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의 정보 기억장치는 다음과 같은 속성에 따라 분류 가능하다.

(1) 배열처럼 아무 지점이나 O(1) 시간 복잡도로 즉시 접근 가능한가? 아니면 링크드 리스트처럼 순차적으로만 접근 가능한가?
Random Access memory라는 건.. 아무렇게나 읽고 쓰기가 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라, 임의 지점 접근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물론 오늘날은 테이프 같은 극단적인 물건 말고는 RAM이 당연시되고 있다. 테이프는 임의 접근이 안 되니 번거로운 감기 기능이 필요했지만.. CD는 아무 트랙이나 바로 갈 수 있다.

(2) 읽고 쓰기 가능한가, 아니면 읽기 전용인가?
ROM이라고 불리는 물건들은 RAM의 속성을 지니면서 동시에 ROM인 셈이다. ROM은 RAM의 엄밀한 반의어가 아니니 유의할 것.
CD 같은 광학 디스크는 요즘 기술로 '쓰기' 자체는 가능하다. 하지만 아무 부작용이나 부담 없이 자유자재로 아무렇게나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3) 휘발성인가, 비휘발성인가
아주 중요한 속성이다. 전원이 끊어지면 내용이 싹 다 날아가느냐, 아니면 그 뒤에도 내용이 남아 있느냐? 읽기 전용 메모리는 당연히 비휘발성이어야 할 테니 이건 읽쓰 겸용 메모리가 대상이다.
반도체 기반의 주메모리는 속도가 빠른 대신 전자이고, 나머지 보조 기억장치들은 느린 대신 용량 많고 후자의 속성을 지닌다.

(4) 매체와 reader/writer가 쉽게 분리 가능한가? 아니면 붙박이인가?
이거 무슨 철도 차량으로 치면 기관차-객차 vs 동차 같은 차이점 같다.

(5) 그리고.. 어떤 기술 배경에 따라 만들어졌는가?
다음과 같이 세 계열로 나뉜다.

1. 자기장: 테이프, 디스켓 // 디스크, 드럼.

매체 분리형에서는 테이프만이 무슨 방송국이나 데이터센터 급의 백업/아카이빙 용도로 쓰이고 있고 나머지는 도태했다. 디스켓이고 zip드라이브고 뭐고 다 망했으니까. 붙박이형은 디스크만이 '하드'의 형태로 남고 다 도태했다.
1950년대에 슈퍼컴퓨터 용으로 무려 5MB짜리 하드디스크를 지게차에다 조심스럽게 실어 나르던 시절을 보면 참 격세지감의 극치가 따로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기는 전통적인 트랙이니 섹터니 하는 구조 구분과 '포맷'이라는 게 통용되는 기억장치이다. 하드디스크는 실린더라는 것도 있었고 말이다.
똑같은 디스켓이라도 운영체제에서 소프트웨어적으로 공간 구획을 구분하고 인식하는 방법이 다르다. 과거에는 플랫폼과 운영체제에 따라 이런 파편화가 더 심했기 때문에 디스켓들이 포맷되지 않은 채로 판매되곤 했다. 물론 IBM PC와 MS-DOS가 천하를 평정한 뒤부터는 디스켓들이 다 미리 포맷되어서 나오기 시작했다.

하드디스크는 전원이 끊어질 때 안전을 위해 파킹이라는-_- 마무리 동작도 권장되곤 했다. 물론 훗날 자동 파킹이 지원되면서 별도의 파킹 유틸리티는 화면 보호기만큼이나 별 필요 없는 눈요기 잉여로 전락했다.

2. 반도체: USB 스틱, SD카드 // SSD

메모리 반도체는 100% 전자식으로만 동작하는 물건이다. 빠른 대신에 비싸고, 무엇보다도 그 특성상 전기가 끊어지면 내용도 다 날아가는 '휘발성 메모리' 전용이었는데.. 기술의 발달로 보조 기억장치 역할도 가능한 메모리 반도체가 등장했다.
얘 덕분에 기존의 테이프나 디스켓이 완전히 전멸해 버렸다. 그리고 SSD도 가격 내려가고 용량 올라가면서 기존 기계식 하드디스크의 입지를 상당수 위협하고 있다.

SSD는 조각 모음이 필요하지 않으며, 동작하는 특성이 기존 디스크와는 많이 다르다.
USB 스틱은 매체와 구동부가 일체형인 반면, SD카드는 매체와 구동부가 분리돼 있다. (별도의 reader가 필요)
옛날 8비트 시절에 게임용으로 쓰였던 롬팩 카트리지도 1번이 아니라 2번 반도체 기반이었던 거지..??

전자기기에서 캐퍼시터(축전기)와 본격적인 화학 전지의 관계가 반도체 메모리와 타 보조 기억장치의 관계하고 비슷해 보인다~!!
전자는 충전· 방전이 아주 빠르고 용량이 아주 작으니까. 그리고 캐퍼시터를 용량을 왕창 키워서 배터리처럼 사용하려는 연구가 진행 중이기도 하다.

