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대한국 국제

작년 가을엔 "오징어 게임"이라는 드라마가 국내외로 대히트를 쳤었다.
거기에는 끝부분에 김 희원 같은 방탄-_-유리 전문가를 떠올리게 하는 유리 전문가 출신의 게임 참가자가 나온다.
그런데 이 사람 프로필이 "1987년부터 모 유리 공장 재직"이어야 하는데, 1897년으로 잘못 기재되어 나가서 구설수에 올랐었다.

1897년은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바뀌었던 해이다. 그만치 엄청난 옛날이다.
이건 이제 중국 눈치 볼 필요 없이 "우리나라의 군주도 '왕-전하'가 아니라 '황제-폐하'이다~"
우리도 단순히 독립국을 넘어서 '제국'이기도 하다고 자뻑에 가까운 대외 선포만 한 것에 가깝다.
서 재필의 독립문이 완공된 때도 얼추 1897년 저 때였다.

중국, 일본보다도 영토가 작은 주제에 국호에 大짜를 붙였으며,
거느리는 식민지 하나 없지만 그냥 어감이 간지 나 보이니까 제국인 거다.
왕조가 바뀌었다거나 나라의 정체성이 바뀌었다거나 한 것도 전무하고, 자동차로 치면 그냥 외형만 바뀐 페이스리프트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대한제국은 보통은 그냥 조선의 역사의 연장선으로 뭉뚱그려져서 취급된다.

1899년 8월 17일엔 '대한국 국제(國制)'라고.. 흔히 한국 최초의 근대식 헌법이라고 불리는 법률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이건 내용을 볼 때 근대적인 민주 헌법이라고 보기 어렵다.
'대한국 대황제'에다가 북괴 최고존엄을 집어넣으면 싱크로율이 굉장히 높다.

1조부터 9조까지 내용을 요약하면.. 대한국 대황제(= 고종!!)께옵서는 입법 사법 행정 군사 뭐든지 자기 꼴리는 대로 할 수 있다는 말밖에 없다. 궁금하신 분은 검색 앙망..
게다가 글을 적을 때 '대황제'라는 단어는 무조건 엔터를 눌러서 줄을 바꿔서 맨 첫 단어로 나오게 써 놨다~!!!! ㄷㄷㄷㄷ

북괴에서 최고존엄 돼지 이름에다가 고유한 문자 코드를 집어넣은 것과 거의 똑같은 짓이 아닐 수 없다. -_-;;
신민에게 보장되는 권리 따위는 한 마디도 없고, 제4조에 왕권에 도전하는 신민 나부랭이는 신민의 도리를 어긴 죄인이라는 위협만 있을 뿐이다.
비슷한 시기에 제정됐던 일본이나 러시아 등의 제국주의 헌법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게 바로 옛날 조선 구한말의 실체였다. 이걸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에 조선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대한민국으로 체제가 바뀐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축복인지를 알 수 있다.
솔직히 개천절과 한글날 대체공휴일을 줄 바에야, 그건 집어치우고 제헌절이나 다시 빨간날로 되돌렸으면 좋겠다.

남한은 대한민국으로 진화했고 아직 국민 의식이 옛날 선각자들을 못 따라가서 큰일인 반면,
북한은 옛날 조선에 가까운 형태로 유턴해서 되돌아갔고 상황이 일제 시대보다 더 나빠졌다는 거다.

제대로 된 국민 의식 교육을 하려면 각종 시설의 창립일은 제발 해방 후 대한민국 건국 이후를 기점으로 잡도록 하고, 조선이나 북한 따위와는 달라진 것, 차별화하면서 더 좋아진 것을 부각시키고 강조해야 할 것이다.

7. 보복

우리나라의 역사상 매우 잔혹하고 야만적인 법이 존재했던 사례를 꼽자면 6· 25 사변의 초기에 군대에서 시행됐던 (1) '즉결처분'.. 그리고 먼 옛날 고려 시대 초기(5대 경종)에 잠깐 전국적으로 시행됐던 (2) '복수법'을 들 수 있겠다.

(1)은.. 개전 초기에 나라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니 "군기가 빠져 가지고 명령 없이 무단 후퇴하는 놈은 재판 없이 바로 총살이다"를 의도한 것이었다. 10대 고등학생들까지 쥐어 짜내서 겨우 사흘 동안 극악의 야메 날림 훈련만 시킨 뒤에 총 쥐어 줘야 했던 시절이니 더 말을 말자..
(2)는.. 호족들 민심을 달래려 했나 정확히는 모르겠다. 말 그대로 revenge 복수라는 뜻이다~!

