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국 (+대만, 홍콩, 마카오): 100%

중국어는 딱히 굴절이나 활용이 심하지 않은 고립형이고 1글자 1의미(형태소) 1음절이 성립하다 보니... 한자 같은 문자는 글자 수가 너무 많고 복잡하다는 단점을 빼면 자기 나라 말을 적는 데 그리 나쁜 솔루션은 아니다. 중국이 한자 종주국인 것엔 이유가 있는 셈이다. 물론, 그 단점이 꽤 큰 단점이긴 하지만 말이다.
중국어는 성조를 빼면 언어적으로 동음이의어도 많다. 그래서 한자로 '팔다'와 '사다'가 모두 같은 음(매)이고, 밝을 명(明)만 있는 게 아니라 어두울 명(冥)도 있다. 그걸 글자에다 뜻을 밝혀 적어서 구분하려는 생각을 한 듯하다.

이런 이유로 인해 중국은 한자 자체를 폐지하기보다는 획을 과감히 줄인 간체자를 만들어서 정착시켰는데, 이는 여타 한자 사용 국가들과의 단절과 혼란을 야기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지금과 같이 문자를 기계식이 아닌 전자식으로 다룰 수 있는 성능 좋은 기계가 일찍 발달했으면 쟤들은 굳이 간체자를 만들 생각을 안 했을지도 모른다.

2. 일본: 90% 보조 문자만 도입

일본어는 구조적으로 중국어보다는 한국어에 훨씬 더 가까운 언어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한자만을 표기 수단으로 쓰는 것엔 불편함이 있었다. 일본어는 성조가 없고 음운 구조도 간단한 대신, 한자 하나를 여러 음절로 읽을 수 있고 훈독과 음독으로 모두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자기네 단순한 음운 구조에 맞춘 히라가나· 가타카나라는 표음문자를 보조적으로 덧붙여서 쓰고 있다.

한자를 없애고 고유 문자만으로 자기네 언어를 다 표기하는 건 불가능하지는 않다. 하지만 길어지고 보기 안 좋아지는 관계로 한자를 완전히 대체하는 건 영 한계가 있다. 마치 한글 자모가 단독이 아닌 모아쓰기를 전제로 만들어져 있는 것만큼이나 일본의 고유 문자는 한자 같은 여타 문자를 보조하는 용도로 만들어졌다는 성격이 강하다.

중국어와 일본어 텍스트에 쓰이는 복잡한 한자들은 한 글자씩 짜 맞춰서 입력하기가 너무 느리고 불편하다. 그렇기 때문에 문장이나 어절 단위로 더 긴 문자열을 입력함으로써 context를 만들고 후보 수를 줄인 뒤에 한꺼번에 변환을 한다. 즉, 이들 언어는 NLP 기술이 동원된 복잡한 입력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3. 한국 (대한민국, 북한): legacy로서 극소수 1% 미만. 고유 문자로 사실상 대체

교착어인 한국어의 복잡 미묘한 용언 활용을 한자로 제대로 표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며, 한국어는 음운 구조도 일본어보다 더 풍부하고 복잡하다. 이런 배경 속에서 세종대왕은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똘끼를 발휘하여 세계가 놀라고 극찬하는 완전한 형태(full-featured, stand-alone)의 고유 문자를 만들어 버렸다.

한글은 단독으로 써도 시각성과 변별성이 충분히 우수하며, 한국어에서는 한자와 음의 대응이 일본어보다 훨씬 단순한 편이다. 의미상 모순되는 동음이의어만 피해 가면 한자 대신 고유 문자 전용이 어렵지 않게 가능하며, 그것이 이미 실제로 일어났다! 게다가 한글은 NLP 기술 없이 매우 빠르고 편리하게 입력도 되고 기계화가 가능하다.

그래서 20세기 중반 이후로 한반도에서는 한자가 빠른 속도로 도태되어 사라졌으며, 한자는 아주 예외적인 상황에서나 희소하게 등장하는 물건이 되었다. 한국어가 중국어와 아예 완전히 다른 언어이고 한자 표기가 어울리지 않는 구조이기 때문에 이에 대처하는 솔루션도 아예 극단적으로 새롭고 과격하게 출발 가능했던 것 같다.

4. 베트남, 몽골: 0% 완전히 폐지하여 흔적조차 없애고 여타 문자로 대체

베트남은 로마자로 공식 문자를 바꾸고 한자를 폐지했다. 단, 베트남어는 중국어보다도 성조가 더 다양해서 이런 걸 알파벳에다 덧붙이는 표기가 꽤 복잡한 편이다. 그래서 베트남 문자는 로마자 기반임에도 불구하고 컴퓨터에서 마치 아랍어 같은 complex script로 분류되고 있다.

