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벌식 찬사

요즘 <날개셋> 타자연습에서 추가된 "김 화백 어록" 연습글로 재미있게 타자 연습을 하고 있다. 이런 연습글을 진작에 추가할 생각을 왜 못 했는지 모르겠다. ㅋㅋㅋㅋ

본인은, 사람이 타자를 하는 동작이 컴퓨터 CPU가 돌아가는 과정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해 왔다.
연습글은 기계어 인스트럭션들이고, 글을 읽는 사람의 눈은 디코더. 타자 속도는 클럭 속도.-_-;;
CPU에 캐쉬 메모리가 있고 파이프라이닝이 있는 것처럼, 사람이 타자를 하는 것도 사실은 글자 단위가 아니라 최소한 단어 단위, 덩어리 단위로 하게 된다. 영문 독해를 빨리 하려면 단어 하나하나가 아니라 덩어리가 통째로 머리에 들어와야 하듯, 타자도 마찬가지이다. 글자 나부랭이 깨작깨작 눌러가지고는 마치 독수리 타법만큼이나 속도가 빨리 날 수가 없다.

세벌식이 두벌식보다 우수하고 속도가 빠른 이유는, 겨우 자모 단위가 아니라 그렇게 머릿속의 덩어리를 그대로 글자판의 손동작으로 옮기는 데 두벌식보다 월등히 더 유리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익숙한 어절이 등장하면 그 초중종성 낱자와 손 모양이 일대일 일심동체가 되어 머리의 지시가 마구잡이로 손으로 전달되고, 머리는 그 글자의 다음 글자가 이루는 손 모양까지 예측하게 된다. 일명 날타. 이런 최적의 조건이 잘 만족되면 세벌식으로 단문은 900~1000타도 어렵지 않게 나온다.

CPU로 치면 파이프라인이 쫙쫙 잘 되는 인스트럭션이라 할 수 있는데 공 병우 세벌식은 우-좌 리듬감 덕분에 이런 게 잘 된다. 쭈루루룩~ 그냥 타자를 치고 싶어진다. '한글날' 같은 글자... 쫘르륵~ 파이프라인이 최적이다.

날타는 오타가 나기 쉽다. 그런데 세벌식은 모아치기라든가 각종 한글 입력 설정 보정을 통해서 그런 오타를 보완하는 시스템까지 갖출 수 있으니, 심리적으로 더욱 편하고 막힘없이 타자를 할 수 있다. 꽤 오랫동안 지치지 않고 장문을 단문 치듯 치는 게 가능하다.
물론 세벌식에서도 '예의, 엽, 까'처럼 좌우 교대가 어긋난다거나 동일 손가락 연타가 발생하는 글자는 미스가 발생하긴 하지만, 종성과 초성 사이의 불규칙한 왼손 연타로 온통 얼룩져 있는 두벌식의 불편함에 비할 바야 물론 아니다.

또한, 앞에서 예를 든 것처럼 대놓고 손가락 움직임이 어긋나는 연타까지는 아니지만 세벌식으로 치기 좀 어려운 글자가 또 있다. '불량률' 같은 단어는 검지의 운지가 1단에서 4단까지 들쭉날쭉해서 세벌식을 10년 넘게 쓴 본인에게도 여전히 쉽지 않다. 이런 글자는 날타가 안 통하고 한 낱자씩 속도를 줄여서 또박또박 쳐야 한다. CPU로 치면 공간 locality의 위배 때문에 캐쉬 미스가 나는 메모리 접근에 비유할 수 있겠다. 날타냐 정타냐를 잘 결정해야 오타 없이 빠른 타자를 할 수 있다. 오타가 한 번 나면 손실이 가히 엄청나기 때문에.

두벌식은 4단을 안 쓰고, 치기 편한 글자와 치기 불편한 글자 사이의 편차가 세벌식만치 심하지는 않다.
하지만 평균적인 타자 experience가 세벌식보다 훨씬 나쁘다. 세벌식은 입체 교차이고 두벌식은 신호등이 있는 평면 교차..

