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은 지난 설 연휴 때 등산 다녀 온 이야기를 블로그에다 먼저 올렸었다. 오늘은 그 다음으로, 그때 등산 말고 국립 경주 박물관과 근처의 동궁과 월지(구 안압지)를 관람한 이야기를 올리도록 하겠다.
서울에서 오래 살면서 맨날 조선 시대 흔적만 지겹도록 봐 왔는데, 모처럼 물이 좀 다른 동네에 가서 분위기를 전환하니 좋았다.

예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었지 싶다만.. 신라는 조선 600년을 아득히 초월하여 한반도 역사상 거의 1000년 가까이 지속되었던 왕조이다. 그 동안 도읍도 한 번도 바뀌지 않고 경주 서라벌로 줄곧 유지되었다는 게 경이롭다. (중간에 도읍을 지금의 대구로 옮기자는 떡밥이 던져지긴 했지만 실현되지 않았음) 덕분에 경주는 일찌감치 관광 도시로 국가적인 지원을 아낌없이 받으며 육성되었다.

신라는 남쪽의 가야를 흡수하고 울릉도 우산국까지 정복해서 자국 영토로 편입시켰다. 나무로 만든 가짜 사자로 원주민들을 위협해서 굴복시켰다니.. 지금으로 치면 배에다 거대한 기관총이나 함포를 훼이크로만 잔뜩 만들어 놓고 뻥카를 친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그 뒤 신라는 삼국 통일의 과업까지 달성했다. 물론 전부 혼자 한 건 아니고 당나라의 도움도 받긴 했다. 그때는 신라가 나름 지금의 서울과 38선 이북 지역까지 차지했기 때문에 진흥왕 순수비 같은 게 의외의 장소에 남아 있다. 일본이 우리나라 남동쪽에만 있는 게 아니라 북쪽으로도 굉장히 길고 크게 뻗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신라에는 화랑이라고 오늘날로 치면 학도병인지 예비군인지 모를 젊은 무인/군인 양성 제도가 있었다. 더구나 화랑 제도 이전에 원래는 남자가 아닌 여자 아이돌을 선발하는 '원화' 제도를 시행했었다. 그런데 첫 원화로 뽑혔던 두 아가씨 사이에 질투로 인한 살인극이 벌어지자 가해자도 처형되고 이 제도 자체가 폐지된 것이다. 신라에는 전무후무하게 여왕이 있었던 것만큼이나 여성과 관련된 특이한 내력이 전해진다.

조선 시대에는 양반-중인-서민-노비의 4계급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신라는 '골품'이라고 '뼈'라는 단어까지 써 가며 조선보다 훨씬 더 세분화된 신분제가 시행되었다. 출신 성분이 무엇이냐를 따지는 성골· 진골 같은 말은 오늘날까지도 쓰이고 있다. 물론 긍정적인 심상보다는 자조· 부정적인 심상으로 말이다.

신라는 한때 그렇게 잘 나갔으나, 나중에는 지방의 호족들이 너무 크고 강해져서 중앙 정부가 지방을 일일이 통제하지 못하는 지경이 됐다. 세금이 안 걷히고 국력이 쇠하면서 신라는 신흥 국가인 후백제와 태봉와 고려에 밀려 급격히 쪼그라들었고, 나중에는 왕이 고려의 왕 건에게 자진 귀순함으로써 멸망했다.

