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음
"무엇보다도 너희끼리 뜨거운 사랑을 품으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으리라." (벧전 4:8)
라는 말씀과 관계가 있는 구절들은 내가 아는 한 다음과 같다.
(1) 사랑의 위력/효과에 대한 말씀의 원조는 잠언이다.
"미움은 다툼들을 일으키되 사랑은 모든 죄를 덮느니라." (잠 10:12)
(2) 저기서 말하는 사랑은 교회 지체간의 brotherly love이다. 이에 대해서는 바울 서신에서 언급돼 있다.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친절하게 애정을 가지고 서로 먼저 존중하며.." (롬 12:10)
"형제의 사랑을 지속하고" (히 13:1)
(3) 지체들간에 그렇게 사랑한다면, 특별히 누군가가 오류에 빠져 잘못 행동하는 것을 사랑으로 잘 권면하게 된다.
"형제들아,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진리를 떠나 잘못하는데 누가 그를 돌아서게 하면.. 그 죄인을 그의 길의 잘못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한 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을 그가 알게 할지니라." (약 5:19-20)
이런 게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하면서" 진리를 얻어 가는 과정이다~!
물론 머리로 이렇게 아는 것하고, 진짜로 성령의 열매로서 사심· 가식이나 조건 없이 사랑이 실천되어 나오는 것은 또 별개의 일인 것을 알 필요가 있다.
2. 야고보서와 로마서
성경에서 야고보서는 “믿음뿐만 아니라 행위로 의롭게 된다”를 가르치면서 언어 통사와 논리 구조상 로마서와 정면으로 모순되는 책이라고 여겨진다. 두 책의 텍스트를 입력시켜서 컴퓨터로 구문 분석을 했더니 통사론적으로 모순 판정이 나왔다는 카더라 통신이 전해지지만..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실험을 했는지, 믿을 만한 결과인지 출처가 불분명하다.
두 책은 똑같이 아브라함을 거론하고 똑같이 창 15:6까지 인용함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정반대로 전개된다. 이걸 보면 굳이 기계가 아닌 사람이 보더라도 두 책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긴 한다.
성경 기록이 무어라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하느니라. (롬 4:2-3)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 위에 드릴 때에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위와 함께 일하고 행위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을 그에게 의로 인정하셨느니라, 하시는 성경 기록이 성취되었고 그는 하나님의 친구라 불렸느니라. 그런즉 너희가 보거니와 사람이 행위로 의롭게 되고 단지 믿음만으로 되지 아니하느니라. (약 2:21-24)
오죽했으면 믿음 덕후 종교 개혁자였던 마틴 루터는 야고보서가 성경 정경이 아닐 거라고 현실을 부정했으며, 차마 쓰레기라고는 말 못 하고 지푸라기 같은 책이라며 극딜을 가했다. 참고로 야고보서는 신약 성경 중에서는 시기적으로 제일 일찍 먼저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위의 필요성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는 증거는 보이는 형태로 드러난다. 이로써 그 믿음이라는 게 실체가 있다는 것이 인증된다” 차원에서 하는 말이다. 예전에도 비유를 들었듯이, 자동차가 시동이 걸렸으면 공회전만 하지 말고 변속기를 D로 넣고 앞으로 나아가야(행위의 열매) 존재의 의미가 있다.
N에서 공회전만 하면 그 자동차는 아무 쓸모가 없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 차의 존재(구원과 믿음)와 작동 자체가 거짓인 건 아니다. 그런 차원인 것이다.
히 5:9에 따르면, 예수님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직접 몸소 고난을 받고 섬김과 순종을 실천함으로써 완전하게 됐다고 한다. 이건 예수님이 성육신 이전에는 신으로서의 능력이나 레벨이 2% 정도 부족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마치 노아(창 6:9)나 욥(욥 1:1)이 perfect였다고 해서 한 치의 죄가 없는 완전무결한 사람이라는 말은 아니듯이 예수님에 대한 made perfect도 그런 자질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건 예수님이 행위를 통해서 뭔가 공개적으로 인증, 입증을 받았다는 뜻이다. 예수님조차 본을 보이셨는데 구원받은 성도들 역시 가식 위선적인 선행이 아니라 믿음의 선행을 실천해 보여야 그 믿음의 실체를 대외적으로 인증받고 남에게 영향력을 행세할 수 있다. 이것이 야고보서가 말하는 바이다.
