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시스템, 용어 등 이야기

1. 궤간

수요가 적은 곳에 철도를 건설할 때는 중전철 대신 경전철로 축하중과 차량 크기를 줄이는 건 기본이요, 전차선은 가공전차선 대신 제3궤조로 만들고, 1량짜리 꼬마 동차를 투입하고 심지어 부산처럼 선로 수까지 후려쳐서 단선으로 만드는 극단적인 경우가 있다.

하지만 제아무리 규모가 작은 경전철이라도 요즘은 협궤는 쓰지 않는 게 국룰이다. 그렇잖아도 요즘은 1435mm 표준궤에다가 폭이 3m가 넘는 차량을 얹어서 굴리는데, 궤간을 후려치면 차량이 너무 비좁아지고 주행 안정성이 떨어지고 각종 부품 호환에도 문제가 생긴다.
요즘은 쬐끄만 스마트폰이라도 CPU는 64비트이지, 작은 기기라고 해서 구닥다리 16비트나 32비트 CPU를 쓰지는 않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비트수까지 후려치는 건 사람이 직접 다루지 않는 임베디드 환경 한정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은 미국이 표준궤로 건설하려다가 만 것을 일본이 물려받았으니 망정이지.. 처음부터 100% 일본의 자본과 기술로 건설됐으면 협궤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첫 단추를 표준궤로 깔았으니 경부선과 경의선도 선뜻 일본 자국의 표준과 다른 표준궤로 잘 만들어질 수 있었다. ㄲㄲㄲㄲ
참고로, 잠깐 활동하다가 말았던 대한제국 철도국은 미국의 영향을 받아서 처음부터 나라의 표준 철도 궤간을 일본 같은 협궤가 아니라 표준궤로 지정했었다고 한다.

2. 등판능력

우리집 근처의 모 지하철역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는 출입구 계단은 수평으로 정사각형 블록을 두 개 이동하는 동안 수직으로 한 칸 상승하는 각도이다. 기울기가 0.5, 즉 50%이고 이를 각도로 환산하면 약 27도이다. 그나마 이것도 어지간한 고층 건물 비상구의 계단보다는 완만한 경사이다. 그런 곳은 거의 30~32도대에 달한다. (60%대 초반)

그리고 우리나라 스키장에서 경사가 가장 심한 슬로프의 경사각도 이와 비슷한 20후반~30초반이고 기울기로 환산하면 60%대이다. 이 정도면 연비 따위 쌈싸먹은 중량과 출력에다 무한궤도까지 깔아서 접지력과 마찰력을 극대화한 군용 탱크 정도나 오를 수 있다.

오늘날 고무 바퀴로 달리는 대부분의 자동차들의 등판능력의 한계는 35%~40%대이다. (18~20도) 참고로 대형 여객기의 이륙 상승각이 15도~20도이니 이와 비슷하다.
국내의 자동차 도로의 법적 오르막 설계 한계는 17%라고 한다. (9~10도) (도로의 구조·시설 기준에 관한 규칙 제25조 종단경사)

물론 이 정도 각도면 완전 극단적인 험지이며 자동차가 정상적으로 달릴 수 있는 경사가 아니다. 낡고 제대로 정비 안 한 자동차는 이런 경사를 오래 오르면 엔진 힘이 딸려서 퍼져 버린다.
종이에다가 저 기울기를 그려 보면 전혀 가팔라 보이지 않지만, 실제 지형을 보면.. 이것만으로도 엄청 급격하고 가팔라 보일 것이다.;;;

자동차가 다니는 산길의 경사는 계단의 경사보다야 훨씬 더 원만하다.
그러나 철도 차량은 그런 자동차보다도 등판능력이 훨씬 더 부족하다.
저 바닥에서는 백분율 %보다 더 작은 단위인 퍼밀(천분율)을 쓰며, 최고 열악한 선로에 대해서 35퍼밀(3.5%)을 한계로 규정한다. 이것은 각도로 환산하면 2도밖에 되지 않는다. (국유철도건설규칙 제11조 구배의 한도)

30퍼밀, 3%대만 되어도 철도의 입장에서는 기관차가 굉장한 부담을 느끼는 험한 경사이다.
서울 2호선 합정-당산, 그리고 경의선 전철 효창공원-용산 구간이.. 철도의 입장에서 법적인 한계를 간신히 준수하는 극악의 급경사이다.

이건 엔진 출력을 강화해서 극복 가능한 문제가 아니다. 세게 밟아 봤자 바퀴만 헛돌지, 경사를 못 오르고 미끄러지기 때문이다.;;
인천 지하철 2호선 검바위 역 부근의 급경사는 5.5%로, 이건 고무바퀴 경전철이니까 가능한 오르막이다. 일반 철도에서는 존재 불가능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러니 러시아-우크라이나 일대에 있는 크림대교도 도로교와 철교가 이렇게 완전히 다르게 생긴 것이다.
철교를 도로교처럼 저렇게 봉긋 솟아오르게 만들면 열차가 자력으로 전혀 지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_=

크림대교는 울나라 인천대교나 영종대교와 달리, 현수교나 사장교 형태로 만들지는 않았나 보다. 건설비를 절약하려고 단순한 공법을 사용했는지, 교각이 굉장히 촘촘하고 높이도 낮은 편이다. 그래서 큰 선박이 아래로 통과할 수 없겠다.

