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어떤 데이터(개념상 Document라고 불리는)를 메모리에 완전히 읽어들여서 사용자가 그 데이터를 편집할 수 있는 업무용 프로그램에는... 거의 필수로 undo 기능이 있다.
이건 우리가 잘 실감을 못 해서 그렇지 사용자에게 심리적으로 굉장한 안정감을 주는 편리한 기능이다. 뭘 잘못해서 망쳐 놓더라도, '미리 저장 -> 지금 문서를 저장 안 하고 예전 문서를 다시 불러오기' 같은 뻘짓을 안 해도 Ctrl+Z만 누르면 만사 OK.

소프트웨어 GUI 가이드라인 교과서를 보면, 소프트웨어는 사용자에게 '용서'(forgiveness)라는 덕목을 발휘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사용자가 아무리 바보짓을 하더라도 이를 최대한 추스리고 수습하고 원상복귀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
컴퓨터 프로그램은 기독교의 하나님 같은 존재가 아니다. “자유 의지가 있으니, 하늘나라든 지옥이든 선택에 따른 책임도 전적으로 네 몫이다” 주의가 아니다. 그러니 인간의 삶에도 Undo가 있으면 참 좋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참으로 안습이다. 오히려 '말은 하고 못 줍는다', '엎질러진 물',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같은 냉정한 속담만이 있을 뿐이다.

잡설이 길어졌다만,
역사적으로 Undo라는 개념이 허접하게나마 가장 일찍부터 존재한 분야는 그래픽 프로그램이었다.
걔네들은 원래부터 문화가 좀 독특해서 마우스의 비중이 매우 높으며, 우클릭이 Context menu의 의미로 쓰이지도 않을 정도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마우스라는 게 키보드보다 실수를 훨씬 더 하기 쉬운 입력 장비이고, 한 번의 동작으로 수백· 수천 개의 픽셀이 한꺼번이 바뀔 수 있기 때문에 Undo가 없으면 안 된다.

문득 든 생각: 그래픽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마우스로 Freehand drawing을 하는 도중에 bksp 키를 누르면.. 직전의 수 픽셀 단위로 곡선을 철회하는 기능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정교한 도트 노가다 할 때 유용할 것 같다. 보통 Ctrl+Z 누르면 그렸던 선 전체가 한 방에 날아가 버리잖아?

물론 Undo라는 건 그렇게 쉽게 구현할 수 있는 기능이 아니며 메모리 오버헤드가 크다.
더구나, 과거에 Undo 기능이 있던 프로그램은 딱 한 단계밖에 취소가 되지 않았었다. Ctrl+Z를 누르면 직전 작업을 취소했다가, 다시 살렸다가 하기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메모장.. 정확히 말하면 윈도우 운영체제의 에디트 컨트롤도 딱 그 수준의 1단계 Undo를 지원한다.)
수십, 수백 단계의 작업을 고스란히 취소하고 취소 내역을 다시 철회(redo)까지 하는 command history 수준의 multi-level undo 기능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MS 워드 같은 소수의 상업용 대형 프로그램에서나 볼 수 있었다.

이런 프로그램은 Document의 내용을 변형하는 모든 명령들이 체계적으로 분류가 돼 있다. 그래서 편집 메뉴를 열어 보면 단순히 '실행 취소 / 재실행'이라고만 돼 있는 게 아니라 '삭제 취소 / 취소된 자동 완성 재실행'처럼, 무슨 명령이 직전에 취소되었고 무엇을 재실행할지 명령의 이름까지 메뉴에 친절하게 표시돼 있기도 한다.
그 반면, Undo/redo를 염두에 두지 않고 Document를 고치는 코드가 제멋대로 섞여 있던 프로그램에다가 어느덧 갑자기 multi-level Undo/redo 기능을 최초로 추가할 일이 생겼다면 아마 십중팔구 코드를 다 갈아엎는 대공사를 해야 할 것이다.

컴퓨터의 성능이 열악하던 도스 시절엔, Undo와 Redo가 모두 존재하는 프로그램은 매우 드물었다.
아래아한글 1.x는 좀 특이한 경우인데, 줄 끝까지 지우기· 단어 지우기 같은 몇몇 지우기 명령으로 인해 지워진 텍스트만을 1회에 한해 되살리는 Undo 기능이 있었다.
그 후 아래아한글 2.0에서 97은 그 Undo의 단계가 3회로 늘었을 뿐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 기능은 최근 3회의 주요 지우기 단축키(메뉴에 등재되지 않은)에 의해 지워졌던 텍스트 중 하나를 골라서 커서가 있는 곳에다 삽입해 주는 기능에 불과했다. 원래 있던 위치에 되돌려 놓는 것도 아니고... -_-

Ctrl+X(오려두기)야 본문이 클립보드에 고스란히 들어가 있으니 별도의 Undo 버퍼에다 저장할 필요가 없고,
Ctrl+E(지우기)로 지워진 텍스트는 의도적으로 되살리기가 전혀 되지 않는다고 도움말에 친절하게 안내까지 돼 있었다. ^^;;
그것 말고 문서나 표 레이아웃을 잘못 건드려서 망쳤다거나 하는 더 중요한 기능에 Undo 따위는.. “Undo 뭥미? 그거 먹는겅미? 우걱우걱...”이었다. 그냥 이전 문서를 새로 불러오는 수밖에..
이런 불편한 프로그램을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쓰고 지냈을까?

