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이 제아무리 시력을 강화해 주고 눈을 보호해 주고 얼굴 외모를 살려 주고 온갖 좋은 액세서리 기능이 있다고 해도, 안경 쓸 필요가 없는 건강한 눈보다 좋지는 못하다.

휠체어가 제아무리 푹신한 웰빙 좌석이 있고 심지어 컴퓨터도 달려 있고, 전동이어서 이동도 힘 안들이고 편리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사람의 건강한 다리 자체를 대신할 수는 절대 없다.

이것은 본인이 컴퓨터에서 일본어를 입력해 보면서 느낀 점이다.
자, 이제 본인이 무슨 얘기를 꺼낼지 눈치 빠른 분이라면 상상이 될 것이다.

일본어 입력기는 뭔가 휠체어 같은 존재라는 느낌이 든다.
제아무리 일본어 IME에 일본어 사전이 통째로 들어있고 환상적인 한자 변환, 전/반각 변환, 히라가나/가타카나 변환에 상용구, 맞춤법 검사기 기능까지 워드 프로세서에나 있을 법한 기능을 죄다 옮겨 놓았다고 해도..
IME 자체가 아예 필요 없이, 치는 대로 아무 제약 없이 곧바로 입력이 접수되는 알파벳/숫자 입력만치 편리할 수가 있을까?

글자 하나로도 모자라서 어절 전체를 본문에다 바로 넘겨주지도 못하고 조합 영역으로 잡고, 또 변환하고, 잘못 변환한 게 있으면 교정하고, 사전 업데이트해서 신조어 등록하고..;

수분이 몸을 무겁게 하는 것보다도 한자는 문자 생활을 더욱 무겁게 한다. 문자를 처리하는 인간의 시간을 낭비하고 비효율을 초래한다.
뭐, 한자라는 문자가 만들어진 것 자체가 인류 역사의 비극이고 한자는 당장 없어져야 할 개 쓰레기라는 식의 초딩스러운 주장을 하겠다는 게 아니다. 본인은 한자의 그 무한한-_- 제자 원리에 담겨 있는 오묘함을 인정하며, 인류가 오랜 시간 동안 한자를 이용해서 축적한 동양 문화 자산의 가치도 존중한다.
다만, 오늘날처럼 PC· 노트북도 모자라서 스마트폰까지 등장한 정보화 시대에 한자는 너무나 거추장스러운 legacy로 전락해 있다는 객관적인 현실만을 얘기하고자 할 뿐이다.

출처는 잘 모르겠다만 누군가가 말하길, 일본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3N 중의 하나가 이런 일본어 정서법이라고 '카더라'. (일본의 무슨 메이저 통신 회사, 나리타 공항, 그리고 일본어-_-)
MS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어떤 엄청 똑똑한 사람이.. 일본의 문자 입력 체계는 진짜 ㅂㅅ 장애인급이라고 혹평을 한 글을 썼다는 소식도 본인은 들은 기억이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한국과 일본은 태양계의 행성 중 마치 지구와 금성처럼 지리적으로는 굉장히 가깝지만, 문화적으로나 특히 문자에 관한 한은 정말 지구와 금성의 대기 구성의 차이만큼이나 극과 극인 것 같다.

물론, 아무리 눈이 건강한 사람이라도 눈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가글이나 선글라스를 써야 하고,
아무리 다리가 정상인 사람이라도 빨리 이동하려면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한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는 한글 문자 입력이라는 분야에서 휠체어 같은 존재가 아니라, 오토바이나 자동차 같은 존재이고 싶다. 이것이 본인이 생각하는 개발 철학이다.

원래 한글은 글꼴과 글자판과 코드 체계만 약간 튜닝을 하면 로마자처럼 직결식--중간 조합 상태가 존재하지 않으며 치는 대로 곧바로 찍히는-- 입력이 가능하다. 풀어쓰기가 아니라 모아쓰는 체계를 유지하면서도 말이다. 세벌식 타자기가 그 예이며 그 원리를 발견해서 처음으로 실용화한 분이 잘 알다시피 공 병우 박사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튜닝을 일상화하기에는 현실이 못 따라 주는 만큼(네모 글꼴, 음절 단위 한글 인코딩, 두벌식 글자판 등), 한글 IME라는 계층이 일단 컴퓨터에서 필요는 하다. 물론 그래 봤자 중국· 일본어 IME에 비해서 한글 IME의 동작 구조는 훨씬 더 간단하긴 하다. (또한, 전화기 같은 환경에서는 워낙 글쇠 수가 적다 보니, 사실은 영문조차도 다중타 같은 IME 계층을 거쳐서 입력하며, 심지어 사전을 이용한 단어 자동 완성 기능이 존재하기도 한다.)

