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의 시동

1. 시동

내연기관은 정지 상태였다가 돌아가려면 시동을 걸어 줘야 한다.
큰 불을 피우기 위해서 맨 처음 작은 불씨를 일으켜야 하듯, 그리고 컴퓨터의 유사 난수 생성기에다가 맨 처음에는 '무작위한' 씨앗을 하나 공급해 줘야 하듯, 동력을 생성하는 엔진도 시동을 걸기 위해 첫 순간에는 외부로부터 힘을 공급받아야 한다.

자동차처럼 스타터 모터가 달린 내연기관에서는 시동을 거는 절차가 간단한 편이다. 키를 꽂아서 옆으로 살짝 돌리거나 아니면 그냥 start 버튼을 누르는 게 전부이다. 그러나 자동차보다 더 작고 열악(?)한 물건에서는 시동을 거는 방식이 생각보다 더 다양했던 것 같다. 특히 옛날에 말이다.

  • 최초의 내연기관 자동차인 벤츠 모터바겐을 포함해 100년 전의 옛날 자동차, 그리고 농촌 경운기는 뒤에서 엔진 크랭크축이라고 해야 하나, 뭔가 묵직한 회전축을 힘껏 돌려 줘서 시동을 걸었다.
  • 기계톱이나 자그마한 모터보트, 예초기 같은 부류는 줄을 푸덜덜 당겨서 시동을 건다. 전문 용어로는 '리코일 스타터'라고 부른다.
  • 요즘은 안 그런 것 같다만.. 옛날 오토바이는 페달을 밟아서 시동을 걸곤 했다. 전문 용어로는 '킥 스타터'. 죽어라고 시동이 안 걸려서 고생하는 오토바이 운전자를 어린 시절에 본 기억이 있다.

묵직한 엔진을 스스로 계속 돌아갈 수 있게 만들려면.. 처음에 힘을 생각보다 많이 전해 줘야 한다. 수~십수kg에 달하는 부하가 걸려 있는 회전축을 충분히 빠른 속도로 여러 바퀴 돌려야 한다.
수동 변속기 차량을 밀어서 시동을 거는 것만 해도 얼마나 힘든지를 생각해 보자. 이중주차된 차를 슬쩍 미는 정도와는 차원이 다르다.

시동을 걸기 위해 걸어 줘야 하는 최소한의 회전수와 토크, 그리고 시동이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최저 회전수나 허용되는 최대 토크(부하) 같은 걸 수식으로 구하고 표현하는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자세히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걸 인력으로 때우는 게 불편하니 자동차에는 20세기 초반쯤에 스타터 모터라는 게 발명되었다. 덕분에 시동을 거는 게 더 편리해졌지만, 그 대신 자동차는 배터리의 방전에 더 취약한 물건이 됐다.

차가 이미 시동이 걸려 있는데 공회전 엔진음이 너무 조용하다 보니 운전자가 실수로 키를 또 start로 옮길 수 있다.
옛날에는 실수로 그러면 스타터 모터가 뭘 잘못 건드리는지 아주 시끄럽고 불쾌한 소리가 나서 운전자가 "앗차~!" 하면서 키를 황급히 on으로 돌려 놓곤 했다.

자동차 취급 설명서에는 "시동이 이미 걸렸는데 키를 start로 또 옮기지 마십시오. 그러면 스타터 모터가 손상될 수 있습니다" 라고 쓰여 있긴 하다. 하지만 한두 번 실수로 잠깐 그러는 것만으로 차가 바로 심각하게 망가지거나 고장 나지는 않는 것 같다.
뭐, 요즘 같은 버튼식 차량에서는 한 버튼이 상태별로 시동 on/off를 모두 겸하니, 저런 실수 자체가 아예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라이터나 가스레인지 같은 화기를 켜는 절차도 내연기관의 시동과 비슷한 구석이 있어 보인다.
라이터는 과거의 '플린트 락' 총기처럼 소형 부싯돌 같은 걸 마찰시켜서 불꽃을 만든다. 그러나 가스레인지는 전기 스파크를 이용해서 불꽃을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용 붙박이 가스레인지는 대형 건전지를 넣는 부위가 있거나 아니면 아예 가정용 교류 전원을 사용한다.

가스레인지의 점화가 자동차 시동과 다른 점은.. 불이 켜진 뒤에도 다이얼이 START에서 ON으로 이동하는 게 없이, 그냥 자기 상태가 화력에 대응한다는 점일 것이다.;;
정비 상태가 불량한 물건은 다이얼을 돌려도 딱딱거리기만 할 뿐 죽어라고 켜지지를 않는데.. 이는 자동차가 시동이 죽어라고 안 걸리는 것과 비슷한 답답한 상황이다. 전기 스파크의 화력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불이 피어오르는 화구 주변이 젖어서 착화가 잘 안 되기 때문일 것이다.

