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화질

  • 영화 필름은 기본적인 화질은 좋지만.. 상태가 안 좋아지면 색이 바래지고 화면 곳곳에 검은 점들이 반짝반짝 거렸던 편이다.
  • 아날로그 TV는 근본적인 화질이 별로 안 좋고, 그놈의 노이즈가 문제였다. VHS 비디오 테이프는 TV보다도 화질이 더 안 좋았다.
  • 컴퓨터로 재생하는 디지털 동영상은?? 빡센 압축 때문에 JPG 깍두기 화질 열화라는 게 있었다.

그랬는데..
오늘날 영상 재생 기술은 정말 정말 경이롭기 그지없다.
한 프레임 한 프레임이 아주 정교한 정지 영상처럼 화질이 좋다. 그것도 다 아날로그가 아니라 디지털 방식으로.. 옛날 같은 잡음 노이즈 깍두기 등등을 거의 찾을 수 없다.

텔레비전이고 영화고 화질이 엄청나게 좋아졌다는 걸 뭘로 느끼는가 하면.. 영상 속 각종 자막이나 글자가 2, 30년 전보다 엄청나게 작아진 걸 보고 느낀다.
저화질에서는 저런 작은 글자를 넣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뭐 일반인이 유튜브로 이미 1K, 2K니 4K니 하는 초고화질 영상을 보는 세상이니, 영화관의 그 커다란 벽면에다 쏠 정도인 영상은.. 7K급이라고 카더라처럼 듣긴 했다.
물론 전자기파의 속도나 대역폭 자체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아닐 테니.. 전자 신호를 갈아넣는 기술이 더 발전하고 그거 중계하고 쏘는 인프라들이 곳곳에 엄청 많이 깔린 것이다. 컴퓨터의 하드웨어도 더 발달했고 말이다.

아날로그 TV로 아무 채널이나 틀면 나오는 치지지직 백색잡음을 일부러 들으려 해도 듣기 어렵고, 아예 그걸 따로 인코딩을 한 유튜브 동영상을 찾아서 시청하는 지경이다.
(디지털 방식에서는 그런 아무말 전파는 디코딩 실패 오류로 처리되니 애당초 화면에 뿌려지질 않음)

이건 뭐 아날로그 시계 바늘을 작대기 실물 현물을 기울여서 구현하는 게 아니라, 작대기 모양 직사각형을 삼각함수 회전변환으로 좌표 계산해서 구현한 것과 같다. 백색잡음조차 그런 방식으로 졸라 어렵게 현학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이제는 텔레비전도 반쯤 컴퓨터가 됐다. KBS MBC 같은 제1군 지상파, 그 뒤 셋톱박스 얹어서 시청하는 제2군 케이블 방송, 그 다음으로 넷플릭스 같은 영화 스트리밍 제3군을 골고루 나눠서 시청하는 영상 단말기가 됐다.
DVD나 블루레이 같은 물리적인 영상 저장 매체는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지만 존재감이 아주 작아지고 주류에서 밀려났다.

2. 사진

요즘 사진과 영화는 처음에 발명됐던 것처럼 필름에다가 아날로그 기술로 빛을 화학적으로 담고 현상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영화는 저렇게 극초고화질로 압축된 디지털 동영상이고, 사진은 고화질 고해상도로 정교하게 컬러 인쇄물일 뿐이다.
이를 제조하는 기계가 그 이미지의 모든 정보를 픽셀 단위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알고 있다. 이게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이다.

쌍팔년도 시절엔 사진관에 가서 필름을 맡기고 나면 최소한 다음날이나 며칠 뒤에 사진을 찾아 왔었다!
그게 조금 발전하면 “23분 완성, 5분 초고속 완성”..;;
사진 인화, 현상을 겁나게 신속하게 해 준다는 뜻이었는데 지금 관점으로는 정말 바보 같다. “고성능 특급 증기 기관차로 경성-부산을 무려 6시간 반 만에 주파”처럼 들리니까 말이다. (저건 1930년대 아카츠키 호 소개 문구. -_-)