"기왕 IME라는 계층을 넣을 거면 IME 없이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편리한 한글 입력 기능도 넣어 보자. 세벌식은 원래 직결식 입력도 가능한 체계인데, 굳이 그 가벼움을 포기하고 이왕 중간 조합 상태를 만들 것이라면 세벌식으로만 가능한 편의 기능을 넣어 보자. 흔히 세벌식 하면 글쇠 수가 많은 걸 단점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는데, 초중종 글쇠가 모두 따로 있음으로써 더 편리해지는 점도 있을 것이다."

는 것이 10년 전의 <날개셋> 한글 입력기 1.0 시절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철학이었다. 모아치기, 특정 낱자 바로 지우기, 앞 글자로 자동 달라붙기 등..! 그리고 그걸 연구하는 과정에서 덤으로, 한글 입력 방식을 범용적으로 기술하는 데 필요한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계층을 나누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안 해 본 사람이라면, 무슨 게임이나 업무용 소프트웨어도 아니고 한글 입력기 같은 간단한(?) 프로그램이 어떻게 정올에서 입상을 했는지, 내 프로그램이 정확하게 무슨 의미가 있는 프로그램인지도 잘 이해를 못 할 것이다.

그런데, 만들고 만들고 또 버전업을 거듭하고도 <날개셋> 한글 입력기는 계속 더 만들 게 생기고, 넣고 싶은 기능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10년을 연구한 것처럼 앞으로 또 10년은 더 투자해야 정말 한글 입력기로서는 더 개선할 게 없는 완전체가 나오려나? 앞으로 두고볼 일이다.

끝으로 생각해 볼 게 있다.
그런 후진 문자를 쓰는 일본도 과학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노벨 문학상까지 배출한 상태인데 왜 우리나라는 그 우수한 문자를 갖고도 해 놓은 게 없냐는 것이다.
기술이 있는 것과 그 기술을 바탕으로 자본과 산업 인프라가 탄탄히 '축적'되어 있는 것은 다르다.
단순히 함수 f(x)의 값이 큰 것과, 그 f(x)의 값들이 꽤 긴 구간 동안 적분된 것은 차원이 다른 개념인 것이다.

제아무리 한글이 우수한 문자여도 한국어로 만들어진 고차원적인 철학 사상이나, 과학 기술 용어가 없으니 무용지물이다. 그걸 이제 와서 살려 보려고 해도 답이 별로 없다. =_=;;
아래아한글이 혼자서 제아무리 날고 기는 워드 프로세서라고 해도 워드· 엑셀· 파워포인트가 한데 뭉쳐 있는 오피스 스위트슈트를 이길 수는 없으며(실제로 아래아한글이 그런지와는 별개의 문제),
고대인들이 아무리 과학 기술이 뛰어났어도 오늘날처럼 자동차와 컴퓨터, 인터넷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음이 자명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0/10/11 09:09 2010/10/11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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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물 2010/10/11 10:52 # M/D Reply Permalink

    일본어는 컴퓨터에서 쓰기 매우 힘든 언어입니다.

    언어가 부족한걸 과학 기술로 보충하는 것이죠.

    한국어(한글)는 컴퓨터에서 쓰기 매우 쉬운 언어입니다. 너무 쉬우니 노력은 안한다는 ㅜ.ㅜ
    (따뜻한 나라 사람들이 굶어 죽을 일 없어서 추운 나라 사람보다 좀 더 게을러 보이는거랑 비슷하겠죠.)

  2. 김 기윤 2010/10/11 13:22 # M/D Reply Permalink

    일본어 IME가 아니라 날개셋로 일본어 입력(..)하고 있는 저도 .. 매우 불편합니다.
    제 날개셋 설정 상태로 ?宮ハルヒのSOS? 을 친다고 하면

    량[한자][Pgdn][8] -> 凉
    궁[한자][1] -> 宮
    [Ctrl+한/영][한/영]haruhi -> ハルヒ
    [한/영]no -> の
    [Ctrl+한/영][한/영]SOS -> SOS
    [한/영]단[e][3] -> ?