어차피 800타, 900타 치지도 못하고 스마트폰용으로 작은 화면에다 그냥 버튼 수 적은 입력 방식을 만들 때야 두벌식이든 그보다 더 복잡한 입력 방식이든 크게 상관할 바가 아니다만... 생업을 목적으로 방대한 양의 글을 입력할 수 있는 정도의 규모를 갖춘 기계에서 한글을 입력하는 데 세벌식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특히, 타자기를 지나치게 폄하하는 의견에 본인은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동의하지 않는다.

첫째, 타자기의 형태를 거의 그대로 답습한 지금 같은 키보드보다 더 보편적이고 빠른 문자 입력 스키마는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으며, 본인은 앞으로도 키보드가 그렇게 호락호락 없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참고로 한 10년 전부터, 스마트폰 같은 게 없던 시절부터도 앞으로 음성 인식 기술 때문에 키보드가 없어질 거라는 낭설이 떠돌았었다. 과연? -_-

둘째, 사람들은 공 병우 세벌식이 타자기를 고려하느라고 뭔가 굉장히 많은 걸 희생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며, 공 병우 세벌식은 기계의 물리적 호환성과 사람의 편의· 심리라는 두 토끼를 매우 훌륭한 형태로 모두 잡았다.

그리고.. 늘 하는 말이지만, 오토마타가 장땡이 절대 아니다.
두벌식은 오토마타가 있으니까 컴퓨터에서나 겨우 문제될 게 없는 수준인 반면,
세벌식은 이론적으로 오토마타가 아예 없어도 되고, 있으면 당연히 두벌식보다 훨씬 더 앞서갈 수 있다.

세벌식이 글쇠 수가 좀 많은 것은.. 그래 솔까말 손가락이 짧은 사람에게 물리적으로 약간은 불편할 수 있다.
그러나 글쇠배열 자체가 외우기 힘들다거나 배우기가 그렇게 엄살 부릴 정도로 힘든 건... 절대 절대 아니다.
정말로 두벌식을 두 시간 만에 익혔으면 세벌식은 세 시간, 아니면 그래 까짓거 네 시간 만에 익히는 정도.
그러고 나서 평생 그 글자판을 쓰는 시간은 얼마나 되며, 평생 만들어 내는 글자는 몇 자나 될까?
이게 비교나 되는 게임이란 말인가?

그 글쇠 조금 더 익히는 대신에 얻는 것, 그리고 그 글쇠 좀 줄여서 잃는 것...
내가 보기엔 전자가 훨씬 더 남는 장사인데 사람들이 고작 그것만 갖고 야단법석을 떠는 게 안타깝다.

흔히, 지금 아무리 비용이 들더라도 100년 앞을 내다보고 미래를 위해서 해야 하는 투자의 예로 남북 통일도 있고, 독립 운동-_-도 있고 220볼트 승전도 제시되곤 하는데,
세벌식을 쓰는 건 그런 것보다도 더 비용이 덜 들고, 휠씬 '덜 극단적인' 예이다.

공 박사가 아니었으면 공 병우 세벌식 같은 글쇠배열은 도대체 얼마나 더 나중에야 나오게 됐을까, 아니 지구가 멸망하기 전에 발명되는 게 가능하긴 했을까?
컴퓨터는커녕 글을 기계로 쓴다는 생각 자체가 없던 시절에 그런 걸 만들 생각을 했다면, 공 박사는 얼마나 천재이고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었던가?

오늘은 모처럼 아주 고전적인, '클래식'한 주제를 다시 꺼내 보았다.
내가 이렇게 이따금씩 세벌식에 '자뻑'하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이다. ^^;;

Posted by 사무엘

2011/06/19 19:22 2011/06/19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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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 기윤 2011/06/19 20:58 # M/D Reply Permalink

    세벌식을 컴퓨터 아키텍쳐에 비교하시다니.. 역시 용묵 님 답습니다ㄲㄲ

    확실히 효율 높은 자판익히는 시간은 짧고, 쓰는 시간은 평생이라 생각하면, 세벌식을 익히는 쪽이 훨씬 유리하죠.