3. 가정용 비디오 테이프

1990년대 말까지는 음성은 카세트 테이프, 영상은 VHS 테이프(매체)라는 아날로그 매체가 수십 년 동안 쓰였다.
영상은 아무래도 음성보다 정보량이 월등히 더 많이 들다 보니, VHS는 길쭉한 테이프(매체 속에 돌돌 감겨 있는 실제 띠)를 딱 최단거리 수직이 아니라 비스듬하게 삐딱하게 기울여서. 즉 |를 /로 바꾸는 꼼수까지 썼다. 그래서 헤드와 테이프가 접촉하는 구간을 늘리고 정보를 더 집어넣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때문에 VHS 비디오 재생기는 헤드도 테이프(띠)를 비스듬하게 감쌌으며, 테이프(매체)를 넣거나 뺄 때, 그리고 재생하거나 정지할 때 각종 고정/해제 전처리 후처리 준비가 꽤 오래 걸렸다. 카세트 테이프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카세트 테이프는 일부 아날로그 감성 충만한 투박한 물건은 재생 버튼을 누르자마자 즉시 재생도 됐던 반면, 그건 비디오 테이프에서는 어림도 없었다.

게다가 정말 의외의 사실인데, 아날로그 비디오 테이프는 영상을 띄워 놓은 채로 일시정지 기능을 구현하는 게 몹시 무리였다. 엥??? 컴퓨터가 쏴 주는 디지털 영상에서는 정말 식은 죽 먹기도 아닌 일이 도대체 왜 저런 거지..???
일시정지도 무슨 미분을 하듯이 전진 후진을 반복하며 그 구간을 헤드에서 계속 읽어서 신호로 보내야 했다. 오랫동안 일시정지를 시키면 테이프나 헤드에 무리가 갔으며, 그 동안에 화면 화질이 떨어지고 노이즈도 잔뜩 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런 비디오 재생기에는 요즘 컴퓨터처럼 비디오 메모리나 그래픽 카드 같은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한번 자신이 만들어 낸 영상 정보를 디지털 형태로 0과 1 차원에서 다 기억해서 화면으로 지속적으로 쏴 주는 형태가 아니다.
그러니 일시정지조차도 테이프를 같은 지점만 계속 읽는 방식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차가 멈춰 있는 상태로 핸들을 너무 많이 돌리면 타이어에 좋지 않은 영향이 가는데, 이와 비슷하게 장시간 일시정지는 테이프에 무리를 줄 수밖에 없었다.

이 유튜브 시대에 옛날 비디오 테이프를 생각하니.. 쌍팔년도는 정말 상상을 초월하게 열악했다 싶다. 인간이 달이나 화성으로 나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딴 분야는 시대가 많이 변하긴 했다.

뭔가 비스듬하게 기울이는 거는 문자 타이포그래피에서 이탤릭체에서도 볼 수 있고, 또 대파를 비스듬하게 써는 것(실제 부피 대비 더 커 보기에),
로켓이 발사될 때 살짝 비스듬하게 기울어져서 상승하는 것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역시 배기가스 분출 구간을 좀 더 늘리는 효과를 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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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보잉 747의 아버지라 불리는 항공 엔지니어 조셉 서터는 생몰년이 1921-2016이다.
그런데 카세트 테이프의 아버지라 불리는 루 오텐스는 생몰년이 1926~2021...;; 뭐 비슷하다면 비슷하다.
VHS의 아버지 내지 주 개발자라고 불리는 엔지니어는 전해지는 게 없는지 궁금하다.

4. 에디슨 과학 박물관

본인은 지난 6월에 여친과 함께 강릉에 갔을 때 말이다.
경포호 부근에서 어디 놀러 갈 데 없나 검색을 하다가 '에디슨 과학 박물관'이란 걸 우연히 발견했었다. 막 많은 기대를 하지는 않고 찾아가 봤는데.. 알고 보니 이거 엄청난 대박이었다.

이 좁은 대한민국에서 참 위대한 오덕 수집가가 계셨구나. '에디슨 과학'은 대표 명칭이고, 사실은 전구, 축음기, 영사기별로 박물관이 따로 있어서 건물 세 채가 한 세트이다. 과학기술과 예술 분야가 잘 만나고 박물관 만들기에 좋은 주제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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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들었을 때는 황금귀 진공관 스피커 덕후가 떠올랐는데, 소재가 거기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더라.
인류가 역사상 최초로 영상과 음성 기록을 남길 수 있게 됐다니.. 그 당시엔 이게 가히 요술 마법 수준이 아니었을까 싶다. 전기· 전자 공학이 그야말로 세상을 획기적으로 바꿔 놓고 있었고, 그게 나중에 궁극적으로는 반도체와 컴퓨터의 발명으로 이어졌으니 말이다. 전화기, 무선 통신, 교류 전기..