    ....익숙해져(-_-;;;)서 빨리 칠 수 있긴 하지만 한글을 빌려서 한자를 친다고 해도 매우 치기 힘들다는 게 요점.. 실제로 한자만 연속으로 나오지 않고 히라가나/가타가나가 섞여서 나오는 데다가 한글 독음을 외워야 하는 점(일본어 IME로 입력할 경우도 독음 모르면 못치는건 똑같지만), 빨리 치려면 그 독음의 몇번째에 있는지도 외워야 하는 점.... 등이 일본어를 치기 힘들게 하는 듯 합니다.

    그나저나 본문 중에

    “<날개셋> 한글 입력기는 한글 문자 입력이라는 분야에서 휠체어 같은 존재가 아니라, 오토바이나 자동차 같은 존재이고 싶다”

    멋집니다!

    p.s. 언젠가는 날개셋 타자연습 내장게임을 직접 뜯어고쳐보고 싶습니다..

  3. 앗! 2010/10/11 16:25 # M/D Reply Permalink

    아래아한글이 혼자서 제아무리 날고 기는 워드 프로세서라고 해도 워드· 엑셀· 파워포인트가 한데 뭉쳐 있는 오피스 슈트를 이길 수는 없으며.....

    김 용묵님의 약간의 실수...;

    suite는 스위트라고 하죠... 스위트룸(suite room)처럼요.

  4. 사무엘 2010/10/11 20:32 # M/D Reply Permalink

    다물: 일본어 입력은 진짜 금성-_-의 대기 같은 답답함과 텁텁함이 느껴지지 않나요?
    한글 입력은 너무 쉽다 보니 더 발전이 없는 것도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MS 오피스 2010의 한글 IME만 해도, 윈도우 9x 시절의 한글 IME에 비해 기능이 본질적으로 바뀐 거 전혀 없습니다. ㄲㄲ

    김 기윤: 각 글자 하나하나가 지닌 엔트로피? 정보량이 필요 이상으로 너무 큽니다.
    우리나라도 한자+구결 이런 문자 체계였다면... 으~ 생각도 하기 싫습니다.
    공부 열심히 하셔서 나중에 타자연습 게임을 꼭 리모델링해 주세요. 소스 인계해 드립니다. ㅋㅋ

    앗!: 제 실수군요. ㅎㅎ suite는 sweet와 발음이 동일하죠. 고쳤습니다.

  5. 주의사신 2010/10/12 08:46 # M/D Reply Permalink

    텍스트 편집기 만들기 위해 WM_IME 시리즈 메시지들 건드렸던 기억이 조금 납니다.

    이 때 한글이 어떻게 합쳐지는가 생각해 봤던 적이 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요.

    1. 사무엘 2010/10/12 18:19 # M/D Permalink

      요즘은 유니코드라는 놈 때문에 텍스트 편집기 만들기도 참 쉽지 않을 겁니다.
      완전히 IME-aware하게 하거나, 아니면 한글 입력을 받을 필요가 없는 곳에서는 아예 IME 구동을 꺼 버려서 네모 상자 안에 만들다 만 한글이 뜨지도 않게 조치를 취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

  6. 김재주 2010/10/13 19:06 # M/D Reply Permalink

    요즘은 아래아한글도 오피스 스위트 형태로 나오고 있습니다.
    전 월드컵 이벤트 때에 매우 싼 가격에 구입했네요 흐흐

    1. 사무엘 2010/10/13 19:57 # M/D Permalink

      네, 한컴 오피스도 있죠. 거의 2007은 돼서부터야 워드 프로세서(한/글), 스프레드 시트(한/셀), 프레젠테이션(한/쇼) 프로그램의 UI가 일관성 있게 통합이 돼서 한 프로그램 같은 느낌이 나기 시작했을 겁니다.
      그런데 넥셀 시절에 프로그램이 너무 불안정해서, 회사에서 업무용으로 그걸 쓴 제 지인 중에는 아직까지도 넥셀 하면 이를 가는 분도 있습니다.
      한번 나빠진 이미지를 회복하기는 쉽지 않죠. 안타까운 일입니다.