3. 광학(레이저)

얄팍하고 비까번쩍 빛나고 뭔가 하이테크스럽게 생긴 원반이다. 1990년대에 첫 등장했을 때는 얼마나 간지 뽀대 났겠는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얘는 그 특성상 붙박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고 드라이버와 매체가 분리돼 있다. 기억장치들 중 디지털 방식의 음반· 영상매체와 가장 친화적이라는 특징도 있다. (그 반면, 테이프는 '아날로그' 방식의 매체..)
얘는 '쓰기'와는 그렇게 친화적이지 않다. 디스크에다가 작정하고 새로 기록 추가만 가능하며, 한번 새겨 버린 내용을 자유자재로 덮어쓸 수 없다. 평범한 디스크 저장이 아니라 종이에다 인쇄하는 것과 얼추 비슷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디스크의 영어 스펠링은 disk와 disc가 혼용되는 듯한데.. disc는 특별히 대놓고 원반 모양인 광학 매체에 한정되어 쓰이는 것 같다. 가령, 하드는 hard disk이지만, CD는 compact disc이다.
그리고 CD(+ DVD, 블루레이)는 지름이 12cm인 반면, 과거에 있었던 레이저 디스크는 지름이 12인치였다는 아주 흥미로운 차이점이 있다. 뭐, 거기에다 미니CD라고 지름 8cm짜리 규격도 있긴 하고 말이다.

한때 광학 기억장치는 용량이 방대하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오늘날은 빛 바랜 장점이다. 이제는 컴퓨터에서 광학 드라이브 자체가 거의 퇴출되었고, 운영체제 설치도 그냥 네트워크나 USB로 다 되는 세상이 됐다.
그래서 DVD의 다음 규격인 블루레이는 용량이 더 방대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존재감이 매우 미미하다. 블루레이에다가 수십 GB짜리 패키지 게임을 담아서 판매하는 시대도 아니니 말이다.

옛날에는 뭔가 레이저를 사용하는 컴퓨터 주변기기는 가격이 억소리 나게 비쌌던 걸로 악명 높았다. 레이저 프린터, 그리고 씨디 라이터.. 그게 어쩌다가 가격이 확 떨어지고 개인용 컴퓨터에 씨디를 굽는 기능까지 내장되어 들어갔는지.. 경이롭기 그지없다.
기껏 들어갔던 기능이 이제는 필요 없어져서 퇴출되는 지경이고..

※ 여담 1: 옛날 추억 더

  • 1990년대에 VGA 이후로 SVGA 그래픽 카드들이 표준 규격 없이 난립했던 것처럼.. 확장 디스켓도 표준 규격 없이 너무 난립했던 것 같다. 더구나 USB니 plug & play니 없던 시절에는 하드나 디스크 드라이브를 하나 더 장착하는 것도 엄청나게 어렵고 컴퓨터 하드웨어 지식이 많이 필요하던 과업이었다. 그러니 그런 싸제 물건들이 성공적으로 보급되기가 어려웠다.

  • 그나저나 이 바닥은 자동차 브레이크 말고도 '디스크와 드럼'을 쌍으로 구경할 수 있는 또 다른 분야인 게 신기하다. '자기 드럼'은 어떤 형태로 동작하는 물건이었을까..?? 개인적으로 무척 궁금하다.

  • 옛날에는 테이프나 디스크에 물리적인 쓰기 방지 탭이나 딱지 같은 게 붙어 있기도 했지만.. 요즘은 그런 관행을 찾을 수 없다. (운영체제 셸이 그런 데다가도 메타데이터나 썸네일 캐시 같은 걸 임의로 써 넣곤 함)

  • 옛날에는 광자기 디스크라는 것도 있었던 것 같은데.. 뭐지? 1번과 3번의 하이브리드인가 싶다.

카세트 테이프(자기장)나 롬 카트리지(반도체)는 8비트의 산물이다. 16비트 IBM 호환 PC급에서 저런 것들을 취급하는 사례는 내가 아는 한 없다.
그 대신 디스켓 FDD는 컴퓨터 붙박이 형태로 16비트 이후 시대를 풍미했다가 64비트 시대에는 사실상 전멸했다.
CD-ROM은 16비트 도스 시절에도 존재하긴 했지만 mscdex니 뭐니 하는 굉장히 무거운 드라이브를 실행해야 사용 가능했다. 그리고 386, 486급 이상 PC의 전유물이었다.
그 뒤로 USB 메모리는 도스와의 유의미한 접점이 없다. ^^

아무리 생각해도 1990년대 중후반에 plug & play와 USB는.. 2000년대 중후반의 64비트와 멀티코어하고 굉장히 비슷한 관계인 것 같다.
서로 담당하는 분야는 다르지만 결국 비슷하고 관련 있는 성격의 기술이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 여담 2: 정보 저장이라는 관점에서 성경 본문 고찰

성경에는 뭔가 정보 기록 매체를 암시하는 얘기가 있다. 가령, 요한복음의 21장 25절 제일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다른 일들도 많으므로 만일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심지어 이 세상이라도 기록된 책들을 담지 못할 줄로 나는 생각하노라."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찬송가의 3절 가사는 이렇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흠, 책이 아니라 SD카드라면 어떨까? 자기 테이프라면 어떨까..??
혹시 생명책이 실제로는 책이 아니라 무슨 SQL 서버가 돌아가는 IBM 메인프레임인 건 아닐까?

Posted by 사무엘

2023/10/05 08:35 2023/10/0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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