어야 할 곳에 불쑥불쑥 불청객처럼 자꾸 자라고 생겨나기 때문에 잡초이다. 이런 잡초는 야외에서 시야를 가리고 미관을 해친다.
먹을 수 있는 식물이 잡초라고 불릴 일은 절대 없을 테니, 식용 가능하지 않은 것은 잡초의 필수 조건이라 하겠다.

왜 하필 인간에게 별로 유용하지 않은 식물이 유용한 식물보다 억척같이 잘 자라는 걸까? 그 근본 이유를 성경에서 찾자면 인류의 타락과 더불어 "또한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창 3:18) 말씀을 펴야 할 것이다.
농사를 짓는다거나 육군 군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이런 녹색 괴물의 강인함과 생명의 끈질김에 줄곧 경악하게 된다.;;

6. 약품

끝으로, 식물에게 치는 약품은 다음과 같은 종류로 나뉘는 듯하다.

  • 영양제 또는 병충해 치료제: 대상 식물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기 위해
  • 농약: 대상 식물의 주변에 붙어서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해충· 잡초· 세균 따위를 제거하기 위해
  • 제초제· 고엽제: 대상 식물을 죽이기 위해

1번 영양제· 치료제는 혼자 성격이 많이 다르니 논외로 하고, 어떤 약품이 농약이냐 제초제냐 하는 것은 경계가 애매한 구석이 있다. 에프킬라가 모기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궁극적으로는 해롭듯이, 그 끈질긴 잡초를 말라 죽게 하는 농약이 보호 대상 식물에게도 어떤 형태로든 부작용이 없을 수는 없다. 단지, 이로운 농작물이 죽기 전에 잡초를 먼저 죽게 해 줄 뿐이다.

골프장은 산을 깎고 많은 나무들을 베어내어야 만들 수 있지만, 내부의 깔끔한 잔디밭도 농약을 왕창 많이 쳐서 유지되는 것이라는 게 공공연한 사실이다. 다만, 도를 넘는 정도는 아니고 나라에서 전국에 등록된 골프장들을 상대로 관리 실태를(농약 사용량 같은..) 조사도 한다고 한다.

농약은 번개탄만큼이나 자살 수단으로 하도 많이 악용된지라 미성년자의 구매, 얼굴 안 보이는 인터넷 거래를 통한 구매가 전면 금지되어 있다. 뭐, 자살이 아니라 실수로 마신 경우도 있고, 또 음식에다 고의로 몰래 타서 남을 죽이는 용도로 쓰이기도 했었다. 그러라고 만든 농약이 아닐 텐데..

그렇다고 위험하고 환경에 해롭다는 이유로 농약을 아예 안 쓰면 인류는 다시 옛날처럼 잡초와 병충해와 힘겹게 싸워야 하고 농산물의 가격은 수직 상승하게 된다. 친자연, 유기농만 고집하다간 후진국형 기생충과 전염병에 다시 시달리게 될 것이다.

농약은 잡초뿐만 아니라 병충해도 상대하기 때문에 살충제하고 성분이나 용도가 뭔가 호환되는 구석이 있는 것 같다. 가령, 그라목손은 살충제로 치면 DDT 같은 위상이랄까?? 너무 위험하고 장기적으로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로 사용이 금지되긴 했지만 당장 후진국에서 사람들이 말라리아 때문에 픽픽 쓰러지는 와중에 DDT보다 가성비 더 좋은 모기 퇴치제 대안은 없는 실정이다.

농약 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맨날 친자연을 외쳐도 애초에 자연이 인간에게 좋은 것만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세상일이 그렇게 단순하고 쉽게 돌아가는 게 아니다.

Posted by 사무엘

2019/12/23 08:34 2019/12/23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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