  7. peremen 2010/10/15 13:24 # M/D Reply Permalink

    글 중간에서 언급한 그 일본의 메이저 통신 회사가 NTT(Nippon Telegraph and Telephone Corporation)입니다. 일본의 KT 같은 기업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1. 사무엘 2010/10/15 17:23 # M/D Permalink

      오홋 peremen 님을 여기서 만나다니, 반갑습니다. ^^;;
      NTT도 나름 일본 안에서 병크 많이 저질렀더군요.

  8. 문태부 2011/06/14 18:58 # M/D Reply Permalink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분에게는 이러한 한자에 대한 불필요성을 느낄 수도 있겠군요.
    http://bibleistrue.com.ne.kr/public_html/hanja.htm
    하지만 프로그램에 한자가 있지 않다면 이러한 것을 설명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도움이 되신다면 좋겠습니다,

    1. 사무엘 2011/06/14 23:51 # M/D Permalink

      뭐 그래도 한자 정도면 아랍이나 태국 문자 같은 것에 비해서는 처리가 아주 수월-_-한 문자에 속합니다만,
      그래도 코드 영역을 너무 많이 차지해서 민폐 끼치는 건 부인할 수 없고
      그다지 컴퓨터 친화적인 문자가 아닌 것도 사실입니다.

  9. 인민 2011/06/19 22:04 # M/D Reply Permalink

    한글은 굉장한 문자입니다.
    IPA도 국제음성한글로 빨리 대체해야죠.

    세종대왕 시대에 복음만 들을 수 있었다면(그리고 세종대왕이 크리스쳔이었다면) 파라다이스였을듯

    1. 사무엘 2011/06/20 00:56 # M/D Permalink

      모처럼 한글 기계화 카테고리 글을 쭉 읽어보셨나 보군요. 반갑습니다.
      저도 신앙의 특성상, 세종대왕과 제임스 왕-_-을 나름 비교해 보곤 했습니다.
      각각 백성을 위해서 문자를 만들고 성경을 번역한 훌륭한 왕이긴 한데, 후자의 경우는 문자를 만들 필요는 없었으니 여건이 더 유리했겠죠.

      나름 한글 연구를 한 결과물을 개인 블로그나 다른 매체를 통해 공개하시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꽤 유익이 될 것 같습니다.

    2. 인민 2011/06/24 21:37 # M/D Permalink

      나... 나름이요???

      저는 그저 다른사람 연구물 걷어먹는 바보일뿐
      누리집은 http://paularbear.blog.me/ 정도랄까요(네이버에서는 제가 곰이 됩니다 ㄲㄲㄲㄲㄲ)

      사실은 본 아이디가 있는데 본아이디는 타락한 지 오래라서 그저 여기로 오시면 되고
      누리집 관리 안 해서 거의 자료가 없습니다. 와보시면 알아요. 현재 바쁘게 업뎃 중.

      P.S.우리나라에 선교사들이 오지 않았더라면/왔어도 한글이라는 문자를 발견치 못했더라면 한글 전용이라는 말은 상상도 못하고 우리는 아직 일본어 IME와 거의 비슷한 수준의 IME를 갖고 있었겠죠. 근데 이슬람을 포교하러 온 사람들은 한글하고 비교도 안되는 수준의 표음문자(아랍)이나 가지고 오니···.

    3. 사무엘 2011/06/25 09:00 # M/D Permalink

      블로그 잘 보고 갑니다. ^^;; 이 정도면 근사하죠.
      앞으로 국어학, 전산학 등 관련 학문을 꾸준히 공부하고 연구 많이 하셨으면 합니다...
      ...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인민 님의 처지에서는 먼저 입시 관문 뚫는 게 현실적으로 더 중요합니다. =_=;;

    4. 인민 2011/06/25 10:14 # M/D Permalink

      입시 으아앆 ㄲㄲㄲㄲㄲㄲ

      원래 사실 이자리에서는 영재학교라던가에 있어서 수학문제나 열심히 풀고 연구하고 산출물을 내야 하는 시점인데 어쩌다 딴생각에 빠져서 '위대한' 글자판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네요 ㄲㄲ

      <종이접기 공식과 번호표 배열로 논문 2개나 낸 어떤 고등학생을 저주하고 싶지만 참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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