에디슨이 카메라 자체를 처음 발명한 건 아닌 것 같다만.. 그래도 그 뒤에 축음기와 영사기를 만들어서 사진의 영역을 크게 확장한 것은 사실이다. 하긴, 영화도 처음에는 무성 영화부터 시작했다가 나중에 유성으로 바뀌고 컬러도 도입됐다.

축음기가 발명되기 전엔 오르골이라는 게 있었다. 축음기와 음반이 임의의 소리를 저장하고 재생하는 mp3 같은 물건이라면, 오르골은 악보를 기록하고 저장해서 음악 연주를 자동화하는 midi 같은 물건이다. 이거.. 나름 구멍 뚫어서 0과 1 정보를 표현하는 천공 카드의 먼 전신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일종의 디지털 정보 저장 매체인 셈이다.

오르골은 자그마한 크기에 딸랑딸랑 예쁜 소리가 나오는 실로폰형 액세서리만 있는 게 아니더라. 야외에서 멀리까지 소리가 크게 나가는 '리코더형' 오르골도 있는데, 20세기 초중반 미국에서 야외 서커스장이나 회전목마 유원지 따위에서 흘러나오던 무슨 피리 소리 같은 BGM들이 바로 이 오르골로 연주되던 결과물이었다. 오오 그랬던 것이군!!

소장품이 저 건물 안에 일일이 제대로 전시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 많아서 거의 창고 수준이라고 하며.. 작동 가능한 현물이 전 세계에 거의 없다시피한 진귀한 축음기나 오르골도 볼 수 있다. 심지어 얼추 1시간 간격으로 가이드가 전시품들에 대해 설명도 해 준다.

우리나라에 올드카 수집 덕후만 있는 게 아니라 이런 분야의 수집 덕후도 계셨다니 정말 대단하다.
뭐, 일본의 어느 대기업 회장이 이 소장품들을 보고는 깜짝 놀라서 "내가 이거 박물관을 도쿄 한복판에 건립할 수 있게 지원해 주겠다. 박물관을 일본에다 짓는 게 어때?"라고 제안했는데 설립자분께서 거절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고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4/08/20 08:35 2024/08/2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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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선, 의학 관련 생각

본인은 사진, 촬영, 영상 관련 기술의 발달사에 대해 관심이 많다. 깊게 잘 알지는 못하고 그냥 관심뿐이지만, 그래도 흑백 사진이 컬러로 바뀌고 영사기가 발명되고, 따로 변사가 붙을 정도이던 무성 영화가 컬러+소리가 가미된 진짜 영화로 바뀌어 간 과정이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그래서 예전에 사진술에 대해서 글을 올린 적이 있기도 하다.

옛날에 카메라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는 알다시피 자기 생얼 사진이 찍히는 것만으로도 자기 혼이 빠져나간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질겁을 했다.
그런데 하물며...
아담 이래로 인류 역사상 최초로,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의 뼈가 사진으로 찍혀 나온 걸 목격한 당사자는 얼마나 기절초풍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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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선, 일명 뢴트겐선이라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잘 알다시피 독일의 물리학자 뢴트겐이다.
그리고 위의 사진은 1895년, 뢴트겐이 자기 아내의 손을 찍은 사진이다. 정말 아내의 손이 맞음을 확인하기 위해 반지까지 낀 채로 사진을 찍었다.
뢴트겐 당사자조차 최초의 방사선 촬영을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혹시 자기가 환각, 헛것을 본 건 아닌지 엄청 의심하면서 번뇌와 고민을 거듭했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노벨 물리학상의 초대 수상자가 되었다(1901년).
이건 충분히 노벨 상 감인 업적이다. 해부를 하지 않고 신체의 내장과 뼈를 들여다보는 게 가능해졌으니 이는 의학계에 가히 혁신을 가져다 준 획기적인 발견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 덕분에 의학에 방사선과 내지 영상의학이라는 분야가 새로 생기게 됐다. 흉부 X선 촬영은 기초 건강 검진을 받을 때 아무 생각 없이 같이 받는 저렴한 검사 중 하나가 됐다. 놀라운 과학의 힘이다.
내과 치료 때는 아예 내시경을 집어넣어서 사진을 찍겠지만, 뼈가 부러졌는지 인대가 나갔는지 등을 판별하는 외과 치료 용도로는 X선이 가히 구세주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짐을 일일이 열어 보지 않고도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금속 탐지기 역시 세상의 보안과 인권을 크게 향상시켜 줬다.
단, 이게 20세기 초반부터 아주 일찍 상용화가 됐다면 일제 강점기 때 항일 독립운동가가 폭탄이나 총을 몰래 반입해서 의거를 일으키기도 훨씬 더 어려워졌지 싶다. X선 사진은커녕 생얼 사진조차 흔치 않은지라, 죽이고자 하는 일제 고위 관리의 얼굴도 알기 어려울 정도로 옛날이었으니 가능했던 일이다.

