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수단이 지나다니는 길은 도로든 철도이든 곧은 것이 건설하기도 쉽고 고속 통과도 가능하니 여러 모로 좋다. 하지만 산이나 강 같은 지형상의 이유로, 또 사람이 사는 지역을 이곳저곳 경유하기 위해서 현실적으로 굴곡이 생긴다.
그리고 철도야 가능한 한 최대한 곧게 건설하는 게 유리하겠지만, 사람의 수작업 운전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자동차 도로의 경우, 과속과 졸음운전을 방지하기 위해 일정 간격으로 일부러 커브를 좀 만들기도 한다. 커브의 크기와 간격은 그 도로의 설계 제한 속도에 의거하여 정해진다.
핸들을 한쪽으로 꺾은 채로 차를 몰면 차는 원운동을 한다. 그 특성상, 도로의 커브를 나타낼 때도 커브의 궤적이 이루는 가상의 원의 반지름으로 표현한다. R300이라고 하면 커브의 굴곡이 반지름이 300m 되는 원의 호와 같은 급이라는 뜻이며, 따라서 숫자가 작을수록 급커브가 된다. 너무 급격한 커브는 차량이 빨리 통과하기 힘들며, 사고의 위험이 커진다.
자동차의 경우, 주행 중에 커브를 도는 정도를 넘어 주차를 할 때라든가 차의 방향을 돌릴 때는 가히 R 값이 10도 채 안 되는 극단적인 코너링을 하기도 한다.
그 반면 철도 차량은 자동차보다 덩치가 큰 만큼 훨씬 더 큰 회전 반경이 필요하다. 국내의 대형 전동차의 최소 회전 반경은 40~80m가량으로, 이런 선로는 차량 기지 내부에서 차의 방향을 돌리는 고리에서나 볼 수 있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의 종각-시청 사이는 극악의 90도 드리프트 구간으로 철도 동호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데, 이곳의 회전 반경은 겨우 R140. 동아일보 사옥을 피해 가느라 이렇게 되었다. 이 구간에서 전동차는 시속 겨우 30~40km밖에 내지 못하고 거친 쇳소리를 내면서 무척 힘겹게 커브를 돈다. 지하철로 이 구간을 이용할 일이 있을 때 주변을 눈여겨보기 바란다.
5호선의 마장-답십리, 그리고 김포공항 역 일대도 급격한 드리프트가 존재하는 구간이며, 신길 역은 1호선과 5호선 모두 승강장 자체가 곡선이다.
지하철 말고 일반열차가 달리는 철도의 회전 반경은 선형이 좋은 구간은 1000~1200대이고, 굉장히 열악한 곳이 400~600 정도 된다고 한다. 굉장히 열악한 곳이 어딘지를 묻는다면 호남선의 서대전-논산 같은 구간. 특히 개태사-계룡이 ‘킹왕짱’ 드리프트가 존재하는 곳이다.
열차가 커브를 고속으로 통과할 때의 원심력을 상쇄하기 위해, 선로 노반 자체를 커브 바깥쪽이 더 높게 건설하는 경우가 있다. 그 높이 차이를 철도 업계에서는 캔트(cant)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 값을 너무 높게 주면 승차감이 떨어지고, 고속과는 반대로 동일 구간을 저속으로 통과하는 완행 내지 화물 열차가 커브 안쪽으로 전복할 위험이 커진다.
그래서, 커브를 돌 때 선로가 아니라 열차 객실을 기울여서 무게중심을 조정하는 기술이 연구되고 있는데, 이를 갖춘 열차를 바로 틸팅(tilting) 열차라고 한다.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 지형에 유리할 거라고 기대를 받고 있다.
그럼,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르고 곧은 길인 경부 고속선의 회전 반경은 어떨까?
우리나라의 고속철은 가히 세계구급 클래스로 건설되어 있다. 무려 R7000이며, 늦게 건설된 만큼 이 정도로 품질 좋은 선로는 세계 어느 나라 고속철에도 뒤지지 않는다. 설계 속도가 괜히 시속 350km로 설정된 게 아니다.
아래의 두 사진은 경부선 KTX와 호남선 KTX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므로 눈여겨보시라. 시속 300으로 달리는 곳과, 시속 100도 낼까말까인 곳의 차이이다. 전자는 경부 고속선 중에서 유명한 곡선 교량인 대전-천안 사이의 풍세교 구간이며(고속철의 로망!!), 후자는 호남선에서 악명 높은 저 최악의 곡선 구간이다.
코레일에서 KTX를 광고할 때 뭔가 빠르고 현대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킬 때는 고속선 고가 구간을 보여주고, 친환경적이고 인간-_-적이고 낭만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킬 때는 꼭 호남선 커브 구간을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
이제 나는 4월 1일 하면 만우절보다도 2004년 KTX 1차 개통일이 먼저 떠오른다. 철덕이라면 마땅히 그래야만 할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