몽골은 먼 옛날에 한자를 잠시 쓰긴 했지만 이내 자기네 고유 문자 내지 러시아 키릴 문자로 문자를 갈아탔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은 베트남보다도 더 한자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나라이다.

내가 한자에 대해서 글을 쓰면서 늘 느끼는 점인데,
한자는 말을 받아 적는 여러 문자 중의 하나이며, 그냥 legacy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니 각 나라마다 자기 언어 사정에 맞게 편한 대로 처분하면 그만이다. 간체자 개량을 하든, 보조 문자를 만들든, 아니면 다른 문자로 완전히 대체를 하든 말이다. 그리고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굳이 중국어 같은 언어를 쓰는 문화권이 아닌 이상, 저렇게까지 불편하고 무거운 문자를 굳이 고집할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한중일 3국간의 한자 통합이 가능해서 사람들이 필담이 가능하다면, 그건 불가능한 것보다는 나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정치· 언어· 문화의 장벽을 감안했을 때 호락호락 가능하지 않다. 불가능한 걸 가능하게 만들겠다고 높으신 분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봤자 돈과 시간 들인 것에 비해 영양가 있는 결과가 나오지는 않을 거라는 데 한 표 건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그건 같은 라틴 알파벳을 쓴다고 해서 유럽 국가들이 다 필담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무모한 발상이다.

한자는 원칙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은 없는 chaotic한 글자이다.
뭔가 제자 원리를 봤을 때 한자처럼 생기긴 했는데 인류 역사상 그 어떤 문헌에도 존재한 적이 없는 '유령 한자'가 있다는 건 문자 코드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이미 아실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문자 코드를 제정하면서 글자들을 수집할 때, 어느 작업 인부가 실수를 한 모양이다.

빽빽한 중국어 자연어 텍스트처럼 생겼는데 실제로는 언어적인 의미가 전혀 없고 실존한 적이 없는 한자처럼 생긴 글자들로만 구성된 텍스트 디자인을 만든 사람도 있다. 그래, 한자는 역시 그런 문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10/20 08:32 2013/10/20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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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재주 2013/10/21 04:42 # M/D Reply Permalink

    여담 1. 기억력 콘테스트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활용하는 테크닉이 바로 단어를 시각화하여 이미지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추상명사는 어떻게든 다른 단어들의 조합으로 나누고, 모르는 언어의 경우 그 스펠링을 잘라서 미리 정해둔 기호로 기억하게 되죠. 국제 기억력 경진대회 우승은 전통적으로 중국의 독주라고 하는데, 한자의 힘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을만한 대부분은 이미 이미지화 되어 있고 한자의 제자 원리에도 익숙할테니까요.

    2. 간체자라고 사실 없는걸 만들어낸 것은 아니고 이미 민간에서 사용되던 속자를 정리한 게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한자가 획이 복잡하다보니 빠르게 필기할 때는 간략하게 쓰게 되죠. 대만 사람들이나 우리 할아버지 대 학자들이 필기를 할 때는 마치 지금의 간자체처럼 썼던 글자들이 많다는 겁니다. 그 외에도 초서도 글자의 많은 부분을 간략화한 형태로 흘려쓰는데 이를 해서 형태로만 바꾼 글자도 많습니다. 대부분이 이런 식이니 디지털화가 빨리 이뤄졌더라도 간체자가 등장했을 개연성은 있다고 봅니다. 일단 사람이 배우기가 힘들잖아요.

    3. 한자는 모양에 뜻이 담겨있다보니 읽기 능력이 곧 쓰기능력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한자능력시험도 보면 읽기와 쓰기를 구분해서 등급을 매기고 있죠. 일본에서는 평소 손으로 필기를 하지 않고 컴퓨터를 이용하다보니 정작 손으로 한자를 써야 할 때 제대로 쓰지 못하는 디지털 문맹이 발생하고 있다는군요. 중국도 아마 비슷한게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컴퓨터로 한자를 쓸 때는 읽기능력만 있으면 되니까요.

    4. 한자가 모양 뜻 소리 세가지 요소를 다 가진 글자다 보니까 사실 조금만 정리하면 필담으로 한중일 삼개국이 소통할 수 있을 여건은 있긴 하죠. 로마자 비유는 적절하지 않은 듯싶고 라틴어 근원 단어들을 통해 필담하는 것과 비교해야 할 듯합니다. 그런데 이건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같은 로망스어에선 어느정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복잡한 내용을 주고받으려면 우리 조상님들이 그랬듯 고대 중국어 문어체, 즉 한문을 배울 수밖에 없지 않나 싶네요.