끝으로, 의학에 대한 원론적인 얘기를 하며 글을 맺겠다.
얼마 전엔 한의사에게도 X선 촬영을 허용하겠다는 말이 나와서 논란이 많았다.
현직 의료인들은 한의사 내지 한의학 쪽을 내가 막연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싫어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본인도 큰 줄기에서는 서양 의학을 지지한다. 어설픈 친환경 대체의학, 백신 음모론, 안전한 예방접종 그런 거 미는 진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근대화 공업화 이전의 자연 환경과 위생 복지에 대해 너무 미화하고 지나치게 낙관하고 있다.

영아 사망률이 지금보다 넘사벽으로 높았고 어렸을 때 천연두 앓다가 목숨만 건진 곰보를 심심찮게 볼 수 있었으며, 죽은 형의 이름을 동생이 물려 쓰던 시절을 벌써 잊으셨는가? 그때로부터 시간이 뭐 얼마나 지났다고?
수돗물을 화학 약품으로 소독하고 너도 나도 백신을 맞은 덕분에 어렵게 퇴치한 전염병을 "이건 백신 없이도 어차피 자연스럽게 사라졌을 질병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밀어붙이는 무식한 주장에는 할 말을 잃을 지경이다.

과학적 방법론으로 우주와 생명의 근원이 무엇인지,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같은 걸 증명할 수는 없다. 그건 재연 가능하지 않으며 과학의 영역에 있지 않다.
그러나 지금 당장 살아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이 가능한 의학에 관한 한은, 투명하고 객관적인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서양 의학이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했으며, 온갖 사이비 돌팔이와 건강 관련 미신들로부터 사람들을 바르게 깨우쳐 줬다고 본인은 굳게 믿는다.

심지어 성경에도 이 주제와 관련된 진술이 있다.

  • 아사의 통치 제삼십구년에 그의 발에 병이 생겨 마침내 그의 병이 심히 중하게 되었으나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주}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사들에게 구하였더라. (대하 16:12. 의사를 찾은 걸 부정적으로 얘기함)
  • 더 이상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있는 병을 위하여 포도즙을 조금 쓰라. (딤전 5:23. 인위적인 의학 처방을 긍정적으로 얘기함)

성경에 왜 이 두 구절이 동시에 존재하며 둘이 무슨 문맥에서 무엇을 말하는지를 바르게 분간할 줄 안다면, 질병 내지 치유와 관련된 온갖 교리적 오류에 빠질 일이 없을 것이다. 성경에서 그 많은 기적을 행한 엘리사도 나중에 병에 걸려 죽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기도만 열심히 하면 공부 안 해도 학교 시험을 100점 맞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병에 걸리기만 하면 다 마귀 탓이고 기도만 하면 다 낫는다는 식의 생각은 매우 잘못됐다.
위의 구절들도, 지금 병에 걸린 상황과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자세와 믿음이 문제이지, 병원에 가느냐 안 가느냐가 본질적인 문제는 아닐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03/19 08:35 2015/03/1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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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에서 컬러로 (2)

사진술과 관련하여 옛날에 비슷한 주제의 글을 하나 올린 적이 있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오랜만에 내용을 좀 보충하도록 하겠다.

1. 컬러로 복원한 흑백 사진

사실, 흑백 사진을 컬러 사진으로 '복원'한다는 개념은 엄밀히 말해 존재하지 않는다. 아예 없는 정보를 원래대로 재구성하는 건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되돌아가지 않는 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흑백 사진에다가 그럴싸하게 인위로 색을 입히는 과정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건 마치 가사를 하나 줘 놓고 멜로디를 붙여 보라는 주문 내지
외국어 텍스트를 줘 놓고 번역(특히 직역이 아닌 의역 형태로)을 하라는 주문과도 같기 때문에,
작업하는 사람마다 제각각의 느낌이 나는 작품이 나올 수 있다. 흑백 사진이 찍히던 당시에 원래 색상이 저랬으리라는 보장은 당연히 없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도 외국의 한 예술가가 만들어 놓은 결과물은 꽤 그럴싸하다.
20세기 초· 중반을 살았던 옛날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까마득한 옛날을 산 것 같아 보이지 않는 효과가 난다.
그 옛날 모습을 시각적으로 느끼는 방법으로는 (1) 흑백 사진, (2) 컬러 그림 아니면 (3) 그 시절을 대충 재현해 놓은 실사 영화 정도가 다일 텐데 (4) 채색한 흑백 사진은 그 중간에 속하는 새로운 영역인 것 같다.

