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텔레비전 수상기

자동차, 컴퓨터, 전화기만큼이나 텔레비전이 기술적으로 무섭게 발전한 것도 보면 굉장히 경이롭다.

  • 디지털: 노이즈라는 게 없어졌다는 게 솔직히 아직도 잘 안 믿긴다. 옛날 아날로그 특유의 무신호 치지직 화면(white noise)도 없어지고 화면조정용 색깔막대 영상도 볼 일이 없어졌다. 같은 전파를 주고받는 방법을 도대체 어떻게 바꿔서 이런 게 실현된 걸까? 디지털에서는 오류가 너무 심해서 화면이 아예 안 나오면 안 나왔지, 치직거리면서 나오지는 않는다.
  • 고화질: 두 말하면 잔소리. 화질이 정말 엄청나게 좋아졌다. 단, 디지털과 고화질이 동치 개념은 아니기 때문에 과거엔 아날로그 기반으로 HD 규격이 나온 게 있기도 하다.
  • 왕창 크고 평평하고 납작한 수상기: 과거의 브라운관 TV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브라운관은 화면 크기에 정비례해서 두께까지 왕창 두꺼워지기 때문에(공간 복잡도 O(n^3)!) 일정 수준 이상으로 대형화가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리고 어차피 영상 신호의 화질도 요즘 같은 대화면을 받쳐줄 만치 좋지 않았다.

TV를 흔히 '바보 상자'라고 부르는데.. 요즘 텔레비전은 차라리 패널(panel)에 가깝지 이제 상자 모양이 아니다. 옛날에(2006년) 한국 애니메이션 고등학교에서 텔레비전에 중독된 현대인을 풍자하는 black box라는 이름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서 오타와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입상한 바 있다. 텔레비전 안에 온갖 희한한 세계가 펼쳐져 있다. 허나, 요즘 텔레비전의 모양으로는 그런 소재를 설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보 상자'라는 개념은 영어권에도 있어서 fool's tube라고 하는데.. 튜브 역시 브라운관의 잔재가 담긴 별명인 건 동일하다. 그래도 '유튜브'가 이 별명을 잘 활용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또한 요즘 텔레비전은 무슨 형광등 켜지듯이 켠 직후에 서서히 밝아지면서 화면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밝기와 색감 등 잡다한 요소들을 조절하는 다이얼 같은 것도 다 사라졌으며, 정 조절이 필요하면 모니터 자체에 내장된 프로그램 UI를 통해서 소프트웨어적으로 조절한다. 그래서 모니터에 다이얼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상하좌우 화살표와 Enter, ESC에 해당하는 key가 있으며, 화살표 key가 트랙패드 같은 걸로 대체된 물건도 있다.

한때 TV는 평범한 월급쟁이 가정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고가 사치품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부잣집이나 공공장소에 옹기종기 모여서 TV를 시청해야 했다. 그리고 잠금 장치가 달린 TV 전용 케이스도 있을 정도였다.
지금이야 뭐 개인용 스마트폰으로 TV 방송을 시청하는 시대가 된 지 오래이다. 그러니 텔레비전 케이스도 '컴퓨터 책상'만큼이나 아련한 옛날 추억이 돼 간다. 하지만 지금 당연한 것이 생각보다 가까운 과거에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2. 대한뉴스

요 근래부터 옛날 대한뉴스 영상들이 유튜브에 올라오고 있어서 재미있게 본다. 경부 고속도로 개통이나 국민 교육 헌장 선포 같은 유명한 사건도 있지만 본인의 주 관심 분야는 철도 개통 쪽이다. 화면 중앙에 태극 마크 워터마크가 엷게 첨가됐지만 전반적인 화질은 괜찮다.

대한뉴스는 무려 1953년부터 1994년 말까지 국립 영화 제작소에서 만들었던 '나라 안팎 사정 기록 영상'이다. 만드는 곳의 특성상 뭔가 국방일보스럽고 정책 및 프로파간다 홍보(긍정적인 것만) 성격이 강하긴 하지만, 그래도 엄연히 잘 보존된 역사 기록이며 영상 실록 역할을 한다.
그 시절엔 이게 전국의 모든 극장에서 영화 상영 전에 의무적으로 흘러나왔다고 한다. 레퍼토리는 두 주 간격으로 교체되었다고. 국산 영화를 일정 비율 이상 강제로 상영해야 하는 스크린 쿼터라든가.. 과거에 음반에 의무적으로 건전가요를 한 곡 넣어야 했던 것과 비슷한 관행이다.

하지만 대한뉴스가 그저 정권의 나팔수 이상으로 오늘날 귀중한 영상 자료인 이유는 이것 말고 딱히 대안이 없는 시기도 있기 때문이다.
1950~60년대에도 텔레비전 방송 자체는 물론 있었다. 하지만 여러분 중에 박통 말고 이 승만 대통령이 텔레비전에 나온 걸 기억하거나 다른 매체를 통해 본 분 계시는가? 없을 거다. 그 시절에 방송되었다 하더라도 지금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때는 TV를 갖고 있는 집이 극소수였다는 점을 차치하고라도, 시청자 말고 방송국의 입장에서도 물자 사정이 열악했기 때문에 영상 기록을 지금처럼 몽땅 저장(아카이빙)할 여건이 못 됐다. 하물며 그 당시 최첨단을 달리던 방송 장비나 저장 매체는 얼마나 비쌌겠는가? 게다가 외제 수입 일색이기까지 했지 않겠는가?

