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폐단· 단폐단
한국 철도에서 운행 중인 특대형 디젤 기관차(정확히는 디젤 전기 기관차)는 앞부분이 잘 알다시피 이렇게 생겼다. (사진들의 출처: 위키미디어)
그런데 가끔은 앞부분이 이렇게 생긴 열차가 다니기도 한다.
이미 눈치 챈 독자도 계시겠지만, 이것은 새로운 다른 기관차가 아니라, 똑같은 기관차를 방향만 달리하여 배치한 것이다.
기관차의 뒷부분이 전방을 향하게 하고, 기관차의 원래의 앞부분을 후방으로 배치하여 객차를 연결한 뒤 기관차를 전진이 아닌 후진시킴으로써 앞으로 나아간다. 본인이 예전에 몇 번이나 언급한 적이 있듯, 모든 철도 동력차들은 전진과 후진을 완전히 동일한 성능으로 자유자재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나 비행기와는 다르다.
기관차의 운전석은 통상 앞부분과 가까이 배치되어 있으며, 전방의 시야도 넓게 확보되어 있다. 이런 직관적인 앞부분으로 기관차를 자연스럽게 운전하는 것을 '단폐단 운전'이라고 한다. 운전석과 차체의 진행 방향 끝부분이 가까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기관차의 양방향 중 운전석 방향과 먼 반대쪽으로 열차를 운전하는 것을 '장폐단 운전'이라고 한다.
철도는 신호 시스템이 아주 발달해 있고 방향 전환이 필요 없는 교통수단이긴 하지만, 그래도 장폐단 운전이 단폐단 운전보다 더 위험하고 기관사의 심신에 부담을 많이 끼치는 근무인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운전석에서 차량의 말단이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그렇잖아도 눈에 안 띄는 사각지대가 많아지는데, 그나마도 양 끝의 작고 좁은 창문만을 통해서 앞을 오랫동안 내다보느라 기관사의 자세도 구부정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장폐단 편성은 왜 생기는 걸까? 기관차의 방향을 돌려 주는 전차대나 루프선이 없는 노선을 운행했다가 되돌아올 때가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는 바로 경인선이다.
경인선에서는 전동차뿐만이 아니라 인천항을 왕래하는 화물 열차도 비정기적으로 운행된다.
그러나 경인선의 종점인 인천 역은 인상선도, 루프선도, 전차대도 없이 열차가 있는 그대로 들어갔다가 도로 나올 수만 있는 매우 열악한 종착역이다. 그래서 인천 방면을 향하고 있던 기관차는 도로 서울 방면으로 돌아갈 때도 뒤쪽인 인천을 향한 채 주행하게 된다.
철도 차량은 아무래도 앞뒤 주행에 모두 유동적으로 대응 가능한 형태로 만드는 게 유리함을 알 수 있다. 앞으로 도입될 예정인 7600호대 디젤 전기 기관차는 앞뒤에 동일하게 운전석과 큰 창문이 달린 전후 대칭형으로 만들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이 경우 마치 동차처럼 장폐단· 단폐단이라는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다.
물론, 전기 기관차는 진작부터 운전실이 앞뒤에 둘 달린 전후 대칭형으로 만들어져 있긴 했다. 기계 부품을 배치하는 데 다른 동력원 기관차보다 자유도가 더 높기 때문일 것이다.
전기나 디젤과는 달리 과거의 증기 기관차는 보일러와 탄수차, 차륜의 배치 같은 여러 문제 때문에 태생적으로 전후 대칭형으로 만들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얘는 길쭉한 보일러가 앞으로 불쑥 돌출돼 있으니, 장폐단 형태만이 가능하다.
드물게, 중형 기관차인 4400호대 디젤 기관차는 설계상의 정방향이 장폐단 형태이다. 증기 기관차처럼 말이다.
그리고 일명 봉고 기관차라고도 불린 7000호대 디젤 기관차는 반대로 후진(=장폐단 주행)을 아예 고려하지 않은 극단적인 설계 때문에 사실상 단폐단 전진 운전밖에 못 한다. 운전석 안에서 후방 시야를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얘는 작년 말에 다 퇴역했기 때문에 지금은 볼 수 없다.