그래서 다른 왕들의 무덤은 경주에 있지만 마지막 경순왕의 무덤은 신라가 아닌 고려의 도읍에서 가까운 연천에 있다.
뭐, 왕릉이 바다에 조성되었다는 문무왕, 그리고 생전에 왕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후에 왕으로 추존되었다는 김 유신 장군도 한국 역사상 유일한 사례이니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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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내가 아는 그 어떤 한반도 국가들보다도 금으로 된 유물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신라라고 하면 떠오르는 게 일명 '신라의 미소'라고 일컬어지는 그 기와 무늬(얼굴무늬 수막새)와 금관이 아니겠는가?
영남 지방에 무슨 금광이 있기라도 했는지, 어째 저 시절에만 저렇게 금 장신구가 많이 만들어졌나 모르겠다. 성경의 솔로몬 시대를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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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무늬 수막새의 유래에 대한 설명이다. 바로 얼마 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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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 말고 도자기 항아리 부류는 오늘날까지 형태가 온전히 남아 있을 수가 없을 텐데..
깨진 조각들을 고고학자들이 전부, 일일이 근성으로 짜맞춰서 이렇게 복원한 것이다. 그 노고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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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불교를 받아들인 시기가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150년이 넘게 늦었다. 하지만 일단 받아들인 뒤엔 신라는 그 어떤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굉장한 불교 덕후 국가로 탈바꿈했다.
이 차돈의 목에서 피가 솟구치는 건.. 뭔가 킬 빌 같은 느낌이 순간 들었다. 물론 킬 빌에서 흰색 피가 나오지는 않지만 말이다.;;

하긴, 후대의 조선은 공식적으로 불교를 버리고 유교 국가로 바뀐 관계로, 국보· 보물급 문화재 중에 불상 같은 건 없다. 뭐 그렇다고 해서 조선 시대에 불자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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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경주 박물관의 건물은 일종의 본진이라 할 수 있는 (1) 신라 역사관, 신라의 불교 미술 관련 유물을 집중 전시한 (2) 미술관, 그리고 동궁과 월지 관련 유물을 전시한 (3) 월지관 이렇게 세 그룹으로 나뉜다. 각 건물이 두 층 정도 높이이다.
그리고 야외에는 각종 유명 석탑의 모형과 불상이 전시되어 있으며, 일명 에밀레종이라고 불리는 성덕대왕신종의 진품도 전시되어 있다. 종은 실제로 치지는 않으며, 그냥 녹음된 종소리를 주기적으로 들려 준다.

성덕대왕신종을 만들 때 어린아이를 갈아 넣었다는 말은 삼국xx 같은 문헌에 실제로 등재되어 있지 않으며, 20세기에 와서야 처음으로 제기된 주작이라는 게 대세이다. 이 차돈의 순교 장면은 선뜻 믿어지지 않을지언정 문헌에 기록이라도 돼 있는 반면, 에밀레종 인신공양은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또한, 구체적으로 어떤 비파괴 검사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종의 내부에는 '인' 같은 인체의 뼈 성분 같은 것도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로 서울 보신각 동종은 매년 1월 1일에 타종하긴 하지만.. 그건 진품이 아니라 30여 년 전에 따로 만든 진품의 복제품으로 하는 것이다. 원래 있던 종은 보존을 위해 국립 중앙 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대외적으로는 1985년부터 복제품을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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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의 입구에는 석굴암 내부에 있는 불상 부조(돋을새김)가 입체 탁본이라는 이름으로 정교하게 복제되어 전시되어 있었다.
2층에는 '국은 기념실'이라고 국은 이 양선 선생(1916-1999)이 수십 년간 수백 점의 신라 유물을 개인적으로 수집하고 기증한 것을 전시한 방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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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을 다 보는 데는 1시간 반 정도 걸렸다. 그 다음으로 날이 어두워질 무렵이 돼서야 동궁과 월지에 도착했다. 걸어서는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동궁과 월지'에서 '과'는 그냥 접속조사이다. 그냥 ‘동궁 & 월지’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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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왕릉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연못과 풀밭, 자그마한 숲, 그리고 약간의 정자 건물만 있는 평범한 공원처럼 보이지만 해가 진 뒤부터는 곳곳에 조명이 켜졌다.
그래서 밤에 관람객들로 북적이고 주차장은 차들로 몸살을 앓았다. 박물관이 저녁 6시까지만 열려 있지만 여기는 밤 10시까지 개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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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런 야경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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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연못 야경보다도.. 여기 바로 옆으로 동해남부선 철길이 지나는 게 더 좋았다~!
전국에서 철길과 이렇게 인접해 있는 옛날 유적지는 아마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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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좀 더 밝았으면 더 좋은 구도의 사진을 남길 수 있을 텐데.. 이렇게라도 방문한 것에 의미를 두련다.

Posted by 사무엘

2019/02/24 08:33 2019/02/24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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