참고로 사진이 찍힌 최초의 전쟁은 1850년대의 크림 전쟁이며, 1860년대의 미국 남부 전쟁도 사진이 전해진다. 물론 흑백. 그러나 이때는 노출 시간이 길었던 관계로 교전 중의 장면은 찍을 수 없었고, 전쟁이 끝난 뒤의 풍경이나 병사들이 작정하고 포즈를 취한 사진만을 찍을 수가 있었다.

2. 처음부터 컬러로 찍힌 고전 사진

우리나라에서는 196, 70년대의 박 정희 대통령 시절만 해도 컬러 사진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없다는 얘기는 아님).
하지만 예전 글에서도 썼듯이 컬러 사진 자체는 생각보다 굉장히 일찍부터 존재했다. 박 정희가 아니라 이 승만 대통령도 컬러 사진이 존재하며 2차 세계 대전 시절의 히틀러· 에바 부부도 컬러 사진이 있다.

초창기의 컬러 사진으로 유명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년 전에 제정 러시아 말기에 세르게이 프로쿠딘-고르스키라는 작가가 남긴 사진들이다.

단, 시대가 시대인지라 저 사람은 RGB별로 세 장의 풍경 사진을 찍어 놓기만 했지, 그걸 실제로 현상해서 컬러 사진이 완성된 걸 보지는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저 사진들은 원판을 토대로 훗날 합성해서 만들어 낸 이미지이니 이거야말로 '복원'이라는 표현이 말이 된다. 100년 전에 3원색 합성까지 완료된 컬러 사진 현물이 지금까지 저렇게 선명하게 전해져 온다는 뜻은 절대 아님.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으면 사진 자체가 누렇게 바래 버렸을 것이다.

후처리 과정을 거쳤다고 해도 그래도 흑백 사진 채색처럼 인위적인 해석이 가미된 것은 아니니 흥미진진하다. 저것은 그림도 아니고 재연이 아니라 진짜 100년 전의 사람과 풍경이었다니!
참고로 12번. '츄소봐니아 강' 사진에서 강물에 기름띠 같은 게 줄줄 보이는 이유는.. RGB별로 사진이 찍히는데 간격이 길어서 시시때때로 변하는 물결 모양으로 인한 불일치가 생겼기 때문이다.

1910~1911년이면 아문센과 스콧 일행이 남극에 갔던 시기와도 비슷한데 이때 남극의 모습이 컬러로 찍혔으면 어땠을까 싶다. 하지만 그 극지에 컬러 사진 촬영을 위한 막대한 양의 장비를 들고 다니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 글 주제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사진 하니까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덧붙인다.
요즘처럼 영상 자료가 넘쳐나는 “seeing is believing” 시대에 실물이나 합성 사진이 아니고, 그렇다고 CG도 아닌 진짜 생그림으로 어떤 사건을 묘사했다고 하면.. 그건 십중팔구 뭔가 안 좋고 심각한 내용이다. 특히 인권 유린과 관계가 있는 것들이라는 걸 생각할 필요가 있다.

어린애가 자기를 성폭행한 가해자를 묘사했다거나, 탈북자들이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대해 증언한 것, 파륜궁 수련자에 대한 고문 장면 등.
사진을 남길 수 없는 곳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이고, 그렇다고 CG로 재구성을 하기에는 민망하고 돈도 안 되고 인권· 초상권이 침해되는 영역이니까.