이 외에도 야고보서에서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완료되면 사망”(약 1:15)은 “죄의 삯은 사망”(롬 6:23)과 대조된다. “믿음의 단련이 인내를 이룸”(약 1:3)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체험을, 체험은 소망을”(롬 5:3-4)과도 대응하는 구석이 있다.
3. 노아의 날과 롯의 날
본인은 우주(지구 포함)와 생명의 기원에 관한 한 신의 창조를 믿으며, 연대기에 관해서는 오래된 우주와 젊은 인류를 지지한다고 이 블로그 글을 통해 몇 차례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의 간극(gap)을 믿는다. 이것이 과학뿐만 아니라 성경적으로도 이치에 맞기 때문이다.
간극 지지자라면 벧후 3:6의 “물의 넘침으로 인한 멸망”이 노아의 홍수가 아닌 더 큰 우주적인 이전 세상의 심판과 멸망이라고 본다. 그러나 반대론자는 이것도 무조건 100% 노아의 홍수라고 여긴다. 도대체 어느 쪽의 말이 맞는 걸까?
본인은 예전에 여러 논리와 비유를 들면서 간극이 성경 교리 차원에서 가능하고 옳으며, 이게 지질학· 천문학 관찰과도 조화를 가장 잘 이룬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벧후 3:6이 노아의 홍수 얘기가 아닌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하기' 컬렉션에다가 항목을 개설하여 이야기를 늘어놓도록 하겠다.
성경적으로 볼 때 노아의 홍수는 소돔· 고모라의 멸망과 호응하고 짝을 이룬다. 전자는 물바다, 후자는 불바다여서 그런 것 같다. 소돔과 고모라도 성경에서 노아의 홍수와 거의 대등한 급으로 굉장히 자주.. 악과 심판과 폐허의 상징으로 두고두고 언급된다. 즉, 인지도가 매우 높다.
그리고 노아의 홍수는 인간을 포함해 코로 호흡하는 육상 동물만 다 죽었지, 다른 어류· 식물· 곤충 따위는 굳이 방주에 타지 않아도 멸종하지 않았다.
소돔과 고모라는 뭐.. 그 지역에 있는 생명체들은 몰살을 면하기 어려웠겠지만, 면적이 노아의 홍수보다는 훨씬 좁았다. 두 심판은 강렬하긴 하지만 규모 면에서 전면적이지 않고 부분적(partial)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성경 본문을 살펴보자.
베드로후서는 바로 앞 2장의 5~6절에서 하나님이 내리신 심판의 사례로 저 두 사건을 쌍으로 언급하고 있다.
더구나 예수님도 눅 17:26-30에서 노아의 날과 롯의 날을 같이 거론하면서 둘을 쌍으로 엮으셨다. 이 정도면 둘이 매우 비슷한 심상이라는 건 성경적으로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반면, 벧후 2의 바로 다음 3장은 어떤 문맥인가?
이 홍수와 나란히 대응하는 불 버전은 하늘과 땅을 통째로 불태워 없애 버리는 것이며(7절), 겨우 소돔과 고모라의 유황불 정도하고는 쨉이 안 된다. 계속해서 10~12절을 읽어 보면, 거의 원자력 핵융합/핵분열 급의 전우주적 물질 붕괴가 묘사되어 있다. 단순히 산소에 의한 연소가 아니다.
이런 묘사는 벧후 이외의 다른 책에서는 거의 찾을 수 없다.
저 불 심판이 소돔과 고모라와 차원이 다른 것과 동급으로, 과거의 물 심판 역시 노아의 홍수와 같은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 본인의 논리이다. 2장 5절도 노아의 홍수이고 3장 6절도 노아의 홍수라고? 완전히 차원이 다른 문맥에서 또..??
아래의 비례식을 생각하면서 본문을 진지하게 다시 읽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노아의 홍수 : 소돔과 고모라 유황불 =
???? : 하늘과 땅이 몽땅 불로 멸망, 물질 붕괴
4. 수식 대상과 범위
위의 3번 아이템과 이어지는 내용인데..
성경에는 긴 문장에서 수식의 대상과 범위를 잘 분간하며 읽어야 하는 부분이 좀 있다.
(1)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때 있던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은 (중략) 심판과 멸망의 날에 불사르기 위해 예비해 두셨느니라. (벧후 3:6-7)
벧후 3장을 처음부터 쭉 읽어보면 종말과 재림을 믿지 않는 비웃는 자들이 나타날 거라는 예측이 나온다.