녹화라는 건 꼭 필요한 것만 아주 신중하게 골라서 해야 했으며, 또한 한 테이프를 계속해서 덮어써서 녹화하면서 우려먹어야 했다. 그러니 그 시절의 방송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 시절의 영상 기록은 외국인 선교사나 종군기자의 촬영분이 아니라면 그냥 닥치고 국가가 알아서 고이 보관해 놓은 대한뉴스로 가야 한다. "새로운 특급열차는 우리 이 대통령 각하께서 무궁화호라고 명명해 주셨는데.."(1960년 2월) 이렇게 전해지는 보도 자료는 출처가 무슨 KBS 같은 전파 타는 뉴스 방송이 아니라 대한뉴스라는 영화라는 것이다. 하긴, 저 때는 아직 "KBS"라는 이름의 방송사조차 존재하지 않았었다.

대한뉴스를 아무 거나 골라서 틀어 보면 건전가요나 행진곡 풍의 촌티 풀풀 나는 BGM에, 감정이라고는 싹 빠진 국어책 읽기 같은 건조한 남자 목소리가 참 인상적이다.
그리고 단순히 정책 홍보가 아니라 뭔가 초등학생 선생님이 애들 가르치는 듯한 설명충 스타일이다. "그럼 태백선 열차를 타고 우리나라 최고의 시멘트 생산지인 어디어디로 가 보시겠습니다." 같은 식. 무지한 백성들을 선진조국 창조 건설의 역군으로 계몽하려는 의지가 느껴진다. =_=;;

정말 격세지감 그 자체이다만, 196, 70년대에 농촌 깡촌 오지에서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알 길이 없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저런 거라도 필요했다. 옛날에는 깜깜한 방에서 무성 영화를 틀어 놓고 "우리나라 바깥에는 이런 곳도 있고 이런 일도 벌어지고 있답니다"라고 변사가 따로 설명해 주면 사람들이 입 헤 벌리고 구경했으며, 소파 방 정환은 영사기도 아니고 영사기 내지 프로젝터의 전신인 환등기만 갖고도 온갖 덕질을 했지 않던가. 게다가 국내에서 영화는 텔레비전보다 더 일찍부터 컬러로 바뀌기도 했다.

개나 소나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올리고 그게 순식간에 인터넷 상으로 퍼져나가고 1인 방송 미디어까지 등장한 오늘날의 잣대로 그 시절을 그저 꼬질꼬질하다고 판단하는 건 적절하지 못하다. 당시의 최첨단을 달리던 영화· 방송의 분위기가 저렇게 꼬질꼬질할 정도였으면 오프라인 사회 분위기는 훨씬 더 권위주의적이고 보수적이었다고 봐야 한다.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이거 기억 나시지 않는가?

허나, 집집마다 전화와 신문, 올컬러 TV가 싸게 보급되고 지식과 소식의 소통 속도가 빨라지면서 대한뉴스는 존재 의의와 가성비가 급격히 떨어졌다. TV 뉴스로 진작부터 접한 나라 안팎 소식을 한참 뒤에 극장에서 대한뉴스로 뒷북으로 접하는 지경이 됐다. 그러니 대한뉴스를 폐지하자는 여론이 진작부터 거론되었으며, 얘는 그래도 1994년 말까지 꿋꿋이 만들어지고 상영되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건 어찌 보면 PC 통신이 인터넷에 밀려 사라진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시기를 따지자면 방위병이 폐지된 때와 동일하며, 수인선 협궤 철도가 없어지기 딱 1년 전의 일이다.

옛날에는 텔레비전은 방송 시간이 지금보다 훨씬 짧았다(24시간 방송이 시작된 것 자체가 21세기부터..). 그리고 기술과 자재의 부족으로 인해 생방송이 많았고, 영화는 후시녹음이 많았다. 아니면 똑같이 후시녹음을 하더라도 후시녹음을 한 어설픈 티가 요즘 영상물보다 훨씬 더 났다. 배경은 너무 조용하고 배우 목소리는 울리고 입 모양 씽크가 안 맞는 등.

철도 분야의 대한뉴스를 몇 편 보니, 열차 달리는 장면에 같이 삽입된 열차 소리는 십중팔구 화면 속의 그 열차가 실제로 달리는 소리가 아니다. 화면엔 디젤 기관차 내지 지하철 전동차가 달리는데 소리는 증기 기관차 달리는 '쉭 씩'인 식이다. 이런 것도 당연히 화면 따로 소리 따로인 후시녹음이다.
베테랑 기관사가 역을 저속으로 통과하면서 통표를 확 낚아채거나 거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요즘은 볼 수 없는 장면이다.

그리고 끝으로.. 옛날에 영상물에다 자막은 어떻게 만들어 넣었을지가 궁금해진다. 텔레비전 화면에 넣는 방법과 영화 화면에 넣는 방법이 서로 달랐을 텐데.
옛날에는 그냥 닥치고 어설픈 흰색 손글씨밖에 없었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서체는 활자로 바뀌고 흰 글씨 주변에 검은 테두리가 추가되었다.

요즘은 자막도 흰 별도의 배경에다가 검은 글씨 형태로 넣는 추세이다. 그래서 배경이 없이 고딕· 둥근고딕· 엑스포체 같은 옛날 서체로 자막이 들어간 영상을 딱 보면 1990년대 영상인 게 느껴진다. 아래의 자막들을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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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7/03/16 08:35 2017/03/1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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