그래서 아래아한글 2002는 256단계 undo가 지원된다고 잔뜩 광고를 하고 다녔었다. MS 제품들은 진작부터 지원한 기능인데도 말이다. 하긴, 그것 말고도 글자 크기 제한이 드디어 없어지고 글자색 제한이 없어진 것도 개인적으로 무척 마음에 들긴 했다. better late than never이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편집기 프로그램은 1.x와 2.x 시절에는 Undo 비슷한 기능도 전혀 없었다. 3.0에 가서야 32단계의 multi-level undo가 추가되기는 했으나... 글자 하나, 한글 낱자 하나 입력되는 모든 단계가 histroy에 기록된지라 실용성이 시원찮았다.
그것이 지금의 형태로 개선되 것이 4.2 버전부터이다. 연속된 에디팅 동작뿐만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에디팅 동작을 한 history로 통합하는 기능까지 추가되어, 여러 블록을 동시에 삭제한 것이나 Replace All 명령을 내린 것도 한 번에 취소가 가능해졌다.

사실 <날개셋> 편집기의 에디팅 엔진은 아직 좀 효율적이지 못한 구석이 있다. Undo/redo 명령을 내리면 그 부분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문서 전체의 레이아웃을 싹 다시 하고, 화면 전체를 새로 그린다. 그렇기 때문에 수~수십 MB짜리 텍스트를 연 뒤에 Ctrl+Z를 꾹 누르고 있기가 겁난다. 본인은 이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이고 프로그램의 내부 디테일이 어떤지를 잘 알기 때문에 그러기가 더욱 꺼려진다.

2004년에 만든 3.0 이래로 그냥 brute-force 알고리즘을 그 부분만은 아직까지 최적화를 못 했다. 한글 입력 부분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고, 딱히 크게 티가 나는 부분이 아니다 보니 지금까지 방치되어 온 것이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 6.0의 다음 버전은 이 부분을 개선하여, 이제 안심하고 Ctrl+Z를 꾹 누를 수 있는 프로그램이 될 것이다.

Undo 기능과 관련된 얘깃거리를 두 가지만 더 꺼내고 글을 맺겠다.

첫째, 예전에 한번 언급한 적이 있듯이, 프로그램들이 Undo는 거의 예외 없이 Ctrl+Z로 정착해 있는 반면 Redo는 단축키가 프로그램마다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MS의 관행은 Ctrl+Y인 듯하지만 Ctrl+Shift+Z인 프로그램도 있다.
아래아한글은 도스 시절에 Ctrl+Y가 지우기 명령의 일종이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Redo를 생각하고 눌렀다가는 Redo는커녕 텍스트를 지우면서 후폭풍으로 기존 Undo history까지 모두 날려 버리기 때문이다!

둘째, Multi-level undo를 잘 구현한 프로그램이라면, 문서의 modified 플래그 처리도 잘 되어야 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문서를 저장했다가 어딘가를 건드린 후(= modified 플래그 켜짐), Ctrl+Z를 눌러 그 작업을 철회한다면 문서는 당연히 다시 unmodified 상태로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반대로, 저장한 문서에 대해서 Undo를 해서 modified 상태가 됐더라도, 그걸 다시 Redo로 철회했다면 문서는 unmodified로 되돌아가야 한다. 논리적으로 당연한 얘기이다. <날개셋> 편집기는 multi-level undo가 처음으로 지원되기 시작한 3.0 때 이거 하나는 아주 철저하게 잘 구현해 뒀다.

비주얼 C++ 에디터, 그리고 국산 에디터인 EditPlus는 이 플래그 처리가 잘 된다. MS 오피스 제품도 마찬가지.
그러나 AcroEdit는 이게 되지 않아서 불편하며, 아래아한글도 2007은 처리가 되지 않는다. WordPad 역시 지원 안 함.

Undo나 Redo 같은 Command history 기능은 문서의 modified 상태까지 예전으로 되돌리는 명령이기 때문에 문서를 건드리는(modified 플래그를 언제나 켜는) 동작보다 상위에서 돌아가야 할 텐데, 이 점을 미처 고려를 못 한 것 같다. Undo나 Redo나 문서를 고치는 기능인 건 매한가지이기 때문에 무조건 modified 상태로. ^^

Posted by 사무엘

2011/06/26 08:23 2011/06/26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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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기윤 2011/06/28 15:00 # M/D Reply Permalink

    한번은 무슨 편집기.....였나를 만드는데, Undo 기능을 만드려고 보니 필요한 준비작업이 장난이 아니다..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orz

    결국 Undo 기능은 넣지 못하기는 했는데, 추후에 다시 만들게 되면 좀 철저하게 해서 넣어볼 예정입니다..! 이래저래 좀 복잡해지겠지만요.

    1. 사무엘 2011/06/28 19:49 # M/D Permalink

      네, 그렇습니다. 또 다른 기능이 아니라, 다른 기능들을 모두 총괄하는 기능이기 때문이죠. 나중에 undo를 넣으려 하다 보면 프로그램을 다 뒤집어엎게 될 겁니다.;;

  2. ???????????? 2011/07/02 01:55 # M/D Reply Permalink

    Paint.NET은 꽤나 재미있는 Undo 기능을 갖고 있더군요. 아예 바깥에 리스트가 나와 있어서 이전 상태와 나중 상태 사이를 자유롭게 왔다갔다할 수 있고, 중간 단계를 건너뛰어 갈 수도 있어요.

    1. 사무엘 2011/07/02 10:17 # M/D Permalink

      뭐든지 history를 관리하는 프로그램은 만들기가 무진장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운영체제의 시스템 복원, 소스 코드의 버전 관리 시스템, 응용 프로그램의 command history 기능 등..
      그래도 개발자와 컴퓨터가 고생을 많이 할수록 사용자가 더 편해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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