물론, 난징 대학살이나 일본군 생체실험, 나치 수용소 같은 건 사진이 전해지긴 한다. 그건 그 집단이 정말 전부 맛이 가 있었으니까 가능한 일이고, 그나마 컬러 사진이 충분히 보급되기 전의 옛날 이야기이다. 인류 역사상 그런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할 터이나 현실은 지구 어디선가 아직도 그런 일이 있는 듯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4/10/10 08:17 2014/10/10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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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카메라 이야기

디지털 카메라는 20세기 말~21세기 이래로 세상의 문화 풍조를 바꿔 놓은 혁신적인 물건임이 틀림없다.
그 전까지는 컴퓨터 화면에서 사진이라는 걸 접하기가 쉽지 않았다. 비디오 디스플레이 기술은 더 오래 전에 트루컬러급으로 발전했지만, 실사 사진을 얻는 방법은 TV 화면 수신이라든가 스캐너 정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뭔가 실사급의 그래픽을 자랑하는 게임이 상대적으로 더욱 신기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랬는데 지금은 정말 개나 소나 아무나 손쉽게 주변으로부터 사진을 얻을 수 있으며, 이를 혼자만 저장해 놓고 보는 게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방방곡곡으로 알리고 퍼뜨릴 수 있게 됐다. 정지 사진으로도 모자라서 동영상까지 그 자그마한 기계로 가능하니 어지간한 소형 캠코더 역할까지 한다. 이로써 1인 미디어, UCC 같은 게 출현 가능해졌다. 그리고 필름 카메라와 카세트/VHS 같은 아날로그 시청각 매체는 급속히 퇴물로 전락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동영상은 용량이 크고 통신 트래픽이 방대한 관계로 인터넷 상에 올릴 데가 마땅찮았다. 그래서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동영상은 깨진 링크도 무진장 많았다. 그러나 유튜브 같은 전세계급 동영상 포털이 등장하면서 이마저도 옛말이 되었으니 참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인터넷에서 동영상을 하나 보려고 Media Player ActiveX 컨트롤을 까네 마네 하던 시절도 참 아련한 추억이 돼 간다. 플래시가 버전 7부터 flv 재생 기능이 추가된 것이 한 10여 년 남짓 전의 일인데, 이게 또 세상을 바꿔 놨다. 당장 유튜브가 이 기술을 기반으로 출현했으니 말이다.

본인이 최초로 사용해 본 디지털 카메라는 2002년인가 삼성 디지맥스라는 100만대 화소의 완전 초창기 골동품이다. 그때 이후로 디지털 카메라는 화소 수 증가 경쟁이 시작되었다. 수 년 뒤에 구입한 다음 카메라는 300만대의 화소에 간단한 무음 저품질 동영상 기능이 추가되었고, 그것 다음에 구입한 카메라는 이제 동영상까지도 그럭저럭 MPEG-2 급의 화질은 나오는 물건이 되었다.

이제는 어지간한 보급형 중저가 디카 급의 사진과 동영상은 카메라를 들고 다닐 필요도 없이 스마트폰만으로도 척척 만들어 내는 세상이 된 지 오래다. 그러니 종래의 디지털 카메라는 폰카로는 만들 수 없는 DSLR급의 고퀄 등급에서나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사진 분야에는 워낙 전문가 매니아들이 많으며, 고성능과 저성능 장비의 퀄리티 차이도 충분히 크기 때문에 그 업계가 망할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본인은 원래는 그런 분야에 전혀에 가깝게 관심이 없었지만, 그래도 철도 촬영 때문에 카메라와 사진 같은 쪽에 그래도 일말의 식견은 생겨 있다.
성능이 안 좋은 카메라는 다음과 같은 한계가 존재한다.

※ 시야

1. 아무래도 시야각이 사람 눈보다는 작은 관계로, 넓은 장면을 한번에 담기 어렵다. 본인은 미국 가서 그랜드 캐년을 보면서 이걸 절실히 느꼈다. 이래서 파노라마 사진이라는 테크닉이 존재하는구나!

2. 또한 사진의 가장자리로 갈수록 상이 둥글게 휜다. 본인은 철길을 촬영하면서 아래의 레일이 둥글게 휜 걸 보고 이런 현상을 느꼈는데, 초소형 몰래 카메라 같은 건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한 걸 볼 수 있다.
사진이라는 건 컴퓨터그래픽에서 다루는 것처럼 사물들이 딱 rotation, projection을 거쳐서 정확하게 2차원 평면에 그려지는 게 아니라 아무래도 0차원의 점에 속하는 렌즈가 빛을 모으는 형태이다 보니.. 중심에서 먼 곳일수록 휘는 게 불가피한 듯하다. 옛날에 브라운관 TV/모니터만 해도 평면을 만들어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 빛을 모으기

3. 카메라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빛을 모으는 기능은 기계가 사람의 눈보다는 확실히 부족하다.
그래서 야경, 밤하늘의 별 내지, 명암 윤곽까지 보이는 선명한 보름달을 찍으려면.. 어지간히 좋은 장비와 기술이 필요한 게 아닐 것이다. 노이즈를 감수하고라도 노출 시간도 굉장히 길게 잡아야 한다.