식당에서 쓰이는 무슨 대형 가스레인지 중에는 가정용 가스레인지와 같은 점화 장치가 없는 물건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건 라이터나 성냥불 같은 걸 가까이 대 줘야만 불이 붙는다.
요즘 일반인이 성냥불을 켜는 건 뭐... 생일 축하 케이크에다가 양초 꽂고 불 붙일 때밖에 없지 싶다.;;

자동차 정도야 대형 버스나 트레일러라도 키를 꽂아서 돌리거나 on 버튼을 누르면 곧장 시동을 걸 수 있다.
그러나 대형 선박이나 철도 기관차, 비행기 같은 건.. 시동을 거는 절차가 더 복잡하고 시간도 더 오래 걸린다고 들었다. 하긴, 화력 발전소를 정지 상태에서 첫 가동하는 것도 그렇게 까다롭다고 하던데.. 뭐 더 자세한 사항은 나도 궁금하긴 하지만 아는 게 없으니 글로 쓸 게 없다.;;

2. 시동과 관련된 보안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영화적 허용 중 하나는 주인공이 주변의 자동차를 너무나 쉽게 탈취한다는 것이다. =_=;;
차 몰던 엑스트라 운전자가 하필 주인공 주변에서 급똥 해결하려고 차 문 열어놓은 채로 황급히 자리를 비운다거나..
주인공이 열쇠 구멍을 들쑤셔서 손쉽게 차문을 연다. 핸들 주변의 내부 배선을 뜯어서 금세 시동을 건다. 그러면서 "이 차는 이제 제 껍니다.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가 된다.

요즘 차들도 영화에서 하는 것처럼 내부 배선을 뜯어서 스타터 모터에다 강제로 전류를 흘려보내면 키 없이 시동 걸어서 엔진을 돌아가게 만들 수는 있다고 한다. 이 상태로 악셀 페달을 밟으면 차가 가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엔진을 강제 가동시켰더라도, 이때는 놀랍게도 잠겼던 핸들이 풀리지 않는다. 차가 정말 직진· 후진과 정지만 할 수 있지 핸들을 돌려서 방향 전환을 할 수 없다.

그러니 이 상태로는 차량의 운행이 불가능하다. 이는 차키 없이 자동차 도난을 방지하기 위한 보안 장치이다.
핸들이야 어떤 방법으로든 차내에 전기가 들어오기만 하면 당연히 풀리는 게 아닌가 싶지만.. (시동이 걸려 있지 않으면 파워핸들만 동작하지 않을 뿐..) 그렇지 않다.

차에서 키가 꽂힌 걸 확인하고, 요즘 같으면 거기 안의 칩에 기록된 ID가 자기 것과 일치하는지도 확인해서 인증을 통과해야만 핸들이 풀린다(이모빌라이저). 잠겼던 핸들을 인증 없이 강제로 풀려면?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시동 배선뿐만 아니라 핸들 주변의 부품을 더 뜯어서 비가역적인 손상을 가해야 한다고 한다.

이렇듯, 차에는 철옹성 수준은 아니어도 최소한의 제 역할을 하는 보안 장치가 다 갖춰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차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키 없이 차를 구동하는 건 실용적인 수준에서는 매우 어렵다.
차를 훔치려면 유리를 깨든지 해서 차내에 들어간 뒤, 시동을 강제로 걸고 핸들도 풀어야 하니 말이다. 맨 처음에 차키 없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차문을 열기만 해도 바로 도난방지기가 작동해서 시끄러운 경보음이 울려퍼질 것이다.

핸들이 한쪽으로 꺾여 있으면 차키를 꽂아도 acc나 on쪽으로 안 돌아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도 보안 장치라고 한다. 핸들을 한쪽으로 힘을 줘서 돌리면 금세 키도 돌아간다고 한다. 무슨 원리로 구현된 건지는 모르겠다만.. 요즘은 뭐 다들 스마트키를 쓰니 이런 걸 볼 일이 없겠다.

그리고 자동차에 온갖 첨단 보안 장치가 갖춰져 있더라도 차주가 그냥 차문을 잠그지 않은 채로 자리를 비워 버리거나, 심지어 차키까지 안에 놔 둔 채로 떠나는 멍청한 짓을 하면.. 그 차는 범죄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다. 작게 끝나면 그냥 차 안에 놔 뒀던 금품만 털릴 것이고, 최악의 경우는 차를 통째로 도난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글쎄, 드물게 차 내부의 부품을 털리는 건 그 중간에 속하는 걸까? 사고로 부서진 게 아니라 도난 당해서 털린 건 자동차 보험으로 보상도 잘 안 된다. ㄲㄲㄲㄲㄲ

저렇게 덤벙대는 차주라면 차를 세우고 나서 백미러도 접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기 때문에 절도범들은 주차장에서 그런 차부터 먼저 노린다고 한다. 백미러가 접히지 않은 차가 문도 잠기지 않았을 확률이 실제로 유의미하게 높기 때문이다. 극악의 초보 고문관 운전자는 접었던 백미러를 펴지 않은 채 운행(!!!!!!!!)하는 전설적인 경우가 있다는데, 주차 때 백미러를 접지 않는 건 그 반대편의 극단이라 하겠다.

아무쪼록 집뿐만 아니라 차의 문단속도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군대에서는 군인에게 총을 니 애인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남에게 절대로 건네주지 말라고 교육을 시킨다. 이와 비슷하게 키가 차 안에 있거나 심지어 시동이 걸려 있는데 차에서 내려서 자리를 비우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할 것이다.

여담이지만.. 도둑이 차를 성공적으로 탈취는 했는데, 하필 수동 변속기인 바람에 계속 시동 꺼뜨리고 운전을 도저히 할 수 없어서 절도에 실패한 사례가 미국과 우리나라에 좀 있었는가 보다. ㅉㅉㅉㅉ 훔치기 전에 변속기와 페달 모양을 제대로 확인했어야지..

Posted by 사무엘

2023/09/11 08:36 2023/09/11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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