(1)과 (2) 모두, 사소한 이유로 자기 마음에 안 드는 놈을 제멋대로 죽여도 되는 살인 면허로 변질됐다. 그러니 둘 다 거의 1년 만에 허겁지겁 전면 금지되고 폐지됐다.
무분별한 사적 보복은 금지하고 막아야겠지만, 그래도 반대로 우리나라 공권력의 형벌은 죄질에 비해 너무 약하긴 해 보인다. 특히 음주운전 인명 사고 같은 거.. 최소한 생명은 생명으로 갚도록 해야 한다.

성경에도 나오는 "눈은 눈으로, 입은 입으로"는 그 자체는 전근대 시절의 야만적인 법이 절대 아니다. 자기가 당했던 것 '이상'으로는 절대로 더 보복하지 말라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8. 일본 -- 전쟁 금지, 고문 금지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벌였다가 완전히 박살 나고 무조건 항복한 이력으로 인해, 향후에도 군사력이 싹 봉인 당해 버렸다. 최상위 법인 헌법에서 제9조에 “국력을 동원하는 적극적인 전쟁과 무력 행사를 영원히 포기한다”라고 명시되었다. 일본과 한국은 20세기 전반에는 식민 지배를 하느냐 당하느냐로 행로가 갈렸다면, 후반에는 군대를 가질 수 없는 나라와 군대에 안 가면 안 되는 나라로 계속해서 극과 극으로 달라졌다.

다음으로 일본 헌법의 제36조는 저 9조 “침략 전쟁”만치 유명하지는 않지만, 이것도 제국 시절의 악행을 금지하고 청산한다는 뉘앙스가 적극적으로 들어간 흔적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공무원에 의한 고문 및 잔학한 형벌은 절대로 금지한다”

과거에 쟤들이 식민지 조선인뿐만 아니라 자국민을 상대로도 저런 짓을 적극적으로 했었기 때문에 ‘절대로’라는 수식어가 붙은 게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았으면 말이 우리나라 헌법 제12조처럼 평범하게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정도로 평범하게(?) 만들어졌을 것이다.

실제로 일제도 유죄가 확정된 범죄자에게 내려지는 형벌 자체는 특별히 심하게 잔인하거나 야만적이지 않았다. 사형 집행도 평범하게 교수형이나 총살형이었지, 나치 독일처럼 이동식 단두대로 목을 뎅겅 짜른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100인 참수 경쟁 같은 건 별개로 생각해야 할 전쟁 범죄인 거고..)

단지, 죄를 묻는 수사를 위한 고문이 악랄했으며, 그런 관행이 전체주의 군국주의 분위기 하에서 묵인되었을 뿐이다.

고문이 행해지는 목적은 딱 둘이다. (1) 혐의를 인정하라, 이게 아니고 혐의 자체는 분명한 경우라면 (2) 누가 시켜서 한 짓인지 배후를 불어라..;;
이렇듯, 한국과 일본의 헌법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vs "천황은 국가와 국민의 상징이다"만큼이나 제정된 배경이 이렇게 차이가 난다.

우리나라는? 출입국관리법 제11조 제7항에 근거하여, 일제 시대 식민 통치의 일환으로 사람을 학살· 학대하는 일에 관여한 사람의 입국을 금지하고 있다.
후손까지 몽땅 금지하는 게 아닌 이상, 지금이야 세월이 워낙 많이 지나서 저건 사문이나 다름없는 규정이 됐을 텐데.. 일제 강점기의 트라우마가 법에 이런 식으로 반영돼 있다. 이런 정서는 반대로 일본의 법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는 형법에 특정 중범죄에 대해서는 ‘처벌’을 넘어 ‘처단’한다고.. 뭔가 법을 제정한 사람의 감정적인 빡침(?)까지 느껴지게 하는 단어가 몇 군데 남아 있었다. 그 죄는 다른 죄보다 특별히 심각하고 죄질이 나쁘다고 여겨졌던 것 같다.

하지만 법이 개정되면서 이 단어는 삭제되거나 그냥 평범한 처벌이라고 순화되었다. 제일 마지막에는 제87조 내란죄에만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한 자는 다음의 구별에 의하여 처단한다”라고 남아 있었지만 이 역시 조만간 사라질 예정.. 프로그래밍 언어 API로 치면 deprecated된 셈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2/01/14 19:34 2022/01/14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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