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승리와 패배의 조건
전쟁에서 졌다는 게 꼭.. 적국이 우리 영토에 쳐들어와서 관광 플레이를 시전하는 바람에 우리나라가 2차 세계 대전 때의 독일이나 일본처럼 "무조건 항복.. 우리가 졌스므니다~" 이러면서 싹싹 비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쟁에서 승패가 결정됐다고 해서 패전국이 반드시 체제가 싹 바뀌고 영토나 배상금을 왕창 뜯기지는 않는다.
이겨도 이긴 것 같지 않은 승리가 있고, 져도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패배가 아닌 패배가 있다.
제일 좁게 기계적으로는.. 공격자든 방어자든 전술적인 목표를 달성하면 승리이고, 그렇지 못하면 패배이다.
그렇기 때문에 방어자가 공격자보다 이기기가 훨씬 더 쉽다. 방어자는 존버해서 현상 유지만 해도 승리이기 때문이다.
6 25는 휴전이 아니라 이 상태로 전쟁이 끝나 버린 거라고 본다면, 한낱 무승부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이긴 전쟁이다. 물론 단독이 아니라, UN군과 함께 싸워서 이긴 것이고..
임진왜란도 당연히 방어에 성공한 조선의 승리(조선/명 연합군)이다. 단지, 조선도 피해가 너무 막심했기 때문에 이건 전리품 잔치를 벌이는 그런 승리가 아니었을 뿐이다.
러일 전쟁은.. 일본이 설마 그 대국 러시아를 완전히 굴복시킨 건 전혀 아니었다. 자기도 전쟁 때문에 재정이 파탄 나기 직전이었는데 전쟁 배상금 따위도 전혀 요구하지 못하는 '상처뿐인 영광'을 얻었을 뿐이었다. 허나, 한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사할린 지역을 빼앗는 '전술적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에 명백한 일본의 승리로 평가되는 것이다.
베트남 전쟁은 거의 미국의 대리전처럼 여겨지긴 한다만, 남베트남이 지고 베트콩이 이긴 전쟁이다. 허나, 그렇다고 미국이 화력의 열세 때문에 전투에서 병력을 다 잃고 패배해서, 무슨 베트콩한테 백기 들고 투항하고 항복 문서에 싸인하는 식으로 패배한 건 전혀 아니다. 여러 이유 때문에 전투를 계속할 명분을 잃어서 그냥 싹 철수만 했을 뿐이다.
이런 걸 보면.. 전투에서의 승패가 전쟁에서의 승패와 꼭 일치하지도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중일 전쟁만 해도 중국이 전투에서는 일본한테 수없이 졌지만, 결국 전쟁은 이겨서 전승국 대접을 받았다. 영토와 인구빨이 있어서 계속 후퇴할 공간이 많고 일시적인 전투 패배를 수습할 만한 충분한 맷집이 있는 나라가 이런 상황에서 더 유리한 것 같다.
전쟁에서의 승패뿐만 아니라 '전멸'의 의미도 영화와 드라마에서 통용되는 의미(마지막 한 사람까지 몽땅..)와 실제 군사적으로 통용되는 의미가 다르다. 현실에서는 병력을 훨씬 덜 잃어도 정상적인 부대와 전투력 유지가 더 안 되면 전멸로 판정하며, 철수하거나 추가 지원을 받는다.
전투의 목표도 적군을 꼭 죽이고 몽땅 다 파괴하고 부수는 게 아니다. 그저 적군을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고 제압 내지 무력화시키는 것이 목표이다. 죽이는 건 그렇게 하는 방법 중의 하나일 뿐이다.
전시의 군대는 정말 냉혹한 결과 실적 지상주의로 돌아간다. 평소에 아군을 왕창 악랄하게 지지고 볶고 갈구더라도, 어쨌든 전투에서는 이기게 하는 지휘관이 당연히 칭송받아야 마땅하다. 방망이 깎던 노인 타입이 군대에서는 대접받는다.