2. 차륜 배치
자동차에는 엔진이 자동차의 어느 쪽에 적재되고 구동축이 어느 쪽 바퀴에 연결되는지를 나타내는 FF(전륜구동), FR(후륜구동), RR, 4WD 같은 용어가 있다. 이와 비슷한 개념이 철도 차량에도 응당 존재한다.
먼저, 동력 분산식 차량의 경우, 연결된 차량 자체가 동력차인지 아니면 단순히 끌려다니는 객차인지를 나타내는 표기가 있다. Tc(한쪽 말단에 운전실이 달린 객차), M(동력차), M'(전동차 한정. 동력차이면서 팬터그래프도 달린 차), T(단순 객차)가 그것.
그리고 다음으로 한 차량을 이루는 대차의 차륜 구성을 나타내는 표기가 있다. 연속으로 이어져 있는 바퀴의 수를 나열하는데, 동력이 연결된 바퀴는 A, B, C로 시작하는 알파벳으로 적고, 그렇지 않은 바퀴는 아라비아 숫자로 적는다.
예를 들어, 아래의 8200호대 전기 기관차의 차륜을 표기하면 Bo-Bo이다. (보다시피 전후 대칭인 것도 맞지?)
B라고 적힌 걸 보니, 한 대차당 바퀴가 두 개 있고 각 바퀴에 모두 동력이 전달된다는 뜻이다. 이 기관차 하나만을 자동차 같은 차량에다 비유한다면 진짜 4WD급인 셈이다.
B 다음에 붙은 o는 그 구동축이 동력원이 내연 기관 같은 다른 엔진이 아니라 전기 모터임을 뜻한다. 순수 전기 기관차뿐만이 아니라 디젤 전기 기관차의 구동축도 결국 전기 모터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o가 붙는다.
사실, 8200호대 전기 기관차는 차륜이 한 레일당 총 4개로 적은 편이다. 가볍고 접지력이 낮은 것에 비해서 출력만 너무 강하다 보니, 이 기관차는 오르막에서 바퀴가 헛도는 공전 현상이 종종 발생했다고 한다.
8000호대 전기 기관차는 Bo-Bo-Bo이며, 특대형 디젤 기관차는 Co-Co로 6개이다. 최근에 도입되고 있는 8500호대 신규 전기 기관차 역시 이 추세게 맞추어 Co-Co로 돌아갔다.
오늘날의 디젤이나 전기 기관차는 차륜이 비교적 규칙적이고 배치 방식이 그렇게까지 다양하지는 않기 때문에 조합이 기껏 저 정도밖에 안 된다. 다양한 차륜의 종결자는 역시 증기 기관차였다.
얘는 엔진 내부에서 전문적인 동력비 조절 장치를 갖추고 있지 않은 원시적인 구조이기 때문에 바퀴의 개수와 크기가 기관차의 출력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다. 그래서 여객용 기관차는 구동축이 걸리는 바퀴를 크게 하여 좀 더 빨리 달릴 수 있게 했고, 반대로 화물용 기관차는 작은 바퀴를 여러 개 달아서 속도 대신 토크(견인력)를 크게 했다.
19세기에 앞바퀴가 엄청 큼직한 자전거가 잠시 등장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때는 체인이라는 개념이 도입되지 않아서 두발자전거도 세발자전거처럼 페달이 앞바퀴에 곧장 연결되어 있었으며 앞바퀴가 구동축이었다.
그리고 바퀴를 크게 하는 게 오늘날로 치면 고단 기어를 써서 페달을 조금만 밟아도 접지면의 바퀴는 더 많이 돌게 하기 때문에, 속도를 향상시킬 수 있다. 물론 그만큼 페달을 밟는 데 힘은 많이 들겠지만 말이다.
이렇듯, 철도에는 장폐단· 단폐단 같은 미처 생각도 못 했던 특성 구분이 존재한다는 걸 우리는 알 수 있었다.
비행기의 랜딩 기어 바퀴의 배치도 이런 표기법으로 기술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지?
다만, 랜딩 기어 바퀴에는 구동축 같은 건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반대로 철도 차량은 비행기나 트럭의 바퀴처럼 바퀴가 안쪽으로 두 겹이 배치되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고려할 점이다. 궤도를 구성하는 한 쌍의 레일의 안쪽에 또 차륜을 얹을 레일이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무슨 복수의 궤간을 지원하도록 특수하게 설계된 선로가 아닌 이상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