3. 시설

우리나라의 고속도로는 (1) 톨게이트를 모조리 없애고 미국 프리웨이처럼 (2) 노선과 진출입로에 번호를 매기는 것이 장기적인 미래 과제로 남아 있다.
그럼 철도는? 역 번호는 초창기부터 잘 정착했다. 광역전철이나 경전철 노선들은 아직까지 번호 없이 이름만으로 통용되고 있는데, 이것도 노선이 10개쯤 되면 번호를 부여하자는 얘기가 차차 나오지 싶다. GTX 노선이야 특정 지명만으로 이름을 붙이기 난감하기 때문에 진작부터 ABC라고 번호에 준하는 명칭이 붙었다.

한편, 고속도로의 톨게이트에 맞먹을 급으로 우리나라 철도에서 가까운 미래에 완수하려는 과업은.. (1) 모든 기관차를 1인 승무로 바꾸는 것, (2) 그리고 역들 승강장을 고상홈으로 바꾸는 것이지 싶다.

대형 여객기를 부기장 없이 1인만으로 조종하는 건 정서적으로 여전히 거부감이 많다. 그러나 철도야 900명이 넘게 타는 KTX도 이미 한 명이 운전하고 있는데 기존 기관차도 사각지대 카메라를 늘리고 각종 절차들을 간소화· 자동화해서 승무원을 줄이는 게 업계의 유행이다.
지하철/전철 쪽도 최장길이인 서울 1~4호선 10량은 아직까지는 앞의 기관사, 뒤의 차장 이렇게 2인 승무인데.. 가까운 미래에 1인으로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고상홈이야.. 자동차에서 저상버스가 도입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물론 고속버스는 아래의 짐칸 때문에 현실적으로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일본의 신칸센 역들은 진작부터 고상홈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래서 장거리 고속열차를 마치 지하철 타듯이 계단 없이 간편하게 타고 내리는 게 굉장히 인상적이다. 우리나라도 그런 스타일을 도입하게 될 것이다.

4. 용어

우리나라가 군대에서 일본식 한자어나 일본어식 음차가 많다며, 엑스반도(밴드-_-), 구보(달리기 뜀뛰기), 고참(선임), 미싱(물청소), 도수체조(맨손체조), 반합(밥통, 도시락), 요대(허리띠), 모포(담요), 화이바(헬멧, 방탄모), 총기수입(손질) 등의 용어들을 바꿔 가는 추세이다.
심지어 헌병이라는 말조차 군사경찰로 바꿨는데 이건 짧고 익숙한 단어를 굳이 왜 바꿨는지 모르겠다.

그것처럼 철도 업계에도 일본식 한자어.. 뭔가 무슨 한자로 이뤄졌을지 얼추 짐작은 되지만 좀 딱딱하고 건조하고 약간 위압적으로 느껴지는 용어가 좀 있다.
방금 얘기가 나왔던 구배(경사)부터 시작해서 사구간(절연구간).. 대합실은 거의 20년 전에 이미 맞이방이라고 바뀌었다.
차량기지는 딱히 일본식 용어 같지는 않은데 괜히 차량사무소라고 공식 용어가 바뀌었다.

'-창'.. 공작창, 정비창이라는 말도 요즘은 안 쓴다. '자전차, 변소'(자전거, 화장실)라고 하면 굉장히 옛날 할아버지 말투처럼 들리듯이 말이다. 군대 영창은 용어뿐만 아니라 그 제도 자체가 요 몇 년 전에 폐지됐다.
그러고 보니 '무'(務)자가 들어간 장소 이름들이 우리나라에서 잘 안 쓰는 일본식 한자어로 여겨지는가 보다. 내무반(군대), 역무실(철도), 형무소(교정시설)처럼 말이다. 의무실조차도 공식 용어가 아니고 '건강관리실'이 표준이다.

우리나라도 해방 이후에 한동안 형무소라는 말을 써 왔다. 그러나 리 승만 할배 이후에 경무대가 청와대라고 이름이 바뀐 시기(1960~61)에 수형 시설의 이름도 교도소와 구치소로 바뀌고 세분화됐다.
우리나라는 반일 감정, 그리고 ‘무 duty’라는 의미에서 느껴지는 건조함과 권위주의 위압감 때문에 정서적으로 이런 조어를 피한 것 같다. =_=

그에 반해 일본에서는 태평양 전쟁 전범들이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된 걸 '법무사'(士가 아니라 死!!!!)했다고 표현을 정도이니.. 일본이 저 '무'자를 정서적으로 우리나라보다 더 즐겨 쓰긴 하는가 보다. 참고로 '경무대'는 '무'의 한자가 武이며, 일본식 한자어가 전혀 아닌 조선 고유의 명칭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3/09/24 19:35 2023/09/24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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