“그것으로 말미암아”와 연결되어 비웃는 자와 인과관계를 형성하는 다음 사건은 “현 세상은 불로써 멸망할 것”이다. 걔네들 때문에 이전 세상이 물로써 멸망한 게 아니다. 수식어와 피수식어의 거리 차이 때문에 저렇게 읽히기 쉬우니 주의해야 한다. 과거의 물 심판은 미래의 심판하고 그냥 대조 대구를 이루기 위해 언급되었을 뿐이다.
(2) 세상의 창건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그에게 경배하리라. (계 13:8)
‘세상의 창건 이후로’는 생명책의 이름 등재 시기를 수식한다. 어린양의 도살..;; 시점을 수식하는 게 아니다.
문장의 통사 구조는 중의성을 지니는데 니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뒤에 계 17:8에서 대놓고 “세상의 창건 이후로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가 분명하게 다시 등장한다. 안심하시라.
어린양이야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에 딱 한 번 죽임을 당했다가 부활했다. 어린양의 도살 시점은 계 5:6에서 “전에 죽임을 당했었던” as it HAD BEEN slain이라고 대과거 완료 시제를 통해 표현돼 있다.
참고로 마 1:6에서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인”, 전처 ex-wife라는 개념도 that HAD BEEN the wife of Urias 과거 완료 시제로 표현됐다는 걸 생각하자. (지금은 우리야가 아닌 다윗의 아내이다 / 지금은 죽지 않았고 살아 있다~ 계 1:18)
5. 달란트 비유와 므나 비유
성경의 복음서에는 달란트 비유와 므나 비유가 있다. 전자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 관점에서 묘사한 마태복음에 있고, 후자는 예수님을 온전한 인간 관점에서 묘사한 누가복음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복음은 마태복음에 비해 유대인 민족색이나 왕국복음 같은 얘기가 덜 나오며, 킹 제임스 성경은 비유에 등장하는 화폐 단위를 음역이 아니라 아예 영어 파운드로 로컬라이즈 번역해 버리기도 했다.
달란트 비유에서는 종 세 명이 각각 5, 2, 1달란트씩을 받는다. 그걸 밑천으로 각각 5와 2달란트.. 즉 정확하게 수익률 100%를 달성한 종은 칭찬을 받지만, 1달란트를 받은 종은 그걸로 아무것도 안 하고 돈을 묵힌 죄로 바깥 어둠 속으로 추방당한다. 이 장소는 성경적인 심상으로 볼 때 지옥으로 여겨진다. 즉, 게으르고 악한 종은 아예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을 상징한다.
그러나 므나 비유에서는 종 10명이 각각 1므나를 “동일”하게 받는다. 그리고 1므나를 밑천으로 투자해서 10므나, 즉 수익률 1000%를 낸 사람도 있고 5므나(500%)를 번 사람도 있어서 수익률이 차이가 난다. 달란트와 달리 원금 별도는 아니고 원금 포함인 것 같긴 하다만.. (달란트는 5+5, 므나는 1-1+10)
여기서도 1므나로 아무것도 안 한 종은 주인에게서 꾸중을 듣는다. 하지만 받았던 원금을 빼앗기는 것으로 끝이고, 추방까지 당하지는 않는다. 심판이 집행되어 처형 당하는 대상은 따로 있다.
므나 비유는 아무리 봐도 구원을 잃지 않고 보상만을 잃는 구원받은 크리스천을 빗댄 얘기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저건 그리스도의 심판석 등급이다.
이 정도 차이는 세대적 진리 공부를 좀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분간할 것이다.
그런데 본인이 이 성경 본문에서 요즘 추가로 주목하고 있는 아이템은 바로.. 예수님의 칭찬도 두 비유에서 서로 미묘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마 25:21은 “네가 적은 것(few - many 少)에도 신실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눅 19:17은 “네가 아주 작은 것(very little - big 小)에도 신실했다”라고 말한다. 전자는 일의 양, 금전의 액수, 물건의 개수를 따지고, 후자는 일 또는 물건의 규모를 따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뭐 언뜻 보기에는 구분 없이 섞어 써도 별 차이 없으며, 그게 그 말 같게도 들린다. 하지만 왕국 복음에서는 “적은 일에 신실함”이 나오고 은혜의 복음에는 “작은 것에 신실함”이 언급되는 것에도 뭔가 미묘한 영적 통찰이 담겨 있을 것 같다. 최소한 하늘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의 차이 같은 차이는 있지 않을까? 이 역시 성경을 성경으로 풀어서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