    1. 사무엘 2011/06/20 00:51 # M/D Permalink

      개인적으로
      A 컴퓨터 글자판 : native 기계어 코드 : 표준궤 중전철
      =
      B 스마트폰 글자판 : 닷넷이나 자바 바이트코드 : 경전철

      이것도 무척 의미심장한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면 세상에 비유할 거리는 많으니까요.
      요즘 대세가 B라고 해서 A가 없어질래야 없어질 수는 없죠. ^^ 둘은 상호 배타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2. 人民 2011/06/19 21:51 # M/D Reply Permalink

    학교 쌤이 세벌식을 쓰지 않는 이유가 영자판과 호환이 안 되는 것 때문이라는군요. (나중에 알았지만 390을 모르셨습니다)

    390이라도 표준으로 제정시켜야 합니다. (물론 390을 제정할 수 있으면 최종도 제정할 수 있을테지만)

    저는 두벌식을 아주 반대하지는 않습니다만 컴퓨터는 도깨비불을 빌리지 않으면 초성과 종성을 인식할 수 없는 녀석이니 세벌식이 최고라고 말하고 싶은데 Samuel님은 다 아는 사실일테고 두벌식론자들은 애초에 이런데 안들어올테니 결론은 이 긴 문장을 도대체 누구한테 말할지와 애초에 누구한테 말하고 있는지가 관건.

    1. 사무엘 2011/06/20 00:51 # M/D Permalink

      음? 그 선생님은 맥에서 세벌식을 접하기라도 하셨나 보군요?
      그래도 이곳엔 두벌식 사용자도 많이 들어오니,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ㅎㅎ

    2. 인민 2011/06/24 20:14 # M/D Permalink

      그러고보니 그쌤 노트북에서 맥을 쓰시더군요?
      윈도우에 익숙한 저로서는 아주 색다른 운영체제랄까요(그것도 XP만. 비스타가 뭐에요? 먹는건가요? 우걱우거ㄱ)

      바꿔본적도 있으셨다고 들었는데 다시 엉터리 두벌식으로 바꾸셨다네요.

  3. 세벌 2011/07/21 07:53 # M/D Reply Permalink

    한글자판전문위원회 2011.7.15. 에 오셨으면 좋았을텐데...
    정희성, 조석환 등 두벌식 우월론자들에게 세벌식의 우월함을 알려주셨으면 좋았을텐데...
    어차피 그 분들은 두벌식이 더 낫다고 주장할 수 밖에 없겠지만...

  4. 인민 2011/07/21 08:31 # M/D Reply Permalink

    솔피 공세벌식 같은 경우 두벌식론자들은 물론이고 논문에 세벌식이라는 것까지 붙여서 글을 쓰는 사람도 대부분 진짜 “장점” 을 “단점”으로 아는 경우가 많아요.

    한글이 4단을 점유함으로서 쉬프트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데 (쌍시옷 겹받침은 레알 ㄷㄷ)
    4단 안쓰니 키패드까지 제공해 주고(날개셋이 없으면 그냥 분동 하나 올려놓고 키패드로 쓴다죠.)

    근데 어떤 자료에서는 "ㅆ, ㅢ 같은 것은 조합으로도 충분히 가능한데 왜 배당을 해 놓았는지 모르겠다" 라든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죠>

    1. 사무엘 2011/07/21 17:00 # M/D Permalink

      뭐, 기왕이면 4단 안 쓰고 Shift도 안 쓰는 게 좋긴 하지만(터치스크린 환경에서는 대략 불편한 요소이므로)... 그런 것도 필요하면 쓰라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걸 한글의 특성에 잘 맞게 활용한 게 그렇게까지 단점으로 매도될 필요는 없다는 거죠.

      그리고 ㅢ 정도면 어차피 그 뒤에 받침이 이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왼손만 이용한 G+D 타법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저는 4단에서 불편한 걸 지적하라면 4~7 자리를 꼽습니다. 그 좌우의 1~3이나 8~0은 정말 하나도 불편하지 않고.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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