사실, 태양이나 목성, 토성 같은 천체의 사진은 실제로 사람이 우주 탐사선을 타고 밖으로 나간다고 해서 당장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다. 태양의 경우 어마어마한 넘사벽급으로 광량을 줄여서 찍은 것이고, 반대로 외행성들은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어마어마하게 빛을 모으고 또 모아서 보정하여 그런 이미지를 얻은 것이다.
광량을 그렇게 줄였기 때문에 태양이 그저 노랗게 보이고 흑점이 검게 보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행성 관측하듯이 똑같은 광량으로 보면 태양은 흑점이고 뭐고 없이 그저 똑같이 맹렬한 흰 빛으로 보일 뿐이다. 그리고 눈이나 카메라는 곧바로 상한다.

4. 사진을 많이 찍어 본 분들은 이미 충분히 경험하셨겠지만,
디카는 집이나 교통수단 안에서 “내부와 창밖 외부를 동시에 균형 잡힌 명도로 찍기”가 몹시 어렵다! 어느 쪽에 focus를 주느냐에 따라 창밖이 너무 밝아지거나 내부가 너무 어두워지기 때문이다. 디카만 그런지 필카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이것을 사진 용어로는 '명암차'라고 하며, 좋은 카메라는 그 명암차의 dynamic range도 크다고 한다.

※ 흔들림 보정

5. 예기치 않은 흔들림 때문에 사진을 망치는 일 자체는 어쩔 수 없다. 허나, 이게 흔들린 사진이라는 걸 디카의 조그마한 preview 화면만으로는 확대해서 봐도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걸 애초에 알았으면 현장에서 촬영을 다시 했을 텐데, 출사를 다 끝내고 PC에서 사진을 큼직하게 확인한 뒤에야.. “에이 흔들렸잖아!” 이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blur된 이미지를 복원하고 카메라 차원에서 흔들림 보정 기술까지 등장해 있으니 이 역시 장비에 돈을 많이 투자하면 극복 가능한 장벽이긴 하다. 패턴인식 기술을 동원해서 “이건 흔들린 걸로 의심되는 사진입니다”를 감지하는 것도 어떠려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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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카메라의 특성을 알면, 사람의 눈이 얼마나 정교하고 대단한 신체 기관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바닥과 평행한 구도로 반듯하게 사진을 찍으려면 삼각대도 필요하고 이것저것 필요한 액세서리들도 추가된다.
또한, 정지 사진을 찍는 건 마치 사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셔터는 방아쇠이고, 격발 시 흔들림 현상이 없으려면 영점을 잘 잡아야 할 테니까.

Posted by 사무엘

2014/10/04 08:29 2014/10/04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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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에서 컬러로

※ 정지 사진

사진술이란, 화학 물질을 잘 이용하여 빛의 강약을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어떤 영상을 보존하려는 기법이다.
최초의 흑백 사진이라 흔히 알려져 있는 것은 1825년 프랑스의 조제프 니세포어 니엡스라는 사람이 남겼는데, 노출 시간이 무려 8시간에 달해서 태양이 한 나절 동안 만들어 낸 그림자가 모두 사진에 담길 정도였다.
19세기 중반에 유럽에서는 이미 흑백 사진 기술은 사실상 안정화가 되었다.

그러나 흑백으로 만족하지 않고 천재 물리학자인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빛이 RGB 세 축으로 분해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낸 후 1861년, 최초의 컬러 사진을 남기는 데 성공했다. 물론 지금처럼 쉽게 한 방으로 찰칵 찍은 게 아니라, 색깔 축별로 사진을 세 장 찍어서 정교하게 합성하여 만든 것이므로 방법이 쉽지는 않다. 그 전에는 흑백 사진에다가 수작업으로 색을 입히는 작업이 진행되기도 했다.

2차 세계 대전은 물론이고 1차 세계 대전과 1900년대 초를 찍은 컬러 사진도 "존재"는 한다. 단지 실용화가 안 됐을 뿐이지. 컬러 사진 기술 자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일찍 등장했다. 한국에서는 6· 25 사진조차도 컬러를 보기가 쉽지 않으나, 서양인이 구한말 1900년대 초에 서울 모습을 찍은 컬러 사진도 극소수 전해 내려오는 게 있다. 컬러 사진은 1920년대에 코닥 사에서 컬러 필름을 대량 생산하면서부터 보편화되었다.