    1. 사무엘 2013/10/21 23:16 # M/D Permalink

      네, 유익한 보충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1. 아마 그런 거라면 확실히 어릴 때부터 한자 같은 문자를 끼고 살았던 사람들이 유리한 면모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초등학교 한자 교육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런 데이터를 아주 좋아할지 모르겠으나, 겨우 그런 부수효과만을 노리기엔 한자 교육은 다른 기회비용이 너무 크겠죠.

      2. 말씀하신 것처럼, 간체자는 완전히 없는 글자보다는 기존 속자들을 정리한 것의 비중이 더 크긴 합니다.
      하지만 문자라는 건 굉장히 보수적이고 쉽사리 변하지 않는 관행이기도 해요. 공산주의 독재 정권 정도의 권력이 아니었다면 간체자를 감히 공표해서 그렇게 밀어붙이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3. 디지털 문맹은 충분히 예견 가능하구요. 읽기 능력과 쓰기 능력은 별개이죠. 돈만 해도요, 실물을 보면 누구나 지폐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지만, 백지 한 장만 주고 지폐 도안을 그려 보라고 하면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4. 네, 그래서 “조금 심하게 말하면”이라는 단서를 붙인 것입니다. 다만, 단어만 늘어놓는 필담은 body language보다 약간 더 나은 수준의 의사소통밖에 못 할 것입니다. 정말로 언어다운 복잡한 문장을 주고받는 건 글자만 안다고 해서 할 수가 없을 겁니다.

  2. Lyn 2013/10/22 11:37 # M/D Reply Permalink

    태국은 어떤가요?

    거기도 왕이 직접 글자를 만들었다던데

  3. Lyn 2013/10/22 11:40 # M/D Reply Permalink

    유령한자야 뭐.... 일부러 어떤 미친놈이 (...) 쓰지 않는이상 볼일이 없는데 중복한자가 쉣이네요

    1. 사무엘 2013/10/23 08:22 # M/D Permalink

      1. U+0E00과 U+0E7F 사이에 태국 고유 문자가 있으며, 그건 컴퓨터에서 처리하기 어려운 '대표적인' complex script로 손꼽힌답니다. 한 글자에 이것저것 덕지덕지 붙는 게 많죠.

      2. ㅎㅎㅎ 유니코드에 중복 등록된 한자들.. 좀 골치아픈 문제이긴 합니다. BMP 영역에 이미 있는데 서로게이트에 또 등록된 놈이 있다고 그러죠?

    2. Lyn 2013/10/23 13:32 # M/D Permalink

      한국이 의도적으로 넣은 글자라니 뭐 이거 ㅡㅡ;

    3. 사무엘 2013/10/23 14:21 # M/D Permalink

      두음법칙 같은 여러 독음 때문에 호환용으로 동일 한자가 일부러 중복 등록한 것도 있긴 합니다만, 그런 거 말고요.
      중국이나 일본에서... 이미 등록이 된 한자인 줄 까맣게 모르고 진짜 실수로 동일 한자를 중복 등록한 것도 있답니다.

      또한, 畓(논), 乭(돌)처럼 뭐, 한국에서 지어내서 혼자 쓰는 한자도 있지만 이런 건 더욱 문제될 게 없겠죠.

    4. Lyn 2013/10/29 00:18 # M/D Permalink

      뭐 한국 전용 한자야 어쩔 수 없죠 ㅎㅎ 있어야 되는거고

      바둑기사 이세돌이 중국에서 이세석이 되거나 (...) 일본에서 이세도루 가 되는거 보면 참 기분이 애매 합니다 ;;

  4. 임나라 2014/06/03 11:47 # M/D Reply Permalink

    저는 한자라는 글자보다는 어휘라는 측면에서 생각을 해봅니다
    한중일 그리고 월남에서도 한자기반의 단어가 많이 있습니다만 한자를 보면 이해되지만 다르게 쓰는 한자도 많다고 생각됩니다
    정보 통신
    변호사 율사
    중심. 센터
    세관. 해관
    수출입. 출입구 등등
    쓰다보니 한일 대 중월의 단어대응이 되어버리네요
    똑같은 한자(발음은 다름), 단어를 익힘으로써 어휘생활이 풍부해지고 아시아 각국의 이해도가 증진이 될것같습니다만... (영어권에서의 비스킷,크래커.. 야드,그라운드..보트,요트..등등)
    먼저 단어의 다양화, 한자문화권의 타국에서는 이경우에 이런 한자어를 쓴다, 그 이후 관심이 있는 분은 외국어로 배워보는건 어떨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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