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어와 영어가 서로 정반대인 관념 중에 대표적인 예로는 부정문에 대한 응답 방법이 있다.

"너 숙제 안 했지?"에 대한 대답이 한국어는 "아냐, 했단 말이야."인 반면, 영어로는 "Yes, I did"로 긍정 의문에 대한 대답과 완전히 동일하기 때문이다. 한국어의 관점에서는 거 참 희한한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영어에도 무조건 상대방의 말 자체에 대한 긍정과 부정을 뜻하는 감탄사가 없지는 않은 것 같다.
Then Sarah denied, saying, I laughed not; for she was afraid. And he said, Nay; but thou didst laugh. (창 18:15) 안 웃었는데요. / 아냐, 너 아까 방금 분명히 웃었어.

킹 제임스 성경은 yes/no보다 yea/nay(예이/네이)가 훨씬 더 많이 쓰인다. 마 5:37의 "오직 너희 의사 표시는,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라."에서도 yea/nay이다.

2.
이에 덧붙여 또 중요한 차이로 '가다'와 '오다'가 있다.

"너 빨리 이리 와 봐."에 대한 대답으로 한국어는 "지금 가는 중이야"인 반면, 영어로는 "I'm coming"이다.
영어는 남이 내게 come이라고 지시를 내렸으니, 나는 거기에 순응하여 그에게 come한다고 기계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한국어의 '오다'는 오로지 나에게, 화자에게 상대방이 움직여 가까이 간다는 뜻이다. '오다'의 주체가 '나'가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come이 성경 번역에서도 굉장히 어려운 요인 중 하나가 된다. 문자 그대로 죄다 '오다'라고 번역하면 우리말 어법에 어긋나게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같은 영어 성경 중에서도 킹 제임스 성경은 come이라고 표현했는데 그걸 go나 enter로 바꿔 버린 경우가 적지 않다.

3.
이렇게 단어 자체에 '나'라는 객체가 수반된 비슷한 예로는 불완전 동사인 '달다'가 있다.
sweet나 equip 말고 give이다. '다오', '달라', '도(사투리-_-)'로만 활용되는 그 이상한 단어 말이다.
불완전 동사가 '가로다', '더불다', '달다', '데리다' 말고 또 뭐가 있더라?
이 '달다'는 '주다'와 의미상으로 거의 차이가 없다. 하지만 남으로 하여금 특별히 '나에게' 뭔가를 주기를 원한다는 아주 이기적인 뉘앙스로 쓰인다. '주다'라고만 하면 내가 남에게 베푸는 뉘앙스가 풍기지 않는가?

"저 사람에게 빵을 다오"라고 하면 뭔가 이상하고 어색하다. "저 사람에게 빵을 주게/주시오/주세요"라고 하거나 아니면 "내게 빵을 다오", "우리에게 빵을 달라"라고 해야 말이 된다.

흔히 한국어는 압존법이란 게 있을 정도로 최대한 청자 위주로 언어가 구성돼 있다고들 한다..
내가 언급하는 사람이 나보다 높더라도, 청자보다는 낮은 사람이라면 반말이 허용된다. "할아버지, 아버지께서 오십니다"가 아니라, "할아버지, 아버지가 옵니다"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오다-가다'의 관계를 살펴보면, 한국어도 청자가 아닌 나 위주, 화자 위주의 사고방식이 배인 것도 분명 있다. 그래서 '달다' 같은 단어도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개인적인 친분 사이가 아닌 공식 석상에서는 압존법이 꼭 적용되는 것도 아니라는데? KBS 한국어 능력 시험 공부하면서 교재 어딘가에서 본 기억이 있다. 가령, 할아버지/아버지가 아니라 사장/과장이라거나(자기는 대리-_-) 할 때 말이다. 이래서 한국어는 어렵다. -_-;;

끝으로, 성경 번역에서 유명한 토착화 표현을 덧붙이며 글을 맺는다.

(1) "누가 너를 데리고 오 리를 끌고 가면 십 리를 가 주어라"(마 5:41)가 영어로 원래 무엇인지가 아는가? 1 mile과 2 miles이다. 5리(약 2km)가 1 마일(약 1.6km)보다는 약간 더 긴 거리이다. ^^;;
(2) "장가 가고 시집 가기"는 영어로는 "결혼하거나 혼인 당하거나"(marry / be given in marriage / be married to)가 된다. -_-;; 성경에서 여자가 시집 가는 건 언제나 marry의 수동태로 표현되어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0/08/10 08:37 2010/08/10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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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재주 2010/07/27 00:43 # M/D Reply Permalink

    예. 영어는 '자기가 가고 싶어서 가는 거면' go, '남이 불러서 가는 거면' come을 쓰더군요. 의미에 차이가 있다기보단 분위기와 컨텍스트의 차이를 가져오는 정도 같아요.

    그리고 원래 marry는 그 집안의 아버지가 딸을 시집'보내다'라는 의미라고 하더군요. 고대인지 중세인지 암튼 옛 영어에서 더 뚜렷하게 나타난답니다. 그래서 be married with가 아니라 to를 쓰는 거라네요. 누구에게 보낼 것인지는 아버지의 결정에 달려 있으니..

    1. 사무엘 2010/08/10 13:26 # M/D Permalink

      마치 C와 파스칼, C++과 자바, 자바와 C# 사이에서 문법 비교하는 것처럼
      자연어에도 이런 식의 특성 차이를 비교하는 게 참 재미있습니다.
      7월 27일자 댓글이죠. 이 글보다 먼저 올려 놓은 글들이 다 올라온 뒤에, 이 글도 드디어 올라왔습니다. ㅋㅋㅋ

  2. 주의사신 2010/08/10 09:19 # M/D Reply Permalink

    영어에서 뭐가 제일 어렵냐라고 저에게 질문한다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처음에는 시제 등등의 문법을 정확히 쓰기,

    그 다음에는 You(모든 사람이 평등해지는 순간이라 참 어색합니다. 나이 든 사람에게 이름 불러도 된다는 사실까지...),

    마지막으로는 yes, no랑 전치사인것 같다.

    yes, no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속도로 답변이 나오는데, 남이 not으로 물어보면 으레 한국어식으로 yes, no가 나가서 참 힘듭니다.

    1. 사무엘 2010/08/10 13:26 # M/D Permalink

      영어 문화권에서 You만큼이나 충격적인 건...
      대여섯 살짜리 꼬마애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바로 대놓고 이름을 부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성경에서 하나님에게도 곧바로 You인데 더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처음 보는 사람하고도, 통성명만 한 뒤부터는 나이 전혀 불문하고 곧바로 이름 아니면 you가 인물 식별자로 통용됩니다. 이름조차도 길고 특이한 이름은 주고받기 불편하니까 애칭이라는 개념까지 만들어 쓰고요.

      나이부터 한 살 단위로 까고 호칭 복잡하게 따져야 하는 한국어(한국 문화권)에 비해서 그게 사실 정말 편하긴 해요. 수평적이고 민주적이고 나발이고 같은 이념이나 가치를 떠나, 저게 단순하고 배우기 쉽고 편하죠.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그런 언어 체계에서 어떻게 살았는지가 궁금해집니다.
      한국어는.. 번거로울 정도로 높여 주는 표현, 아니면 아주 얕잡고 깔보고 무시하는 표현이 되는 딜레마를 좀 해결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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