※ 영화

기술적 토대는 19세기 말에 마련되어서 정말 초라한 흑백 무성 영화로 시작했다. 찰리 채플린 같은...=_=
그때 영화는 진짜 말 그대로 환등기 같은 걸로 틀어 주는 움직이는 그림일 뿐이었으며, 음악을 따로 곁들이거나 내레이터가 중간 중간 라이브로 설명을 해 줬다.

여기에 에디슨이 발명한 축음기 기술이 결합하여 동영상에 소리까지 첨가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이다. 단순히 움직이기만 하던 그림이 말하는 그림으로까지 발전했다.
그 후 한동안 흑백 영화 전성기가 이어지다가 컬러 영화는 2차 세계 대전을 전후하여 1940~50년대부터 차츰차츰 등장하기 시작했다. 십계(1956), 벤허(1959)가 그 초창기의 컬러 영화이며, 심지어 우리나라 6· 25 직후의 참상도 누가 컬러로 찍어 놓은 희귀 영상 기록이 남아 있다.

※ 텔레비전

비록 화질이 영화보다는 못하지만, 동영상과 소리를 전기 신호로 바꿔서 장거리로 송수신하는 방식이니, 기술적 난이도는 가장 높다고 볼 수 있다. 그 원리는 1920~30년대에 완성되고 실용화됐다. 발명자의 이름을 따서 음극선관(CRT)의 이름을 브라운관이라고도 일컫는다.

미국에서 1931년에 시험 방송이 시작되고 영국에서 1937년, 세계 최초의 TV 방송국인 BBC가 개국했다. 한국에서는 1956년이 돼서야 TV 방송이 첫 시작했다(물론 다 흑백). 즉, 일제 강점기 때엔 우리나라에 TV가 없었고, 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지고 있다는 방송은 다 라디오를 통해서나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컬러 TV는 은근히 등장이 늦었다. 기술 개발이 성공한 건 1950년대이지만, 미국에서도 가격 장벽이 낮아지고 본격적으로 보급된 건 60년대가 돼서였다. 그래도 달 착륙 동영상을 흑백이 아닌 천연색으로 볼 수 있게 된 건 정말 천만 다행이다. 70년대 중후반부터 흑백은 이미 골동품 내지 휴대용 초소형 TV용으로나 전락했다.

우리나라는 잘 알다시피 5공 시절인 1980년대 초반이 돼서야 컬러 TV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서 3S 정책이라는 비아냥거림은 있다. 그런데 그럼 박 정희 때는 컬러 TV가 전혀 없었고 땡전 뉴스부터 천연색으로 나오기 시작했다는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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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수천 년을 살아 오면서 뭔가 기록을 남기는 방법이란 글 아니면 기껏해야 그림밖에 없었다. 사진처럼 기가 막히게 초상화나 풍경화를 잘 그리는 화가가 장땡이었다. 아니면, 사람 얼굴 윤곽은 데스마스크 같은 걸로 남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던 것이 사진술이 개발되어 사진을 남기고 심지어 동영상을 만들고 이를 전파로 만들어 송출까지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전과 그 후의 인류의 삶의 양상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은 발명이 아닐 수가 없었다.
1900년대 초에는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한 덕분에, 사람의 실물 사진도 모자라서 살아 있는 사람의 뼛속 사진까지 이미 찍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발달한 사진술은 얼마 안 있어 금성과 달 같은 우주의 모습까지 담아 오는 데 성공한다.

사진을 한번 팟 찍으면 내 영혼이 빠져나가는 줄 알고 혼비백산했을 당대 사람들이 이해가 될 만도 하다.
사람을 해부하지 않고 자기 손의 뼈 사진을 봤을 때 그 심정이 어땠을까?
당대의 화가들은 사진술의 발명으로 인해 자기 정체성을 심각하게 재고하게 됐다고 한다.
(그래도 지금도, 도시 건물 같은 거.. 완전 실사 뺨치게 그리는 걸 업으로 즐기는 화가도 있다)

우리는 지금 불과 200여 년 전 사람들조차 상상도 할 수 없던 대단한 문명의 이기를 당연하게 사용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스팸 메일 없는 이메일을 상상할 수 없듯,
사진술의 대중화와 동시에 인류는 이제 음란물과의 전쟁을 치르기 시작하게 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0/01/11 10:39 2010/01/11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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