2. 전범
한편으로 '전범'이란 '전쟁 범죄' 또는 '전쟁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의 준말이다.
(1) 수뇌부의 입장에서는 명분 없는 불법 침략 전쟁을 일으키면 그 자체가 전범이 된다. 고위 정치인 내지 별 달린 장군 정도만이 이 유형의 전범이 될 수 있다.
단, 현실에서는 그렇게 전쟁을 벌이고도 "졌을 때만" 전범으로 몰려 처벌받는다. 쿠데타만 해도 성공하면 혁명이니 구국영웅이니 하면서 추앙받지만, 실패하면 주동자가 영락없이 역적 정치범 내란수괴로 몰리지 않던가? 전쟁도 이와 비슷하다.
물론, 여기서 진다는 건 더 수지맞지 않아서 점령지를 슬쩍 철수하는 정도가 아니라, 반격을 당해서 자기 나라가 다 망하게 생겨서 싹싹 비는 정도로 지는 것을 말한다.
(2) 다음으로, 전투를 실제로 수행하는 실무자의 입장에서 전범이 되는 방법은 전쟁 명분과는 전혀 무관하다.
무장한 적군이야 전장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어떤 방식으로 낚고 속이고 죽이든, 윤리 논란 따위 당연히 만무하다. 단지, 그 적군이 다치거나 포로가 됐거나 아예 항복을 해서 전투력을 상실했다면 그 다음부터는 인도주의적으로 대해야 한다.
그리하지 않고 이런 적군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것, 포로를 반인륜적으로 학대하는 것,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을 고의로 약탈· 학살하는 것은 제네바 협약 위반이며 전쟁 범죄로 간주된다.
정상적인 군대라면 이런 건 자국 군대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적발하고 처벌해서 근절해야 한다. 그러면 그건 국제적인 전쟁 범죄 문제로 불거지지 않고, 해당 범죄자만의 예외적인 일탈로 간주되고 넘어간다.
사실, 군인들도 감정이 있으니 방금 전까지 전우들을 죽인 이놈들한테 당장 보복하고 싶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건 현실적으로 다 컨트롤 하기 어려운 면모도 있다. 그러나 지휘관인 장교 차원에서 이런 짓을 조직적으로 묵인하거나 조장한 게 밝혀지면 영락없이 전범으로 몰리게 된다.
이건 승전/패전과는 전혀 무관하게 공평하게 처리해야 하는 사항이지만, 이 역시 현실적으로는 패전국에 대해서만 더 집요하게 거론되고 터는 편이다.
그런데 1번 같은 전쟁을 일으킬 정도의 불의한 나라라면 그 과정에서 휘하의 지휘관들이 어차피 2번과 같은 범죄도 매우 높은 확률로 저지르며, 윗대가리들이 이를 막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1번에 해당하는 전범은 대부분의 경우 어차피 2번에 대한 책임까지 지워지면서 더욱 지탄받게 된다.
3. 포로
(1)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군인이 나라 지키려고 전투 과정에서 지휘관의 명령을 따라 무장한 적군을 죽이는 것은 자국 법으로나 국제법으로나 성경적으로나 죄가 전혀 아니다. 군인은 적국에 포로로 잡혀 간다 해도 "너 왜 우리 병사 죽였어?" 이런 추궁을 받을 일은... 없다. 그건 적군도 똑같이 하고 있는 짓이니까.
글쎄, 혼자 너무 심하게 악랄한 명성을 떨쳤던 유명 저격수나 삼손 같은 인간흉기, 초특급 에이스 파일럿이 포로로 잡혔다면 곁의 병사들에게서 개인적으로 감정적인 해코지를 당할 수 있지만.. 그것도 명목상으로는 불법이다.
그 대신 군인은 자기가 적군에게 죽는 것으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한다. 이런 특성이 있으니 군인은 전시에 민간인과 다른 취급을 받는 거다. 자기 목숨은 자기의 전투 능력으로 알아서 챙겨야 하며, 자기가 전사하게 되면 자국으로부터 호국영령으로 어지간한 의인 의사자를 아득히 능가하는 예우를 받는다.
군인이 교전 중에 전사하는 건 민간 생명 보험으로도 보장이 안 된다. 천재지변이나 사변처럼 영역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서킷에서 카레이싱 때 발생한 사고가 통상적인 자동차-운전자 보험으로 보상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쉽게 말해, 배에 돈 내고 탄 승객이랑 거기서 근무하는 선원이 조난 사고 때 역할과 취급이 서로 같을 리가 없다.
(2) 군인이, 특히 지휘관이 자기 할 바를 다하지 않고 제멋대로 전투를 거부· 포기하고 적에게 투항한다면? 군수물자를 스스로 없애 버리거나 아예 적에게 건네준다면..? 그건 사형으로도 모자랄 중죄 대역 반역이다. 그 어떤 민주 인권 국가라도 이런 극단적인 죄는 사형으로 다스린다. 옛날처럼 사지를 찢지는 않는 게 감지덕지일 것이다.
하지만 보급도 지원도 없고 정말 개죽음이 뻔한 상태에서 불가피하게 항복· 후퇴하거나 포로로 잡힌 건 당연히 면책이며 그래야만 한다. 단순히 인권· 도의적인 차원이 아니다. 그렇게 해 줘야 패잔병들로부터 전투 경험과 노하우가 전수될 수 있고, 그들이 자포자기해서 아예 완전히 탈영해 버리는 걸 막을 수 있다. 전투에는 졌지만,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히지 않고 도망쳐서 살아서 돌아오는 것도 어지간한 운과 실력이 따라 줘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 데서까지 무조건 항복이나 후퇴를 금지하고 닥치고 정신력 근성 깡 드립에 영예롭게 죽으라고 부하를 사지로 몰아넣는 건 지휘관의 올바른 판단이 아니다.
이게 사랑의 체벌과 아동학대, 안락사 살인과 연명 치료 중단처럼 종이 한 장 차이로 판정이 참 미묘하게 달라질 수 있는 것 같다.
(3) '포로'를 영어로는 prisoner of war이라고 한다. 포로는 비록 정치· 군사적인 이유로 인해 자유를 박탈 당한 prisoner이지만, 군인의 직무 특수성으로 인해 여느 범죄자와는 성격이 다른 사람이다.
이와 비슷하게, 신념을 갖고 법과 공권력에 저항하다가 수감된 일명 '양심수'를 영어로 prisoner of conscience라고 한다. 이런 사람도 여느 범죄자와는 성격이 좀 다르다.
우리나라의 교정 시설에서는 평범한 사기· 상해· 절도 등의 대다수 잡범은 하양, 캐 흉악범 사고뭉치 요주의 인물은 노랑, 약쟁이는 파랑, 사형수는 빨강.. 이렇게 죄수복 명찰의 배경색을 달리하여 죄수들을 분류한다.
그런 것처럼 양심수라든가, 아무런 고의 없이 전적으로 과실로 금고형 정도 받은 죄수는 초록으로 분류해도 될 법해 보이는데.. 꼭 그럴 필요는 없어서 초록색은 안 쓰는가 보다.
예수쟁이라면 prisoner of war, prisoner of conscience의 연장선상에서 성경에 나오는 prisoner of Jesus Christ (엡 3:1, 몬)와 prisoner of the Lord (엡 4:1)를 상기하면서 바울의 저 당시 심정을 생각해 보자. 전쟁이나 다른 신념 때문이 아니라 '그분'으로 인해 박해받고 수감당했다는 뜻이다. '양심수'와 같은 방식으로 조어한다면 '예수囚' 정도 된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